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일:아랍 카이사레아 3.jpg
카이사레아 유적
등이 있다. 이런 광범위한 건축의 재원은 유대, 사마리아, 갈릴래아 곳곳에 있던 헤로데왕의 직할 토지들의 수입, 키프로스의 구리광산, 사해의 아스팔트, 예리코의 대추야자밭 등이 있었다. 다만 클레오파트라가 사해의 아스팔트와 예리코의 대추야자밭을 탐내서 뺏으려 한 탓에 안토니우스를 의식해서 사해의 아스팔트 채굴권은 분할하고 예리코의 대추야자밭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소유권을 이전하고 이를 헤로데가 임대하는 형식으로 해주었다. 물론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몰락하면서 알짤없이 다시 챙겼지만.
또한 유대에 흉년이 들자 이집트에서 대량의 밀을 수입해 곡물난을 해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헤로데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이다. 당시 예루살렘 대성전은 바빌론 유수때 파괴되었다가 페르시아의 용인으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귀환 이후에 세워진 스룹바벨의 제2성전이었는데 헤로데는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한 규모였던 제2성전을 아예 뜯어고치고 초호화판 스펙타클 성전으로 증축한 것이었다. 당연히 목표는 솔로몬의 제1대성전의 위용 이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헤로데 성전'이라 칭한다. 이는 절대 세 번째 성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2 성전의 증축이었다. 대리석에 벽에는 금을 바르는 등 초호화판으로 유명해서 예수의 제자들도 그 위용에 주눅들었지만 예수는 저거 나중에 다 불타 사라질 거야라고 말하면서 예언한다. [1]
그것도 제 1성전이 붕괴한 날과 똑같은 날짜였다. 심지어 헤로데 왕은 자신의 야심작이 완공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어쨌든 이 초호화판 대신전은 기원전 1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기원후 63년이 되어서야 겨우 공사가 끝났다. 의외로 당시 유대인들은 이 건설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엄청난 세월이 걸린 만큼 백성들을 죽어라 쥐어짜는 것도 물론이었거니와, 워낙 규모가 큰 공사였기 때문에 행여나 도중에 중단되기라도 하면 그나마 있던 신전마저도 잃을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성전은 제1차 유대전쟁이 일어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헤로데 자신의 평생 숙원으로 8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들여 완공한 성전은 아이러니하게도 헤로데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73년 유대전쟁 당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로마군은 로마에 반항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유대인들의 구심점이었던 대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였고 그 안의 보물들을 모조리 긁어갔다. 대성전이 있던 자리엔 이슬람의 성지인 알 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이 들어섰으며 로마군이 유일하게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대성전의 서쪽 벽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훗날 성지가 된 마사다 요새도 그의 작품이며, 대운하 계획도 있었다고. 특히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카이사레아를 항구와 함께 건설했는데, 이 카이사레아는 유대 왕국 멸망후 로마 직할령의 수도(주도)가 되었다. 그는 올림픽과 로마식 원형경기장을 적극 지원했고, 그의 세력은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에 미쳤으며, 이집트와 지역 이권을 배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아나톨리아나 크레타의 유대인의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티오키아, 로도스, 다마스쿠스 등에 온갖 건축물을 지어서 기증하고 올림픽을 후원하기도 하는 등 동방에서 유력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적어도 이런 엄청난 건축공사만 보면 대왕이라는 칭호가 걸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건축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헤로데는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지역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4. 잔혹함[편집]
그러나 헤로데는 대단히 잔혹한 군주이기도 했다. 순수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이두매아)인 혼혈이라는 혈통과, 헤로데 이전까지 유대를 다스리던 유대인 왕가인 하스몬 왕가(마카베오)의 외척(공주 마리암의 남편, 즉 부마) [2]
그나마도 정략결혼으로 전처를 버리고 10대인 마리암과 결혼한 것이었다.
