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론(詩論)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1년 12월15일 (목)
문태준(시인)
“비단 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하다오"
1.
새 시집을 낸 소회를 말하는 것은 큰 소득이 없다. 헛헛한 가슴을 석류를 쪼개 보이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해 시집을 낸 한 지인이 그러길 “나 정말 죽겠어요, 형편 없어요"라고 말하던 게 아마도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되, 그냥 쓸쓸하고 바짝 마른 열매 같고 그렇다.
나는 요즘 집 주변의 들길을 산책하는 데 보람이 있다. 아파트 주변을 살짝 비껴가면 참으로 희한하게 소소한 들길이며 농장이며 숲길이 있다. 그 흙길을 걸어가다보면 저물어 저녁이 되어도 좋다. 그리고 그 인근에 배를 파는 집이 몇 군데 있다. 주인은 올해 배가 달기가 그만이란다. 그러나 나는 배를 파는 작고 주저앉은 그 함석집이 좋다. 멀리 산을 넘어 줄달음쳐 고향집 마루에라도 앉은 기분이 된다. 이런 산책은 마른 가을 갈대 같은 마음자리를 그나마 보살펴준다.
2.
요즘은 밥집에서 흰 쌀밥을 받을 때 마치 산에 사는 스님이라도 된 듯 ‘오관게’를 염송하는 버릇이 생겼다. 밥 먹기 전 외우는 오관게는 대충은 이런 내용이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 어렵네. 탐진치를 버리고 도업을 이룰지니, 다만 몸이 말라 병들지 않는 약으로 삼아 이 공양을 받네.".
물 한 방울에도 8만 4천 마리의 벌레가 들어 있다는데 어찌 한 그릇 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노고를 잊은 채 사사로이 공양을 받겠는가. 시를 섬기는 것이 오관게를 외우는 자세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시인의 삶이 이처럼 검박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3.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현칙'이라는 스님이 있다. 그 스님이 생전에 쓴 일기가 <산중일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볼 때마다 감흥이 적지 않다. ‘빙판에서 미끄러지다'라는 짧은 글은 세인을 주눅들게 하는 선승의 기개가 있다. 내용인즉 이렇다 “어느 날 밤에 변소에 가다가 얼음에 미끄러져서 펄썩 주저앉았다. 발목이 금방 퉁퉁 붓고 꼼짝할 수가 없어서 업혀 들어가 요강에다 오줌을 누었다. 오줌은 요강으로 해결하더라도 방에서 똥냄새를 피워가며 살 일은 아니다 싶어서 그날부터 먹는 일을 그만두었다. 한 일주일간 지내니 지팡이를 들고 변소에 갈 만하기에 그때부터 다시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곡기를 끊고 지냈다는 문장을 지날 때면 나는 털썩 울고 말게 된다. 이 문장 앞에 내 시도 나도 송수하다. 나는 내 시가 그리고 나의 하루 하루가 너저분한 얼룩을 남기지 않기를 바란다.
4.
쏜살같이 내려와 토끼를 채가는 새매처럼 시는 일순에 쏟아져야 한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확,확 터져나오는 그런 것이 전율처럼 올 때를 나는 기다린다. 그게 잘 안되어서 밤 늦도록 전전긍긍하는 때가 많다. 큰 재주가 없다는 뜻일게다. 삶과 시의 터전이 영 시원찮다는 뜻일게다.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고만고만하다는 뜻일게다. 큰 재주가 없으면 오래 오래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기다리다보면 나는 또 송수하다. 대체로 나는 사상이나 모랄 같은 것이 전면에 드러나는 시가 좋기만 한 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자처럼 거느리는 배경이 있는 시를 좋아하는 게 내 시의 취향인가보다.
5.
‘무상無常'과 ‘공空'을 생각할 때가 많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나도 변하고, 변하는 내가 본 세상도 끊임없이 바뀐다는 이 말이 좋다. 또,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我'라고 말할 게 없다는 사실도 나는 흔쾌히 수긍한다. 이 세상에 목숨을 받아 와서 머무르고 변화하다 결국 소멸하는 이 사연을 어쩔 것인가. 죽어 ‘중음中蔭'에 머무르다 다시 환생하는 이 목숨의 순환을 어쩔 것인가. ‘我'아'라 고집할 게 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두 손으로 곱게 받을 때가 많다. ‘입아아입入我我入'이라는 걸 뼈에 새긴다. 그러나 시가 사상이나 모랄 그 자체이어서는 곤란하므로 이런 것들을 시의 몸에다 한 벌의 옷처럼 입혀보기도 하지만, 소출은 적다.
중국 가상대사 길장 스님은 죽음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다. “이(齒)를 가지고 털을 품은 자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삶에서 죽음이 온다. 내가 만약 태어나지 않았다면 무엇에서 죽음이 있겠는가? 마땅히 처음에 태어남을 보고, 마침내 죽음이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삶에 울고 죽음을 두려워 말라”. 죽음에 익숙해야 한다. 그럴 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노래하고 곡(哭)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라는 말의 숨결을 나는 좋아한다. 이것과 저것의 틈. 그 틈을 내력을 구멍을 들여다보길 좋아한다. 그 틈에는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다. 외로운 방 같은 ‘사이'라는 말이 단풍처럼 곱다.
6.
불교의 수행자들은 같은 나무 아래 여러 날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마저 애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단다. 다르게 이해하면 ‘걸식의 정신'이라 부를만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두려울 때가 많다. 한 곳에 머물러 이내 일상과 혼백이 부패하리라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 시업도 삶도 웅덩이의 물처럼 고이게 될까 두렵다. 이런 걱정은 족쇄처럼 내 발목을 잡고 있어 끝내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
7.
조선시대를 통틀어 몇 안되는 전업시인 가운데 한 분인 이달은 나그네 생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시를 썼다고 한다. 나는 이달의 시 가운데 ‘강을 따라서'를 좋아한다. 시는 이렇다. “강변 십리 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꽃잎 속을 뚫고 가니 말발굽도 향기롭다//산천을 부질없이 오고간다는 말 마소/비단 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하다오//".
시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달은 객지생활의 고달픔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나도 시로 나의 누추한 생활을 견딘다. 견디어 견디어 사라질 것이다. 시를 뜨거운 한 그릇의 쌀밥으로 섬길 것이다. “비단 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하다오". 이 얼마나 부러운 소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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