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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의 향훈] ① 영명연수 永明延壽의 무애행 비판
간 베어내도 목석같다면 고기먹어라
도를 배우는 문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중鵝쳬瞞� 할 일은 한량없는 세월을 지나는 사이에 육신이 익혀온 업의 종자를 씻는 일이다. 너희들이 만약 애욕(愛欲)을 소제하고 망령된 인연을 끊어 모든 애욕의 경계를 대하더라도 목석처럼 될 수 있다면 설사 도안(道眼)을 밝히지 못한다 해도 자연히 깨끗한 몸을 이룰 것이다.
만일 진정한 선지식을 만나거든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배워라. 설사 수행해도 깨닫지 못하고, 배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듣게 되면 절로 도의 종자가 되어 세세생생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몸을 받아서 언젠가는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로 말한다. 참된 선지식은 사람 가운데 큰 인연이 되며 능히 중생을 교화하여 불성(佛性)을 얻어 보게 한다.
참으로 슬프다. 말세에는 미친 말 하는 선객이 많다. 참다운 깨달음은 없고 빈 화두만 배워서 걸음걸음에 유(有)를 행하되 입으로는 공(空)을 말하며, 자신의 업력(業力)은 책망하지 않고 남에게는 인과(因果)가 없으니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깨달음에 장애 되지 않고 도둑질하고 간음하는 것이 지혜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살아서 불법을 만났다가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진다. 지옥의 업이 다하면 다시 축생ㆍ아귀에 들어가 백천만겁 동안 벗어날 기약이 없다. 그러나 오직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자리에 서서 사(邪)를 뒤집어 정(正)을 만들 것이다. 만일 스스로 참회하고 제도하지 않으면 백천의 부처님들이 나타나실지라도 너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심장과 간을 베어내어도 목석(木石)과 같을 수 있는 도력(道力)이 있다면 고기를 먹어도 되고, 술을 마시되 오줌을 마시듯 해야 술을 먹을 자격이 있을 것이고, 단정한 남녀를 보되 죽은 시체와 같이 보인다면 음행을 해도 되고, 자기 재물이나 남의 보물을 보되 흙이나 돌과 같이 볼 수 있다면 도둑질 하라. 비록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섣불리 그런 행동에 마음을 내서는 안 되며 단지 한량없는 성인(聖人)의 몸을 증득한 뒤에 비로소 세상의 좋고 나쁨에 걸림 없는 무애행을 행하라.
만약 음행을 버리지 않으면 청정한 종자가 끊어지고, 음주를 끊지 않으면 지혜 종자가 끊어지고, 도둑질을 버리지 않으면 일체의 자비 종자를 끊는다.
이처럼 삼세의 부처님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고 천하의 선종이 한 목소리로 말했으니, 어찌 후학들이 예사로 듣고 따르지 않겠으며, 스스로 바른 행동을 허물고 마귀의 말을 행할 수 있겠는가? 오래 익힌 업의 종자로 태어났으니 올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악의 뿌리는 빼기 어렵고 오히려 선력(善力)마저 쉬이 녹아 버릴 것이다.
옛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군의 일을 보면 만 개의 화살이 마음에 와 박히는 듯이 하고 마군의 소리를 들으면 천 개의 송곳으로 귀를 뚫는 것 같이 하라.” 그러니 너희들은 악행을 멀리 여의어서 보지도 말고 듣지 말며 오직 마음공부에만 매달려야 한다. 정리=채한기 기자
■ 영명연수(永明延壽)는
중국 북송(北宋) 때의 고승으로 28세에 승려가 되어 천태덕소 국사에게 선지(禪旨)를 깨닫고 법안종의 제3조가 되었다. 매일 아미타불을 10만 번씩 외웠다고 전해지는 스님은『종경록』,『유심결(唯心訣)』,『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등의 저서를 선보였다.
<영명 연수(永明 延壽, 904~975) 선사 이야기>
종경활요(안동 광흥사 소장)
중국 오대(五代) 십국(十國) 시대에서 송(宋) 대에 걸쳐 활약한 영명 연수(永明延壽) 선사의 속성은 왕씨(王氏)요 절강성(浙江省) 임안부(臨安府) 여항(餘杭) 출신이다.
