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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한다는데 왜 빨갱이로 내모나
증 언 자 : 이성길(남)
생년월일 : 1957. 7. 5 (당시 나이 23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학원강사)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1980년 법대 학생회장,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법대 단과대학 시위를 주도했다. 5월 20일까지 전남대 정문에서 시위를 주동하였다. 주모자급 학생들을 연행한다는 말에 광주를 무사히 빠져나갔으나 군대병집 소집장이 발급되어 입대하는 날 군대가 아닌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간부로 활동
1980년 당시 나는 전남대학교 법대 법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때 우리 학교에서는 학내의 반민주 요소들을 척결하고, 사회 각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던 민주화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학도호국단 어용교수, 학생 군사훈련 등 반민주적 요소를 척결하기 위해 학도호국단의 완전한 해체를 강행하였다. 나는 법대 학생대표로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활동을 하였다. 서클의 자유로운 창설과 활동을 보장하는 민주적인 학생자치기구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학생회 부활의 정당성 및 학내민주화 일정을 학우들에게 유인물을 통해 알리는 작업을 하였다.
4월 9일 박관현 씨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고 나는 법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후 학내 어용교수 퇴진을 이슈로 학원민주화작업에 들어갔다. 총학생회에서 4·19 20주년 기념식과 총학생회 부활 기념제를 통하여 민주화에 대한 여론을 조성시켰다. 의대 본관 옆에서 놀이마당을 하며 학생회 출범식을 지역의 주민들에게 알리는 데도 학우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4월 19일 이후 학내문제는 학외문제로 발전해 갔다. 총학생회는 최규하 내각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유신잔재의 청산과 그들의 계엄통치 연장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과도정부의 민주일정제시, 계엄령 해제, 정부의 개헌주도 거부, 민주인사 석방, 노동자 구속 및 탄압중지' 등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강경한 투쟁을 전개해 가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지침 아래 각 단과대학은 투쟁을 전개해 가겠다는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호응을 얻기 위해서라도 가두투쟁을 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법대에서는 준비단계로서 스쿨버스를 빌려 시내로 나가기로 하였다. 학교에서는 법대가 제일 먼저 가두시위를 나갔다. 먼저 시내로 나가 가두투쟁을 전개하고, 구호를 외치고 전단을 뿌리자고 토론한 뒤 후문으로 나갔다. '계엄령 철폐, 전두환 신현확 퇴진하라, 정치일정 밝히라'는 구호를 주로 외쳤다.
이때 경찰차가 법대 시위대로 들어와 만장을 걸지말고 전단도 뿌리지 말라고 하였다. 법대 학생대표부에서는 경찰들에게 우리는 전남대 의대까지 버스로 나갈 테니 그리 알라고 하며 에스코트를 부탁하였다. 경찰이 계속해서 가두시위를 막자 '호남전기' 부근에서 버스에서 내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경찰이 버스에 올라타라고 하면서 시내로 나가는 것을 더 이상 막지 않았다. 우리는 시내로 나가 버스 안에서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전남대의 학생회에 연락하여 연대할 것을 알렸다. 그러나 학생회와 연결이 안 되어 의대에서 연좌시위를 하고 버스에 승차하여 학교로 돌아왔다. 이날이 며칠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5월 10일 정도였을 것이다. 전국의 대학에서 민족적 투쟁의 깃발을 올려 투쟁할 것을 결의했고 전남대에서도 민족민주화대성회가 각 단과대학별로 진행되었다. 교내시위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했고 교문진출을 결행하였다.
5월 13일 교문에서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인 뒤 해산했다.
교문 돌파
14일은 싸움하는 데 필요한 전략과 전술까지도 계획하여 종합운동장에 모여 집회를 한 뒤 학교 교문 쪽으로 난 하천을 따라 진출해 나갔다. 교문에서 대치하고 있던 경찰이 일제히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발사하였다.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함성과 구호 속에 단과대학별로 대오를 정비하여 순식간에 정문, 후문을 돌파, 도청 앞 광장을 향해 질주해 갔다.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위대열은 분수대 주위로 집결하여 '민족민주화대성회' 개최의 흥분과 열정에 사로잡혔다. 총학생회장이 분수대에 올라 '민족민주화성회'의 시작을 알리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민주일정 제시, 과도정부의 개헌주도 정지, 비상계엄 즉각해제, 유신잔당 청산, 대학인의 민주의사 탄압중지' 등을 학생들이 제창하였다. 총학생회장은 평화적인 시위주도와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연설을 끝으로 시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받으며 학교로 돌아왔다.
5월 15일도 전날과 같은 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전경들과 직접 대치되어 부상자가 생김으로써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고 분수대에서 함께 연좌하기도 하였다.
