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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27, 2015
여행 후기-비엔나
비엔나는 관광사업을 체계있게 상업화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관광이 전체 GDP의 10퍼세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인가 봅니다. 거리는 깨끗했고 모든 건물은 복고풍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고층의 현대 식 건물은 중심가에서 하나도 찾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관광 사업을 할려면 이 정도의 철저한 도시 계획과 미래를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시민들은 아주 친절하고 묻는 질문에 잘 대답해 주었으나 관광 명소에 일하는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빠졌는지 마지 못해 일하는 것처럼 보였고 불친절했습니다.
젊은 이들은 활기차게 보였고 어디에 앉아서나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담배 피우는 사람이 많은것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남자나 여자들이 피워 대는 연기에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기침이 날 정도입니다.
맥도 날드 햄버거 집이 많은 것도 놀라웠습니다. 한 블럭에 하나는 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미국에서는 건강식때문에 점점 인기가 없는데도 외국에서는 이렇게 잘 되어서 현상 유지가 되는 모양입니다. 마켓 작전인지 식당 안을 고급스럽게 꾸민 것도 미국과 달랐습니다.
모든 상점이 달러를 받지 않고 유로화만 받는 것은 이해할 수없었습니다. 호텔 카운터의 말에 의하면 은행에서만 유로로 바꿔 주고 은행문이 닫힌 시간에는 공항까지 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일요일에는 극 소수의 음식점을 제외하고는 전 상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노동 조합의 요구라고 합니다.
어디에서나 처럼 거리에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꽉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절반 이상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급 상점은 한자 어로 표시된곳도 보았습니다. 시끄럽고 길거리를 점령하여 통행을 막고 남을 상관하지 않는 그 들의 태도는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관광객도 많이 보였지만 중국 관광객의 수에 비할 바 아닙니다.
비엔나 관광의 대부분이 몇 군데를 빼고는 걸어 갈 수있는 곳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호프부르그 궁전을 중심으로한 박물관 지역에는 국립 박물관, 알버티나 박물관, 시시 (프란츠 요셉1세의 왕비인 에리자베츠의 애칭) 박물관이 있었고 얼마 떨어 지지 않는 곳에 오페라 하우스, 성 스테판 성당이 있어 하루면 걸어서 충분히 볼 수있습니다. 전차로 몇 구간을 가면 벨비디어 궁전, 성 찰스 성당, 필 하모닉, 스타트 팍이 서로 가까이 있어서 아주 편리하였습니다. 당시 여름 궁전이었던 숀브룬 궁전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지만 지하철로 몇 정거장 안 떨어져 있습니다.
성당은 오래 전부터 신물나게 보아 왔던 터라, 또 사진을 찍어 놓아도 집에 돌아 오면 어디 곳이 어느 곳인지 헷갈려 이번 관광에서는 건물 밖의 사진만 찍고 내부는 눈요기 정도로만 하였습니다. 궁전 내부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러나 여행 가기전에 미리 메모해 두었던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 관람하였습니다.
국립 박물관의 렘브란트, 루벤, 알브레트 뒤러 (르네상스 초기 원근법을 처음 도입한 무사초가 배웠다는) 작품, 알버티나 박물관의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라파엘 작품, 벨비디어 궁전 박물관의 클림프트 (Klimpt)와 쉴러 (Schiele)의 작품들은 꼼꼼히 챙겼습니다.
클림프트와 쉴러가 오스트리아에서는 국민 화가로 대접을 받는 다는 것을 이번 방문에서 알았고 특히 클림프트의 “키스”는 경호원들이 항시 감시하고 있어 진품은 사진에 못 담고 건물 입구에 있는 모조품이 있어 그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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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는 두 곳에 갔습니다.
쇤브룬 궁전과 비엔나 필하모닉입니다.
