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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경주대동기원설"은 한국에 있는 모든 최씨가 진한(辰韓)의 6촌(六村) 중 하나인 사량부 돌산 고허촌 촌장 소벌도리공의 후손으로 사량부를 중심으로 살아온 경주최씨가 그 중심세력(大宗, 큰집)이며 사량부에 살던 최씨들이 각각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그 지방을 근거로 하는 최씨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이 설은 성씨(姓氏)가 먼저 생겨나고 같은 성씨의 사람들이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 살면서 그 지방을 근거로 하는 본관(本貫)이 만들어졌다는 이론체계(理論體系)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론체계는 현대 역사학계는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는 그런 대로 인정을 받아 조선 말기에 이르러 족보를 만들고 역사를 연구하는 일이 유행(流行)하면서 "선의계 추록(先疑系 追錄)"이라는 왜곡된 세계표(世系表)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근래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설을 근거로 모든 최씨의 역사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사책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작업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성씨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심리적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최씨경주대동기원설"에 의하면;
개성최씨, 삭령최씨, 동주(철원)최씨, 전주최씨 문충공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에 사량부를 떠나 경주최씨에서 나누어 졌고.
함양최씨, 청주최씨, 영흥최씨, 용강최씨, 수원최씨, 부안최씨, 강릉최씨, 강화최씨, 화순최씨, 통천최씨, 양천최씨, 원주최씨, 해주최씨, 진주최씨, 탐진최씨, 전주최씨 문성공계, 전주최씨 문정공계, 전주최씨 복야공계 등은 문창후 최치원의 후손에서 나누어 졌다고 주장한다.
한편 재야 사학자 강경구는 그의 저서 "한국성씨의 뿌리를 찾아서"에서;
"전주(全州)는 신라 하주 군단의 주둔지로 시작된 도시이다. 신라 하주 군단은 본래 비사벌이라 불린 지금의 경상도 창녕에 설치되었고 한때는 경산 지방까지 후퇴했으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합천, 거창, 전라도 남원을 거쳐 완산(完山)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전주 지방에 창녕의 옛 이름인 비사벌이 옮겨와서 지금도 전주의 옛 이름을 비사벌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다.....창녕지방의 호족이 완산에 진출한 것이 이러한 지명의 이동에 의한 것이다. ...전주 지방의 호족은 신라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라고 주장하여 전주최씨가 신라 하주 군단을 따라 사량부에서 전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강경구는 같은 저서에서 "고려시대 전주최씨는 청하최씨라고 존칭하고 중국 지명(地名) 청하를 끌어다 자기 본관으로 호칭하여...."라고 전주최씨는 신라 출신이 아니라 예맥인들로 고구려 출신이라고 위의 내용과는 엇갈리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다가 결국은 "전주최씨 집안의 모든 기록을 검토한 결과 최씨의 경우 전주최씨(군옥파)의 경주 기원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나 개성최씨, 동주최씨 등은 고구려 최씨 계통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한 걸음 물러서면서 다시 전주최씨가 사량부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주최씨 집안에서는 "전주최씨는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망명 해 왔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역사학계는 "전주최씨는 예맥인의 후손으로 고구려 출신의 최씨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성씨보다는 본관이 먼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대 역사학계의 정설인데 이의 고증을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고증을 해야만 할 것인데 그리하지 않아도 앞으로의 글을 읽어보면 이 학설이 잘못된 것임을 스스로 알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해설 :
진한(辰韓)
기원전 한반도 동남부에 있었던 고대 부락 집단의 연맹체. 뒤에 신라로 발전했다.
큰 나라는 4-5,000호 작은 나라들은 6-700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맥(貊族)
예맥족(濊貊族).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으로 옛날에는 중국 대륙의 동북지방(산동반도 이북 발해만 부근)에 살았다. 맥족은 옛날 숙신과 동호 사이에서 개재하여 송화강, 흑룡강, 압록강 등의 유역과 함경도 강원도 지역에 걸쳐서 활동한 대 민족으로 역사상 부여, 고구려, 예맥, 옥저 등으로 부르는 여러 족속이 여기에 포함된다.
"최씨경주대동기원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로
"선의계 추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자칫 오해하기 쉬워서 "과연 이곳에 올리는 것이 바람직 한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곳에 올려 함께 고증을 통해 잘못된 기록임을 알게 된다면 다른 곳에서 이런 자료를 보더라도 잘못된 것임을 알게되는 "예방효과"도 있을 수 있다고 판단되어 이 곳에 올리기로 한다.
"선의계 추록"은 이 기록의 원래 이름이 아니고 사람들이 고증 해 보니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믿을 수는 없지만 이런 기록이 있다"라는 뜻에서 선의계(先疑系) 추록(追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기록은 경주최씨를 중심으로 한국 최씨 전체의 조상에 관한 계보도(系譜圖)로 1877년 함경남도 이원군 동서면 효우리에 살던 강성우(姜聖佑)씨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강성우씨의 6대 할아버지 율계 강필동씨가 취미로 한국 모든 성씨의 족보를 수집하여 보관해 왔다고 하는데 "선의계 추록"도 강필동씨가 수집한 기록중의 일부라고 한다.