이었다가 왕위를 빼앗은 점 때문에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또 헤로데도 나름대로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의 침공으로 잠시 로마까지 피신했던 나쁜 기억이 있었다. [3]
이 때 그는 최초로 원로원에게 "유대의 왕" 칭호를 받는다.
가장 큰 문제는 그에게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안겨준 왕비 마리암(Mariamne I, 기원전 54 ~ 기원전 29)이었다. 헤로데는 마리암을 사랑했으나 마리암은 하스몬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은지라 도도하기가 이를데 없었고 둘은 부부이긴 했으나 사실상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헤로데와 마리암의 갈등은 폭발하여 마리암은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며, 마리암과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인 알렉산드로스(Alexander, son of Herod, 기원전 35 ~ 기원전 7)와 아리스토불로스 4세(Aristobulus IV, 기원전 31 ~ 기원전 7)와 함께 처형되었다. 헤로데가 이들을 처형한 데에는 이들이 하스몬 왕조의 혈통이 이어지는지라 헤로데 사후에 왕위가 하스몬 계통으로 넘어갈 우려때문이었던 걸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헤로데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했다.
장모 마카비 알렉산드라(Alexandra the Maccabee, ? ~ 기원전 28)는 헤로데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여왕으로 선포했는데 결국 실패하였고 헤로데는 그녀를 재판없이 죽였다.
이후 왕위계승은 첫째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안티파트로스 2세(Antipater the son of Herod the Great, 기원전 46 ~ 기원전 4)가 유력해졌으나 헤로데는 이후 안티파트로스 2세도 아우구스투스의 동의를 구해 처형시켜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헤로데의 아들이 되느니 헤로데의 돼지가 되는 게 낫다. 헤로데는 적어도 돼지는 안 잡아먹을 테니까." [4]
유대교는 후대의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먹지 않는다. 즉 헤로데의 돼지가 되면 잡아먹진 않을테니 살아남을게 아닌가라는 뜻.
라고 헤로데를 비웃었다.
결국 왕위를 계승할만한 왕자는 넷째부인에게서 난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그리고 다섯째 부인에게서 난 헤로데 필립포스 2세 정도였다.
4.1. 죽음[편집]
기원전 4년, 헤로데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말년의 헤로데는 대단한 병의 고통속에서 죽었다고 한다. 헤로데는 자신의 왕위는 아르켈라오스에게 물려주고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래아와 페레아, [5]
현재의 요르단의 요단강 동쪽 계곡.
필립포스에게는 골란 고원과 베타니아, [6]
현재의 이스라엘 알에이자리아(al-Eizariya).
트라코니티스 [7]
현재의 시리아 라자트.
를 물려주었다.
| 기원전 4년 헤로데 사두정치 | |
| 헤로데 아르켈라오스(Ἡρῴδης Ἀρχέλαο, 기원전 23 ~ 서기 18) | |
| 헤로데 안티파스 | |
| 헤로데 필립보 2세(Herod Philip II, 기원전 4 ~ 서기 34) | |
| 살로메 1세(기원전 65 ~ 기원전 10) [8]명목상의 지역 지배이지만 사실상의 리비아 드루실라와 티베리우스의 영지가 되어버린다. |
헤로데에게 질렸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몰래 로마로 사절단을 보내 아우구스투스에게 헤로데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간청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헤로데의 세 아들들은 왕이라는 칭호 대신 통치자(개신교 성서에서는 '분봉왕')라는 칭호만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아르켈라오스는 이 사절단에 가담한 사람들과 그 일가족 3천여 명을 학살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기원후 6년에 유대의 통치자직에서 폐위되고 유대는 시리아 총독의 직할통치령이 된다.
5.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했나?[편집]
파일:유아대학살.jpg
[9]
바로크 미술의 거장 '폴 루벤스(1577~1640)'의 역작이다. 런던 소더비에서 무려 49,506,650 파운드(한화 약 990억 원)에 낙찰됨으로써 유럽의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 한번에 담겨있는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신약성서에는 헤로데가 아기 예수의 탄생과 관련되어 언급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동방에서 유대의 왕이 태어났음을 별을 보고 알게된 동방박사들 [10]
아마도 페르시아의 점성술사들일 것이라고 한다.