연수(延壽)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어 세인의 주목을 받았는데, 자극성 있는 음식은 입에 대지 않고 늘 경전(經典)을 독송했으며, 특히 <법화경>을 좋아해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16세에 지은 글이 아주 뛰어나 세상에 천재로 불릴 정도로 총명했다. 그런 그가 일찍부터 출가에 뜻을 두었으나 부모들이 허락을 하지 않자 세속에 살면서 불법을 돈독히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급제해 고을을 지키는 고을 원인 종장(種將) 벼슬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어 출가의 계기가 됐다.
어느 날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호송하다가, 그 돈을 몽땅 방생(放生) 비용으로 써버려 공금 유용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런데 진상을 조사해본즉 착복이 아닌 순수한 동기였음이 밝혀져 사정을 전해들은 오월(吳越, 907~978)의 국왕은 깊이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죄인을 형틀에 매달아 칼로 목을 치려할 때 죄인의 안색이 변하거든 목을 베고 안색이 변하지 않거든 목을 베지 말고 풀어주라”고 했다.
명을 받은 형리(刑吏)가 죄인을 형틀에 매달고는 칼을 들어 목을 치려해도 연수의 안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더라는 것이다. 형리는 왕의 분부대로 목을 베지 않고 풀어주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연수는 인생무상(無常)을 크게 느끼고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번에 꼭 죽을 사람이었는데 부처님 덕에 살아나서 이제 부처님 제자가 되고자 하니 나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잊어주기를 바란다”고 하고 벼슬을 그만 두고 출가했다. 당시 그의 니이 34세로 설봉 의존(雪峰義存, 832~908) 선사의 법을 이은 취암 영참(翠岩令參) 선사에게 계(戒)를 받아 승복을 입었다.
선승으로서 그의 법명은 연수(延壽)이고, 영명사(永明寺)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세상에서 영명 선사라 일컬었다. 법호는 종경(宗鏡)이었다.
출가 후 천태 덕소(天台德韶, 891~972) 문하에 투신해 현지(玄旨-깊은 뜻, 가르침)를 받고 법안종(法眼宗)의 제3대조로 꼽히게 됐다. 선종 5가(禪宗五家)의 일파인 법안종에 속하면서, 그는 천태(天台)ㆍ화엄(華嚴)ㆍ법상(法相) 등의 교종과 선종(禪宗)을 융화회통하려는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추구했다.
그리고 지자선원(智者禪院)에서 <법화경>을 많이 외웠고, 961년에 항주(杭州) 영명사(永明寺)에서 대중을 크게 제접하며 참선과 염불을 겸할 것을 추구하는 선정겸수(禪淨兼修)의 법을 선양했는데, 항상 매일 행할 일을 정해 매양 이를 실천하고, 특히 염불에 열중했다. 그리고 생전에 <법화경>을 1만 3천 번 외웠다고 한다.
특히 그가 들판에 나가서 <법화경>을 암송하면 양떼가 감응해 엎드려 들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인(學人)들로부터 ‘자씨(慈氏-미륵보살)의 하생(下生)’으로 숭앙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명 연수 선사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종경록(宗鏡錄)> 1백 권,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6권, <유심결(唯心訣)> 1권, <정혜상자가(定慧相資歌)> 1권, <서문(誓文)> 1권 등을 지었으며, 입적 후에는 ‘지각 선사(智覺禪師)’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제3대조가 되는 법안종(法眼宗)은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에 의해 형성된 종파로서 대체로 선(禪)과 화엄(華嚴)을 융합해, 선(禪)⋅교(敎) 합일을 도모함으로써 안목을 무한으로 넓혀 일체만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체득할 것을 강조했다. 법안의 선법을 이어받은 천태 덕소(天台德韶, 891~972)는 천태산에 머물면서 선(禪)과 천태학(天台學)을 융합한 선교융합(禪敎融合) 종풍을 펼쳤다.
