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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품바 어원
<어원1>
품바가 처음으로 기록된 문헌은 신재효의 한국판소리 전집 중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
이다. 이에 의하면 품바란 타령의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소리라 하여 조선 말기까지
'입장고'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시절에
이르기까지는 '입으로 뀌는 방귀'라 하여 '입방귀'라는 의미로 일반화되었고,
현재는 장터나 길거리로 돌아다니면서 동냥하는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로 일반화되었다.
품바란 민초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쌓였던 울분과 억울함, 그리고 그들에 대한 멸시나 학대 등
이 한숨으로 뿜어져 나오는 한이 깃든 소리로 여겨진다. 예로부터 가난한 자, 역모에 몰린 자,
소외된 자 등 피지배계급에 있는 자들이 걸인행세를 많이 해왔는데,
그들은 부정으로 치부한 자, 아첨하여 관직에 오른 자, 기회주의자, 매국노 등의 문전에서
'방귀나 처먹어라! 이 더러운 놈들아!'라는 의미로 입방귀를 뀌어 현실에 대한 한과 울분을
표출했다.
또한 품바란 가진 것 없는 허(虛), 텅 빈 상태인 공(空), 도를 깨달은 상태에서의 겸허함을
의미한다고 하며, 구걸할 때 '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예, 왔습니다. 한 푼 보태주시오. 타령 들어갑니다.' 등의 쑥스러운 말 대신 썼다고들 한다.
또 한자의 '품(稟)'자에서 연유되어 '주다', '받다'의 의미도 있다. 또 다른 의미로 품앗이, 품삯
등에 쓰이는, 일하는 데 드는 수고의 의미인 '품'에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품바에 함축된
의미는 '사랑을 베푼 자만이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며, 타령이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날 때는
반드시 '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렸다.
<어원2>
각설이
각설이라 함은 장타령꾼을 낮게 잡아 이루는 말로 각설이 패거리에서는 장타령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각설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물리칠 각 (却)을 쓰기도 하고
깨달을 각 (覺)을 쓰기도 한다.
사전에는 물리칠 각으로 되어 있지만, 어원이나 유래에서는 깨달을 각을 썼다.
먼저 유래를 살펴보면 각설이의 기원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자,
당시 지배계층은 떠돌이 나그네가 되어 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지로 변장하거나
정신병자 혹은 병신으로 위장하여 걸인 행각을 하였다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세조실록에 1456년 직제학 눌제 양성지(1415~1482)는 상소를 통해
악기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엄히 금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각설이가 기록된 문헌은 송순(1493~1583)이 지었다는 타령과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낙향하면서 걸인 행각 중 불렀다는 천자풀이 등이 전하며,
신재효(1812-1884, 전북 고창)의 변강쇠에게서도 품바의 뜻이 '입장고'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 승려들은 승복을 입고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으므로 각설이는 조선불교의
조직체계인 향도의 거사걸립패를 중심으로 결성된 패거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불법화된 조선불교가 포교대상인 백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백성이 모이는
시장밖에 없었다. 이들은 승복을 벗고 민간 복장으로 일반인의 말로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염불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염불을 외고 후반에는 양반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가락과 춤으로 흥을 돋우는 방식이었지만 점차 염불은 노래 속으로 스며들었고, 차츰 농요의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이는 남부지방의 선소리인 ‘보렴’, ‘화초사거리’ 등의 노랫말이 거사 사당패들이 부르던 염불의
특성과 유사하다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완도와 진도 등 남도의 도서연안지역에서 구전되고
있는 품바타령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걸립패의 출발도 불교집단이었다. 수행에 전념하는 이판승과 역할을 나누었던 사판승들은
서당걸립패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시주를 독려하며 고사염불 기원을 했는데
이는 고사소리를 하는 판소리 광대들을 비나리꾼으로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런 가락들은 회심곡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현대의 사물놀이패의 ‘비나리’는 걸립패의
‘뒷염불’ 중 ‘평염불’, ‘덕담’, ‘반맥이’, ‘오조염불’ 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련사와 원각사, 청룡사 등이 사당패들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각설이(覺說理)는 ‘깨달음을 전하는 말’이라는 불교용어이며 동냥도 ‘승려들의 탁발행위’를
일컫는 말인데 유학자들이 이를 거지들의 구걸행위로 의도적으로 낮추어 물리칠 각(却)을 써서
却說이라 부르고 동냥이라 한 것이다. 백과사전에서는 동냥을 풀이하기를 탁발을 나가는
스님들이 동령(動鈴)을 들고 흔들기도 하였는데, 그 동령에서 파생된 말이 동냥이라고 하였다.