이렇게 전해오던 "선의계 추록"은 함경남도 단천에 살았던 최장환(崔章煥)씨가 이런 기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강성우씨 집을 찾아가 최씨에 관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적어와서 공개하므로 최초로 세상에 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 후 충청남도 서산에 살던 최홍연(崔弘淵)씨가 서울에 살고있는 경주최씨들과 상의하여 1937년에 경주최씨상계보(慶州崔氏上系譜)라는 이름으로 발행했고 이것을 1949년 경상북도 월성군 천북면 손곡리에서 다시 발행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선의계 추록"의 내용은;
1세(소벌도리)--> 2세(대벌리)--> 3세(소벌리)--> 4세(대평)--> 5세(호빈)--> 6세(광윤)--> 7세(조)--> 8세(서)--> 9세(강)--> 10세(국)-->11세(지무)-->12세(비)-->13세(개)--> 14세(창)--> 15세(은의)--> 16세(서봉)--> 17세(혜양)--> 18세(대임)-->19세(동웅)-->20세(동지내)-->21세(형공)-->22세----23세----------24세----------25세---26세
형공---임분---계양성---산윤---치원(문창후)---은함---승로-도함---첨로
---처원----산두---인연---도---창로---이정---승우---준옹---동무---우달----응---상---계양현---언위(문영공)---광윤---광귀---광원---항---유부---형일---선경---창
즉 이 기록에 의하면 전주 최씨의 조상이라고 전해오는 문영공 최언위는 소벌도리공의 23세손이며 경주 최씨의 조상이라는 문창후 최치원은 24세손이라는 것이다.
해설 :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년(신라 헌안왕 1년)에 태어난 신라 말기의 학자로 자는 고운(孤雲)이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라고 하기도 한다. 12세에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여 17세에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 내봉공이 되어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879년(신라 헌강왕 5년) 황소의 난에 출전하여 격문을 써서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893년(진성왕 7년)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듬해에 시무십여조를 만들어 아찬이 되었다.
공은 난세를 한탄하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공의 제자 중에는 고려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고 신당서 예문지에 공의 사륙집(四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봉암사 비문, 숭복사 비문, 석순응전 등이 유명하다. 경남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국보 47호 진감선사비의 비문은 공이 지은 것이다.
문정공 최승로(文貞公 崔承老)
927-989. 고려 성종 때 문신. 12세에 논어를 읽는 것을 태조가 보고 원봉성 학사로 올렸다. 982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이 되고 왕명으로 시무책 28조를 올려 고려 왕조의 기초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988년 수문하시중이 되고 청하후에 피봉 되었다. 경주최씨의 조상이다.
최승우(崔承祐)
신라 말기의 학자로 890년(신라 진성여왕 4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892년에 당나라 과거 빈공과에 급제하여 문창후 최치원, 문영공 최언위와 함께 당대의 3최로 추앙 받았다. 신라로 귀국하여 후백제 견훤의 요청으로 견훤의 책사가 되었다. 경주최씨 집안에서 경주최씨라고 주장하는데 최승우의 선대(先代)나 후대(後代)가 아무도 연결되지 않는다.
희개공 최응(熙愷公 崔凝)
개성최씨(開城崔氏)의 시조 최우달(崔佑達)의 아들로 최우달은 황주 토산현(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사람으로 부인이 희개공을 임신했을 때 집에 오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오이 넝쿨에 참외가 열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마진국 왕 궁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궁예가 점을 쳐보니 최우달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면 나라에 불리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궁예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하므로 최우달은 희개공을 숨어서 길렀다.
희개공은 천재로 궁예 아래에서 벼슬을 했는데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불러 모반의 누명을 씌우려 하자 왕건이 변명하고 나섰다. 이런 정황을 눈여겨본 희개공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내려와 붓을 줍는 체 하면서 왕건에게 이르기를 굽히지 않으면 해롭다고 귀뜸을 하여 왕건이 해를 면하게 했으며 이로 인하여 왕건과 친해지게 되었다.
문영공 최언위(文英公 崔彦 )
868-944. 전주최씨의 선조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대부분의 전주최씨가 소벌도리공에 이어서 전주최씨의 원시조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는 "최언위는 처음 이름이 최신지(崔愼之)이며 경주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글을 잘 했다. 신라 말기 18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당나라 예부시랑 설정규 아래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니 발해의 재상 조소도의 아들 광찬도 함께 급제했다....."라고 하여 경주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또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는 ".....최언위는 42세에 신라로 귀국하여 집사성 시랑과 서서원 학사 벼슬을 했다. 이어 고려 태조가 고려를 개국하자 가족을 데리고 고려로 와서 태자사부가 되었으며 고려 조정이 그에게 문한(文翰)의 책임을 모두 맡기니 고려 궁궐의 건물 이름은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
당시의 귀공자들이 모두 그를 섬겼고 벼슬은 대상원봉 태학사 한림원령 평장사에 이르렀다. 고려 혜종 원년에 돌아가시니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왕은 매우 슬퍼하며 정광 벼슬을 다시 내리고 시호를 문영공이라고 했다......"라고 했다.