그리고 제3대조인 영명 연수 선사는 더욱 확대시켜 정토사상(淨土思想)과의 합일(合一)까지 도모해 정토종의 제6조가 됐다. 그리하여 스님은 선종인 법안종(法眼宗)의 제3대 조사(祖師)이자 연종(蓮宗: 정토종)의 제6대 조사로서 양대 종파에서 높이 존숭을 받은 분이다. 당시 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참선이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요, 염불이 하열한 수행방편으로 알고 있었으나, 본래성품을 깨달은 선종의 조사가 육바라밀을 닦고, 염불로 보임(補任)해서 윤회를 벗어남을 설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화(淸華, 1923~2003) 스님께서는 화두선(話頭禪) 일변도의 한국 선(禪) 풍토에서 염불선(念佛禪)을 수행의 방법으로 택해 참선과 염불을 공히 숭상했다.
그리고 영명 연수 선사는 교학 가운데서도 화엄사상을 매우 중요하게 부각시킴으로써 화엄(華嚴)의 이사무애(理事無碍)나 육상원융(六相圓融)과 같은 사고 경향을 선(禪)의 가르침에 그대로 적용했다. 즉, 생활과 수도를 별개로 인식하지 않고 중생과 부처를 대립적 개념으로 보지 않으려는 불이적(不二的) 특징을 가졌다.
그리하여 영명 연수 선사의 독특한 용어로는 ‘일심위종(一心爲宗)’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일심(一心)’은 바로 모든 생명의 근원과 무한한 가능태(可能態), 그리고 여래의 씨앗으로서의 ‘일심(一心)’이며, 불후의 명작인 그의 주저 <종경록(宗鏡錄)>은 바로 이 ‘일심(一心)’에 대한 해설서 격이었다.
그래서 그가 쓴 <종경록> 서문에 따르면, <종경록>을 편찬한 목적이 ‘일심을 들어 종지[宗]로 삼아 만법을 거울[鏡]처럼 비추기(擧一心爲宗, 照萬法如鏡)’ 위해서이며, 이를 위해 기존의 경과 논 등의 원만한 가르침을 간략히 추려 기록[錄]한 것이 <종경록>이라 했다고 했다.
이러한 영명 연수의 독특한 사상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은 고려 4대 광종(光宗) 때 소개되자마자 광종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리하여 원공(圓空)과 지종(智宗) 등 36명의 고승들을 3년간 중국에 유학 보냈다가 귀국 후에는 ‘법안종’을 고려에 유포하게 하자, 법안종풍이 고려에서는 정토종(淨土宗)으로 드날렸으며, 그 후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그 중심사상이 되기도 했다.
또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도 영명 연수 선사를 존경해, 자신의 대표적 저술인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에서 이러한 사상을 원용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도모한 원묘 요세(圓妙了世, 1163-1245)의 경우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영명 연수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는데, 특히 정토사상(淨土思想)의 타력(他力) 신앙을 강조함에 어김없이 영명 연수의 주장과 논리가 대두되곤 했다.
그러면 영명 연수 선사의 대표작이라 할 <종경록>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종경(宗鏡)’의 ‘종(宗)’은 가장 근본이 되는 마음을 의미하고, 종(宗)이란 일심(一心)을 가리키며, ‘경(鏡)’은 일심이 만법(萬法)을 비추는 것이 마치 거울이 모든 것을 비추어 주는 마음의 거울로 비유한 것이다. 거울이 모든 사물을 비추듯 일심(一心)의 도리를 이 책에서 빠짐없이 보여주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름에 걸맞게 <종경록(宗鏡錄)>은 만법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일심에 관한 경론(經論)을 예증(例證)으로 인용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일체를 오직 마음 하나하나가 만들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욕계, 색계, 무색계가 오직 마음뿐이라는 삼계유심(三界唯心),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은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마음이 근본이 된다’는 불어심위종(佛語心爲宗)과 같은 표현들은 불교의 가르침이 모두 ‘마음’ 하나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것이 <종경록>이 밝히고자 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종경록>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역설하고, 불심종(佛心宗)이라고 불리는 선종의 마음과 불어종(佛語宗)이라고 불리는 교종 각파에서 말하는 마음을 여러 예증을 들어서 논했다.
폭넓은 인용이 백과전서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당ㆍ송시대의 불교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체계화에 결함이 있으나 경⋅론⋅장⋅소(經論章疏)의 <종경록>은 ‘심경록(心境錄)’이라고도 불릴 만큼, ‘마음’에 대한 풍성한 논의를 담고 있다.
