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영화 「윈터슬립」의 결말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날들의 연속이 삶은 아니다,라고 영국 작가 D. H. 로런스는 말한 바 있다. 살다보면 나날을 이어가는 것만으로 얼마나 소중한가 싶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나날의 연속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순간도 역시 그 하루하루를 무언가 의미있는 것으로 채웠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저 살아남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는 생존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말이 목숨이 붙어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생기에 넘쳐 삶을 구가한다는 뜻인 것을 보면, 살아 있는 존재의 목표는 살아 있는 것이라는 동어반복도 가능하겠다.
‘살아 있음’의 다양한 양상을 그린 영화
2014년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누리 빌게 제일란(Nuri Bilge Ceylan) 감독의 영화 「윈터 슬립」(Winter Sleep, 한국개봉 2015.5)이 다루는 문제는 결국 ‘얼마나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과의 대면이라 보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대면을 피하는 방식이 얼마나 여러가지인가 하는 것이다. 삶과 정면으로 만나는 일은 곧 자아의 욕망과는 또다른 ‘살아 있음’의 요구를 듣는 일이므로 마치 신탁과도 같은 엄중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상 우리 대부분은 때로 오만하게, 때로는 겸손하게, 때로 허위로 또 때로는 정직으로 어떻게든 그 사건을 비껴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국적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터키 카파도키아의 풍광에 자연스레 녹아들어간 (좀 지나치게 상징적인 이름인) ‘오셀로’ 호텔의 경영자 아이딘이라는 남성이 영화의 중심인물이다. 척 보기에도 배우의 얼굴이다 싶은 이 인물은 매우 적절하게 전직 배우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 직업으로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부친으로부터 호텔뿐 아니라 다수의 부동산을 물려받아 임대료도 챙기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어디까지나 ‘교양있는’ 지역유지로서 밀린 임대료를 비롯한 ‘속된’ 문제들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주는 고용인에게 일임한 채, 서재에서 지방신문에 기고할 칼럼을 쓰는 한편 터키 연극사 집필을 구상하고 있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아이딘이라는 인물의 허위의식과 속물성에 대한 폭로가 영화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가 실제로 꽤 점잖은 인물이라 영화의 풍자 또한 미묘한 바 있어서 직설적 풍자와는 다른 재미를 준다. 가령 그가 자기 칼럼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방식은 이런 것이다. 칼럼 독자가 자금 지원을 요청해왔는데 어째야 할지 판단할 수 없으니 도와달라면서, 자선활동에 관심이 많은 아내 니할과 친구 수아비를 불러놓고 독자의 편지에서 칼럼을 고무‧찬양한 대목을 길게 읽어준다. 그 대목을 읽을 때 그의 변함없이 사심없는 듯한 얼굴과 니할의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의 대조가 아이딘의 실상이 드러나는 틈새가 된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의 자선활동 모임에 참석한 젊은 남자를 질투해 간섭하면서도 기부금 장부 작성과 영수증 발급 등 필수사항을 모르는 아내를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성실히 내세우는 태도를 볼 때면 정말 그런 의도도 있나 싶을 정도다. ‘연기하지 마라’는 니할의 일침이 없었다면 관객으로선 알고도 속아 넘어갈 만큼 전직 배우를 맡은 이 배우(할룩 빌기너)의 연기는 곱절로 은근하다.
영화의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을 꼽는다면 단연 연극의 한 장면처럼 길게 이어지는 설전(舌戰)이다. 아이딘과 그의 여동생 네즐라, 네즐라와 니할, 그리고 니할과 아이딘 사이의 말싸움은 인물 각각이 안고 있는 한계를 극히 밀도있게 드러내는 장치다. 언쟁이란 대개 감정을 격앙시켜 과장된 인신공격으로 치닫기 십상이고, 그래서 흥분한 쪽이 지고 말거나, 둘 다 흥분하다가 급히 반성하며 화해하는 구도로 가기 쉬운데, 이 영화는 그런 상투성에서 자유롭다. 이 교양있는 인물들의 말싸움은 자못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에 대해 더 신랄한 진실을 전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들은 모두 서로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자기 삶과의 대면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삶과의 대면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니할의 경우 아이딘과 비교하면 더 정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갈 곳 없는 처지를 빌미로 이혼을 들먹이는 남편 앞에서 객관적인 약자이기도 하다. 남편 때문에 삶이 가로막혔다고 느끼는 그녀는 유일한 보람으로 자선활동에 매달리는데, 아이딘이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기부한 ‘집 한채 값’의 돈다발을 아이딘의 세입자 이스마엘의 집에 전해주러 간다. 이스마엘은 밀린 집세 때문에 징수원에게 폭행당하고 TV와 냉장고를 뺐겼으며, 그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당하는 모습에 분개해 아이딘의 차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병 주고 약 주고’에 해당하는 이 돈을 이스마엘은 기어이 난롯불에 태워버린다. 내심 보란 듯이 남편의 위선과 자기 삶의 의미를 일거양득으로 입증하려던 그녀의 의도는 혼신의 힘으로 자존감을 지켜낸 이스마엘의 행동 앞에 진상이 폭로된 셈이다.
영화의 결정적 한방은 결말에 있다. 이스탄불에서 겨울을 보내겠노라 호기있게 선언하고 떠난 아이딘이 무조건 항복의 자세로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니할은 자기 방 창문에서 내려다본다. 진작 끝난 싸움에 이제껏 자존심을 세우던 아이딘이 도무지 그녀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서 흐르는 아이딘의 내레이션. 니할이 없으면 자신은 버틸 수 없음을 이제는 인정하겠고 그러니 ‘당신의 방식대로 삶을 계속해나가자’고 그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을 지속하는 것은 또다른 허위일 뿐임을 이제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알고 있다. 결말을 아이딘의 깨달음으로 해석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패배를 자인한 아이딘이 거의 명랑한 태도로 터키 연극사 집필을 시작하는 마지막 장면은 가장 통렬한 아이러니라 부르고 싶다.
누구를 얼마나 날카롭게 비판하든 어떤 관념에 몰입하든 그 자체로 나의 살아 있음을 대신하지 못하듯이,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는 것이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는 것도 그 일을 대신해줄 수 없다. 살아 있음이란 비판과 헌신과 자기인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금까지의 삶과 조금이라도 다른 한걸음을 실제로 내딛지 않는 한 이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삶과의 대면은 언제나 두려워 마땅한 법이다. 그 두려움마저 속이려 할 때 아이딘의 마지막 모습처럼 본격적인 ‘겨울잠’이 시작되는 것이리라. 우리가 숨기고 싶어하는 이런 삶의 실패와 우리가 비판해 마지않는 정치의 실패 사이에 유비(類比)관계가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5.5.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