최광윤(崔光胤)
문영공 최언위의 큰아들. 고려 초기의 충신으로 진(晉)나라에 유학하던 중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거란에서 관리가 되었다. 이 때 거란이 고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함을 보고 비밀리에 고려에 보고하여 고려 정종이 30만 대군으로 광군(光軍)을 창설하여 서경에 주둔시켜 이에 대비하게 했다.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始祖) 문성공(文成公)은 휘(諱)가 아(阿)이며 자(字)는 형지(衡之)이고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며 완산군(完山君)이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문성공이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고,
큰아들 안렴사공 최용생(按廉使公 崔龍生)이 1350년에 경상도 안렴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대호군공 최용각(大護軍公 崔龍角)이 1357년에 검교대호군을 지냈고,
셋째아들 판사공 최용갑(判事公 崔龍甲)이 1323년에 중국 원나라(元) 과거에 합격했고
증손자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 )이 1346년에 태어났으므로 문성공은 1260년에서 127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감찰공 최세영(監察公 崔世榮)은 전주최씨 문성공계 최초의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에서 말하기를 "최씨 각 계파(系派)의 역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성공의 선조는 최균이라고 하기도 하고 최순작이라고 하기도 하며 최청지, 최○○, 최송년(崔松年) 심지어는 최선능(崔善能) 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왔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비록 모두가 같은 성씨, 같은 본관이라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혈연관계가 없거나 그 관계가 매우 멀어서 비록 같은 혈연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누어진 데를 알 수가 없으므로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서로 따로 따로 믿고 서로 잘못 알고있는 것이다.
고증을 거쳐서 문성공을 시조로 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으로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다.(崔之別以史傳人物言之則先祖又有崔均崔純爵崔淸之崔○○崔松年之異至於崔善能又自中國淸河而來矣此皆雖曰同姓字同本貫而其實則不相統屬遠矣雖或同是一源而亦不知其分派之所自來故隨其諸本之誤認辦證如後而直以文成公爲始祖此誠後人之不可不知者也)"라고 적었다.
문성공 제단 비문(祭壇 碑文)에는 "우리 동방의 전주최씨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니 공의 선조는 전해오지 않는다.
공의 휘는 아이고 벼슬은 문하시중으로 문성은 공의 시호이다. 공은 네 분의 아들이 있으니 큰아들 최용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최용각은 검교대호군을 지냈으며 셋째아들 최용갑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를 지냈고 막내아들 최용봉은 중랑장을 지냈다.
공의 후손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와 중랑장공 최용봉의 후손만 하더라도 향사(享祀)가 열 여섯이고 정려(旌閭)가 여섯이며 문과 급제가 41명 무과 급제가 67명이고 생원과 진사가 84명이다. 그 외의 대소 관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여기에다 다 적을 수가 없다.
할머님에 대해서나 공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산소의 위치 등의 기록은 오랜 세월과 그 동안의 수많은 전쟁으로 없어져 전해오지 않는다.
전주 주덕산에 있는 분토동에는 전주최씨의 선산이 있고 또 옛날 노인들의 입을 통해 공의 현손 존양당공 최덕지(存養堂公 崔德之)의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옛 무덤 너머에 있는 옛 어른 무덤(大人葬)이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정조년간 병진년에 봉분(封墳)을 열고 발굴 조사를 했으나 광(壙) 위에는 넓은 돌 하나가 덮여 있을 뿐 다른 유물(遺物)이나 지석(誌石) 등 공의 산소라고 증거 할 만 한 자료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다음해인 정사년에 후손들이 합의하여 산소라고 전해오는 장소에서 북쪽으로 수궁허(數弓虛)에 제단(祭壇)을 쌓고 위토(位土)를 두어 제사를 올리니 전해오는 이야기만 그대로 믿기 어렵다.
경진년에 다시 표석(標石)과 산문(山門)을 세워 예전에 못 이룬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 눈이 미치지 못하여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옛날일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조선 순조 21년 경진년 통훈대부 경기전령 이병운 근지"라고 되어있다.
공의 산소에 대하여 전주최씨 연촌공파 족보에는;
"족보 초성일권에 '공의 산소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 주덕산에 있다고 하였고 옛날 노인들이 이야기로 전해오기를 연촌공 최덕지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옛날 무덤 너머에 있는 옛 어른의 무덤이 공의 산소'라 하므로 후손 4파가 회의를 거쳐서 1796년에 봉분(封墳)을 열고 발굴조사를 해 보았으나 지석이나 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 할 수 있는 유품을 발견 할 수가 없어서 1797년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주최씨 집안에서는 중랑장공파 만이 그 무덤을 공의 산소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나머지 3파에서는 그 무덤을 공의 산소라고 인정하여 제단에서 제사를 올리지 않고 그 무덤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사는 중랑장공파는 음력 3월 3일에 단각에서, 그리고 안렴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사공파는 한식날 그 무덤(疑塚)에서 올린다.