5월 16일 오후 2시경 전문대학과 조선대·전남대·교대 등 광주지역 전대학이 도청 광장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위한 횃불대회'에 참석하였다.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가두에서 맞아주었다. 각 대학 대표가 분수대 위로 올라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고, 전남고생이 분수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이라고 하여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았다. 학생들의 성명서가 낭독된 후 구호를 외쳤다. 전날과 같은 구호로 민주화 요구에 대한 성토대회를 마치고 이에 합세한 시민들과 야간 횃불시위를 벌였다. 전남대생들은 2개조로 나뉘어 금남로를 거쳐 계림오거리, 시청 앞 사거리, 산수오거리, 농장다리로 해서 도청으로 왔다. 경찰들의 경비도 있었지만 자체내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결의했고 학생대표들이 횃불시위의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수시로 경호하는 등 수십만 군중들 틈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마쳤다. 이날 시위 때 보여준 시민들의 호응으로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요구와 열망을 확인한 셈이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지도부는 그날 있었던 일을 점검하고 앞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지 않으면 다음주부터 수업에 들어가자고 하였다. 오늘 시위를 통해 학생들이 외치는 요구가 시민들에게도 잘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휴교령이나 계엄이 확대 실시되면 학교에 모이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 총학생회 단대장 대표들과 함께 집행부 회식을 갖고 투쟁방향을 의논하였다.
17일 저녁 법대 학생회 대표들을 소집해 학교 부근의 식당에서 회식을 하며 법대 투쟁방향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 자리에서도 별일이 없는 이상 정상적인 수업에 들어가자고 이야기를 모았다.
며칠간의 계속된 시위에 지쳐 술을 조금 마셨던 탓인지 피곤이 엄습해 왔다. 그날 저녁 총무부장 집으로 가서 잠을 잤다. 당시 나는 학교내의 법정연구 고시반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중이었으므로 숙식을 주로 학교에서 해결하였다. 가끔 큰누나 집에 들러 먹을것과 옷가지를 바꿔왔지만 그즈음에는 연일 계속된 시위로 학교 공부엔 신경쓸 틈이 없었고 거의 학생회실에서 밤을 지새웠다.
17일 저녁 친구와 곯아떨어져 자다가 틀어놓고 잔 라디오에서 전국 대학의 휴교령과 비상계엄이 확대, 실시됐다는 방송을 듣고 새벽녘 깨어났다. 옆에서 자고 있던 친구를 깨워 라디오를 들어보라고 재촉하였다. 선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염려하며 전남대 정문 앞으로 8시경 도착하였다.
개구멍을 뚫고 학교로 들어가
정문에는 계엄군이 완전무장을 하고 서 있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들어갈 수 없다고 막으며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때 교수들이 교수회의를 소집하였다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만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교수님들이 왜 들어갈 수 없느냐며 항의하자 계엄군이 교수님을 몽둥이로 막으며 때리기도 하였다. 여느 때보다 살벌한 계엄군의 무장과 횡포에 우리들은 정문 앞에서 흩어질줄 모르고 학우들이 더 불어날 것을 기다렸다. 나는 계엄군이 학교를 장악했다면 학교에 있는 법정연구 고시반의 친구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가장 궁금하였다. 교문에 모인 학우들의 말에 의하면 17일 저녁에 학교에 있었던 사람들은 본관 건물 3층 회의실로 끌어냈다고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계엄군 앞으로 걸어나갔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자세로 학교에 들어가 책을 가져와야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을 하였지만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나와 법대 총무부장을 하던 친구, 그리고 총무부 차장 셋이서 학교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정문과 후문에는 계엄군이 있으니 농대 뒤쪽으로 하여 들어가기로 하였다. 농대 뒤쪽은 계엄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수림이 많은 곳에 쌓여 있는 수도 개구멍을 타고 들어가 법대 뒤쪽 숲을 통과하여 갔다. 법대 현관에 가보니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벽에 붙은 대자보와 플래카드 등이 떨어지고 찢어져 밟힌 자국으로 짓뭉개져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수위가 다급하게 말했다.
"성길이 너 죽으려고 들어왔냐. 계엄군한테 발각되면 큰일이니 얼른 나가라."
"괜찮습니다. 모두들 잡혀가는데 뭐 어떻습니까? 궁금해서 온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태연히 대답하고 법정연구 고시반으로 가려는데 수위 아저씨는 우리를 붙들고 계속 말렸다.
"나도 어젯 저녁에 그놈들한테 맞고 실신했다 새벽에야 깨어났다. 수위라고 아무리 말해도 인정사정 안 두고 때리더라. 깨어보니 본부 3층 회의실이었는데 직원들만이라도 내보내달라고 사정해 겨우 이쪽으로 온 것이라니까."
