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의 경승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렵구나/백성들 평화롭고 만물이 풍요로와 일경이 평안하구나 남쪽의 명승지를 어느 곳에서 찾아볼 것인가 / 서석산瑞石山 보고 오는 길에 또 이 정자일세 紅綾山水畵難形 民富物豊百里寧 南州勝狀看何處 瑞石歸路又此亭
이 시는 조선 말기의 유학자로 화순능주 출신의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1845년 헌종 11 ∼1910년 융희 4)이 무등산을 들러 화순적벽 한 정자를 두고 지은 시이다.
그는 자는 계방(季方)이고, 호는 일신(日新)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화순 능주 대덕리에서 출생하였다. 노사 기정진(奇正鎭)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역학, 복서 등에도 박학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난 유학자였다. 그는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고, 일제 침략자를 타도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이때 정의림(鄭義林)은 60세 때 을사조약에 체결되자 울분에 겨워 죽음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소장을 작성하였다. 또 호남유일의 구한말 을미창의 나주항쟁에 '광산회맹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에 기우만.고광순.기삼연.오준선 등과 함께 능주의 선비대표로 참가한다.
그는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과 영남 최후의 성리학자라고 칭하는 한주 이진상과 학문논쟁과 토론을 그치지 않아 노사학문과 한주학문이 결합되는 높은 수준의 영호남 성리학을 이룩하는 역활을 했다.
그는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 칠송부락에 있는 영귀정(詠歸亭)에서 20ct초의 건립해 강학소로 사용하면서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 능주의 영벽정에서도 그의 시가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산수를 그리기 어렵도다/백성은 태평하고 만물이 풍요롭네 남쪽의 절경을 어디서 찾아볼까/서석산 돌아나와 이 정자 찾아보게.
그는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쌍봉마을 뒷산 대숲사이에 있는 1905년에 지어진 한후정(寒後亭)에 그의 시가 남아 있다. 평생에 寒後의 뜻을 / 오늘에 처음 이루었도다 소영嘯詠하니 一山이 늦었고 / 소요하니 삼경三逕이 맑도다 비롯이 없이 마침이 있으랴 / 안이 중하면 밖은 더욱 가볍다네 魯○에게 무엇을 칭도하리 / 千秋에 大義는 다시 밝으리라
平生寒後志 今日亭初成 嘯詠一山晩 盤桓三逕淸 始無絡豈有 內重外愈輕 魯○奚稱道 千秋義復明한후정(寒後亭)은 쌍봉리 쌍봉 마을 뒷편 대숲 사이에 있다. 제주양씨 양재경(梁在慶)이 1904년 연못을 만들어 양어하고 1905년에 연못의 북쪽에 정자를 건립하였다. 그후 1985년 양동석(梁東錫)이 중수하였다.
스승인 노사(蘆沙)의 문집 간행에 관여하였으며 스승의 학설을 옹호하는 글을 남겼다.그래서 광주 금곡사. 영귀사. 삼산사.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서 배향하고 있다. 문집으로 일신재집(日新齋集)이 전한다
문화.김은희/ nox9109@naver.com
이 뉴스클리핑은 http://www.ehonam.com/newshome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