중랑장공(中郞將公)은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始祖)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의 막내아들로 휘(諱)는 용봉(龍鳳)이며 고려 충정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전주최씨 연원지"에는;
"공의 휘는 용봉이니 당시 막내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보살핌과 총애를 혼자 차지하면서 성장하였기로 벼슬에 큰 뜻이 없어 벼슬이 중랑장(서기관급)에 머물렀으나 본래 영민하여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재질과 정기는 후손들에게 유전되어 최씨 문중의 찬란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된다.
공께서는 7형제를 두셨으나 불행히도 셋째 아들 휘 서(瑞), 넷째 아들 휘 익(翊), 다섯째 아들 휘 중거(仲車), 여섰째 아들 휘 안복(安福), 일곱째 아들 휘 안수(安壽) 다섯 형제는 후손이 없어 대를 이어오지 못하였으니 안타깝고 다만 위로 두 분 형제만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으니 큰아들 휘 을인(乙仁)은 사온서 직장 동정을 지내시어 한 계파를 이루고 둘째아들 휘 의(立義)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도승지와 행검한성을 지내시어 또한 계파를 이루어 대를 이어오고 있다."고 적고있다.
옛날 노인들 간에 이야기로 전해 오기를 중랑장공의 산소가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 주덕산에 있다고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으므로 1815년 3월 2일에 제단을 쌓고 매년 음력 3월 3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중랑장공의 후손을 전주최씨 중랑장공파라고 부르며 중랑장공파는 다시 한성공파, 송애공파, 송파공파, 소윤공파, 연촌공파로 나누지고 전주최씨 문성공계 중에서 가장 후손이 왕성하다.
사온동정공 최을인(司同正公 崔乙仁)
전주최씨 문성공계 2세 중랑장공 최용봉의 큰아들로 휘는 을인(乙仁)이다. 고려 말기에 사온서 직장 동정을 지내셨다고 전해오며 태어난 해와 돌아가신 해 그리고 산소(山所)의 위치 등에 대하여 기록(記錄)되어 전해오지 않는다.
월당공 최담(月塘公崔 )
1346-1434. 전주최씨 문성공계 중랑장공파 3세 사온동정공 최을인(崔乙仁)의 외아들로 휘는 담( )이고 호는 월당(月塘)이다. 17세에 사마시에 1377년에는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고향에 계신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가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1396년 중신들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이 되고 1398년 중훈대부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0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시와 글을 벗삼아 살았는데 1416년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통정대부 검교호조참의 집현전 제학에 제수 되었다.
전주에 한벽당이라는 정자를 짖고 만년(晩年)을 풍류(風流)를 벗삼으며 살았다. 나이 80이 넘어서 까지 건강하여 말(馬)을 타거나 내릴 때도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았고 언덕길을 걸을 때도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가다가도 사람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고 시골 작은 행사도 반드시 직접 참석했다. 잔치 때면 춤을 추며 즐겼고 글을 지을 때 어린 기생(童妓) 두 사람에게 종이(紙)를 잡게 하고 선(立) 채로 글을 지었다.
연촌공 최덕지(烟村公崔德之)
1384-1455. 전주최씨 문성공계 중랑장공파 4세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 )의 넷째 아들로 연촌공파 파조이다. 휘는 덕지(德之)이고 자는 우수(迂 ) 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연촌(烟村) 또는 존양당(存養堂)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 대각을 거쳐서 여러 지방의 지방관을 지냈고 남원 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버리고 나주(전남 영암군 영보촌)로 내려가 서재를 지어 이름을 존양루(存養樓)라 부르고 호를 "연촌"에서 "존양당"으로 바꾸었으며 책과 글을 벗삼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450년에 조선 문종의 부름을 받아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 직제학을 이 되어 다시 벼슬에 나갔으나 다음 해인 1451년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벼슬을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공이 벼슬을 버린 2년 후 1453년에 계유정란이 일어나고 1456년에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공과 친분이 깊었던 충신들이 목숨을 잃었다. 만약 공이 벼슬을 버리지 않았으면 공도 이런 변을 당했거나 아니면 신숙주 등과 마찬가지로 명예에 훼손을 입었겠지만 공은 적절한 시기에 벼슬을 버리므로 명예를 유지하면서도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아 자손을 번영하게 할 수가 있었다.
공은 조선 정조 때 기록된 명신록에 휘가 오른 유명하신 분이시다.
연촌공파.(烟村公派)
전주최씨 문성공계 5세손 연촌공 최덕지의 후손.
