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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원문보기 글쓴이: 등대지기
미국 속 유대인-1
미국 인구의 2%에 불과한 유대인이 미국 경제력의 20%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특히 금융, 정보통신, 영화, 유통, 언론, 식량, 부동산 관련 대기업은 상당수가 유대인 소유입니다.
미국 유대인은 기발한 아이디어, 단결력, 성실함 등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둡니다.
이들은 후원금과 언론과 유대인 로비단체를 통해 미국정부가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치도록 유도합니다.
1. 유대인의 성공요인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90%는 100년전 동유럽으로부터 이주한 아쉬케나지 유대인의 자손입니다.
유대 이민자들이 20달러 정도밖에 안되는 돈을 가지고 와서 부유해진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귀국율이 낮아 돈을 벌어도 대부분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유대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농업종사자보다 상공업종사자 비율이 높았습니다.
기독교인이 금욕적인데 비해 유대인은 영리추구를 선하게 보았고, 탈무드의 영향으로 돈을 벌고
저축하는 기술을 어릴적부터 몸에 익힙니다.
유대인은 돈이 많아도 검소하게 사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 호화롭게 살면 반유대주의가
일어나 핍박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랑민족인 유대인은 몸이 재산이란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교육을 중시합니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토라와 탈무드로 교육 받아 탈선하지 않고 바르게 자라게 됩니다.
유대인은 선택받은 민족이란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기대치가 높아 크게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높은 편입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유대인들은 거액을 출자해 이민자들에게 무료로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유대인은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율법에 금지돼 있습니다.
1960년대까지 미국 대기업은 유대인 고용을 차별하였는데 이는 유대 젊은이들이 영화, IT, 금융,
유통 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미국 유대인 이민 역사
이탈리아계 유대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1492년입니다.
동년인 1492년 카톨릭 국가 스페인은 자국 내 유대인에게 카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떠나라고 강요합니다.
유대인 5만명은 카톨릭으로 개종했지만 나머지는 유럽이나 중동 지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포루투갈의 유대인 마라노는 네델란드의 서인도회사에 속해 브라질의 설탕농장과 원목벌채에 투입됩니다.
집단적으로 미국에 최초로 정착한 유대인은 1654년 뉴욕에 도착한 23명의 브라질계 마라노입니다.
개인적으로 미국에 최초로 정착한 유대인은 1654년 뉴암스테르담(뉴욕의 옛지명)에 도착한 아슈케나지
유대인 바르심슨(Jacob Barsimson)입니다.
본격적인 유대인 이민은 1840~1880년간 독일 농촌출신 30만명과 1880~1917년간 러시아 및 동유럽
출신 260만명입니다.
1723년 미국 최초의 유대인 교회 시나고그가 뉴욕에 세워졌고, 뉴욕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지였습니다.
초기 유대인은 정육점, 행상인, 철공소, 의류재단사 등에 종사했고, 인디안과의 물물교환도 많이 했습니다.
1825년 튀니스 주재 미국 영사를 역임했던 세파라디 유대인 노아가 그랜드 아일랜드에 유대인 합중국을
건설한다는 일명 아라랏 계획을 세우지만 유대인의 냉담한 반응과 랍비의 반대로 실패합니다.
a) 독일계 유대인 이민
19세기 초 독일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독일 거주 유대인에게 공민권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자 유대인은 공민권을 박탈당합니다.
자유와 권리를 누려 본 유대인들은 과거의 억압과 가난으로 돌아가기 싫었고, 탈출구로 신대륙행을
선택하게 됩니다.
19세기 500만명 이상의 독일인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앵글로색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집단이 됩니다.
이들과 함께 30만명의 독일계 유대인도 이주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독일 시골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중이이서 수천명의 유대인도 북군과 남군에 참전합니다.
독일계 유대인은 유럽의 산업혁명을 체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미국의 상공업 분야에 진출합니다.
독일계 유대인은 은행업에도 진출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 로스차일드는 이미 유럽에서 국제금융의 절대강자가 되었습니다.
셀리그맨 가문, 발부르그 가문, 쿤 뢰브 가문, 골드만 삭스 가문 등 독일계 유대인이 미국의 유대
금융계의 시조가 됩니다.
b) 러시아 및 동유럽 유대인 이민
1880~1917년간 러시아 및 폴란드,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등에서 260만명의 유대인이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이민했습니다.
