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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의 국지전 그 뿌리와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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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야만의 얼굴을 한 평화 - 국지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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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기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정된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이라는 국지전의 사전적 정의에 맞게 지역별로 대표적인 국지전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에서의 국지전 -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베트남전 추축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패망으로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을 지원함으로써 공산당의 정권 장악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물량 지원에도 불구하고 제2차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1949년 중국 본토를 장악하자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고 패전국 일본을 재건해 아시아의 군사·경제적 거점으로 삼고자 한다. 미국은 한국전쟁(1950-1953)이 발발하자 1951년 서둘러 일본과 안보조약을 맺고 승전국으로서의 배상 취득을 포기하고, 일본의 반성 없는 주권 회복을 인정한다. 이후 미국의 일본을 이용한 중국 봉쇄 정책은 현재 일본의 재무장화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의 전략적 패배와 1949년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은 미국의 냉전적 사고에 더욱 불을 당겨 50년대 초에는 미국 전역을 매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에 휩싸이게 한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을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통치하고자 한다. 앞서 베트남 민족지도자 호치민의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베트남의 민족지도세력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 그들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기대를 품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반제민족해방 세력은 프랑스 식민정부와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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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50년까지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체의 프랑스군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한 분량인 약 30만 정의 소형무기와 기관총, 10억 달러의 군사비를 프랑스에 지원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전쟁 비용 중 약 80%를 부담했다. 하워드 진, 조선혜 옮김, 「베트남전쟁」, 『미국민중저항사2』, 일월서각, 1986, 220쪽 9) CIA의 전신인 OSS의 윌리엄 도노반 국장은 소련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 유럽에서 소련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철학이라는 대단히 강력한 카드를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은 소련만큼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정치적, 사회적 철학이 없다." 10여 년 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도 이와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았으며, 인도차이나 사태가 악화됐을 당시에도 미 정부 당국자들은 같은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노암 촘스키, 오애리, 「남-북, 그리고 동-서」,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2000, 이후, 121쪽에서 재인용. 그리고 이런 불안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의 토지개혁 과정과 쿠바 혁명의 성공이 제3세계 민중들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성있는 시도로 보이는 것 자체를 불안 요소로 여기고 미리 차단하려는 반혁명, 예방혁명 시도로 이어진다. 10)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국내 TV뉴스에서는 영국 BBC방송의 한 프로듀서가 미 국방부 문서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노근리를 포함한 전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조직적 민간인 살상에 대한 명령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소개되고 있었다. 11) 이삼성, 「미국의 세기와 베트남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한길사, 1998, 211~212쪽에서 발췌 인용 12)) 이 말은 1837년 멕시코와의 전쟁에 즈음해서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존 어 설리반(John L. O'Sullivan)이 쓴 신문 사설에서 멕시코는 "앵글로 색슨족의 월등한 기력에 융합되거나 굴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패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긴 말이다. 최웅, 김봉중, 「해외팽창」, 『미국의 역사』, 1997, 조합공동체 소나무, 2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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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민족해방 세력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의 패전으로 독립을 쟁취할 듯이 보였던 베트남은 1954년 프랑스와 제네바 협정을 맺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임시 분할되고 협정에 의거하여 남북베트남간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다. 예상되는 선거 결과는 호치민 정부의 승리9)였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이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CIA를 통해 베트남에서 여러 비밀 공작들을 수행하여 조약을 파기하고, 고딘 디엠 정권이 수립되도록 했다. 