나는 총학생회장이 분명히 학교에 있었을 텐데 어찌되었는지 궁금했다.
"아저씨, 총학생회장은 어찌되었소?"
"글쎄, 잘 모르겠구만. 어쨌든 어젯 저녁 학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전부 본관 건물에 잡혀 있어."
우리 셋은 그럴 것이 아니라 우선 총학생회장실로 가보자고 하였다. 셋이 다니면 위험하니 선발대로 친구 두 명이 가기로 했다. 우리는 중앙도서관 뒤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대학원 뒤쪽으로 하여 상대를 지나 중앙도서관 뒤로 갔다. 친구들이 오지 않아 망설이다가 법정연구 고시반으로 들어가 책가방을 들고 나와 제1학생회관으로 가보았다. 공수 두 명이 나를 향해 뒤에서 집총으로 "손 들어!" 하고 외쳤다. 그들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경상도 말투로 다그쳤다.
"넌 뭐야? 이놈 뭐하러 학교에 왔냐?"
"우리도 대학 다니다 군대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왜 데모만 해."
긴장해 있는 중에도 대학에 다니다 왔다는 말이 솔깃했다. 저들도 대학에 다니다 왔다하니 학생의 입장을 말하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할 때 데모만 일삼는다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왜 시위를 하는지 근본원인을 생각해 보았어요?"
하고 겸손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한번 같이 생각해 보자고 깨우치기까지 하였다.
군인들은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왜 학교에 왔는지 캐물었다.
"공부하러 왔는데 휴교령이 내려져 교문이 닫혀 있길래 책을 사러 왔습니다."
"서점이 어디에 있다고 헛소리야."
그들은 되지도 않는 말을 한다고 의심했다. 내가 구내서점 있는 쪽을 가리켰다.
"있긴 있구나."
하고는 그래도 의심스러운 듯,
"너! 어디로 들어왔냐?"
"농대 뒤로 해서 들어왔습니다."
"이리 가면 죽는다. 빨리 나가라."
정문 쪽을 가리키며 그들이 말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난 나는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서 정문 앞으로 갔다.
전남대 정문 앞
학생회로 갔던 친구 두 명을 정문 앞에서 만나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총학생회실에 가보았더니 기물은 부숴져 있고 쑥밭처럼 어지럽혀져 있더라고 했다.
총학생회장은 학교에서 빠져나간 것 같다고 했다. 그 친구들은 학생회실에서 나와 중앙도서관으로 갈 틈 없이 동산 쪽을 통해 물대롱을 타고 농대 쪽으로 하여 나왔다고 하였다.
정문에 모인 학생들의 수가 차츰 많아졌고 14, 15, 16일 연일 싸웠던 역량으로 고조된 학생들은 이렇게 있지 말고 학교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계엄군들과 싸워야 한다며 서서히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학교 운동장에는 트럭이 있었고 군인들이 텐트를 쳐놓고 제식훈련을 하고 있었으며 학교 밖의 사정을 살펴보고 있었다. 학생들이 교문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나가자 계엄군의 막사로 연락을 하였는지 1개 소대 군인이 바로 증원되어 교문 앞으로 나왔다. 메가폰을 든 군인이 "휴교령이 내렸으니 귀가하라. 5분내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조치할 테니 어서 집에 돌아가 가정학습에 임하라"고 반복하였다.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을 들어 싸울 기세로 투석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계엄군은 여느 때와는 달리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총기를 앞으로 하였고 하나에서 다섯까지 세더니 학생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1개 소대 병력이 계속 돌진하여 학생들을 향해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러댔다. 골목까지 쫓아가 학생을 질질 끌어냈고 워커발로 짓뭉갰다. 교문 앞 지금의 주택지에서 그때는 공사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이에 질세라 학생들 2백-3백명은 한 시간 정도 실랑이를 벌이며 싸웠다. 하지만 끌려간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이대로 싸워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시민들에게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는 시내로 나가 싸우자고 하였다. 특정한 학생이 시민들과 동참하여 싸우자고 했던 것은 아니고, 또한 학생지도부가 있어 계획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싸우자고 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시내로 진출
하루 전에 가두시위를 했던 것처럼 4열종대로 하여 금남로 지하상가가 있는 곳에서 전경과 부닥쳤다.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학생들과 전경들이 서로 밀리고 밀치는 가운데 금남로 5가 태평양화학까지 전경들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전경들에게 무슨 지시가 떨어졌는지 유동 쪽에서 계엄군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무작정 잡히기만 하면 곤봉과 군화발로 짓밟으며 포효하듯 시위대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줄곧 김경석, 박기수와 셋이서 다녔는데 박기수와는 시내에서 헤어졌다. 김경석과 함께 계림파출소 앞으로 가서 투석전을 벌이다 저녁 8시경 기수 친구집으로 가서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의논하였다. 학생 대표들이 수배된 상태이기에 연락도 취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제가지 싸워왔던 방식으로 싸우다간 계엄군의 잔악한 횡포를 당해 낼 재간이 없고 언제까지 그들에게 당해야만 하는지 암담했다. 큰누나 집에 전화를 했더니 군인들이 군화를 신은 채 집안까지 들어와 나를 찾았다고 몸을 피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싸움을 시작해 놓고 이를 수습하지 못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고 또 그냥 무책임하게 내버려두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피신