은퇴한 후부터 음악에 관하여 공부를 해온 터라 가능하면 많은 콘서트에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음악의 도시 답게 수 많은 곳에, 특히 거의 모든 궁전과 성당에는 콘서트의 광고판이 걸려 있었고 레퍼토리는 대부분이 모짤트 곡이고 양념으로 스트라우스의 곡이 있었습니다. 비발디의 4계절 광고는 한번 본적이 있으나 신기하게도 베토벤 곡은 찾아 볼 수없었습니다. 듣던대로 오스트리아인들은 모찰트와 스트라우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슈베르트와 하이든도 오스트리아 인인데…
두 곳의 레퍼토리가 비슷하였습니다. 모짤트의 4대 오페라 (황궁에서의 탈출, 돈 지오바니, 피가로의 결혼, 마술 피리) 중 몇 곡과 “여자는 다 그래(Cosi Fan Tutte)”는 두 곳에서 모두 들었습니다. 달랐다면 쇤브룬 궁전에서는 무용이 나왔고 단원이 더 많은 필 하모닉에서는 세레나데 13번인 작은 밤의 음악 (Eine Kleine Nachtmusik), 미사, 심포니 #40의 연주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스트라우스의Radetzky 행진곡으로 관중들의 흥을 돋우는 것은 잊지 않았고 아들 스트라우스의 Blue Danube의 아름다운 선률도 양념으로 선 보이고…
쇤브룬 궁전은 모찰트와 인연이 있던 곳입니다.
6살인 모짤트가 황제앞에서 피아노 연주할때 마루에서 미끌어져 울고 있을 때 1살 위인 마리 안트와넷 공주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다독거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는 곳입니다. 모짤트는 그 자리에서 “나중에 너와 결혼할래”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녀는 후에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어 1792년 시민 혁명때 단두대 위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녀가 모짤트의 아내가 되었더라면 화제가 더욱 풍성했을텐데…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상당한 기대를 하고 VIP석을 구입했는데 생각보다 작고 초라한 공연 홀에 실망했습니다. 모짤트가 이 궁전의 두 홀에서 공연했다는데 그 중의 하나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천장에 샹들리에가 몇 개 있고 바닥에 의자 300여개 쯤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단순한 홀이었습니다. VIP석이라고 특별히 대접하는것도 아니고 맨 앞 두 줄의 좌석으로 직원이 직접 자리까지 안내 해 준 곳 뿐입니다. 우리 부부의 좌석은 첫째 줄 맨 가운데 자리이었습니다. 실망감도 있었고 도착한 다음 날이라 피곤도 엄습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연 중 잠이 와 마누라가 몇 번을 깨운지 모릅니다. 다행히 마누라 쪽으로 몸이 기울어 졌기에 망정이지 다른 청중 쪽으로 기울었으면 크게 망신을 당할 번했습니다. 악단원이 그 것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퍽 궁금하기도 하고... 스트라우스의 왈쯔와 폴카에 맞춰 춤추는 여자 무용수가 너무 예뻐 그 녀에게 집중하여 잠을 몰아 낼려고 했는데도 오는 잠은 어쩔 수없었습니다. 마누라 하는 말이 코 골까 봐서 조마했다고 합니다. 공연은 좋았지만 (?) 홀이 기대에 어긋나 괜히 비싼 표를 구했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갈 때는 호텔에서 불러 준 택시를 탔지만 밤 늦게 돌아 올때는 바로 길 건너 편에 있는 지하철을 타고 오는 재미도 쏠쏠하였습니다.
다음 날 궁전 전체를 구경하면서 그 에피소드가 있는 방에 들어 가 봤습니다. 피아노 한 대 놔두니 겨우 몇 사람 들어 갈 정도의 좁은 방이었습니다.
며칠 후 비엔나 필하모닉에서도 실망하기는 마찬 가지이였습니다. 지난 번에는 공연장에 실망했다면 이번에는 관중에 실망했습니다. 나 자신도 정장을 안 했지만 버스에서 왁자지껄하게 무더기로 쏟아 지는 중국사람들을 보고 나의 환상은 완전히 깨져 버렸습니다. 여행 가방을 챙길 때 마누라는 콘서트갈때 입을 양복 한벌을 넣자고 했지만 짐을 줄일려고 못 넣게 했는데 그러기를 천만 잘 했습니다. 턱시도 입고 갔더라면 키 작은 내 꼴이 영락없는 호텔 보이가 될 번했습니다. 입구 쪽의 현판에는 프란쯔 요셉 1세의 이름과 글이 있었는데 독일어에 까막눈인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없었고…앞 몇 째 줄 중앙이 내 좌석이어서 최상이었지만 2층 난간의 좋은 좌석은 중국 사람이 뾰쭉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단원의 수준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늙게 보이는 단원들이 여러 명 보였고 Concert Master도 좀 무게있게 보여 연주에 신뢰는 갔습니다. 건물 내부는 시카고 심포니에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좋았습니다.