고딘 디엠 정권은 태생적 한계와 실정, 부패로 인해 국민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1963년 CIA의 공작에 의한 쿠데타로 제거된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수행한 일련의 정책들은 미국이 다른 제3세계 국가에서 수행한 일련의 정책들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댐과 병원, 학교를 건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전역에서 소모한 폭탄의 2배 이상을 남·북베트남 구분없이 골고루 투하했다.(참고로 남베트남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가 통치했고, 북베트남은 국제법상 독립국가였다.) 이 시기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다이옥신 등 각종 화학무기를 실험한 것은 물론 CIA의 피닉스 공작을 통해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닉슨 대통령 시절에는 북베트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와 시간을 벌기 위해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공급기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미국이 대외에 선전한 것은 낙후되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제3세계의 빈민국가에 문명의 혜택(?)을 전하는 전도사였다. 이런 미국의 교만한 정책은 결국 밀라이(My Lai)10)에서 347명의 민간인을 학살한다. 이런 미국의 군사전략은 피해당사자였던 제3세계 민중은 전세계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67년 버트란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아이작 도이처 등과 같은 세계의 지식인들이 '베트남전쟁범죄에 관한 국제재판소'를 조직해 베트남에서 미국의 행위가 민간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무차별 대량 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side)라는 전쟁범죄를 포함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이 재판소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증언을 청취했고, 베트남 민간인들의 증언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최종적인 평결문에서 당시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가 "(베트남에서)우리는 우리를 방위하고 있다"고 한 말에 주목하며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 목적이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런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허명을 내세워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제노사이드라는 의도적인 무차별 살상 즉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만장일치로 결론지었다.11) 1975년 4월 29일. 베트남 전쟁은 미군 58,000명의 전사자, 153,000명의 부상자를 내며 끝났지만 베트남 민중의 인적·물적 손실은 계량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이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의 교사'를 자청하며 일으킨 결과였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게 된 원류는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발견한 원주민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을 택했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인디언들이 가꾸고 생육하지 못한 땅을 자신들이 문명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와 똑같은 논리로 1848년엔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텍사스, 유타 등 서부 지역을 빼앗았다. 신의 축복을 받은 미국은 세계를 미국식 민주주의로 문명화시키기 위해 계속 팽창해야 하고, 그것은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12)이었다. |
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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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를 하나의 독립된 연방제 국가로 묶고자 노심초사했던 이유는 장차 이 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이런 구상은 영국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분열 정책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20여 개국으로 분열되면서 좌절된다. 1823년 미국의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가리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먼로 독트린은 불간섭주의, 고립주의 정책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을 통해 카리브해 일대의 패권과 필리핀 점령을 통해 태평양에 미국의 팽창 전략의 전진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해로를 찾고자 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장장 1만 5천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페르디낭드 드 레세프였지만 공사는 여러가지 악재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뒤이어 미국이 중단된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하려 했을 때 파나마를 통치하고 있던 콜롬비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의 건설권과 운영권을 차지하고, 이른바 '파나마 운하지대'로 불리는 파나마공화국의 영토 중 5%를 할양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운하의 운영 및 관리는 물론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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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민웅, 「미국의 제3세계 군부훈련학교」, 월간 <말>, 1990년 2월호. 에 의하면 사무엘 헌팅턴, 루시안 파이 등 소위 정치발전론자들은 1960년대 '신군부(new military)'이론을 통해 국가권력형성과정과 경제개발주체로서 제3세계의 군부 엘리트들을 미국이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미국은 여러 곳에 군부훈련학교를 설치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교육하고 있다. 다음은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군부훈련학교들이다. 남부사령부(Southcom)-파나마운하지역 퀘리 하이츠 소재, 중남미의 군부를 관장하고 미군사고문단 파견부터 정보활동의 중앙통합기능을 수행. 미육군전미학교-파나마운하 지역 포트 굴리크 소재, 중남미출신만 관리하며 반게릴라 작전 훈련을 집중적으로 수행, 페루, 볼리비아, 칠레, 파나마의 쿠데타 주역들이 이곳 출신. 