품바의 춤은 대안대사의 동발무나 혜공대사의 부궤무, 원효대사의 무애무 등이 그랬듯이 자유
스럽고 호방한 형식이었다. 품바의 악기는 지금처럼 사물을 사용했다가 보다는 스님들이 사용
했던 놋쇠로 만든 탁발그릇이나 박 바가지 등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각설이는 일제 강점기 때 나름대로 조직적으로 일본 왜경에 대항하였다. 장터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을 때 구걸을 하는 척하며 품바 노래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일본에 주눅이 들지 말고 저항할 것을 촉구하였다.
각설이가 왜경에 대항한 것은 소위 호국 3부경(三部經)이라는〈법화경 法華經, 금광명경 金鑛明
經〉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등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불법은 국가 민족의 복리(福利)를
기원하는 교법으로서 만약에 국난이 일어나면 호국의 의무행위로서 칼을 들고 총궐기해야
한다."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승려가 군사로 출전하는 것을 허용했기에 임진왜란 때에도
서산대사나 사명당 같은 승려가 왜적과 크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왜경의 지속된 탄압 때문에
각설이는 일본 강점기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해방되자 다시 나타났다.
각설이 타령이 가장 활발히 불리고 알려진 시대는 해방 직후로부터 6.25와 자유당 시절로서
전국적으로 퍼져 그중 지각 있는 각설이들은 자유당 독재의 행각을 각설이 타령으로
풍자하기도 했다.
각설이의 상징처럼 보이는 찌그러진 깡통은 6. 25 이후 등장한 것으로 보면 된다.
공화당 때는 독재에 항거할 것을 염려해서인지 1968년, 법으로 걸인 행각을 금지하면서
또다시 전국에서 각설이가 사라져야 했다.
품바타령의 원래 명칭은 각설이타령이고 지금 품바타령으로 통칭한 이유는 1982년 연극
<품바>의 공연 이후 품바라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원래 각설이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좋은 의미에서 시작했으며, 나라가 어수선하면 각설이가 나타나 백성의 마음 깊숙한 곳에 쌓인
울분과 억울함, 그리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등 피지배 계층에 있는 사람을 대변하여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백성을 억압하는 지배층에게 "입으로 뀌는 방귀"라 하여
"입방귀"를 풀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부 몰지각한 엿장수나 품바꾼들은 각설이의 본질을 모르고 각설이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음담패설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돈벌이로 이용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답게
승계하여야 할 소중한 문화가 물질 만능주의 탓에 그 뜻이 우습게 변질해가고 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중국이 아리랑을 자기네 무형문화재로 등재하듯이
각설이 역시 어쩌면 중국 문화의 일부분으로 기록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원3>
품바란 각설이타령의 후렴구에 사용되는 일종의 장단 구실을 하는 의성어로 전해왔으나
현재는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로 일반화되었다.
품바란 낱말이 처음 기록된 문헌은 신재효의 한국 판소리 전집 중 '변강쇠歌'이다.
여기에서 보면 품바란, 타령의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소리라 하여 '입장고'라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이조 말기까지는 이런 의미로 통했을 것이다.
그 후 일제, 해방, 자유당, 공화당 시절에 이르기까지는 '입방귀'라는 말이 널리 일반화되었는데
그것은 '입으로 뀌는 방귀'라는 뜻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피지배계급(가난한 자, 역모에 몰린 자, 관을 피하여 다니는 자, 지배계급에
불만을 품고 다니는 자, 소외된 자 등)에 있는 자들이 걸인 행세를 많이 하였는데
그들은 부정으로 치부한 자, 아부 아첨하여 관직에 오른 자, 기회주의자, 매국노 등의 문전에서
"방귀나 처먹어라 이 더러운 놈들아!"라는 의미로 입방귀를 뀌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恨)과 울분을 표출했다 한다.
또한 품바란 가진 게 없는 허(虛), 텅 빈 상태인 공(空), 그것도 득도의 상태에서의 겸허함을
의미한다고 전하며 구걸할 때 '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예, 왔습니다. 한푼 보태주시오.
