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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3년 분봉왕 헤롯 필립이 죽었다. 그는 요단강 근원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필립은 조용하고 온순하였으며 자신의 분봉국을 떠나지 않고 항상 그 안에서 살면서, 일단의 친한 친구들을 거느리고 순회재판을 열어서 죄를 범한 자는 처벌하고 무죄한 자는 방면해 주었다. 그의 아내는 세례요한을 죽게 만든 춤추는 살로메(Salome)였고, 그녀는 필립이 죽자 친척에게 재가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헤롯왕의 집안은 근친결혼을 하였고, 같은 이름의 자녀들이 많다. 한편 티베리우스 황제는 필립에게 후손이 없으므로 그의 영토를 취해서 시리아에 병합시켰으나, 그 곳에서 나오는 세금만큼은 그냥 그 곳에서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하는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도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좋은 곳인 게네사렛 호수가에 도시를 하나 건설하여 '디베랴(Tiberias)시'라고 불렀다. 그는 아라비아의 왕 아레타스의 딸과 결혼하여 오랫동안 무리없이 살았는데, 그의 배다른 동생인 헤롯 필립(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네의 아들)의 아내인 헤로디아(Herodias)와 눈이 맞아서 결혼하였다. 즉 안티파스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다. 이 결혼을 세례요한이 비난했기 때문에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에게 악감정을 품고, 그를 죽게 만들었다. 아무튼 국경문제로 안티파스와 갈등을 빚어오던 아레타스는 딸이 소박맞고 친정으로 돌아오자, 안티파스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안티파스의 군대가 패배한 것은 세례요한을 살해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안티파스는 이런 사실을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고하였고, 황제는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게 아레타스를 응징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비텔리우스는 페트라(Petra)에 있는 아레타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고, 안티파스와 친구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는 3일간 머물면서 유대인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는데, 이때 요나단을 대제사장에서 해임하고, 그의 형제 테오필루스(Theophilus; AD37~42)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4일째 되는 날,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서신이 비텔리우스에게 당도했고, 그는 아라비아 원정을 중지하고, 새로 등극한 칼리쿨라(AD37~41)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헤롯 아그립바(Agrippa)는 헤롯왕의 손자였고, 헤로디아의 남동생이었다. 그는 일찍이 로마로 유학을 가서 황제의 친족들과 함께 자랐다. 그런데 그는 낭비벽이 심해서, 파산을 하여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 그의 아내 키프로스는 헤로디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래서 매형인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지역인 디베랴시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두로(Tyre)에서 잔치가 열려 술을 마시고 즐기는 중에, 안티파스는 아그립바에게 자기 덕분에 입에 풀칠을 하는 가난뱅이라고 빈정댔다. 이에 크게 모욕을 느낀 아그립바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만나기 위해, 나폴리 앞바다에 있는 황제의 별장이 있는 카프리섬을 방문했다. 그때가 황제가 죽기 1년 전인 AD36년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죽은 아들 드루수스(Drusus)의 친구였던 아그립바를 멀리하였다. 이에 아그립바는 칼리쿨라에게 희망을 갖고 그를 돕다가 황제의 눈 밖에 나서 6개월 동안 감옥신세를 졌다. 그렇지만 이 일로 칼리쿨라와 그의 할머니 안토니아(황제의 제수씨)는 아그립바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칼리쿨라는 티베리우스를 이어 자신이 황제에 오르자 감옥에 있던 아그립바를 석방하고, 그를 공석이던 필립의 분봉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마룰루스(Marullus)를 제6대 유대총독으로 파견하였다.
칼리쿨라 제2년(AD38년)에 헤롯 아그립바는 유대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되어 금의환향하자 놀라워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자기 동생의 출세에 배가 아팠다. 그래서 남편에게 로마로 함께 가서 아그립바보다 더 큰 왕위를 받아갔고 오자며 졸라댔다.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요구를 귀찮게 여겼으나, 하도 조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로마로 향했다.
한편 아그립바는 매형과 누나가 배를 타고 항해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하를 칼리쿨라 황제에게 보내 황제에게 드리는 예물과 함께 헤롯 안티파스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고발장을 전달했다. 칼리쿨라는 안티파스의 문안을 받은 후에 아그립바가 보낸 편지를 읽고 힐문했다. "그대의 병기고에 7만명의 병사들이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갑옷이 비축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안티파스는 아라비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칼리쿨라는 안티파스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여 아그립바에게 주고, 그를 고울(Gaul)지방의 리용(Lyons)으로 영구 추방하였는데(39년), 그곳에서 곧 죽었다. 헤로디아는 아그립바의 누나였으므로 황제는 그녀에게 특혜를 베풀어 주려고 했으나, 헤로디아는 자청하여 남편을 따라갔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에게 내려졌다.