케네디군사지원학교-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브랙 소재, 미육군 심리전 학교로 저강도전쟁(대중교란, 반미지도자 제거, 여론조작 등)을 수행하는 전술을 개발과 전수. 민사및 군정학교 -미국 조지아주 포트 고든 소재, 미군사고문단 교육. 미 육군 지휘 및 참모대학-미국 캔사스주의 포트 리벤워드 소재, 제3세계 군부훈련 최고위과정, 1975년 통계를 보면 이곳 출신 중 12명이 대통령 혹은 수상, 112명이 장관이나 대사, 80명이 사령관 그리고 992명이 장성이 되었다. 미8군 특전사-파나마 운하 지역 포트 굴리크 소재, 볼리비아 특전사를 훈련시켜 체 게바라의 게릴라부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웨스트 포인트- 니카라과의 소모사가 웨스트포인트 46년도 졸업생이었다. 국방대학 - 미국 워싱턴 소재, 고급장교의 정치교육 14) 1987년 당시 워싱턴 포스턴지 편집부국장이었던 밥 우드워드의 『장막 - CIA의 비밀전쟁』에 의하면, 82년 레바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레바논 대통령 바시르 제마엘을 비롯해, 엘살바도르의 호세 두아르테 대통령, 도미니카의 유지니아 찰스 총리 등도 CIA에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다고 한다. 15) 카를로스 푸엔테스, 서성철 옮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1997, 까치, 40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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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등장과 때맞추어 1981년 토리에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나마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한 노리에가는 레이건 정권의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CIA의 여러 비밀 공작들 '이란-콘트라 게이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노리에가의 체포 후 월스트리트지의 폭로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이 CIA 국장으로 있던 1976-1977년 매년 11만 달러를 노리에가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을 비롯해서 총 1천 1백만 달러 상당의 돈을 지급해왔다고 한다. 한 나라의 최고 실권자가 미 CIA의 앞잡이14)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 기본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중남미에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식은 해병대와 포함(砲艦)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반미 감정에 의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공개적인 무력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책보다는 CIA를 동원한 비밀 공작에 주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CIA가 개입된 것으로 확인된 라틴 아메리카의 정변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 전복(1954), 쿠바 피그만 침공(1961), 도미니카 공화국 내정 개입(1965),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 니카라과 내전(1981-1983), 엘살바도르 내전(1981-1983) 등 다양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베트남 전쟁 결과 조성된 미국 내 여론 역시 CIA의 비밀활동에 대해 의회의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미국은 CIA와 같은 공식기구가 아니라 그 실체가 좀더 명확하지 않은 일종의 청부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것이 '이란-콘트라 게이트'였다. 니카라과는 1855년 미국의 해적 윌리엄 워커에 의해 처음 침략당한 후, 1909년부터 1934년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의 침략을 당했다. 1934년 민족주의 지도자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암살되었고, 그를 살해한 아우구스타시오 소모사가 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고, 소모사와 그 일족은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타도될 때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다. 소모사 정권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통치를 펼쳤는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 그를 가리켜 "소모사는 개새끼였지만 우리의 개자식이다."15) 말했다. 소모사를 타도하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장악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의 최대 고민거리였지만, 1982년 미국 의회는 니카라과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CIA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CIA는 1984년 니카라과의 항만에 비밀리에 어뢰를 설치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일체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이 시기는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 미국은 니카라과의 반군(콘트라)을 지원할 예산이 봉쇄되자 니카라과 반군은 마약거래를 통해 자금을 마련했고, 미국은 세계 각국에 콘트라를 지원할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요구한다. 게다가 미국은 비밀리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지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미국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룬 것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였다. 탈냉전이 시작되던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리에가에 대한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노리에가가 국제 마약밀매업에 깊숙이 개입해온 것을 두고 미국 내 여론의 비판이 심해졌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민주헌정을 회복하고, 국제마약밀매 혐의자인 노리에가를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명목으로 파나마를 침공했으나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은 1980년대 말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부통치가 종식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힘의 우위에 의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 소모가 커지면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제3세계의 군부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강해지고, 미국 경제의 하락으로 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군부정권의 경제 관리능력이 한계에 달하게 된다. 