<종경록>은 전체를 3장으로 나눈다. 첫째가 표시장(標示章)이요 둘째가 문답장(問答章)이요 셋째가 인증장(引證章)이다. 표시장은 총론이고 문답장은 심(心)을 종(宗)으로 삼는다는 요지를 설명하고 있다.
<종경록>이 워낙 방대해서 마음에 대한 논의 가운데서도 다시 요점을 추려서 간행한 책이 바로 <명추회요(冥樞會要)>이다. 그리고 그 외에 <종경록>을 축약화한 것에 <종경촬요(宗鏡撮要)>가 있다.
※명추회요(冥樞會要)---북송의 회당 조심(晦堂祖心, 1025~1100) 선사가 영명연수 선사가 쓴 <종경록> 100권을 읽은 뒤, 그 <종경록>은 마음에 대한 정보를 엮은 방대한 책인데, 여기서 다시 중요한 부분을 추려 정리한 것이 <명추회요>이다. <명추회요>에서 ‘명(冥)’은 깊고 그윽한 도리를, ‘추(樞)’는 그 도리에서 가장 긴요한 내용, ‘회요(會要)’는 마음에 관한 요점을 모았다는 뜻이다
※종경찰요(宗鏡撮要)---영명 연수 선사께서 저술한 <종경록> 100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학인들은 그 책에 수록된 문자가 마치 백과사전을 방불케 할 만큼 방대하고 그 이치마저 끝없이 펼쳐짐으로 학인들은 <종경록>을 접함에 그 경지가 거대한 바다를 바라만 보고 탄식하면서 물러나듯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담분(曇賁) 스님은 그 가운데서 백에 한 둘을 엮어 모아 그것을 <종경찰요(宗鏡撮要)>라고 했다. 이는 말하자면 <종경록>을 축약한 것이란 의미이다. 그리하여 이후 학인들에게 <종경록>으로 알려진 책이 대개 이 <종경촬요>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 <종경촬요>가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돼,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존중되고 있다. 즉, 안동 광흥사 소장의 <종경촬요>로서, 2013년 광흥사 명부전의 시왕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중의 하나이며, 영명 연수 선사가 지은 <종경록>의 요점을 발췌해서 송나라의 승려인 담분(曇賁)이 엮은 책으로 고려 강종 2년(1213년)에 수선사에서 처음 판각했으며, 안동 광흥사의 <종경촬요>는 수선사판과 같은데, 구결이 남아있어 한글과 서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영명 연수(永明延壽) 선사는 선(禪)과 염불(淨)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참선 보다는 염불이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수행법이라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네 가지로 헤아려 알린 게송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이것이 <선정사료간(禪淨四料簡)로서, 참선과 염불을 같이 닦을 것을 설한 선정쌍수(禪淨雙修)의 근원이 된 법문이다.
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 ― 참선수행도 하고 염불수행도 하면
유여대각호(猶如戴角虎) ― 마치 뿔 달린 호랑이 같아
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 ― 현세에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내세작불조(來世作佛祖) ― 장래에 부처나 조사祖師가 될 것이다.
무선유정토(無禪有淨土) ― 참선수행은 없더라도 염불수행만 있으면
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 ― 만 사람이 닦아 만 사람이 모두 가나니
약득견미타(若得見彌陀) ― 단지 가서 아미타불을 뵙기만 한다면
하수불개오(何愁不開悟) ―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 걱정하리오.
유선유정토(有禪無淨土) ― 선수행만 있고 염불수행이 없으면
십인구차로(十人九蹉路) ― 열 사람 중 아홉은 길에서 자빠지나니
음경약현전(陰境若現前) ― 저승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면
별이수타거(瞥爾隨他去) ― 눈 깜짝할 사이 그만 휩쓸려 가버리리.
무선무정토(無禪無淨土) ―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수행도 없으면
철상참동주(鐵床竝銅柱) ― 쇠 침대 위에서 구리 기둥 껴안는 격이니
만겁여천생(萬劫與千生) ― 억만 겁이 지나고 천만 생을 거치도록
몰개인의고(沒箇人依怙) ― 믿고 의지할 사람 몸 하나 얻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