하이든 집은 나의 호텔 에서 3-40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서 며칠 지나 우연히 찾아 보았고 스트라우스 집은 찾아 가기에 지쳐 스타트 공원 (Stadt Park)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황금 빛 입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다뉴브 강 여행도 좋았습니다.
몇 시간을 버스로 달려 선착장에 도착한 뒤에 배로 옮겨져 Wachau (영어 표기-와차우) 계곡을 따라 미끌어져 갑니다. 산 밑 자락에 붉은 지붕의 집들이 몇 채 강변을 따라 모여 있는 한가로운 정경이었습니다. 10월쯤이면 단풍이 정말 멋 있을 것같았습니다. 산 위에는 성과 요새들이 보였습니다. 몇 집 안 보이는 이런 곳에 옛날 성주는 몇 명의 백성을 거느르며 군림했을까? 누가 쳐 들어 온다고 산 꼭대기에 요새를 지었을까? 성을 짓느라 강제 동원된 백성의 고초는 어떠 했을까? 등등을 생각하며 사진을 부지런히 찍다 보니 멜크 수도원 (Melk Abbey)의 성벽 밑 선착장에서 다다렀습니다. 1시간 반의 선상 여행이었습니다. 깎아 지른 바위 위에 거대한 성벽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약간의 깔끄막을 오르자 수도원의 입구가 보이고 그 입구안에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점심 이라 자유 시간이 주어지고 식사는 각자 부담이었습니다. 옥외의 한 테이블을 겨우 찾아 이 곳 오스트리아의 전통음식이라는 굴라쉬 (Goulash-같은 이름의 음식이 프라하롸 부다페스트에서도 있었음)를 주문하였습니다. 소고기를 기름에 튀겼다고 하는데 아주 졸깃 졸깃하고 맛이 좋았습니다. 서 너개의 Dumpling이 side dish로 나왔는데 우리가 먹는 그런 만두가 아니라 빵, 양파, 파슬리를 갈고 뭉쳐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 식성에는 맞지 않아 몇 입 먹고 남겼습니다. 테이블이 부족하여 스콧틀랜드에서 온 두 나이 먹은 여인들이 나중에 합석하고 담소했는데 친구 사이라고 합니다. 나이 먹은 여자 둘이서 여행 다닐 수있는 그런 여유있는 마음과 사회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도원 안은 화려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선형으로 되어 있는 층계를 타고 올라갔다가 차차 내려 오면서 구경하는 식이었습니다. 이 수도원에 대하여는 좀 더 기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11세기에 레오폴드 1세 황제가 자기의 여러 성 가운데 하나를 사제에게 주어 세웠다고 합니다. 성경을 이 곳에서 출판한 적도 있었고 오스트리아와 그 주위 지역의 사제의 규범을 관장할 정도로 최고의 권위와 명성을 가진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만은 역사적 건물들이 화재나 전쟁으로 불타고 파손되었지만 이 수도원만은 16세기의 종교 개혁, 18세기의 황제 명령에 의한 교회 철폐와 나폴레온 전쟁에서도 살아 남았고, 20세기의 나치 하에서도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것입니다. 그 건 기적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정부의 전적인 지원과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도서관의 장서도 놀라웠습니다. 성경에 대한 기록 뿐 아니라 역사, 법률, 의학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10만 권 이상의 책이 위 아래층에 보관되어 있는데 중세 이 후부터의 책이 많으나 가장 오래 된 책은 988년에 쓰여진 것도 있다고 하고 그 중에는 구르텐부르그의 활자로 제작된 책도 많다고 합니다. 사제들이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가 촛 불을 켜고 공부한다고 합니다. 이 수도원 하나가 세계적인 보물 창고인 셈입니다. 빈 터가 즐비한 부여, 공주를 유네스코에 등록시킬 정도의 한국의 실력 (?)같으면 진즉 등재되었을 건데…지금 그안에 900명 정원의 남녀 공학 학교가 있는데 그사제 교육이 아니고 일반 학교라고 합니다. 수도원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멜크 시가와 다뉴브 강의 경치도 일품이었습니다.
돌아 올때는 이미 사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비엔나로 돌아 왔습니다.