미국은 민중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저항 세력 가운데 친미적인 개혁 세력을 내세워 문민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재민주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에 저항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미국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일종의 시범 사례로 제거된 것이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노리에가 축출을 지지하면서도 미국의 이런 방식을 비난하고, 국제법상의 '범죄적 행위'로 규정했다. 이는 미국이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귀속되는 파나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유지하겠다는 것과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국제법에 제약받지 않고 강제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했다. 미국의 침공 당시 파나마 민간인 300여명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 미국 언론의 주요 관심사는 국제법 무시로 인한 비난이나 파나마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이 작전에 최초로 실전 참가했던 F-117 스텔스 폭격기의 성능이었다. F-117 스텔스 폭격기는 걸프전 당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공격의 95%를 담당하며 그 성능을 맘껏 뽐내기도 했다. |
중동에서의 국지전 - 석유(Oil)자원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각축, 걸프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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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국경선은 19세기 유럽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한 때는 서구 유럽이 아랍의 독립을 지원한 적이 있다. 우리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유럽(그중에서도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해 아랍의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식민지였던 아랍의 독립을 지원했다. 1915년 아랍의 총독이었던 맥마흔은 전후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1917년 전쟁에서 유태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민족 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것이 발포어 선언이다. 한편 1916년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는데 이것은 전후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해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갖는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이 전통적으로 서구에 대해 갖게되는 반감의 뿌리는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이기는 하나 근대에 이르러서도 지속되는 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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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왕정 역시 이런 서구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민중의 반발에 부딪혀 1958년 압둘 카림 케심 대령이 이끄는 '자유장교'의 군사 쿠데타로 붕괴된다. 군사쿠데타 당시 이라크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이라크 공산당이었다. 이 시기 이란, 이라크를 비롯한 이집트 등에서 개혁 시도는 1차적으로 석유산업의 국유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이라크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나간다.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바트당이었다. 바트당은 1963년 짧은 집권 이후 잠시 실각하기도 했으나 우익 군부와 연대하여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이라크의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주의'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바트당은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이라크에서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이었으나 1973년 쿠르드족 진압을 위해 일시적으로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한 기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철저히 실천에 옮긴 일은 공산당 탄압이었다. |
16) 2000년 3월 17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올브라이트는 미국-이란 협회 연설에서 미국이 1953년 좌파 성향의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미 CIA가 개입한 사실을 인정하고,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편을 드는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 17) 1990년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와 연결된 지역에서 암암리에 원유를 뽑아냈다. 쿠웨이트 침공 일주일 전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 에프릴그라피스는 사담에게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훈령을 받았다. 미국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여러번에 걸쳐 거듭 밝혔다. 그리고 침공 이틀 전 국무차관 존 켈리는 "미국은 쿠웨이트 방위의 감시자가 아니다"라고 하원에서 강조함으로써 사담에게 청신호를 보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이라크는 새로운 국경설정안을 포함해서 여러차례 협상제의를 했으나 어떠한 협상이나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44일간의 단기전에서 이라크 군인 10만 명(그것도 대부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군인들)이 전사했고, 민간인 약 20만 명이 사망해서 모두 30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이에 비해 동맹군은 미군 148명, 영국군 47명을 포함해서 모두 211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마저도 1/3은 미군의 오포 공격으로 인한 것이다. 