연촌공의 아들은 호군공 최주(護軍公 崔凋)와 사용공 최창(司勇公 崔 ) 그라고 진사공 최숙(進士公 崔淑) 세 사람이다.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호군공과 사용공은 전실(前室) 부인의 아들이고 진사공은 평양조씨의 아들로 보인다. 그 증거로서 호군공 제단 비문에 "공은 아버지인 연촌공이 남원부사로 있을 때 남원에서 살라는 명을 받들어 남원 주암촌에 터를 잡고 살았다"라고 되어 있고 감찰공 최세영은 평양조씨를 후비라고 적고있으며 그 산소가 전남 영암에 있고 호군공과 사용공 후손은 전북 남원(임실)을 중심으로 살아왔고 진사공 후손은 전남 나주(영암)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큰아들 호군공 후손으로 8세 암계공 최연손(巖溪公 崔連孫)은 자가 자윤(子胤)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가선대부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당시의 교지(敎旨, 임명장) 등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고 12세 비비정공 최영길은 임진왜란 때 큰공을 세워 도사 창주첨사가 되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전북 삼례에 정자를 세워 그 정자의 이름이 비비정(飛飛亭)으로 또 호를 비비정 이라고 했는데 비비정이란 최영길을 중국의 유명한 장군 장비(張飛)와 악비(岳飛)에 비교한 것이다. 후손은 남원시, 임실군, 광양시, 영암군, 보성군 등지에 살고 있다.
둘째아들 사용공의 큰아들 휘 대성(大成)은 호조참의, 셋째아들 휘 집성(集成)은 병조참의, 넷째아들 산당공 최충성은 자가 필경(弼卿)이며 유명한 학자로 할아버지 연촌공과 함께 녹동서원에 모셔졌다. 후손은 충남 보령, 예천, 대전, 영동, 전남 나주, 전북 정읍 등지에 살고 있다.
셋째아들 진사공은 아들을 낳지 못하여 사용공의 아들 최지성(崔智成)을 양자로 대를 이었다. 5세손 몽은공 최응용은 큰 뱀(龍蛇)이 나타나 모든 사람이 피하여 몸만 빠져 도망갔는데 오직 몽은공만이 연촌공의 영정을 몸에 품고 피하여 연촌공의 영정을 완벽하게 보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초로 전주최씨 문성공계 족보 초성일권을 만든 감찰공 최세영은 진사공의 7세손이다. 후손은 전남 나주, 영암, 광산, 강진, 해남, 무안, 전북 이리, 전주 등지에 살고 있다.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 --안렴사공 최용생(按廉使公 崔龍生) ----- 안렴사공파
----------------------------대호군공 최용각(大護軍公 崔龍角) ----- 대호군공파
----------------------------판사공 최용갑(判事公 崔龍甲) -------판사공파
---------------------중랑장공 최용봉(中郞將公 崔龍鳳) ---- 중랑장공파
중랑장공파
2세------------------3세-----------4세-----------5세--------------6세---------7세
최용봉(崔龍鳳)-최을인(崔乙仁)--최담(崔 )-최광지(崔匡之)-최생명(崔生明)-최수손(崔秀孫)
----------------------------------------------------------최도명(崔道明)-최수강(崔秀崗)
------------------------------------------최직지(崔直之)-최성명(崔誠明)-최해(崔稽)
------------------------------------------최득지(崔得之)-최자목(崔自睦)-최분(崔汾)
----------------------------------------------------------최자인(崔自姻)-최정(崔淨)
----------------------------------------------------------최자임(崔自姙)-최무강(崔無彊)
----------------------------------------------------------최자공(崔自恭)-최복희(崔福希)
------------------------------------------최덕지(崔德之)-최주(崔<水周>)-최대(崔岱)
-------------------------------------------------------최곤(崔崑)
-------------------------------------------------------최강(崔崗)
----------------------------------------------------최창(崔<水敞)----최대성(崔大成)
--------------------------------------------------------------최집성(崔集成)
---------------------------------------------------------------최충성(崔忠成)
----------------------------------------------------------- ------최숙(崔淑)
-----최지성(崔智成)
--------------최의(崔<立義>)-최심(崔深)-최구지(崔久之)-최석견(崔石堅)-최안손(崔顔孫)
안렴사공파
2세--------------------3세---------4세-----------5세------------6세--------7세
---------------------------------------------------------------------
최용생(崔龍生)-최전우(崔田雨)-최담(崔潭)-최사필(崔斯必)-최자경(崔子涇)-최수지(崔水智)
-------------------------------------------------------------------------최수인(崔水仁)
-------------------------------------------------------------------------최수용(崔水勇)
----------------------------------------------------최득경(崔得經)-최효랑(崔孝良)
------------------------------------------------------------------------ -최효문(崔孝文)
------------------------------------------최사강(崔斯江)-최종복(崔宗復)-최승로(崔承魯)
대호군공파
2세----------------3세----------4세--------5세------------6세--------------7세
최용각(崔龍角)-최옹(崔邕)-최반(崔盤)-최숙량(崔叔良)-최자유(崔自洧)----최학전(崔學全)