독일계 유대인은 교육수준이 높은 중산층이 많았지만 러시아계 유대인은 못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러시아계 유대인은 뉴욕 맨하튼은 Lower East Side 지역에 집단적으로 정착했는데 범죄에 빠지는 경우도
많아 유대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곧 각종 사업에 성공하는 인물이 나오게 되는데 1933년 유나이티드 프루트를 인수한 젬무레이나
1916년 주류도매상을 하다 시그램을 인수한 브론프만이 있습니다.
독일계 유대인과 러시아계 유대인은 처음엔 갈등을 겪었지만 같은 아쉬케나지이고 같은 언어인
이디쉬어(히브리어에 독일어 러시아어 폴란드어가 합성된 언어)를 써서 곧 화합합니다.
독일계 유대인은 보스톤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학교나 병원사업에 주력한 반면 러시아계 유대인은
급진 사회주의 정당이나 과격한 노조운동에 참여하고 시온운동에 힘씁니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유대인 금융인 쉬프와 뢰브는 유대인을 박해하는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일본을 지원합니다.
1911년 미국 유대인 단체들은 1832년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무역협정(유대인의 이동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됨)을 폐기할 것을 미국 상원에 청원해 성공합니다.
c) 나치즘에 쫓긴 유럽계 유대인
극우민족주의 나치즘이 독일과 유럽에서 횡행했던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약 10만명의 전문직
유대인이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이들은 가능한 기반을 쌓은 유럽에 머물고 싶었지만 나치정권의 차별과 재산강탈과 박해가 점점
심해져 이민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럽의 지식층은 뒤떨이진 미국의 과학기술, 학문, 문화예술을 크게 발전시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주요 직종은 의사, 변호사, 음악가, 작가, 학자 및 교수 등이며, 노벨상 수상자도 10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유대인의 미국 정치 참여
미국 유대인은 직접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간접적으로 로비, 기부금, 언론, 투표 등을 통해 미국
정치에 참여해 왔습니다.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이 경제력과 언론인데 미국의 부호 100명 가운데 22명이 유대인이고, 주요 언론의
경영진과 필진의 35%가 유대인입니다.
러시아와 동유럽 출신 유대인은 대부분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어서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진보적인
민주당을 선호합니다.
민주당 선거자금의 1/3이 유대인의 후원금으로 충당됩니다.
미국 평균 투표율이 53%인데 비해 유대인의 투표율은 80%를 넘고, 정치참여 의식도 강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뉴딜정책을 시행하자 유대인들은 이를 크게 환영합니다.
4선 대통령인 루즈벨트 대통령의 선거 때마다 유대인은 90%의 표를 몰아주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명문 사립대의 유대인 입학정원 쿼터제를 폐지하고, 많은 유대인 전문가를
자문역으로 사용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국무부를 불신하여 단독으로 외교문제를 결정합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되자 트루먼은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지원합니다.
당시 마샬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을 승인하는데 소극적이었지만 트루먼은 유대인인 나일즈 보좌관의
조언에 따라 승인을 결정합니다.
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초기에 이집트의 나세르가 왕정을 전복하는 쿠테타를 지원합니다.
이를 통해 이집트를 중동에서 소련을 견제하는 중심국가로 만듭니다.
그러나 미국이 이집트 대신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이집트는 1955년 소련제 무기를 구매하고
중공을 승인합니다.
이에 미국은 이집트의 아스완댐 건설 지원을 거부하고, 중동의 파트너를 이집트에서 사우디로 바꿉니다.
그러자 격분한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영국 프랑스와 전쟁위기를 겪습니다.
당황한 아이젠하워는 미국 내 유대인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닉슨과 접전을 벌여 35대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유대인, 흑인, 카톨릭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케네디는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처음으로 미국제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1962년 케네디는 문제 많은 연방준비은행의 폐지를 계획했는데 이로 인해 유대 금융계와 사이가
나빠졌고, 결국 1963년 11월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 도중 암살됩니다.
케네디의 서거로 대통령이 된 존슨은 많은 유대계 인사를 기용하고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칩니다.
변호사, 상원의원, 부통령을 거쳐 37대 대통령이 된 닉슨은 민주당의 험프리 후보를 꺽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공화당 후보로는 드물게 유대계의 지원을 받은 닉슨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군사 및
경제원조를 실시합니다.
닉슨은 록펠러의 추천을 받아 하버드대 교수였던 유대인 키신저를 안보특보로 기용했고, 1973년에는
키신저를 국무장관에 임명해 중동문제를 총괄하게 합니다.