걸프전 후 국제연합식량기구(FAO)의 1995년 보고서에 의하면 이미 56만명의 이라크 어린이들이 사망했고, 국제보건기구(WHO)는 현재 이라크에서 아이들의 불필요한 죽음이 6분마다 1명꼴로 진행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49년 제네바 협정에는 "어떤 전쟁도 시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대상은 공격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은 이라크의 식량부문과 농경지, 상수도, 댐, 발전소 등 사회 전부문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정문태, 「이라크 꼬마들이 죽어간다」, <한겨레21>, 238호, 1998년 57~58쪽 18) 걸프전쟁에 나타난 미국 언론통제전략의 실상을 연구한 룬 오트슨(Rune Ottoson)에 의하면 미군 당국은 3가지 언론통제전략을 처음부터 구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가능한 언론을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2)동시에 가능한한 오랫동안 취재, 보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3)최대한의 보도 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 미군 당국은 엄밀한 선발과정을 거쳐 미국과 세계에서 특파된 약 192명의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을 몇 그룹으로 나눠 각각 다른 미군기지에 주둔시켰다. 전세계 175,000명의 기자를 대표하는 국제기자연맹(IJF)은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현재 실시하고 있는 기자풀제는 명백한 언론 자유 침해이다. 또한 중요한 정보는 차단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비영국, 비미국 기자들을 차별하고 있다." … 걸프전 당시 세계 방송사에서 방영된 미군에 의한 바그다드 군사시설 정조준 폭격장면이 미군당국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된 방영물이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방송은 이 전쟁에서 미군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이라크 군사기지만 포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라크의 무고한 국민들이 얼마나 미군의 포격에 희생됐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십자사의 조사로는 걸프전으로 이라크의 시민 15~20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김창룡, 「신문의 2001년 미국테러사건보도와 문제점에 관한 연구」, http://www.jabo.co.kr/68th_media_3.htm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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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던 보수왕정을 통해 저유가 시대의 호황을 누리던 세계 경제는 급전직하 곤두박질쳤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의 걸프만 일대의 왕정 국가들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 자본주의는 이란 회교 정권을 제거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고 이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여 이라크를 지원하여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을 일으킨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을 포함한 아랍 왕정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은 이라크에 무기를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8년에 걸친 전쟁이 이들 국가에 남겨준 것은 막대한 사상자와 전쟁 부채였다. 이 전쟁을 가리켜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슬람 내부의 전쟁,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수니파 국가인 이라크의 전쟁으로 표현했으나 이것은 전쟁의 원인을 오도한 것이다. 실제 이라크의 종교 분포는 시아파가 55%, 수니파가 20%, 쿠르드족이 20%로 되어있다. 다만 이라크의 지배 권력인 바트당의 기반이 수니파였고, 급격한 도시화로 농촌에 뿌리를 둔 대다수 시아파 농민들의 삶의 물적 토대가 붕괴되면서 이라크 내에서도 이슬람 민족주의의 움직임이 불어오자 이런 내적 긴장을 외부로 발산한 것이다. 8년간의 소모전이 끝난 뒤에 이란과 이라크에 남은 것은 폐허였지만 민중의 의지를 토대로 수립된 이란의 이슬람 정권은 호메이니의 사후 유연한 정책을 바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의 독재를 강화시키는 일환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다시 들고 나오면서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중동 지역의 국경선은 석유 자원을 탐낸 서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을 부추겨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의 패배로 독립한 이들 국가들은 다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보호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보호국, 독립국을 오가게 된다. 쿠웨이트 역시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오래 전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일한 행정구역상에 속하는 등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지역에서의 석유 자원을 탐낸 영국에 의해 분리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이라크의 후세인은 자신을 아랍민족주의자, 반제국주의자라고 부르며 쿠웨이트 알 사바 왕가를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며 아랍민족주의의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1990년 8월 개전 5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완전히 장악한다. 한동안 미국은 이런 이라크의 영토 확장욕을 비밀리에 부추겼으나17)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미국은 UN을 통해 신속하게 이라크 제재를 결의하고 이라크의 패권주의와 아랍민족주의에 위기를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일부 아랍 국가까지 포함된 33개국의 다국적군을 편성 1991년 1월 17일부터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다. 6주간 지속된 이 작전은 1천여 시간의 공중폭격과 그 뒤 1백 시간의 지상작전을 통해 지상작전 개시 4일 만에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걸프전은 베트남전 이후 실추된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한 전쟁이자 미국이 앞으로 추진할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이 TV 수상기를 통해 안방까지 전쟁의 참상이 생생히 방영된 결과 반전여론이 조성돼 전쟁에서 패했다고 보고, 걸프전 전기간을 통해 언론 보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했다. 