타령 들어갑니다." 등의 쑥스러운 말 대신 썼다고들 한다.
또, 품바란 한자의 '품(稟)'자에서 연유되어 '주다', '받다'의 의미도 있다.
또 달리 '품'이란 품(일하는 데 드는 수고나 힘), 품앗이, 품삯 등에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허나, 전해 내려오면서 명칭의 변화는 있었지만 거기에 함축된 의미가 "사랑을 베푼 자만이
희망을 가진다"라는 말로 변해왔으며, 이 노래(타령)만은 처음 시작할 때와 끝났을 때
반드시 '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렸던 것이 다른 노래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이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한다.
<어원4>
1. 각설이란?
깨우칠 "각" 말씀 "설" 사람을 뜻하는 "이". 옛날 선비가 세상이 어지러워 팔도를 유랑하면서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각 고을에 행사, 대가 집 경사에 참여해서 불렀던 노래나 시 글귀 등이
다. 현재 부곡 온천제(각설이 경연대회), 충북음성품바축제 등이 있으며 각 지방자치 단체의
후원을 받아 지방 축제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각설이의 어원은 각설(却說)이라는 한자에서 찾을 수 있다. 각설이라는 말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몇 가지의 다른 방언 형태를 지니다. 각서리(전국), 각설히(충북), 각써리(전국)
등으로 발음되나 모두 각설이를 기본으로 한다.
또한 현장 조사에서 "각설하다"하면 각설이타령을 부르면서 구걸한다는 뜻으로 쓰임임을
확인했다. "이야기를 전개시키자면"이란 뜻으로 소설에서 널리 쓰이게 되면서 이 용어가
대중에 널리 퍼지게 되었을 것이며 소설을 낭독(朗讀)할 때는 한 단락의 화제가 전개되다가
"각설하고" 하면서 다음으로 넘어 가게 되며, 실제로 각설이들이 구걸 행위 중에 사용할 때는
타령을 부르고 난 후 '각설하고'라는 말을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고는 동냥을 청하게 된다.
각설이가 구걸의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의 형태라 볼 때
그 기원은 걸인의 기원에서부터 분화되어 왔다고 유추할 수 있다.
품바란 가진 게 없는 허(虛), 텅 빈 상태인 공(空), 그것도 득도의 상태에서의 겸허함을
의미한다고 전하며 구걸할 때 '품바'라는 소리를 내어 "예, 왔습니다. 한푼 보태주시오.
타령 들어갑니다." 등의 쑥스러운 말 대신 썼다고들 한다. 품바란 각설이타령의 후렴구에
사용되는 일종의 장단 구실을 하는 의성어로 전해왔으나 현재는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로
일반화되었다.
각설이의 모습을 살펴보자. 닥치는 대로 얻어 입기 때문에 각설이들의 복장에 특정한 유니폼이
있을 리가 없다. 걸망을 짊어지고 끈을 멘 깡통이나 바가지를 들며 얼굴에는 일부러 검댕이를
칠하여 일부러 지저분하고 불쌍하게 보이게 하고 날씨가 춥지 않은 한, 바지를 걷어 올려 많이
드러내어 활동을 편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궁기(窮氣)를 과장하기도 한다.
머리에는 수건을 동여매기가 보통인데 이는 '베데기' 혹은 '패데기'라고 해서 머리에
서너 번 감아 멘다. 간혹 모자가 생겨서 쓸 때는 푹 눌러서 귀를 완전히 덮고
눈썹까지 가리는데 그들의 말로 '하시기'라고 한다.
2. 각설이 타령의 기원
각설이 타령이 언제부터 전래되었는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자 당시 지배계층은 떠돌이 나그네가 되어 거지로 변장하거나
혹은 정신병자나 병신으로 위장하여 걸인 행각을, 문인 계통은 광대로, 무인 계통은 백정,
줄타기 등등의 재인(才人)으로 전락하여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허나 구전되어 오던 타령이 문자로 정착한 것은 이조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조선 말기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1812~1884)의 변강쇠가에서 품바의 뜻이 '입장고'라 기록되었고,
송순(1493~1583)이 지었다는 타령과,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이조시대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낙향하면서 걸인 행각 중 불렀다는 천자풀이 등이 전한다.