10시간 이상의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부다페스트의 1일 관광도 했습니다.
거의 12시간이 걸렸습니다.
비엔나에 5박 6일 체류했지만 도착하고 떠나는 날 빼고 다뉴브강 유람의 하루, 부다페스트 관광의 하루를 빼면 비엔나에 있었던 기간을 만 3일에 불과했지만 비엔나 관광은 그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다페스트를 가서 보고 괜히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누라는 언제 그 곳을 가느나며 잘 했다고 하지만).
볼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유태인이 오래 살았던 지역에 유럽에서 제일 크다는 시나고그가 있다고 하지만 그 것도 차안에서 일별했을 뿐이고…프라하에서도 유태인 지역의 관광이 있었는데 그런 곳에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혹 유태인들의 마켓팅 전략에 말려 들고 있지는 않나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가이드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차 안에는 미국에서 온 사람이 다수를 차지 했었지만 스페인에서 온 사람, 독일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로 이야기하다가 다음에는 스페인어로, 마지막에는 독일어로 설명하니 한참 지나다 보면 어디까지 영어인지 언제부터 영어가 다시 시작하는지 헷갈리었습니다. 누가 불평했는지, 부다페스트 시내를 관광할 때는 앞에서 영어 가이드가 설명하는데 뒤에서는 다른 가이드가 스페인어로 하고 있었습니다. 가이드 두명을 부쳤던 겁니다. 그러니 앞에서 말하고 있는 영어 가이드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겁니다. 이 것은 혼자 가는 여행의 단점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본래 부다 (물을 의미)와 페스트 (동굴 또는 건국자의 이름을 표시) 가 다뉴브강을 경계로 독립된 나라이었는데 1873년 오스트리아와 합병할 때 같이 합쳐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를 방문하기전의 내 상식으로는 헝거리가 훈 (Hun-흉노) 족이 세운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가이드는 한사코 아니라고 합니다. 그 녀의 설명에 의하면 본래 있었던 로마 사람에 동방에서 온 사람들과 켈트족 (스콧틀랜드 지방)이 어울려져 세운 국가로 그 들을 통칭 헝가리 족이라 부르고 언어도 독특한 헝가리 언어를 쓴다고 합니다. 나는 아직도 훈 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로 믿습니다 (나중에 다른 족속이 합쳐졌겠지만).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고속도로 길에서 멀리 떨어진 산위에 까마득히 보이는 독수리 상이 있었는데 동방에서 온 사람들을 독수리가 인도하여 그 곳에 정착하였다고 해서 기념으로 세운거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만 보아도 동방 족이 주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헝가리는 16세기부터 1918년 오스트리아가 1차 대전에 패배할 때까지 오토만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2차 대전후에는 소련의 위성 국가로 지내서 그런지 자존심이 센 것처럼 보였습니다. 2차 대전때의 폭격으로 역사의 유물이 많았던 부다 지역은 70퍼센트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기들이 자랑하는 성 마티아 성당은 완전히 새로 지은 건물처럼 보였습니다. 거리의 많은 건물도 수리가 안 된 채 방치되어 있는 걸 보고 그 들의 어려운 생활이 비엔나와 비교되었습니다.
부다 지역의 관광이 끝나고 강을 건너 페스트에서 잠시 자유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건너 산 위 멀리에 두 개의 상이 보여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소련이 나치에게서 해방시켜 준 기념으로 세운 자유의 여신상 (Liberty Statue)이라고 합니다. 젊은 사람에게 러시아를 좋아 하느냐고 물어 봤더니 할아버지는 혹 모르지만 자기는 아니라며 고개를 흔듭니다. 소련을 미워하면서도 그 상을 없애지 않고 남겨 둔 게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며칠 후 첵코에 가보니 블타바 강 다리 위에도 있었습니다.
걸으면서 근방의 집들을 구경하다가 어느 집 벽에 요셉 요아킴 (Joseph Joachim)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내용을 알 수없어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가 돌아 오는 차 안에서 가이드에게 보여 주었더니 그 집에서 비올린 연주를 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게 나의 가장 값진 (?) 부다페스트 여행의 수확이었습니다. 요아킴은 헝가리 출신으로 당시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명이었던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극찬하며 슈만에게 추천하는 편지를 써 준 사람이 바로 그 입니다. 요아킴이 22살이고 브람스가 20살 때의 일 입니다. 평생을 브람스와 친구로 지냈고 브람스,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와 함께 연주 여행도 많이 하였습니다.