또한 이 전쟁은 철저한 하이테크 전쟁으로 이라크 사망자 15만 명에 비해 다국적군 사망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걸프전의 결과로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쿠웨이트의 사바 왕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위축돼 걸프만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명실상부한 의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재산피해는 750억 달러, 전쟁 전 1,000억 달러 이상의 해외자산은 550억달러로 감소했고, 계속되는 다국적군의 주둔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돼 1997년까지 경제성장률은 1%였다. GDP의 12.8%인 35억 달러를 첨단 무기 구입 등 국방예산에 쏟아부으며 전력강화에 힘쓰고 있다. 그들이 구입하는 무기의 대부분이 걸프전을 통해 놀라운 성능을 입증한 미국제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중동 지역에서 긴장이 유지되는 동안 오일달러는 계속해서 무기를 구입하는데 지불될 것이다. |
아프리카 - 서구가 이식한 인종주의 갈등과 UN의 침묵, 르완다 내전(1963-19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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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750만 명 중 50만 명이 희생당했고, 200여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르완다 내전의 뿌리는 1919년 콩고를 거점으로 한 벨기에 군대가 키갈리를 점령하고 위임통치령이 되면서였다. 르완다는 14세기경 북방에서 이주해온 투치족이 후투족을 병합하여 왕국을 세우며 시작되었으나 벨기에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독립을 잃게 된다. 벨기에는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투치족과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르완다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85%)을 고립시키고, 소수 부족인 투치족(14%)을 우대하여 그들을 교육시켜 식민 통치의 말단 관료 집단으로 삼은 것이다. 1925년 벨기에는 통치기본법에 따라 국왕 및 추장에 의한 전통적 지배체제를 인정하면서 식민지 통치체제의 상징적인 상부구조로 삼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프리카에서도 독립국가 건설이 붐을 이루자 1946년부터는 르완다도 벨기에 신탁통치령으로 바뀌게 되었다. 1956년에는 선거제도가 도입되어 지방 평의회가 설치되었지만 1959년 투치족의 왕이 죽자 투치족의 한 부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후투족 지도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했다. 이에 반발한 후투족의 폭동으로 투치족 중심의 므와미 체제가 붕괴되고, 약 8만 명의 투치족이 국외로 떠났고, 마지막 군주 키게리 1세도 망명하였다. 1961년 6월, 유엔 신탁통치 이사회의 감시하에 실시된 주민투표와 총선거에서 후투족 정당인 공화민주운동당이 승리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하였고, 같은 해 10월 벨기에가 이를 승인하였다. 유엔의 신탁통치가 끝나고 1962년 7월 1일 독립을 이룩하고 그레구아르 카이반다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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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르완다 대통령 하비아리마나가 테러 공격에 의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후투족 정권은 다음날부터 소수 종족인 투치족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실시한다. 르완다 정부 방송은 대통령의 암살 배후로 투치족 게릴라들을 지목했고, 후투족 주민들에게 투치족에 대한 보복 공격을 선동했다. 르완다의 정규군을 비롯한 무장 군인들이 4월 한 달이 다 가기 전에 대략 25만 명의 투치족을 학살했다. 이런 대량학살 이전에 투치족 인구는 대략 65만으로 추정되었는데 학살 이후 생존한 투치족은 15만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
16) 이삼성, 「유엔과 미국」, 『세계와 미국』, 2001년, 한길사, 680쪽 17) 이삼성, 「20세기 그 절망의 문명」,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1998, 한길사, 9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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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맺어진 아루샤 휴전협정에 따라 수도 키갈리와 르완다 북부의 군사분계선 북쪽에는 약 2,500명의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있었지만 UN은 대량학살을 저지하지 못했다. 당시 르완다 평화 유지군 사령관이었던 로미오 달래어(Romeo Dallaire) 소장은 대량학살이 발생하기 3개월 전부터 대량학살의 조짐에 대한 경고와 실질적인 지원요청을 UN 안전보장 이사회에 제출해놓고 있었다.16) 그러나 UN을 비롯한 서구와 미국은 르완다에서 제노사이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했다. UN의 평화관련 역할의 핵심은 유엔 사무총장이 지휘하는 사무처가 아니라 안전보장 이사회, 그리고 상임이사국들에 의한 것이었지만 미국은 자신의 국익이 걸리지 않은 곳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시에라리온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손발이 잘려나가고, 어린이들이 병사로 징집당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외면한 채 수수방관했다. 그동안 미국이 주장해오던 인권이나 인도주의의 발로에 의한 국제법을 무시한 수많은 분쟁 개입과 사회주의 혁명의 방지를 위한 예방혁명, 반혁명 시도가 있었음에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UN은 르완다와 시에라리온의 민간인 대량학살에 침묵하고 말았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1991년)의 같은 아프리카 국가였던 소말리아에서 부족 연합체가 관리하는 여러 지역의 군벌들 사이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약 150만 명에 이르는 소말리아인들이 기아에 시달리게 되자 미국은 1992년 12월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안정적 식량보급을 비롯한 구호 및 내전 종식을 위한 소말리아 내 평화유지활동에 들어갔다. 미국의 소말리아 파병은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목으로 실시되었고, 1993년 1월 20일까지 2만 여명의 미군을 투입했다. 그러나 식량수송 루트를 개척한 미군은 평화유지군에 대한 도발과 군벌 해체라는 명목으로 소말리아의 3대 군벌 중 하나인 아이디드를 체포하려고 시도했지만 군벌 해체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르완다와 시에라리온에는 없지만 소말리아에는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당시 소말리아에는 미국계 석유회사 네 곳이 석유 시추 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개입은 경제·안보전략적 가치가 현저히 적다고 판단되어 1994년 3월까지 미군과 다국적군은 소말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3대 군벌간에는 정전이 합의되었으나 부족에 기초한 파벌간의 대립과 긴장은 미해결 상태로 남게되었다. 벨기에의 한 역사학자는 자신들이 식민 통치하며 뿌려 두었던 이 후투족과 투치족의 부족간 갈등을 두고 "이것은 좋은 녀석들(good guys)과 나쁜 녀석들(bad guys)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다같이 나쁜 녀석들의 싸움이다" 17)라고 말했다. |