그러나 각설이 타령이 가장 활발히 불리어지고 알려진 시대는 해방 직후로부터 6.25와 자유당
시절로서 전국적으로 퍼져 불려졌으나 공화당 때인 1968년, 법으로 걸인 행각을 금지시키면서
부터 전국에서는 각설이타령이 한동안 사라지는 듯했다.
품바타령의 원래 명칭은 각설이타령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품바타령으로 통칭된 연유는
1982년 연극 <품바>의 공연 이후 테이프, 레코드 등을 통해서 전국에 확산되어
급격히 불리어지기 시작하면서 널리 일반화되었다.
요즈음 어디를 가나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연희 패거리들은 바로 각종 타악기를 두드리며
신나게 장단을 몰아치는 난타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헤진 모자를 쓰고 얼굴에 칠을 하고
나타나는 각설이패(혹은 품바)들이다. 그 중 장바닥에서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역시 각설이패다.
사실 각설이패들은 걸인집단이 아니다. 각설이는 구한말 유랑집단들의 한 유파다.
각설이가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누더기 옷을 입고 깡통을 들고 동냥을 다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연희 후에 받는 동냥이 아니면
일체 받지를 않았다. 오죽하면 육당 최남선조차 수표교 밑의 각설이들을 보고
‘대단한 예인집단’이라고 칭찬을 했을까?
<어원5>
구한말 유랑집단의 한 패거리인 각설이패
구한말 한창 정세가 어두웠다. 사람들은 날마다 먹고 산다는 것에 전전긍긍하던 시기였다.
이 때를 맞아 전국적으로 많은 예인집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집단으로 구성된 남사당패였다. 남사당보다 먼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당패는
술동이를 남정네 등에 지워 술을 팔고 다니는 사당패였을 것이다.
이들 사당패들이 있어 ‘남사당’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말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유랑집단들이 생겨났다. 주로 절의 중창을 목적으로 절에서 내준 신표를
갖고 다니면서 걸립을 하는 절걸립패로부터, 중매구패, 솟대쟁이패 등 다양한 패거리들이
전국을 누볐다. 유랑집단들이 전국의 장거리나 사대부가를 누비면서 기예를 파는 것에 비해.
각설이패는 주로 정해진 정거리에서 소리를 팔아 연명을 했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백제멸망 후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걸인집단
각설이패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자, 당시 지배계층은 떠돌이 나그네가 되어 거지로 변장하거나
혹은 정신병자나 병신으로 위장하여 걸인 행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 문인 계통은 광대로,
무인 계통은 백정이나 줄타기 등을 하는 재인(才人)으로 전락하여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설은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각설이들이 부르는 소리는, 구전되어 오던 타령이 문자로
정착한 것은 조선조 때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조선 말기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1812∼1884)의 변강쇠가에서 품바의 뜻이 ‘입장고’라 기록되어있고,
송순(1493∼1583)이 지었다는 타령과,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에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낙향하면서 걸인 행각 중 불렀다는 천자풀이 등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고대소설이나 신재효 판소리집, 강령탈춤, 가산오광대 등에서 각설이타령이 등장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들이 부르는 각설이타령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많은 유형의 소리가 전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각설이패의 역사는 구한 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허 이놈이 이래도 정승 판서의 자제로
팔도 감사를 마다하고 돈 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왔네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품바하고도 잘한다
앉은고리는 돈고리 선고리는 문고리 뛰는고리는 개고리
나는고리는 꾀꼬리 달린고리는 저고리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각설이타령’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어
각설이들이 부르는 각설이타령은 ‘장타령’이라고도 한다. 장타령이라는 어원은 ‘장(場)’을
쫓아다니며 소리를 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1에서부터 시작한 노래가 장(10, 열)으로
끝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각설이 타령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장타령으로 구분하는데 그 중 장(場)타령은
“떠르르르르르르 돌아왔소. 각설이가 먹설이라 동설이를 짊어지고 똘똘 몰아서 장타령……”
대부분 이렇게 시작되며, “1자에 한자나 들고나 봐..”로 시작하는 것은 숫자 장(=십)의
장타령이 된다. 즉 그 사설의 종류에 따라 유형이 구분이 되는 것이다.