---------------최철(崔哲)-최광제(崔光濟)-최중소(崔仲紹)-최득우(崔得雨)-최진손(崔震孫)
-------------------------------------------------------------------------최감손(崔坎孫)
---------------------------------------------------------최윤우(崔潤雨)----최치(崔淄)
---------------------------------------------------------최치우(崔致雨)----최진(崔津)
--------------------------최계로(崔季魯)-최자진(崔自進)-최인한(崔仁漢)-최화수(崔和粹)
-------------------------------------------------------------------------최화후(崔和厚)
-------------------------------------------------------------------------최화중(崔和重)
---------------------------------------------------------최의한(崔義漢)--최징(崔澄)
---------------------------------------------------------최예한(崔禮漢)--최화미(崔和美)
---------------------------------------------------------최지한(崔智漢)--최윤종(崔胤宗)
---------------------------------------------------------최신한(崔信漢)--최을두(崔乙斗)
판사공파
-----2세------------ ---3세---------4세-----------5세------------6세-----------7세
최용갑(崔龍甲)-최영(崔濚)-최종수(崔宗守)-최의지(崔義之)-최의수(崔聃壽)-최중좌(崔仲佐)
------------최복생(崔福生)-최온지(崔溫之)-최희현(崔希賢)-최연조(崔戀祖)-최연석(崔連石)
----------------------------최이화(崔以和)-최수평(崔守平)-최문손(崔文孫)-최한경(崔漢卿)
* 안렴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사공파, 중랑장공파 등을 대파(大派)라고 부르고
대파 안(內)에서다시 중파(中派) 그리고 중파 안에서 다시 소파(小派)가 나누어진다.
* 본인이 무슨 파(派)라고 말 할 때 보통 가문(家門)이 번성(繁盛)하여 후손이 많은 경우 중파나 소파를 그렇지 못한 경우 대파를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파는 대개 족보 작성 때만 사용되고 중파를 본인의 파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중파의 한 예로서 중랑장공파 안(內)에서 나누어 진 중파를 살펴보면;
3세 한성공 최의(漢城公 崔<立義>)를 파조(派祖)로 하는 한성공파
5세 송애공 최광지(松崖公 崔匡之)를 파조(派祖)로 하는 송애공파
5세 송파공 최직지(松坡公 崔直之)를 파조(派祖)로 하는 송파공파
5세 소윤공 최득지(少尹公 崔得之)를 파조(派祖)로 하는 소윤공파
5세 연촌공 최덕지(烟村公 崔德之)를 파조(派祖)로 하는 연촌공파가 있다.
항렬(行列)은 같은 혈족간(血族間)의 대수(代數) 관계를 이름자(字)에 나타낸 것으로 한 가문(家門) 안(內)에서 그 사람의 서열(序列, order)을 의미한다.
한국 사람의 이름은 대개 두자(二字)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한자(一字)를 항렬자(行列字)로 사용하며 흔히 돌림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항렬자는 문중회의(門中會議)를 통하여 미리 만들어 두고 이름을 지을 때 항렬자에 한 글자를 보태어 이름을 지어 나간다.
항렬자는 그 글자가 가지는 의미(部首가 가지는 의미)가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따라 수(水), 목(木), 화(火), 토(土), 금(金)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름을 지을 때는 항렬의 단계에 따라 항렬자를 앞뒤로 배치 위치(配置位置)를 바꾸어서 같은 의미의 항렬자가 중복사용(重複使用)되는 문제를 피하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전주최씨의 경우 26세는 항렬자(林, 根)를 뒤로하고(*林 또는 *根) 27세는 항렬자(然, 炯)를 앞으로(然* 또는 炯*)하는 식으로 구성하므로 같은 목부(木部)를 사용하는 26세와 31세(種* 또는 柱*)는 비록 부수의 의미가 같아도 이름 안(內)에서 항렬자의 배치가 달라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항렬자는 근래에 순수한 한글 이름이 나오는 등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옛날에는 항렬을 매우 중요시하여 비록 자신이 나이 많은 어른이거나 노인이라 해도 자기보다 항렬이 높은 어린이에게 깍듯이 존대 말(敬語)을 사용하고 비록 어린이일지라도 자신보다 항렬이 낮은 어른에게 "이렇게 하게", "저렇게 하게" 하고 낮춤말(卑語)을 사용하는 등 높은 서열자(序列者)로서 행세(行勢)를 했다.
또 객지(客地)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도 같은 성씨 같은 본관(同姓同本)이면 항렬자를 비교하여 서열(序列, order)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이름을 매우 중요시하여 진짜 이름(本名)은 숨겨두고 사용하지 않고 부르기 위한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이 때 그 사람의 진짜 이름을 명(名)이라 하고 부르기 위한 이름을 자(字)라고 했다. 이러한 이름 체계는 중국문화권(中國文化圈)에서 사용한 것으로 중국, 한국, 베트남(越南) 등에서 사용해왔었다. 그 예로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주인공 유비(劉備)는 이름(名)이 비(備)이고 자(字)는 현덕(玄德)이므로 흔히 유현덕(劉玄德)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친구들 간에 부르기 위한 호(號), 아호(雅號), 존호(尊號), 시호(諡號) 등 많은 호칭(呼稱)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호칭 체계(體系, system)는 그 사람의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더 복잡하고 다양한 경향이 있었다.
