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복음 말미에 나오는 내용을 중점으로 해서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개별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하는 묵상은 많은 훌륭한 신부님들의 묵상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제목에는 강론이라고 표현하려고 했지만 복음에 이미 설교라는 단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설교로 하겠습니다. 사실 설교라는 표현은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묵상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설교와 강론이 비슷하긴 하지만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양쪽을 다 경험한 사람으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양쪽의 공통점은 일단 성경을 바탕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공통점은 이것 하나인데 차이점은 많이 다릅니다. 대체적으로 개신교 설교는 어떤 설교 주제가 있으면 성경의 어떤 구절을 설정합니다. 그 구절을 바탕으로 해서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대개보면 신약과 구약을 왔다갔다 합니다. 구약이 주제가 되더라도 신약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주제는 신약인데 구약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성경의 내용을 성경으로 그 내용을 해설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목사님의 사견을 바탕으로 해서 첨가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개신교 신자는 이런 설교보다는 철저하게 성경 말씀으로 설교의 내용을 대체해서 말씀 풀이를 해 주시는 설교를 은혜로운 설교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설교라는 것은 목사님의 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개신교 성경이사야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아의 말씀을 자제히 읽어봐라. 짝이 없는 말씀은 하나도 없나니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실제 이 표현이 의미하는 행간의 의미는 성경은 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만 보면 반쪽짜리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짝으로 보고 이해를 해야 완전히 하느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것 때문에 그런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는 게 사실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하면 인간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말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으로 이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가톨릭은 설교라고 하지 않고 강론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개종 후 들은 강론을 바탕으로 해서 강론이라는 것을 설명한다면 일단 가장 큰 대원칙은 복음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복음입니다. 그다음 확장을 한다면 독서와 같이 내용을 연계한 후 묵상해서 강론 자료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다른 세상적인 어떤 좋은 내용이 있다면 그것까지 가미해서 구성을 합니다. 경상도 표현을 하자면 조매 그렇게 하는 강론은 정말 보기 힘듭니다. 조매라는 표현 이것 좀 잘 이해를 못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 다시 언급을 하자면 개신교 목사님 설교는 엄밀히 말하면 묵상이 빠져 있다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을 목사님이 듣게 된다면 반박을 할 것입니다. 가톨릭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가톨릭에 비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묵상과 다른 개념으로 묵상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팩트가 있으면 그 팩트를 바탕으로 해서 뭔가 단순히 결과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의미만 건져올리는 것 정도만을 묵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별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그걸 스토리텔링을 하듯이 연결시키는 것은 목사님의 개인적인 언어능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잘 연결하는 능력이 없으면 목사님의 설교는 그냥 죽을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사님의 설교 능력이 좌우됩니다. 개신교 목사님의 생명은 설교 능력입니다. 아무리 성직자로서 인품이 좋고 해도 설교 능력이 없으면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럼 가톨릭에서 신부님들의 강론은 묵상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을 때 이 묵상은 그럼 개신교 목사님들이 생각하는 묵상과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물에 비유하자면 우물을 파는 범위가 좁다는 것입니다. 좁은데 그 깊이는 깊이 파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범위는 많은데 우물의 깊이가 얕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양쪽 종교의 시스템적인 차이 때문에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쉽게 말해 전례에서 구조적으로 생기는 차이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론만 제외하면 전례가 다 거의 똑같은 구조로 돼 있습니다. 개신교는 그런 과정이 우리와 비교하면 거의 없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설교로 시작해 설교로 마무리되는 그런 과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넓은 범위보다는 좁고 깊은 방향으로 강론의 방향이 정해진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대체적으로 개신교 설교와 가톨릭 강론의 차이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일부분을 집중적으로 해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의 대명사가 회개입니다. 제가 앞 묵상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실제 원론적인 회개의 내용보다는 현실적인 실무에서도 적용이 되는 내용이 현실화되어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내용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젠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한번 파고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보통 보면 자기가 자신을 잘 성찰해서 회개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회개하는 경우는 요즘 현실 속에서는 거의 희박합니다. 또한 그게 아마 누구나 봐도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외부에서 인식이 될 정도이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평생 수도원 같은 곳에서 기도생활이 주가 되는 수도자가 아니고 현실이라는 세파 속에서 묻혀 사는 일반 보통의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럼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가장 큰 대안 중 하나가 저는 바로 신부님의 강론이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과연 강론이 회개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고 해도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론으로 심지어 어떤 사람을 단순한 통회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등통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회개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느냐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론이 비수 같으면 그게 가능합니다. 