칼리쿨라(37년3월18일~41년1월24일)는 뛰어난 웅변가요 헬라어에도 능통한 달변가였고,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만큼 티베리우스 황제의 긴축정책에 사람들은 싫증이 났지만, 불만을 표시할 수가 없었고, 활력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가 국가재정으로 남겨 놓은 6천7백5십만 데나리우스(로마 은화)라는 막대한 돈을 갖고, 칼리쿨라의 통치 첫 해인 7개월 동안은 날마다 명절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어, 수도 로마에서는 검투사 시합이나 전차경주가 열리고 연극이 상연되었다. 이같이 칼리쿨라는 '빵과 서커스'를 즐기려는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러던 칼리쿨라는 갑자기 고열로 쓰러져서 시민들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당장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실의와 불안에 빠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맨 먼저 물어보는 것은 칼리쿨라의 안부였고, 칼리쿨라의 쾌유소식에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서 춤을 추었다. 그런데 병상에서 일어난 칼리쿨라는 자신을 주피터(or 제우스) 신의 동생으로 자처하였다. 과거 로마는 왕정을 폐지하고 오랫동안 공화정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를 이기고 로마의 패권을 차지한 율리우스 시저는 왕정복고를 획책한다는 이유로 원로원의사당 안에서 살해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우구스투스는 무척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그래서 개선장군이란 뜻의 '임페라토르(imperator)' 대신 '프린켑스', 즉 시민중에 제1인자를 공식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절대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왕관도 없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에 해당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모른척했다. 그런데 칼리쿨라는 황제라는 말도 눈에 안찼는지 신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그는 폭정을 저지르다가 황제 즉위 3년10개월 만에 살해되었다.
AD38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큰 충돌이 생겨서, 양쪽에서 각각 3명의 대표를 뽑아 칼리쿨라 앞에서 소송을 하기로 하였다. 필로(Philo)를 단장으로 하는 유대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그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그리스 사절단이 도착하면 그때 함께 만나겠다고 통지하였다. 이듬해 봄에 그리스 사절단이 로마에 오자, 황제는 '마이케나스(아우구스투스의 왼팔)의 정원'에서 있을 연극 준비상황을 점검하는 김에 양쪽 사절단을 그곳으로 불렀다. 헬라인 대표 아피온(Apion)은 "유대인들은 가이사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모든 백성들은 가이사를 위해 제단과 신전을 건설하고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유독 유대인들만은 가이사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물론 가이사를 위해 우상을 만드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비난했다. 이번에는 사람들로부터 '유대의 플라톤'이라는 말을 듣는 필로가 황제에게 변론하려고 하자, 황제는 필로의 말을 제지하고, 현장을 걸어 다니면서 즉흥적으로 필로에게 힐문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무런 결론 없이 양측은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황제는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 대신에 페트로니우스(Petronius)를 후임 총독으로 임명하였는데, 유대인에 대한 대책으로 그에게 편지를 쓰기를 "대군을 거느리고 유대로 진격하라. 그리고 나의 형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라고 명령하라.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는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곳에 나의 형상을 세우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페트로니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톨레마이스로 이동했다. 톨레마이스는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에 세워진 갈릴리의 해변도시다.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페트로니우스를 찾아와서 조상 전래의 율법을 범하도록 강요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만일 총독께서 가이사의 형상을 굳이 성전 안에 세우시겠다면 먼저 우리를 죽이시고 그 다음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율법이 금하고 있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결코 좌시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무려 40일 동안이나 땅 바닥에 엎드려 목을 길게 빼고 어서 죽여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는 동안에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페트로니우스는 유대인들의 말과 행동에서 죽음으로 항전하겠다는 그들의 굳은 결의를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페트로니우스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유대인들을 디베랴시로 소집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재고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낼 예정이니까, 여러분들 각자는 생업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권면했다. 그런데 페트로니우스가 이런 말을 마치자마자 소낙비가 내렸다. 중동지역에서는 비가 귀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해하였고,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페트로니우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신이 유대인들을 특별히 보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확신을 갖고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로마로 보냈다.
칼리쿨라는 유대인들이 가이사의 형상을 성전에 세우는 문제로 폭동을 일으킬 기세를 보인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고 몹시 격노해서 페트로니우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너는 황제의 명령보다도 유대인의 뇌물을 더 중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교만해져서 나의 명령을 어기고 유대인의 비위를 맞추는데만 급급했음을 나는 분명히 알았노라. 그러므로 너는 나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알고 자결하도록 하라. 나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자들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너를 본보기로 지금뿐 아니라 장래의 모든 인간들에게 생생히 보여주도록 하겠노라." 그런데 황제의 서신은 배가 풍랑을 만나 3개월간 바다에서 지체되는 바람에,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적힌 서신보다 27일이나 늦게 페트로니우스에게 도착하였다.