이 예루살렘에 와서 태어난 유대의 왕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예루살렘과 헤로데가 발칵 뒤집어졌다.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후손도 아니면서 왕이 된 사람 앞에 다윗의 자손으로 알려진 유대의 왕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니 어안이 벙벙해진 것. [11]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과 그의 자손은 유대 역사에서 유대에 유일하게 통치권을 약속 받은 정통 왕족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헤로데가 대사제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베들레헴임을 안 뒤에 [12]
미가서의 예언.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고 경배하거든 자신에게도 그곳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예물을 바친다. 이후 신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동방박사들에게 헤로데에게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이에 동방박사들은 헤로데를 만나지 않고 돌아가버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동방박사들이 돌아오지 않자 헤로데는 명을 내려서 베들레헴에서 2살 이하의 남자 아기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만
성경에 따르면
이 예언대로 아기 예수는 그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고 베들레헴의 아기들만 죽어났다는 이야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마태 복음서를 제외하고 헤로데의 영아살해를 언급한 외부문헌으로는 (1) BC 1세기/AD 1세기 초반의 유대교 위경인 '모세의 승천'과 (2) 고대 말기의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집대성한 AD 5세기의 문법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리아' 제 2권 4장 11절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흔히 헤로데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바리사이파이기도 했던 요세푸스가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점이 이 사건의 실제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저작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당대 중요했던 사건들도 여럿 있다. 게다가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베들레헴은 도시라기 보다는 마을 수준의 인구를 가진 곳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2살 이하의 유아가 살해되었더라도 그 수는 후대의 과장된 숫자와 달리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며, 요세푸스가 특별히 주목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일 수 있다.
위경 '모세의 승천'은 예언의 형식을 빌어 헤로데 대왕의 폭정을 고발하고 있는데, 헤로데는 특별히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을 죽였던 것처럼" 유대인들을 죽일 것이라고 적는다. 학자들은 이 언급을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의 태어난 남자아기들을 죽인"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언급되는 인물의 연대로 보아) 이 문서의 연대가 AD 1세기 초반이라면, 이 문서는 '마태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헤로데의 영아살해를 다룬 가장 오래된 문건이다.
한편, {사투르날리아} 제 2권에서 마크로비우스는 주로 키케로와 아우구스투스의 일화와 어록을 정리해 옮기고 있는데, 그 4장 11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투스 당시, 행정구역 상 유대아는 시리아의 일부로 여겨졌다. 마크로비우스가 전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은 그리스어로 아들/huios과 돼지/hus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다. 유감스럽게도 마크로비우스가 어떤 소스에서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을 가져온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크로비우스가 기독교도가 아니었고, 또 그때까지의 어느 기독교 교부들도 아우구스투스의 이 발언을 저작 속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원 출처가 기독교 측이었다고 볼 이유는 특별히 없다.
유아학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에서는 헤로데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의 모든 아기들을 학살한 것은 두번째 왕비 미리암과 그에게서 난 두 아들을 죽인 이야기의 변주로 본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이 일을 예레미아서를 인용하면서 라마에서 아이가 죽고 라헬은 위로받기를 거절했다라는 예언이 일어난 것이라 해석하는 점에서 헤로데의 잔혹함과 산고끝에 죽은 야곱의 부인 라헬의 사건을 결합한 것이란 분석이 있다.
6. 평가[편집]
한국 개신교에서는 헤롯이라 번역되어 불리며 기독교계에선 폭군으로 묘사하고 예수를 죽이려든 악마같이 대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에선 대왕이라고 칭송된다. 그러다보니 신약 성경으로 헤로데 대왕을 악마같이 대하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적이라는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2000년 전 유대인들이 들으면 어떤 반응일까? [13]
상술했듯 정작 생전에는 찬탈자 이미지, 에돔 혈통 때문에 정통파들에게 잔뜩 공격당했다.