*** 전주최씨 문성공계 집안의 항렬자 ***
1. 문성공계.
---------------23세---------24세--------25세-------26세--------27세-------28세
부수(部首)----(土*)--------(*金)------(水*)--------(*木)-------(火*)-------(*土)
-------------규(圭)*-----*호(鎬)-----낙(洛)*-----*림(林)-------연(然)*-----*철(喆)
-------------------------------------한(漢)*-----*근(根)-------형(炯)*-----*기(基)
------------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
부수(部首)--(金*)-------(*水)--------(木*)------(*火)-------(土*)--------(*金)
----------용(鎔)*-----*준(準)------종(種)*-----*희(熙)-----재(載)*-----*현(鉉)
----------석(錫)*-----*택(澤)------주(柱)*-----*화(譁)-----재(在)*-----*진(鎭)
시조(始祖)란 한 가문(家門)을 연(開) 선조(先祖)를 가리키지만 시조 스스로가 자신을 시조로 하여 능동적(能動的)으로 가문을 연 것이 아니라 가문이 만들어(形成) 진 후 후손(後孫)들이 역사를 더듬어 어떤 한 조상을 자신들의 시조로 지정(指定)한 것이므로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지만 당연히 시조에게도 부모님(父母)이 계시고 또 조상(祖上)도 있다.
1.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始祖)를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로 정(定)한 사람은 조선 숙종 때 최초로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을 만든 감찰공 최세영(監察公 崔世榮)이다.
한국에서 역사가 깊은 성씨(姓氏)들은 그 조상을 신라시대나 또는 그 이전에 살던 사람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족보(族譜)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 졌으므로 당연히 신라시대의 조상과 지금의 현대인들이 족보에 의하여 세대(世代)가 연결되지 않는다. 대체로 족보를 통하여 세대를 확인할 수 있는 조상은 족보를 만든 시점(時點, 조선 후기)에서 300-500년 전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까지가 그 한계(限界)이며 그 이상으로 올라가면 검증(檢證)이 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되고 만다.
한번 생각해 보라 !!!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역사(歷史)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면 누가 있어 수 백년이나 지난 후까지 그 이름을 기억해 주겠는가?
조선 후기에 만든 족보에 수 백년 전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 사람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적힌 그 내용을 역사책이라도 있어서 그 내용을 고증해 준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과연 족보에 적힌 그 내용을 그대로 믿어도 좋겠는가?
이런 현상은 다음에 좀더 상세히 짚어 보기로 하고......
어쨌거나 비록 족보를 통해 현대인과 세대(世代)가 연결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본관(本貫)과 성씨(姓氏)를 사용한 사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실제로 그 사람이 그 성씨나 본관을 사용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성씨, 그 본관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사람의 후손이라고 믿는 사람)을 원시조(原始祖)라고 부르고 족보를 통하여 세대(世代)가 확인되는 즉 족보상의 1세조(一世祖)를 중시조(中始祖)라고 부른다.
따라서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 문성공 최아는 족보를 통하여 정확하게 현대인과의 관계와 세대가 검증되므로 중시조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감찰공 최세영(監察公 崔世榮)은 어떤 근거(根據)로 문성공 최아를 중시조로 하여 족보를 만들었을까? 감찰공은 전주최씨 문성공계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 서문(序文)에서;
"최씨 각 계파(系派)의 역사를 전(傳)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성공 최아의 선조(先祖)는 복야공 최균이라고 하기도 하고 문열공 최순작이라고 하기도 하며 최청지, 최○○, 최송년, 심지어는 최선능 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선조가 중국 청하(淸河)에서 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비록 모두가 같은 성씨, 같은 본관이라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혈연관계가 없거나 그 관계가 매우 멀어서 비록 같은 혈연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누어진 데를 알 수가 없으므로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서로 따로 따로 믿고 서로 잘못 알고있는 것이다.
고증을 거쳐서 문성공 최아를 시조로 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으로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다.(崔之別以史傳人物言之則先祖又有崔均崔純爵崔淸之崔○○崔松年之異至於崔善能又自中國淸河而來矣此皆雖曰同姓字同本貫而其實則不相統屬遠矣雖或同是一源而亦不知其分派之所自來故隨其諸本之誤認辦證如後而直以文成公爲始祖此誠後人之不可不知者也)"라고 적었다.
여기서 알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당시 감찰공은 문성공의 아버지 상호군공 최입평(上護軍公 崔立枰)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찰공은 상호군공과 상호군공을 통하여 문열공이나 복야공 또는 그 윗 세대로 연결되는 모든 설들을 차단(遮斷)하고 확실히 검증되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여 족보를 만들었다.