세계석유파동이 일어나 중동국가들이 오일달러를 벌어들이자 키신저는 이를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도록 유대했고, 중동국가는 이스라엘보다 경제발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극우주의자였던 닉슨은 대통령이 되자 월남전을 종식시키고, 1971년 중국을 방문해 개방시켰으며,
소련과 화해하는 등 실용주의 노선을 걷습니다.
재선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대계 언론인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의 집중포화를 맞고
의회 탄핵 전 사임합니다.
백악관 녹음 테이프에 의하면 닉슨은 유대인을 자신의 정적으로 보았고, 유대인을 배신에 능한
믿을 수 없는 부류라고 언급했습니다.
후임 포드 대통령 당시 키신저 국무장관은 이스라엘 원조를 확대하고, 중동문제 해결을 '포괄적 타결'
(Global Settlement)에서 '분리 타결'(Bilateral Negotiation)로 변경하였습니다.
근본주의 유대인 가문 출신인 키신저는 중동문제를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이끌면서도 아랍권도
어느정도 납득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39대 대통령 카터는 이스라엘을 지지했지만 1977년 이스라엘 라빈 수상과의 회담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합니다.
이스라엘 이쿠드 강경파인 베긴은 요단강 서안을 이스라엘의 확장된 영토로 정의함으로 협상을
어렵게 합니다.
1978년 9월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우여곡절 끝에 타결되었지만 유대계는 불만을 가졌고, 카터는
유대인의 낮은 지지로 재선에 실패합니다.
영화배우 출신 대통령 레이건은 헐리우드에서 생활하면서 유대인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레이건은 친이스라엘 정책을 이어갔고, 1981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군사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시기 대이스라엘 원조는 증액되었고, 일부 차관은 무상으로 제공되었습니다.
레이건 행정부는 유대 로비단체인 에이팩(AIPAC)을 역으로 활용해 제삼국 관련 외교문제를 해결합니다.
부시는 백인 주류 코스인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원유탐사회사에서 일하며 아랍 부호들과 친분을 맺었고,
CIA 국장과 부통령을 거쳐 41대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부시와 국무장관을 지낸 베이커는 전형적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인)로 유대계와는 큰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계 로비의 영향력을 아는 부시는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하고 걸프전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강적인 이라크의 힘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걸프전 이후 중동평화회담의 국무부 실무 전문가 3명과 백악관 국가안보위 중동담당은 유대계였습니다.
부시는 마드리드 평화회담에서 이스라엘에게 1967년 중동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양보하라고
이스라엘에게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소련 유대인 백만명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부시가 이스라엘에게 제공할 100억 달러의 상업차관의 의회심의를 연기할 것을 의회에 요청하자
이스라엘 샤밀 수상은 유대계 로비와 언론을 이용해 부시의 재선을 막습니다.
미국 주요 언론은 부시가 외교만 신경 쓰고 국내 경제와 사회문제는 소홀하다고 논평했고, 당시
무명이던 클린턴을 젊고 신선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공개적으로 지지합니다.
부시는 베이커를 선거 사무장으로 기용했지만 대세는 클린턴으로 기울었고 결국 낙선합니다.
베이커는1989년 '이스라엘은 점령지 합병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과 협상하라'고 말해 반발을 키웁니다.
42대 대통령이 된 클린턴은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쳤고,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9명의 유대인이 각료급
공직에 기용되었으며, 연방대법관 9명 가운데 새로 임명된 2명이 유대인이었습니다.
1993년 클린턴은 이스라엘 라빈 수상과 팔레스타인 자치계획을 담은 오슬로협정을 체결하고,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완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은 새롭게 이스라엘 총리가 된 네탄야후와 요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 확대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1998년 르윈스키 섹스 스캔들이 터져 언론을 장식하면서 다음해 2월 상원에서 탄핵안에 부결될
때까지 클린턴은 곤혹을 치뤘는데 공교롭게도 르윈스키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지지를 받은 고어를 제치고 2000년 대통령이 된 부시는 유대인의 내각 기용에 인색해
조엘릭 통상장관 한명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유대언론은 부시의 외교력이 미숙하고 감세방안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게다가 버몬트주 공화당 상원의원이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공화당은 다수당 지위를 잃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발생하자 세계는 경악했지만 부시는 위기관리능력으로
인기가 상승했고, 아프간을 침략해 탈레반을 몰아냅니다.
2002년 부시가 악의 축 발언을 하자 유대계 인사들이 나서 이라크 공격의 정당성을 언론을 통해
성토합니다.