밤 8시쯤 비엔나의 버스 종착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각 자의 호텔로 데려다 준다고 조그만 밴으로 옮겨 타라고 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후 가이드에게 팁을 주려고 지갑을 꺼내 20불 짜리 지폐를 한장을 꺼내고 지갑을 다시 뒷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한꺼번에 사람이 내리고 있었고 주위는 어둑해져 약간은 어수수선한 분위기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지갑이 내 소유였다는 것을 호텔에 도착해서야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마누라의 이야기입니다. 밴 운전자가 각 자의 행선지를 알려고 밴 옆에서 서성거리는 세 여자에게 어느 호텔로 가느냐고 묻는데도 대답을 않더라는 겁니다. 그 들을 같이 여행했던 사람으로 알고 저렇게 영어도 못알아 듣는 사람이 어떻게 여행을 하지? 하고 혼자 말 비슷하게 마누라가 말했던 것은 기억합니다. 그 중 하나가 나를 따라 밴의 내 옆 좌석에 앉더니 곧 바로 내리더라는 겁니다. 그 때 당한 것 같습니다. 지갑과 돈을 양 손에 들고 한참을 서 있었고 뒷 주머니가 헐렁하게 생겼으니 그 들의 눈에 번쩍 띄었을 겁니다.
200여 달러와 몇 십 유로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크레딧 카드 2장과 운전 면허증도 함께…
호텔에서 카드 회사로 연락하고 overnight으로 새 카드를 보내 주겠다는 것을 사양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마누라 하는 말이 자기는 한 숨도 못 자고 있는데 나는 들어 눕자 말자 코를 드르렁 골더랍니다.
나쁜 일은 금방 잊어 버리자는 게 나의 신조입니다.
화 내 봤자 내 몸만 상하고 나만 손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206유로,
소매치기에 200불과 몇 십 유로를 바치고 …
두번째 황당 사건이었습니다.
비엔나에서 별 쑈를 다하고 다녔습니다.
다음 날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출발했습니다.
시카고 특파원 일용이가
후기: 구 소련의 유럽 해방 기념물이 부다페스트, 프라하 뿐만 아니라 비엔나에도 있다고 합니다. 찾아 가 보지는 안했지만 비엔나에도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았습니다.
성 스테판 성당에서 나와 알버티나 박물관을 가기 위하여 오페라 하우스 뒤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길 이름이Glabenstrasse이고 외국 관광객을 위한 쇼핑지역이라고 합니다. 거리 중앙에 있는 황 금 빛 기념물이 있었습니다. 커피 한잔 하고 싶어 옥외 천막 아래에 앉아 옆 테이블의 두 젊은이들과 대회를 나누었습니다. 한 젊은이의 영어가 유창하여 물어 보니 미국에서 살다가 왔다고 합니다. 그 기념물이 뭐냐고 물었더니 18세기 (내 생각에는 부정확한 연대 같음)에 페스트가 번창하여 비엔나 시민 20만 명이 죽었는데 그 걸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흑사병 기념물 (Plague Column)이라고 합니다. 너무 반짝거려 황금으로 만들어 졌냐고 물었더니 비엔나에 진짜 황금으로 만들어 진것은 꼭 하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소련으로 부터의 해방 기념물인데 소련군이 유태인에게서 빼앗은 금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사진으로 보니 군인 (소련?)이 방패를 들고 서 있는 해방군이라 자처하는 소련이 보여 준 또 하나의 야만적인 행동을 말 하고자 함 입니다.