다만 기독교에서도 헤로대 대왕을 고평가하는 목소리도 아주 없던 건 아니었는데 신학자 에른스트 크나우프는 백성들에게 평화, 인정, 번영을 가져다 주는 왕이 좋은 왕이라면 유다의 가장 좋은 왕으로 꼽은 사람 두 명중 하나가 헤로데 대왕이다. [15]
다른 하나는 므나쎄. 아합은? $(document).ready(function(){ $("#rfn-14").bind("contextmenu",function(e){ $("#Modalrfn-14").attr("style", "display: block;"); return false; }); $("#Modalrfn-14").on("click", function(){ $("#Modalrfn-14").attr("style", "display: none;"); }); $("#rfn-14").bind("touchend", function(){ $("#Modalrfn-14").attr("style", "display: block;"); }); $("#Modalrfn-14").bind("touchstart", function(){ $("#Modalrfn-14").attr("style", "display: none;"); }); }); [14]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뺏는 등의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자기가 직접 한게 아니라 이세벨이 한 짓이고 자기는 스리슬쩍 먹은 것 뿐이다. 오히려 카르카르 전투에서의 승리로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막는 등 나름대로 명군이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영국 사극 ROME에서 잠깐 등장한다. 하스몬 왕조를 대체한 유대의 왕이 될 야심을 가지고 있으며 냉철한 판단력으로 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동방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상하여 유대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유대의 독립을 포기하고 로마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보고 이를 가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기독교 영화 '네티비티 스토리'에서는 냉혹한 폭군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ROME에서 카이사르 역을 했던 키어런 하인즈.
붉은 추장의 몸값에선 개초딩에게 당하던 납치범 빌이 성경 속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찬양했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DLC 감추어진 존재들 마지막에서 암살단에 합류한 카와브에 의해 폭정을 펼치고 있다고 암살 타겟으로 이름만 언급되었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1977년 TV 드라마 <나사렛 예수>에서는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가 열연하였다.
[1] 그것도 제 1성전이 붕괴한 날과 똑같은 날짜였다. 심지어 헤로데 왕은 자신의 야심작이 완공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2] 그나마도 정략결혼으로 전처를 버리고 10대인 마리암과 결혼한 것이었다.[3] 이 때 그는 최초로 원로원에게 "유대의 왕" 칭호를 받는다.[4] 유대교는 후대의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먹지 않는다. 즉 헤로데의 돼지가 되면 잡아먹진 않을테니 살아남을게 아닌가라는 뜻.[5] 현재의 요르단의 요단강 동쪽 계곡.[6] 현재의 이스라엘 알에이자리아(al-Eizariya).[7] 현재의 시리아 라자트.[8] 명목상의 지역 지배이지만 사실상의 리비아 드루실라와 티베리우스의 영지가 되어버린다.[9] 바로크 미술의 거장 '폴 루벤스(1577~1640)'의 역작이다. 런던 소더비에서 무려 49,506,650 파운드(한화 약 990억 원)에 낙찰됨으로써 유럽의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 한번에 담겨있는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다.[10] 아마도 페르시아의 점성술사들일 것이라고 한다.[11]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과 그의 자손은 유대 역사에서 유대에 유일하게 통치권을 약속 받은 정통 왕족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12] 미가서의 예언.[13] 상술했듯 정작 생전에는 찬탈자 이미지, 에돔 혈통 때문에 정통파들에게 잔뜩 공격당했다.[14]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뺏는 등의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자기가 직접 한게 아니라 이세벨이 한 짓이고 자기는 스리슬쩍 먹은 것 뿐이다. 오히려 카르카르 전투에서의 승리로 아시리아의 레반트 진출을 막는 등 나름대로 명군이었다. 출처 https://thewiki.kr/w/%ED%97%A4%EB%A1%9C%EB%8D%B0%20%EB%8C%80%EC%99%95
클레오파트라
https://cafe.daum.net/Fullgospelgk/EMwg/320?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