닉슨, 카터, 부시, 클린턴 대통령의 공통점은 초반엔 유대계 지원을 받아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쳤지만
후반엔 중동평화와 관련해 공정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유대로비단체의 반발을 불러왔고, 유대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재선에 실패하거나 스캔들에
시달리게 됩니다.
4. 유대 로비단체
미국에는 3천5백개의 유대 단체가 등록돼 있는데 큰 결속력과 자금동원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미국 정치와 여론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원을 목적으로 한 단체가 512개, 국제 유대인 사회의 연대를 위한 단체가 524개인데
이중 대표적인 유대인단체는 6개입니다.
1. AJC (미국유대인위원회, American Jewish Committee)
1906년 결성된 미국유대인위원회는 전세계 유대인의 단결을 도모하며,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고,
중도적 성향이며, 유대인의 창의력 개발과 타민족과의 조화를 위해 각종 사업을 추진합니다.
2. AJC (미국유대인총회, American Jewish Congress)
1918년에 창설된 미국유대인총회는 뉴욕에 본부가 있고, 진보적이며, 유대인 단체 사이의 협조와
유대인의 권리투쟁과 유대인 교육방식의 지침을 마련하는 사업을 수행합니다.
3. ADL (반비방연맹, Anti-Defamation League of B'nai B'irth)
1913년 법조인 리빙스톤이 창설한 반비방연맹은 뉴욕에 본부가 있고, 보수적이며, 전세계의 반유대
활동을 감시해 대응책을 마련하고, 출판물 연극 영화 분야에서 반유대주의를 추방합니다.
4. AIPAC (미국이스라엘공적위원회, American-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
1954년에 설립된 에이팩은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미국 의회 행정부 언론을 상대로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로비를 하는 기구입니다.
미국 내 이스라엘 로비의 핵심 단체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기자출신인 케넌이 유대인과 의원
사이의 친목을 목적으로 창설합니다.
그는 업무를 전산화하고 예산을 120만달러로 올려놓았으며, 접촉인사에 대한 개인신상파일
1,200개도 작성했습니다.
1970년대 에이팩은 매년 7억달러의 무상원조가 이스라엘에게 제공되도록 했고, 미 의회가 대이스라엘
차관의 상환연기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게 합니다.
1975년 포드 대통령이 아랍권의 반미감정을 의식해 대이스라엘 무기인도의 연기를 결정하자
에이팩은 76명의 상원의원이 대통령에게 재고를 요청하게 합니다.
에이팩은 1985년 미국 상원이 대요르단 무기제공을 반대하게 했고, 1987년에는 미국 의회가 매버릭
미사일 1600기의 사우디 판매를 저지하게 합니다.
에이팩은 1987년 이스라엘이 '라비'(Lavi)라는 신형 전투기(결국 포기)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5억5천만불의 차관을 제공하도록 미국 의회를 움직였습니다.
5. Conference of Presidents of Major American Jewish Organization
(미국유대인단체회장단총회)
1955년 설립돼 뉴욕에 본부를 둔 미국유대인단체회장단총회는 미국의 모든 유대인단체의 회장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 WJC (세계유대인총회, World Jewish Congress)
1936년 결성된 세계유대인총회는 뉴욕에 본부를 두고, 전세계 유대인의 결속과 유대사회의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유대 로비의 주요 대상은 주로 미국 의회와 행정부이며, 미국의 중동과 이스라엘에 대한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칩니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단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나라이기 때문에 로비활동이 양성화 되었고
로비스트는 정부나 의회에 등록을 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합니다.
유대인의 로비로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되었고, 미국의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정찰활동에서도 이스라엘은 제외되고 있습니다.
유대 로비는 친이스라엘 성향 정치인의 선거자금을 지원해 당선시키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정치인의 선거자금 지원을 중단해 낙선시킵니다.
5. 언론과 영화
미국 유대인이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언론과 영화를 지배하고 그들의
뜻대로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가진 유대인은 언론, 영화, 음악, 문학, 과학, IT산업 등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미국 1700종의 일간지 중 유대인 소유는 3%이고, 유대 언론인의 비율은 6%이므로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 언론은 뉴욕 워싱턴 LA 등 대도시에 위치하고, 주요 신문사를 소유하며,
고정칼럼을 쓰는 전문가나 정치평론가가 많아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1847년 태어난 헝가리계 유대인 조셉 퓰리처는 기자와 미주리주 하원의원을 거치고, 1878년 파산한
신문사를 인수해 타블로이드 신문 '포스트 디스팻취'를 발행해 성공합니다.