유럽 - 미국의 새로운 세계질서, 세계화와 코소보(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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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세기말 세계는 르완다와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라는 문명의 야만을 경험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이런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 침묵으로 방관했다. 그리고 1998년 코소보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인종청소가 벌어지고 있다는 징후가 보이자 1999년 3월 말 미국은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동원해 78일간 3만6천 회의 강력한 공습을 단행했다. 코소보 사태는 20세기말 국제 사회가 처한 새로운 질서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코소보 지역은 원래 세르비아 왕국의 근거지였으나 14세기 경 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이슬람계인 알바니아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현재는 이들이 90%(1백80만명)를 차지하고 있다. 20세기 초 터키의 지배가 끝나자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영토로 통합되었지만 코소보인들은 신유고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원했다. 1998년 3월 초 코소보해방군(KLA)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코소보 내전은 공격당한 세르비아 경찰이 즉각 반격에 나서고, 반군 거점 지역에서 약탈, 강간, 민간인 학살 등이 발생하면서 확대되었다. 이어 세르비아가 5월부터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하자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군을 피해 산악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6월 들어 코소보 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하고 나토 병력을 주변에 배치, 세르비아군의 병력철수 및 잔혹한 인종청소의 중단을 촉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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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는 탈냉전의 움직임 속에서 소련의 해체보다 먼저 해체되기 시작해서 소련의 해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해체되었다. 유고연방은 탈냉전,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1980년대 국제금융시장의 고금리와 험난한 교역조건 때문에 막대한 채무를 안게 되었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유고연방에 대해 IMF는 구제금융을 신청한 대개의 국가들에게 요구한 긴축 재정과 사회 각 산업 분야에 대한 개방을 요구했다. IMF식 긴축재정은 유고 경제를 핍폐하게 만들었고, 유고연방이 거둬들인 세수입조차 서방채권단에 대한 의무이행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 지방재정은 더욱 황폐화되었다. IMF와 세계은행의 요구대로 개혁에 임했으나 결과는 유고연방 내의 수백 개 기업이 도산하면서 엄청난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유고연방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급류에 휘말려들며 혼란에 빠져들었고, 보스니아 사태에 개입했으나 서방의 공세에 밀려나고 말았다. 보스니아 사태로 인해 유고연방은 서방측의 경제 제재를 받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유고연방이 택할 수 있는 정책은 고립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를 활용하면서 서방의 경제 제재를 견뎌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유고연방의 밀로세비치가 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가 유고연방에 나토의 공습을 방어할 대공무기 제공을 거부하였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세르비아에 원유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모스크바의 협박 때문이었다.19) |
18) 기무라 히데스케, 이윤희 옮김, 「다극화된 세계정치와 격화된 민족분쟁」, 『20세기 세계사』, 1997년, 가람기획, 288쪽 19) 타리크 알리 외,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 『전쟁이 끝난 후』, 이후, 2000년, 11쪽 20) 이종태, 최전승민, <죽음의 수용소는 없었다>, 단독입수/보스니아 학살 조작 폭로한 비디오테이프, <말>, 2002년 2월호, 178~183쪽 21) 레지 드브레,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옮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 여행객의 공개서한」, 『전쟁이 끝난 후』, 2000년, 이후, 33~4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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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르비아인들은 세기말에 갑자기 나타난 나치 집단이었고, 밀로세비치는 히틀러의 재래였던가?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1992년 8월 영국의 뉴스 전문 방송국 ITN이 방영한 '죽음의 수용소'라는 다큐멘터리는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에 세운 수용소에 이슬람계 주민들을 가둬놓고 대대적인 사형, 고문, 강간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말>지 2002년 2월호 기사는 <죽음의 수용소는 없었다>고 한다.20) 또한 코소보 현지를 실제 답사한 레지 드브레 (미테랑)대통령 자문위원 또한 1999년 3월 24일로부터 첫 사흘간의 대폭격 동안에는 방화, 약탈, 살인 등이 일어났으나 그 후로는 반인륜적인 범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21) 그렇다면 한 민족 전체를 인종청소라는 야만적인 범죄자로 간주하도록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나토와 미국은 어째서 신유고연방을 그토록 무참하게 폭격한 것일까? 신유고연방은 NATO를 근간으로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고수하고자 했던 미국에 저항했으며 IMF와 세계은행을 통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다. 