<어원6>
覺說理 타령
어 허 ~~~ 시구 시구
( 於虛 ) ~~ (矢口 矢口)
“어“ 어조사 어 로서 ”허“를 보조해주는 소리이며 ”허“는 텅 비어있다는 말.
“시”와 “구” 가 합해져서 알“지(知) 字가 된다.
욕심이 없는 텅 빈 마음이 앎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는
생각과 마음의 세계는 소멸하지 않고 윤회하며 해를 거듭하며 소생한다는 뜻.
한편, "리" 는 "이" 도 되는데 사람의 호격으로 사용되는 "이" 로도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젊은 "이" 어린"이" 사나"이" 등....
<또 다른 의미의 얼시구 절시구 의미 >
얼 시구 시구 (乙 矢口 矢口)
乙 “을”(=봉황새 불멸의 영물을 의미)
矢口 矢口 (알 知자; 알라는 뜻)
切 矢口 矢口 (끊을 “절” 시구 시구 ) 세상의 탐욕을 끊고 진리를 알아라.
節 矢口 矢口 (절 시구 시구 ) 절기의 절字 . 즉, 때를 알라.
흥을 돋구기 위해 읊어대는 각설이타령의 시작은 모름지기 세상을 달관한
그 당시의 지도자급 인사가 몰락 또는 안빈락도의 길을 택하며 해박한 지식에
일상의 음가를 빌어 해학적으로 소리를 했던 것이 그 시작일 것으로 추측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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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타령 (품바 타령)
얼-씨구씨구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일 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일편단심 먹은 마음 죽으면 죽었지 못 잊겠네
둘에 이 자나 들고나 보니
수중 백로 백구 떼가 벌을 찾아서 날아든다
삼 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삼월이라 삼짇날에 제비 한 쌍이 날아든다
넷에 사 자나 들고나 보니
사월이라 초파일에 관등불도 밝혔구나
다섯에 오 자나 들고나 보니
오월이라 단옷날에 처녀 총각 한데 모아 추천 놀이가 좋을 씨고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여섯에 육 자나 들고나 보니
유월이라 유두날에 탁주 놀이가 좋을 씨고
칠 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칠월이라 칠석날에 견우 직녀가 좋을 씨고
여덟에 팔 자나 들고나 보니
팔월이라 한가위에 보름달이 좋을 씨고
구 자나 한 장을 들고나 보니
구월이라 구일 날에 국화주가 좋을 씨고
남았네 남았네 십 자 한 장이 남았구나
십 리 백 리 가는 길에 정든 님을 만났구나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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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 타령 (자진모리)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여름바지는 솜바지 겨울바지는 홑바지
당신본께로 반갑소 내꼬라지 본께로 서럽소
주머니가 비어서 서럽소 곱창이 비어서 서럽소
일자나 한자나 들어나 보오소 일자리 없어서 굶어 죽을 판
이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이판사판 사까다지판
삼자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삼일빌딩 호화판
사자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사짜기짜 잘 살판
오자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오적들이 난장판
육자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육씨문중에 장설판
칠자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칠전 몽둥이에 불이날판
팔자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팔자 타령이 절로날판
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구세주가 와야할판
십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오소 십원짜리 하나가 아쉬울판
밥은 바빠서 못먹고 떡은 떫어서 못먹소
죽은 죽어도 못먹소 술은 술이술이 잘넘어간다
어허이 품바가 잘도헌다
( 어허이 품바가 잘도헌다)
품바허고 잘도헌다
( 품바허고 잘도헌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소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품바허고 잘도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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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혼> 사과
여러 개를 복사하여 옮기다 보니 복사 위치가 잘못되어 헤깔려 버렸습니다.
늘 못난 빙혼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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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연양식의 특징
첫 번째로 악?가?무에 재담까지 곁들인 한국 전통연희 특징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연희장소와 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있지 않다.
그들은 전부터 음식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가 구걸을 하였다.
세 번째로 연희자와 청중간의 거리가 가깝다.
네 번째로, 우리의 문학처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恨)과 울분을 토해내고,
야유, 풍자, 해학, 허무, 영탄들을 웃음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현재의 각설이 타령의 연희모습은 주로 지방축제나 회갑연이나 각종 행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사전 공연으로 연희되고 있다.
5. 맺음말
각설이타령이 구걸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형태로 볼 때, 그 기원을 걸인에 둘 수 있다.