퓰리처는 1883년 '뉴욕 월드'를 매입해 정통신문을 발행하는데 시사만화와 컬러사진을 도입하고,
심층보도와 비리폭로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퓰리처는 1911년 작고했지만 고인의 뜻에 따라 콜롬비아 대학에 신문학과가 개설되고, 문학 언론
음악 분야의 권위 있는 퓰리처상이 제정됩니다.
1858년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독일계 유대인 옥스는 신문사 사환과 폅집 경영 등의 일을 했고,
1896년 경영난을 겪던 뉴욕 타임즈를 인수합니다.
그는 뉴욕 타임즈를 황색 언론과 대비 되는 정통 정론지로 키웠고, 신문대금을 1센트로 내려
판매부수를 3배 증가시킵니다.
뉴욕 타임즈는 오늘날 세계 최대의 신문이자 최고의 정론지가 되었습니다.
1895년 뉴욕에서 태어난 뉴하우스는 판사 사무실 사환과 법률공부를 통한 변호사 합격을 거쳐
작은 신문사들을 인수했고, 결국 전국의 지방지들을 인수해 거대한 신문제국을 형성합니다.
그는 잡지에도 손을 대 보그, 글래머, 마드모와젤, 하우스 앤 가든 등을 발행합니다.
그는 신문대금을 낮추고 매체의 질을 높여 높은 광고료를 받는 방법으로 성공합니다.
1917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래햄은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워싱턴 포스트의 부사장이 됩니다.
그녀는 1961년 뉴스위크를 인수하고, 1963년 워싱턴 포스트의 사장이 되어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 수준을 높인 결과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성장시킵니다.
그녀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심층취재한 기자들의 보도를 허락해 특종을 냄으로써
닉슨이 의회 탄핵 전 사임하게 만듭니다.
미국 언론이 친이스라엘 성향을 갖게 된 것은 1967년 6일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정복자, 팔레스타인은
희생자란 인식이 생기면서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반유대주의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에 미국 언론은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켐페인을 벌였고, 친이스라엘 보도는 미국 언론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미국 언론은 이스라엘에 관한 문제는 호의적으로 보도하고, 아랍권에 관한 문제는 비판적 폭력적으로
보도해 테러리스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이스라엘 당국은 외국기자에 대한 홍보에 적극적이지만 아랍권은 비판적인 서방언론의 취재에
협조하지 않아 더 편향적인 보도를 하게 됩니다.
미국 7대 메이저 영화사는 파라마운트, MGM, 워너, 폭스, 유니버셜, 콜롬비아, 디즈니입니다.
이중 디즈니를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이 설립한 영화사입니다.
디즈니도 1984년 유대인 아이즈너에게 경영권이 넘어갑니다.
최근 유대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미라막스와 함께 만든 드림웍스도 메이저 대열에 합류합니다.
독일 출신의 유대인 칼 래믈은 시카고에서 의류사업을 하다 1909년 영화사업을 시작했고, 1912년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설립합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세실 비데밀 감독을 영입해 '십계', '삼손과 데릴라' 같은 유대계 영화를 만들어
성공했습니다.
유니버설은 1990년 일본 마쓰시다에 매각되었고, 1995년 캐나다의 유대계 주류회사 시그램에
인수되었으며, 최근 프랑스 대기업 비벤디에 매각되었습니다.
1873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 온 유대인 아돌프 주커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유대인
동료 제쓰라스키와 파라마운트 영화사를 세웁니다.
파라마운트사는 1966년 걸프 웨스턴 그룹에 흡수되었다가 1994년 바이아콤 그룹에 통합됩니다.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 윌리엄 폭스는 세탁소를 경영하다 1935년 20세기폭스사를 설립합니다.
20세기폭스는 석유부호 데이비스에 의해 운영되다 호주계 언론재벌 머독에게 매각되었습니다.
러시아계 유대인 루이 메이어는 마르커스 로우와 함께 1922년 MGM사를 설립합니다.
MGM은 찰리 채플린 주연의 영화를 흥행시키면서 세계 최대의 영화사로 발전합니다.
1969년 MGM은 호텔업계 거물인 커코리안에게 매각되었고, 배급사 UA와 통합되었습니다.
6. 미국의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는 영어로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인데 반셈족주의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1880년에 독일 작가 마르가 antisemitismus란 라틴어를 쓴 것이 기원입니다.
