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입니다!
증 언 자 : 임재구(남)
생년월일 : 1964. 4. 16(당시 나이 17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상업)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조선대부속고등학교 1 학년에 재학중이던 1980년 5월 시내를 돌아다니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하고, 5월 20일 오후 6시 차량시위에 참가했다가 붙잡혔다.
도청 상황실에서 무수하게 구타당하였는데 21일 저녁 도청이 시민군에 의하여 장악될 무렵 도청 뒷담을 넘어 귀가.
평온한 시위
조선대부고 1학년 재학중에 1980년 5월을 맞게 되었다.
16일 저녁 횃불시위를 구경했다. 도청 분수대에 모여든 시민, 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씨가 간디의 무폭력 무저항을 주장하며 만약 계엄군에 의한 진압이 있다면 땅바닥에 누워버리자고 연설했다. 많은 시민들이 그 연설에 공감을 한 것 같았지만 한편의 시민들은 무저항에 반대하는 듯했다.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내려왔다는 플래카드를 든 학생들이 나올 때마다 박수를 쳐주는 등 비교적 평온한 상태였다.
18일 조선대 운동장에 진주한 공수대원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부마사태 때도 여러 명 대가리를 깼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광주에서도 그렇게 진압을 하게 됐다고 하여 섬뾵한 생각이 들었다.
오후 3-4시경 동명동 집에서 청산학원 앞을 지나가는데 학생,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찰 서너 명을 땅바닥에 꿇려놓고 파출소 점거 시위중이었다. 어디선가 공수대원 30, 40명을 태운 군트럭이 나타났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여대생을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때리며 끌고 갔다.
이것을 본 한 시민이 공수대에게 말했다.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은 광주시민을 우롱하는 것이다. 시민들을 건드리면 무슨 사태가 날 줄 아느냐. 무서움을 모르고 이렇게 날뛰다가는 큰일이난다."
결국은 그 시민의 말이 맞았다. 청산학원 앞을 지키던 전경과 지나가려는 시민 한 명과 시비가 붙었다.
"바로 앞이 집이니 좀 지나갑시다."
라고 말한 그 사람을 전경 한 명이 진압봉으로 머리를 치고 군화발로 짓밟아버렸다. 그것을 본 주위 시민들이 몹시 흥분했다. 전경들은 지방에서 차출되어 광주로 올라왔는지 나이가 들어 보였다.
덜 매울 것 같아 택시에 오른 것이
20일 아침 나는 도청과 광주극장 앞을 지나갔다. 공수대원들의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러내린 시민들을 볼 수 있었다.
오후 6시경 광주시내 차량이 무등경기장에 집합하여 도청을 향해 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선두에는 택시들이, 후미에는 버스가 있었다. 운전수 없이 키만 꼽힌 채 전진 중인 택시도 더러 있었다. 나는 전남일보사 앞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다 최루탄이 터지는 거리보다는 택시 안이 덜 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친구와 같이 택시에 탔다. 운전수가 앞좌석에, 뒤에는 친구와 나 또 다른 사람 한 명 모두 4명이 타고 있었다. 복면을 쓰고 택시에 탄 지 5분도 안 되어 내가 탄 택시가 가장 선두에 섰는데 곧바로 진압이 시작되었는지 도로에는 연기가 솟았다. 그리고 차에 탄 사람들은 방독면을 착용한 공수대원들이 진압봉으로 유리창을 깨고 끄집어냈다. 친구와 주변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는데 나는 택시 시트 밑으로 숨었다. 최루가스에 호흡하기가 곤란해 이대로 질식사하느냐 아니면 맞아 죽느냐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 지나가는 공수대원들을 보고 밖으로 뛰어나와 고등학생이라고 외치려는데, "고, 고." 하는 말만 간신히 나올 뿐이었다.
공수대원에게 끌려가 YMCA 앞의 도로에 앉아 있는데 25-26명의 시민들이 끌려 와 있었다. 땅에 코를 박고 옆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우리를 미니버스에 모두 태운 후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더니 도청 분수대를 한바퀴 돌아 도청으로 들어갔다. 차창은 커텐이 드리워져 있었다. 도청 상황실에 갖혀 나무 도시락을 먹고 나서 가지고 있던 증명을 빼앗고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나는 학생증을 빼앗겼다. 구경하던 노인, 버스기사, 안내양 등이 함께 같은 방에 갇혀서 1시간 간격으로 들락거리는 공수대원들에게 구타당했다. 얼마나 많이 두들겨맞았는지 나중에는 얼굴이 부어 누구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공수대원들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전라도 남자 씨를 말리겠다."
"오늘 저녁에 우리 대원 3명이 칼에 찔려 죽었다."
내가 고등학생이라고 했더니 진압과정에서 고등학생들이 콜라병을 깨서 던졌다며 때리고 다른 시민에게는
"군대는 어디 나왔냐?"
며 낮은 포복을 시키고 때렸다.
도망
21일 새벽에 MBC방송국이 불 타는 모습이 보였고 오후에는 저격자세의 공수대원이 보이고 총성이 울렸다. 헬기가 두 번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방송을 통해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대원 피하시오."
"긴급상황 알립니다."
그 틈을 타서 전신전화국 방화범이라는 죄를 쓰고 잡혀와 있던 같은 학교 친구 '정'의 도움으로 도청 뒷담을 넘어 도망갔다. 세무서가 타고 카빈을 든 시민군들이 보였다. 도청에 갇혀 있으면서 당한 구타로 인해 팔이 부러져 병원에 갔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집에서 한방으로 치료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학생증을 빼앗겨버렸으므로 언제라도 집으로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였다. 그래서 피난을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27일 새벽 폭발음과 엄청난 총성이 들렸다.
1984년 군에 입대, 경비대에서 근무를 하는데 정보처에서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지휘부나 소장실 근무는 아예 시키지 않았다. 그때 맞은 팔이 후유증으로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할 뿐 아니라 날씨만 궂으면 머리가 아프고 힘든 일은 할 수가 없다 현재 집에는 늙으신 아버님이 군인으로 퇴직, 매달 나오는 25만 원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5·18의 발단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광주시민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정부측의 공식적인 사과, 명예회복, 책임자 처벌 및 진상규명이 있은 후에 보상문제가 있어야 한다.
(조사.정리 주경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