우리는 앞서 미국이 개입한 국지전의 여러 사례들을 보아왔다. 미국이 개입하는 전쟁은 전통적으로 인도주의적인 명분보다는 국가 이익을 우선했다. 인종청소를 중지시키기 위해 동원된 나토 동맹국 소속의 터키 공군기가 세르비아 영토를 폭격하는 동안에도 터키에서는 쿠르드족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었다. 앞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는 비록 주권국가라고 할지라도 서방의 이익에 배타적인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 국가의 민간인들조차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이 전쟁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패권질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한 약소국이 자행하는 테러에 대해 좀더 강한 패권국가가 자행하는 패권 테러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침묵했으며 오히려 이에 동조했다. 냉전종식으로 이제 유일한 세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선택한 21세기의 세계질서였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민주적 시장질서의 세계적 확산'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어떤 장애도 기꺼이 넘어서 줄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나토에 속해있는 국가들이 지출한 군사예산을 다 합친 것보다 30%가 많은 군사예산을 사용하고 있다. 유럽의 좌파정권들이 러시아를 포함할지도 모를 새로운 유럽 방위기구 논의를 지속하는 가운데 미국은 탈냉전으로 적을 잃은 나토에게 새로운 적을 찾아주었다. 나토의 유고공습을 통한 최대의 수혜자는 코소보 난민들이었을까? 나토의 공습은 코소보인들에게 고향을 찾아주지도 못했고, 민족 갈등을 해소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수많은 세르비아, 코소보인들에게 살 곳과 의료 체계, 전력, 식료품을 빼앗았을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것은 나토의 공습 이후 미국의 경제가 전례없는 호황 속에 방산업체들의 주식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2001년 12월 30일자 연합뉴스 런던발 소식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일단락 지은 미국이 다음 목표로 선정한 이라크 전면공격 계획이 크루즈 미사일 부족으로 혼란에 빠졌다는 것인데, 원인은 지난 1998년 아프가니스탄과 수단, 코소보에 대한 공격으로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 비축량이 거의 바닥나 이제 크루즈 미사일 재고량이 30기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대당 가격이 18억 원 정도 하는 이 미사일을 생산하는 보잉사는 군수뇌부의 독려를 받으며 신속한 생산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미국의 승리와 불량국가들, 그리고 평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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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몰락하는 유럽에서 시도된 여러 안간힘(제국주의와 군국주의)들을 극복 혹은 계승하고, 냉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무엇보다 미국의 탁월한(?) 정치지도자들의 비전과 막강한 국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처 회복되지 못한 소련의 국력을 치열한 군비경쟁을 통해 소모시키고 결과적으로 냉전 체제에서 탈락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많은 약소국들이 열강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했으며 많은 나라들이 사회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거나 혁명을 시도하였으나 현재 세계는 미국의 새로운 패권 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나라들은 아직도 미국으로부터 불량국가(Rogue States)의 낙인이 찍혀있는 상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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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이반 일리치, <녹색평론>(통권 62호), 2002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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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는 평화라는 개념이 각 시대와 문화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평화는 세계의 중심부 사람들에게는 "평화의 유지"로, 주변부 사람들은 그저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바라는 것만큼 다른 것이다. 유태의 천사는 유태인에게 '샬롬'이라고 말하지, '팍스'라는 라틴어로 인사하지 않는 것처럼 유태의 평화는 로마인의 평화처럼 로마 보병군단의 군기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성전과 전통 속에 삶을 유지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라는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이 평화는 내용상 서로 상이하게 다른 것이며,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 할지라도 같은 평화가 아니다.22) 할리우드의 어떤 영화에서처럼 미인대회에 출연한 모든 미인들이 웃으며 자신의 꿈은 "세계 평화(World Peace)"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비참함에 몸을 뒹굴며 "제발, 우리 이대로 살아가게 해주세요." 라고 절규하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평화는 이식(移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 국가의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 다른 지역의 평화가 파괴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는 아닐 것이다. "한 개인에 의한 다른 개인의 착취가 폐기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한 국민에 의한 다른 국민의 착취도 폐기될 것"을 실험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세기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의 트루먼 독트린처럼 서로 다른 삶의 양식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제한다. 그것은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질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미래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지난 세기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기에도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