원래 셈족은 유대인을 포함한 아랍인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유대인만을 가르키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원래 다양한 이민족이 한데 어우러져 사는 곳이고, 청교도와 같이 유럽에서 핍박 받던
유대인에게 반유대주의는 드물었습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가장 핍박한 세력은 카톨릭이었는데 미국은 개신교가 주류이므로 유대인은
박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헨리 포드는 분업생산 시스템으로 자동차를 저렴하게 대량생산 해 미국 자동차를 대중화시킨
역사적 인물입니다.
포드는 육체노동과 기독신앙을 중시했고, 공산주의자들의 파업을 경멸했습니다.
그는 교활한 유대인들이 미국을 부정적으로 물들인다고 믿고, 유대인과 투쟁해 건전한 사회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공격대상 유대인은 국적없는 국제금융인, 퇴폐적인 영화 음악인, 혼란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디트로이트에서 발행하는 주간지에서 국제금융이란 제목으로 유대인을 흡혈귀에
비유하며 비하하는 특집기사를 100여회 내보냅니다.
그는 독일계 유대금융가들이 유럽의 유대금융가들과 야합하여 불로소득의 폭리를 취하여 산업자금을
위축시키고,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주장합니다.
포드는 시온의정서가 위작이 아닌 진짜문서라고 믿고 이를 대량으로 출판해 보급시킵니다.
그는 시온의정서 내용대로 유대인이 세계금융을 장악해 산업질서를 교란하고, 타락한 영화나 음악을
공급해 청소년들이 기독 가치관을 떠나 타락하게 만들며, 저질 주류를 생산해 미국인의 건강을
해친다고 주장했습니다.
포드의 반유대주의에 유대인들은 포드 자동차 불매운동으로 맞섰으나 포드는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미국의 극우단체 KKK(Ku Klux Klan)는 남북전쟁 직후인 1866년 테네시주 풀라스키에서 생겨나
퍼레스트 장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882년 해체됩니다.
KKK는 1915년 사이몬즈 대령과 클라크에 의해 조지아주에서 재건됩니다.
KKK는 백인 개신교 국가의 건설과 공산주의, 유대인, 흑인 배척을 실천하는 단체인데 1920년대
회원수 400만명으로 절정기를 맞습니다.
KKK는 온몸을 뒤덮는 흰색 복장과 십자가를 불태우는 특이한 예식으로 유색인종을 공포에 몰아
넣었으나 1944년 해체되어 현재 4천명만 남은 상태입니다.
버틀러 목사를 중심으로 한 '아리안 민족체'(Aryan Nations)라는 단체는 아이다호주 헤이든 호수
주변에서 유대인을 사탄의 후예로 규정하고 오백명의 군사조직까지 갖추었습니다.
아리안 민족체는 유대인 방송기자 Alan Berg를 살해하는 등 테러를 자행했으나 FBI의 수사를 받고
소멸되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소련과의 냉전시대가 열리자 반공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색출해 타도하는 매카시즘
열풍이 미국에 불었습니다.
아일랜드계 공화당의원이자 반공주의자였던 매커시 상원의원은 정부 내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폭로함으로써 민주당에 비해 열세였던 공화당의 지지를 끌어올리게 됩니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많았던 유대인들도 의혹의 눈길을 받았습니다.
매카시즘 동안 조금의 좌익사상만 있어도 공개적으로 비판 받고 격리되었습니다.
핵개발 정보를 소련에게 넘기다 체포돼 처형된 로젠버그 부부와 공범인 헤리 골드, 물리학자 훅스 등이
대표적인 유대인 인물입니다.
흑인해방운동은 원래 그리스도교 중심이었으나 1968년 킹목사 암살 이후 카마이클이 이끄는 '검은
표범단'이나 무하마드의 급진 이슬람 운동이 활약합니다.
이들은 중동의 과격한 이슬람 국가들과 연대하면서 반유대주의 색체를 뛰게 되었고, 반유대주의를
주장한 인물로는 제시 잭슨 목사와 파라칸 등이 있습니다.
1979년 미국 침례교 목사 제리 팔웰은 공화당 보수파의 지원으로 '도덕적 다수'라는 신교근본주의
로비단체를 만들어 레이건 후보 지원에 참여하는 등 정치·종교운동을 벌였습니다.
팔웰 목사는 자유개방주의는 유대인이 미국의 기독교 가치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리버럴한 정치인의 낙선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참고도서
1. 유태인의 미국 (해누리, 박재선)
2. 미국 경제의 유태인 파워 (가야넷, 여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