신세한탄과 울분, 한을 토해내는 각설이타령은 ‘품바’라는 의성어로 그 시작과 끝을 알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품바는 현재 ‘각설이’를 뜻하는 대명사로 변했다.
각설이타령은 내용과 형식에 따라 장타령과 각설이타령으로 나누어지며, 기본 틀 안에서
그 내용과 장단, 빠르기 등을 자유자재로 그 상황에 맞게 변형시킬 수 있다.
이러한 각설이타령은 전통연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현재는 각종 축제나 기념행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사전공연으로 많이 연희되고 있다. 개성 있는 차림새와 악기, 도구들로
주목을 받으며 사물놀이의 악기나 쓰레기통, 드럼통 같은 도구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각설이타령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으로는 체계적으로 전승하고 그것을 배우고 접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이 늘어나야 한다.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미디어매체를 통한
기록과 데이터베이스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사전공연, 하이라이트 공연도 좋지만
그들만의 공연을 다양하게 관람할 수 있는 독자적인 공연이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어원8>
장타령(場打令/일명 각설이 타령)에도 “얼씨구절씨구”가 나온다.
얼은 보이지 않는 넋과 보이는 씨
넋은 마음을 통제하는 기력(氣力), 정신, 혼백(魂魄),
씨는 싹을 내는 종자(種子), 동물을 생기게 하는 정자(精子)다.
얼씨구는 씨 뿌림의 환희(歡喜)다.
절구 공이(杵)로 떡메질함의 율동이요 가락(旋律)이다.
절씨구는 얼 또는 씨가 잘 익었음을 만족하는 감탄사다.
절구(臼)에서 떡메를 받고 거두어들임의 율동/선율이다.
이처럼 얼씨구/절씨구는 단순한 감탄사나 추임새가 아니다.
얼싸 좋네ㆍ얼리다.
어원(語源) 상으로는 기분교접(氣分交接)이다.
“얼싸(精射)”는 얼(精)을 쌈(射)/정액을 주입함이다.
“얼싸 좋네!”는 사정(射精) 순간의 희열표출 감탄사다.
“얼리다”는 얽히다. 어울리다. 한데 섞이어 조화됨이다.
“어우르다”는 여럿이 모여 한 덩어리가 되다. 한 판을 이룸이다.
수컷이 암컷을 회유하여 교접함이다.
고전소설 진서(眞書) 원전(原典)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형식은 운(韻)을 맞춘 율시(律詩) 선율(旋律)이다.
춘향뎐 변장한 암행어사의 칠언시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인의 피땀이요
옥반가효만성고(玉搬佳酵萬成膏) 옥반의 좋은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낙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촛농 떨어질 때 백성눈물 흘러내리고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 또한 높도다
내용은 서민의 욕구분출용 음담(淫談)/도색(桃色) 풍자(諷刺)다.
춘향가
“이도령이 춘향이를 얼누는디
춘향이의 치마를 밧기고 고쟁이를 밧기고 ....
이번에는 춘향이가 이도령을 업구서 얼누는디(후방위 교접 하는데)
어화둥둥 내사랑아...”
열여섯 선남선녀 이도령과 성춘향은 첫 교접을 동물처럼 후방위로 한다.
서동요(薯童謠)
“서동과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얼눈다.”
언감생심, 신라 공주를 사랑하게 된 백제의 가나한 산골 촌놈 서동이
신분의 장벽을 넘기 위해 아이들에게
유언비어 노래로 소문을 퍼트리게 하여 혼인에 성공한 동화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춘향전/임꺽정전/어우동/변강쇠타령 따위처럼
얼누는 내용이 아주 많은 음담(淫談)물이라 할 수 있다.
▲ 활쏘기 관련설도 한다.
-얼씨구(~ 知口) : 얼(넋/정신/혼)을 담은 화살을 쏨.
-절씨구(節知口) : 화살이 과녁에 적중(的中)함.
장타령(場打令) 또는 각설(却說)이 타령
어우렁더우렁, 사람들과 어울려 바쁘게 사는 세상이다.
얼씨구절씨구의 정서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 중 하나가 장타령이다.
▲ 却說 ; 화제를 바꾸어 다른 이야기를 꺼낼 때 앞에 붙이는 접속부사.
후렴(後斂)은 뒤에 오나, 각설은 앞에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