또 감찰공은 전주최씨 문성공계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 시수(始修) 경보서(京譜序)에서;
".....선조의 세대(世代)가 분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족보를 통합하는 것은 윤리를 그르치는 일(倫序之誤謬)이라고 결론지어 통합(合譜)을 못했으나 같은 조상(一源)에서 나누어 진(分派) 후손임은(同宗) 틀림없으니 비록 고증(考證)은 하지 못했으나 같은 조상의 후손임을 후대에 전하리라.(無窮焉相傳)"라고 하였다.
감찰공은 문성공의 선조를 고증하는 여러 가지 기록을 초성일권에 남겼는데 그 내용을 모두 여기에서 검토하기는 어렵겠으니 중요한 부분만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초성일권에서 읽어지는 당시 감찰공의 인식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첫째 ".....선조의 세대(世代)가 분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족보를 통합하는 것은 윤리를 그르치는 일(倫序之誤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문의 역사가 유구(悠久)하다고 자랑하기보다는 확실하지 못한 선조를 인정(認定) 할 수 없다는 역사인식(歷史認識)을 가졌던 것 같다.
둘째 문성공의 사위(壻) 최선능이 문성공의 선조라는 설을 하물며(之異至於, 황당하게도 그렇게 주장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최선능도 선조라는 설마저도 있다고 예시(例示)하여 세간(世間)에 떠도는 여러 가지 검증(檢證) 불가능한 설들을 부정(否定)하고 차단(遮斷)하려 하고 있다.
셋째 근래 문열공 최순작(文烈公 崔舜爵)을 시조로 전주최씨 문열공계와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족보를 통합하여 하나의 계파로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복야공과 문성공이 모두 문열공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지만 감찰공 최세영은 문열공보다 복야공이 더 옛날 사람인 것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넷째 감찰공은 선후대(先後代)로 혈연관계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부모자식(父子關係)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 사위(壻)로 처리한 것 같다. 그 예로 문성공과 최선능의 관계 외에도 대호군공 최용각(大護軍公 崔龍角)과 화순최씨 최원지의 관계도 당시에 최원지가 대호군공의 아들이란 설이 있었으나 고증(考證)을 거쳐 부정하고 사위라고 적었다.
2. 이 설은 문정공 최재의 아버지 전서공 최득평(典書公 崔得枰)과 문성공의 아버지 상호군공 최입평(上護軍公 崔立枰)의 휘(諱)가 모두 평자(枰字)로 끝난다는 데에서 시작된다. 즉 두분 모두 평(枰)자로 끝나는 휘를 가졌으므로 형제 항렬(行列)이고 좀더 발전하여 두분 모두가 시랑공 최정신(侍郞公 崔正臣)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시랑공은 아들이 3형제로 큰아들이 전서공이고 둘째가 시랑공 최직평(侍郞公 崔直坪)이며 셋째가 상호군공이라는 것으로 계보로 정리 표현해 보면;
1세 문열공 최순작(文烈公 崔舜爵)
2세 상서공 최숭(尙書公 崔崇)
3세 문강공 최남부(文康公. 崔南敷)
4세 소윤공 최전(小尹公 崔佺)
5세 시랑공 최정신(侍郞公 崔正臣
6세 전서공 최득평-----시랑공 최직평-----상호군공 최입평
7세 문정공 최재--------------------------문성공 최아
즉 문성공은 문열공의 6대손(六代孫) 이라는 것이다.
나의 뿌리는 시조는 문열공 최순작이시고
평도공 최유경(平度公 崔有慶)-판윤공 최사위(判尹公 崔士威)--판윤공파
------------------------------양도공 최사의(襄度公 崔士儀)--양도공파
------------------------------지평공 최사규(持平公 崔士規)--지평공파
------------------------------경절공 최사강(敬節公 崔士康)--경절공파
------------------------------첨추공 최사용(僉樞公 崔士庸)--첨추공파
------------------------------감무공 최사흥(監務公 崔士興)--감무공파
중 하나 경절공파 최사강의 후손이다.
3. 복야공이 문성공의 선조(先祖)라는 설을 세계도(世系圖)를 통해 검토해 보면;
복야공 최균(僕射公 崔均)
문정공 최보순(文定公 崔甫淳)
상서공 최윤미(尙書公 崔允<人爾>)
병부상서공 최윤개(兵部尙書公 崔允愷)
한림학사공 최소(翰林學士公 崔 )
찬성사공 최비일(贊成事公 崔毗一)
문간공 최성지(文簡公 崔誠之)
양경공 최문도(良敬公 崔文度)
최사검(崔思儉)|
완성군공 최을의(完城君 崔乙義)
소윤공 최선(小尹公 崔宣)
상호군공 최입평(上護軍公 崔立枰)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
로 연결된다는 것이 이 설(說)의 줄거리(大綱)이다.
이 설은 감찰공 최세영이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을 만들 당시에는 상당히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감찰공은 족보 초성일권에 이상의 계보를 특별한 해석(解析)이나 논평(論評) 없이 부록(附錄)으로 기록하여 두었다.
<<<[출처:전주최씨 홈페이지. 글쓴이:최순주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