칼리쿨라가 두 명의 대대장이 이끄는 20명 안팎의 근위병에게 살해되었을 당시에, 헤롯 아그립바 왕은 유대 임지를 떠나 로마에서 황제의 고문역할을 하고 있었다. 황제 암살의 주역인 근위대 대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는 로마원로원과 합세하여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7명의 대대장과 1만명에 이르는 근위대 병사들은 지도자가 여러 사람인 것 보다는 한 사람의 왕이 통치를 해야 군인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또다시 내전이 벌어져 군인들 간의 전투가 끊이질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리쿨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변을 확보한 후, 로마원로원과 협상을 했는데, 그 협상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헤롯 아그립바 왕이었다. 그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 등극하였다(41년1월24일~54년10월13일). 이때부터 수도 로마에 주둔하고 있는 근위대가 차기 황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새 황제는 아그립바의 공로를 인정하여 유대총독이 통치하는 지역을 아그립바에게 주었다. 이로써 그는 그의 조부인 헤롯왕이 다스리던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헤롯왕을 헤롯대왕이라 불렀다. 그의 속을 들여다보면 무척 불행한 인생이었지만 겉은 화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헤롯 아그립바는 헤롯대왕에 버금가는 왕이 되어 유대땅으로 귀국했다(41년). 사람들은 그의 출세에 대해서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그립바 왕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과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안나스의 아들 테오필루스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헤롯대왕이 한번 대제사장에 임명했던 보에투스(Boethus)의 아들 시몬을 다시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시몬은 두 번이나 대제사장이 되었다.
아그립바 왕은 예루살렘주민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시몬을 대제사장직에서 해임하고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을 후임으로 앉히려고 하였으나, 안나스가 자기 동생 마티아스(Matthias)를 추천하므로 그에 따랐다. 피소(Piso)의 둘째 아들 마르쿠스가 페트로니우스의 뒤를 이어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아그립바 왕은 성전 북쪽에 위치한 새 도시인 벳새다(Bezetha)와 연결된 예루살렘 성벽을 수리하는 한편 성벽을 더욱 높고 넓게 확장했다. 벳세다는 요한복음 5장2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에 나오는 지역이다. 그러나 시리아 총독 마르쿠스는 아그립바 왕이 성벽공사를 한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알려 공사를 중단시키게 했다. 만일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인간의 힘으로는 함락시키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그립바 왕이 갈릴리의 디베랴시에 갔을 때 주변의 모든 왕들이 그와 함께 머물렀다. 이때 시리아 총독 마르쿠스가 그를 찾아왔는데, 아그립바 왕이 왕들을 수행원처럼 거느리고 와서 총독을 마중하는 모습에 비위가 상해서, 왕들에게 즉시 각자의 영지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아그립바 왕과 마르쿠스는 정적이 되었다. 그후 아그립바 왕은 마티아스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하고 시몬의 아들 엘리오네우스(Elioneus)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안나스의 친족들과 시몬의 친족들이 번갈아 가며 대제사장직을 맡은 셈이다.
43년경에 사도행전 12장1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처럼 아그립바 왕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둔 후 무교절이 끝나면 죽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빼내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아그립바 왕은 죄수가 도망친 책임을 물어 간수들을 죽였다. 그런 후에 아그립바 왕은 가이사랴로 내려갔다. 그는 황제의 안전을 비는 축제가 가까웠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곳에서 가이사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기로 했다. 축제가 다가오자 각지에서 많은 귀족들과 유력인사들이 가이사랴에 몰려들었다. 축제가 열린지 이틀째 되는 날, 아그립바 왕은 은으로 만든 멋들어진 옷을 입고 이른 아침에 야외극장으로 갔다. 떠오르는 햇살이 그의 옷에 달린 은에 비치자 어찌나 휘황찬란하던지 쳐다보는 사람들이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현란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아그립바 왕을 인간이 아닌 신이라고 외쳐댔다. 그런데도 아그립바 왕은 아첨하는 군중들을 꾸짖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때 갑자기 배에서 무서운 통증을 느꼈다. 고통은 더욱 격렬해졌고, 5일간 기진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왕위에 오른지 7년째,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의 영지에서 나오는 조세수입은 연간 1,200만 드라크마(그리스 은화)였으나 너무 씀씀이가 커서 죽을 때까지도 채권자들에게 많은 돈을 빚졌다.
아그립바 왕이 죽을때의 일을, 사도행전 13장21절~23절에서는,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아그립바 왕은 17세의 소년인 아그립바 2세와 세 딸을 남기고 죽었다. 그 소년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밑에서 양육 받고 있었다. 세 딸들의 이름과 나이는 장녀 베르니케(16세), 차녀 마리암네(10세), 세째 드루실라(6세)였다. 아그립바 왕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가이사랴와 세바스테 출신의 왕의 병사들은 생전의 아그립바 왕에게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천지 원수처럼 행동했다. 반면에 황제는 아그립바의 아들로 왕국을 잇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만류하였다. "그렇게 넓은 왕국을 아직 나이 어린 소년에게 맡기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무를 보살필 만큼 분별력이 발달하지 못한 소년을 장성한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황제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를 제7대 유대총독으로 파견하였고, 시리아 총독 마르쿠스를 아그립바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다가, 얼마 후에 그를 해임하고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를 후임으로 보냄으로써 고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