사진 #1-하이든 집
#2/3-라파엘 작품
#4-알브레트 뒤러 작품
#5-쇤브룬 야경
#6-쇤브룬의 연주 홀-이때 까지만 해도 정신이 총총
#7-두 무용수의 춤-여자 무용수 (왼쪽 여자)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다 못 담아 약간 서운
#8-모짤트의 친필 작곡
#9-다뉴브 강위의 유람
#10-선착장 가까이에서의 Melk Abbey
#11-Abbey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12-Abbey위에서 바라 보는 경관
#13-Abbey 도서관의 장서
#14-아들 스타라우스의 바이올린 연주 모습
#15-왕자 결혼식 광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모짤트도 그림안에 담았음. 사살 그 때 모짤트는 4살 때이어서 비엔나에는 없었고 살쯔부르그에 있었으나 그림을 완성하는데 몇 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모짤트는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는 때라 화가가 그를 집어 넣었음. 조그만 네모안에 있는 어린애가 모짤트임
#16-알버티나 미술관에 있는 미켈란 젤로의 그림들
#17-벨비디어 궁전 겸 박물관
#18-입구에 있는 클림프트의 키스 모조작-진품은 삼엄한 경계로 사진에 담지 못했음
#19-또 한 사람의 오스트리아 화가인 에곤 쉴러 (Egon Schiele-독일어로 아마 쉴레로 발음되지 않을까 생각)의 그림
#20-비엔나 필하모닉 앞
#21-필하모닉 내부
#22-부다페스트의 국회 의사당(페스트 쪽에 있음)
#23-Abbey 뒤 쪽에서 찍은 사진
여러 사진을 올리려 했으나 카페에서 23개만 허용되어 어쩔 수 없었으니 이해 바랍니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봤다...ㅎㅎㅎ
그런데 똑 같은 사진이 또 나와서 또 보고...ㅎㅎㅎ
나의 기술 부족으로 그런것같다. 사진을 골라 올렸더니 시간이 너무 경과했다고 안되고...너무 많다고 안되고...계속 몇번 저장한다는 알림이 있던대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집에 애들이 하나도 없으니 물어볼 사람도 없고...그러나 저러나 너희들 사진은 언제 볼수 있다냐?
은퇴후 공부한 음악이 전문가보다 더 깊고 폭넓다. 작곡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알고 작곡의 의도를 알고 간 여행,얼마나 좋았을까? 멜크사원과 멜크수도원 도서관이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지니고 있다는 정보도 유익했다. 가이더가 말한 항가리 민족은 유박사 말이 맞아. 4세기 후반에 훈족이 그곳에 침입했는데 그 이전에는 로마속주 로 지냈지. 훈족 지배가 끝나며 게르만족(동고트족 등) 등 여러 민족이 뒤섞여 출현하고 함께 지내다 한 마자르족 지도자가 이곳을 평정했다고 함. 언어상으로 우랄어 계통이 이를 증명함. 흔히 항가리 민족을 우리말로 '머저리'족이라 부르는 것은 훈족 이후의 민족을 말하는 것. 잘 보았네 --
가이드가 몰랐다기 보다 훈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은 뉴양스가 풍기더군...역사 왜곡인지도 모르지...이번 여행은 비엔나에서의 황당한 일 빼고는 대 만족일세...이 다음에는 돈과 카드는 주머니에 넣어 목에 걸고 다녀야 겠네.
여행후기 - 바엔나 잘 보았다.
사진 올리면서 불편을 겪는 모양인데
우리청탑회 "다음 카페"에서는 한번에 사진 50장까지 올릴 수 있으며
용량으로는 전체 50MB까지 올릴 수 있다.
그래서 사진 한장 크기가 1MB가 넘으면 50장을 올릴 수 없으며 "50/사진 한장의 용량" 으로 되겠지!
그리고 큰 사진을 올려도 다음카페에서 자동적으로 긴 쪽이 1024픽셀로 조정되어버린다.
올려 놓은 사진을 보면 가로사진은 1024×768로 되어 있고 세로사진은 768×1024 로 되어 있다.
iPhone 6 Plus 사진 품질 참 좋군!
자동적으로 사진 크기를 다음 카페에서 조절된다면 50장이 올려져야 되는데 23장만 등록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사진을 더 올리는 방법을 찾았다. 한정된 사진만을 올린 뒤에 등록했다가 다시 수정을 한 뒤에 몇 장 올리니 되더라. 프라하 여행기 때 써 먹었지. 하여튼 고맙다
@유일용 내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은 한장의 용량이 1.81MB 이다.
이 사진을 올린다면 50MB / 1.81MB = 27.6 이므로 27장 만 올릴 수 있다.
참고로 사진의 크기는 3268 × 1960 픽셀이었다.
이 사진을 다음카페에 올리면 다음카페서 자동적으로 크기를 1024 ×768로 줄여버리고
용량은 사진에 따라 다르게 555KB 342KB 등으로 줄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