강론이 비수가 될려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할까요? 물론 필력과 문장력 등도 있으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런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육비에 박힐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가 없으면 겉만 번지르르한 말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비수가 되기 위한 조건 하나만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깊은 묵상과 고뇌'입니다. 이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 교부들이 저술한 설교를 한번 보시면 제가 드린 말씀이 증명이 될 것이고 수긍이 될 것입니다. 그냥 간단한 산술적인 계산만 해도 불과 예수님 승천 후 300년밖에 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이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온전히 잡을 수 있는 시기인가 생각하면 그 역사는 미천할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와 같은 설교나 강론이 나올 수 있었는가 하고 역으로 질문을 던지면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고민에 고민을 한 결과물입니다. 이 고민의 시간 때문에 바로 깊은 곳에 있는 우물인 영적 양식을 길어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개신교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은 목사님께 이상한 요구를 하는 걸 봤습니다. 우리가 회개를 할 수 있게 좀 무시무시한 하느님 이야기를 해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얼핏보면 그런 설교가 회개를 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대 심리학이라는 학문에서 보면 그런 것은 오히려 반발 효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한 사람의 영혼에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동과 자극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이런 자극은 그게 자극적인 내용이어야 자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풍 같은 바람인데도 그 바람이 영혼을 향할 때는 강력한 허리케인 같은 바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미풍 같은 강론이 비수 같은 강론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잠시 어떤 신부님을 한 분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을 지금까지 몇 차례 들었습니다. 몇 번 듣지는 않았지만 제가 전 본당에 있었을 때 손님 신부님으로 오셔서 강론하셨습니다. 저는 그날 주일이었는데 쇼킹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하셨습니다. 내용도 훌륭하셨습니다. 발음도 또 한몫하셨습니다. 여기서 좀 더 부연을 하자면 지난 주일에도 제가 이분 강론을 들었습니다. 이분 강론을 들었을 때 공교롭게도 몇 번만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제 판단으로는 일단 고민을 하신 흔적을 역력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건 어떤 다른 좋은 강론이 있다고 해서 그걸 표절해서 옮긴다고 그런 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표절을 한다고 해도 그게 일부분은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문맥적으로 연결시켜 전체 강론 주제와 일관성 있게 통일성을 좌우하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과 함께 이분의 또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사실 실제 이 능력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이런 능력이 출중하셔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형태에 따라 그 내용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이렇게도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똑같은 강론 원고가 있습니다. 그 강론 원고를 만약 그대로 똑같이 국어책 읽듯이 그 내용을 강론하신다고 하는 전제를 해도 결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데요 영어에만 인토네이션 같은 게 있는 줄 아는데 사실 한국말에도 인토네이션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와 함께 끊어읽기를 잘 해야 합니다. 이게 잘 안 되는 분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건 신부님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일반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제가 언어를 다루는 입장에서 보면 배워서 되는 게 아니고 원래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이분은 이런 게 뛰어나다는 것을 저는 처음 강론을 들을 때부터 느꼈습니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이분이 가진 이런 능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본당 신자들은 이분의 강론이 얼마나 훌륭한 강론인지는 그냥 잘하신다는 정도는 인식을 할 수는 있어도 얼마나 대단한 강론인지는 모를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 이런 데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 자체에 대한 생각조차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본당 신자들에게 만약 제가 하나의 팁을 드린다면 다는 아니더라도 그분의 강론을 들을 때 간단한 메모는 하셔서 다시 한 번 더 댁에 돌아가셔서 그 의미를 음미하고 묵상해본다면 엄청 영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강론을 그냥 한 번 듣고 흘리기엔 아까운 강론이라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묵상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둘입니다. 하나는 강론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와 강론을 통해서 한 영혼을 회개시켜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주옥 같은 강론을 많은 신부님들께서 해 주셨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담아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첫댓글 두 시간 정도 타이핑을 하니 눈도 좀 아프고 머리도 집중을 하다 보니 이제 멍멍합니다. 여긴 스터디 카페라 지금 시간에 아무도 없어서 카페에서 작성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거의 오타만 나중에 올린 후 체크했는데 요즘은 퇴고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어떤 부분은 좀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점이 있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래 글이라는 것은 작성 후 퇴고를 하고 해야 하는데 요즘은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널리 양해바랍니다. 이젠 집에 가 자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