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25.주일오후찬양예배 설교
*본문; 삼상 25:1~8
*제목; 당신에게는 아비가일이 있는가?
1. 삼상24장의 다윗과 삼상25장의 다윗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삼상24장’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상24장’의 사건의 핵심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고백하며 그 옷자락만 자르고 살려줍니다.’
우리라면 이럴 수 있을까요? 아마 절호의 기회,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소리치면서 단박에 사울을 죽이고, 그 왕위를 차지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상25장’에서는 전혀 다른 다윗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남자만 600명이 되었습니다. 식솔들까지 합치면, 아마 족히 1000명을 되었지 싶습니다. 사울의 칼을 피해 다니는 다윗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가장 큰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즘으로 말하면 “자율방범대”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들과 그 가정을 지켜주는 일을 하고, 이를 통한 사례를 받아 공동체를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이 지켜주던 나발의 양떼들의 양털을 깎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농사짓는 자의 수확일과 같은 의미였고, 잔치날이었습니다.
당연히 다윗의 수비대는 이들에게 가서 잔치날 음식을 나누어 먹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은혜를 사그리 무시하고 “나발”이 다윗을 사람들을 모욕합니다. ‘10~11절’입니다.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삼상 25:10~11)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대노하면 나발과 그와 함께 하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겠다고 씩씩대며 그에게 군대를 이끌고 달려갑니다. ‘21~22절’입니다.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삼상 25:21~22)
다윗이 화내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삼상24장의 다윗’과는 너무도 대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22절’의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라는 표현은 “히, 마슈틴 바키르”로 “벽에 오줌 누는 놈들”이라는 히브리의 비속어입니다. 다윗도 그야말로 이성을 잃어버리고, 400명의 군인을 데리고 나발과 그에 속은 모든 남자들을 죽이겠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이렇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던 “다윗”도 이전의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믿음과 이성도 다 놓친 채, 하나님 앞에 이런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떨까요?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귀는 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늘 주님 바라보고, 입으로는 주님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자극에도 무너져 믿음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가 됩니다.
2. 나발과 아비가일
이렇게 다윗은 측면에서 사건을 살펴보았다면, 반대로 나발과 아비가일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살펴봅시다.
그야말로 이름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시는 내 이름이 무엇일까? 너무 궁금해집니다.
“나발”은 “바보”란 의미입니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나발’입니다.
그러나 ‘관계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나발’입니다. 그렇게 다윗의 수비대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그리고 그 열매를 수확하는 털 깎는 날이 되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발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영적 능력’이 나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인줄 모르고 사는 것이 바로 ‘나발’입니다.
우리는 ‘나발’이 아닙니까? 감사할 줄도, 은혜를 은혜인줄도 모르는 나발입니다.
나발의 부인인 “아비가일”은 “기쁨의 원천”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발의 부는 사실 다 아비가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런 자로 살길 원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화나게 하자, 종들은 바로 ‘아비가일’에게 달려가 사정을 고하고, 이를 바로 잡아 줄 것은 간청합니다.
그녀는 즉시 양식을 들고, 다윗을 찾아가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어날 비극을 막아섭니다. 진정 ‘기쁨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23~26절’입니다.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상 25:23~26)
이를 통해 다윗은 폭군에서 다시 예전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였고 ‘나발’의 생명의 지킨 자이지만, 다윗의 길과 영을 지킨 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중에 나발이 죽은 후에,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은 직접 심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38절’입니다.
“38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삼상 25:38)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정은 이를 통해 어두워지고 무너지기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3. 우리에게 ‘아비가일’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의 핵심 질문에 도달합니다.
“우리에게 ‘아비가일’이 있습니까?”
아비가일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물건이 될 수도 있고,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흥분하여 하나님의 의를 그르치고, 자신의 성정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무엇인가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를 마련하시는 영적 순례자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항상 깨어 있지 아니하면, 늘 넘어지는 것이 우리입니다. 항상 귀에는 말씀이, 눈은 하나님을, 입에는 믿음의 단어만 가득 채워가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우리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믿음, 소망, 사랑,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된 순간을 지켜낼 아비가일이 필요합니다. 오늘부터 아비가일(사람,물건,장소 등)을 가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