다음날 19일 아침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투석전을 벌이며 계엄군과 싸웠다. 흩어지고 밀리는 가운데 장동로터리 전남대 의대까지 밀리고 밀치는 싸움이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이젠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시위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박기수가 계엄군의 탄압이 차츰 살육만행으로 번지고 있고 이렇게 있다가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면서 박관현 형도 광주를 빠져나간 것 같으니 너도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하였다. 학생대표부는 수배중이니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궁리 끝에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생각났다. 평소 아저씨라고 하며 잘 따랐다. 누나와 친한 사이여서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지산동에 살고 있어서 그곳으로 일단 갔다. 아저씨도 날 보더니 잡히면 성하기 어렵다고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하였다. 20일 아침 완도 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터미널로 가서 강진 마량 방면의 완행버스를 탔다. 운전기사 바로 뒤에 앉으면 검열관이 뒤로 향하여 검열을 하기 때문에 걸릴 염려가 없었다. 두 번의 검열이 있었지만 다행히 검열당하지 않고 강진에 도착하였다. 집에 연락하여 보니 부모님께서 집에 오면 안 된다고 하여 고금도에 있는 외가집으로 가서 지하굴방 생활에 들어갔다. 사람들과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라디오에 의존하며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작은누나의 매형이 가끔 찾아와서 광주 소식과 집안 소식을 들려주어 26일까지 그곳에 있었다.
항쟁이 끝나면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여 27일 그곳에서 완도읍으로 가 한려수도로 갔다.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간 뒤 다시 광주로 왔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지산동 아저씨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았는지를 들었다. 당시 상황을 예상만 했으면 아무리 주위의 걱정과 만류가 있었어도 그렇게 빠져나가지 않았을텐데 후회스럽기만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수배상태인 나는 광주에 있는 것도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가 누님집에 연락을 해 조용한 산사에 들어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마침 광주 소식이 궁금하여 내 소식을 알고자 누나집에 연락을 했는데 그 친구가 고시공부를 하던 곳에 가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계엄군이 진압하고 난 뒤 수배중인 학생대표 중 자수한 사람도 있으니 자수를 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수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 친구와 가평에서 고시공부를 한다는 곳에 가기로 마음 먹고 광주역에서 친구와 함께 열차를 타고 떠났다. 고시촌에 있는 학생들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사실대로 믿지 않으려 하였다. 나는 조용히 있다가 5·18 민중항쟁에 대해 본 대로 이야기를 하였다.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광주시민을 폭도로 간주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만은 없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여기에 있는 사정도 광주민중의 혈전에 쫓기어 왔다고 말한 뒤 잘못 알고 있는 광주상황을 이야기하였다. 나중엔 그들도 수긍하며 나의 처지를 위로하여 주곤 하였다. 이렇게 가평에 6개월 정도 있는 동안 서울에 있는 사촌이 나의 하숙비를 대주었다. 공부를 하는 고시생들은 틈만 나면 여가를 이용해 나를 찾아와 광주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까지 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현재 제도언론에 왜곡되어 사실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결코 폭도가 아니다, 이런 사실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얘기해 주면 타지역 사람들도 점차로 이해했다.
병집 신체검사 통보
1981년 미검자 공고령이 내릴 때 병집 신체검사가 나왔다고 1월초 동생이 가평에 찾아와 알려줬다. 찾아온 내력은 신체검사가 발부되었으니 함께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신체검사가 발부될 때도 아니었건만 신체검사장까지 나온 것을 보니 그들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시간에 이르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가는 것이 앞당겨졌다고만 생각하였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월에 신체검사를 받자 얼마 후 영장이 바로 나왔다. 그것도 전두환이 광주에서 소년체전 한다고 내려오는 전날 영장이 발부되었다. 목포로 친구들과 내려가 환송식을 조촐하게 가진 뒤 군대에 들어갈 각오를 하였다. 군대 가는 일이 나의 소임이라면 그것을 생활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위해 자주와 민족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정리하였다.
너같은 자식은 군대에 보낼 수 없어
다음날 유달국민학교에 8시 30분에 소집되어 가기로 되어 있었다. 유달국민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헤어져 5분 늦게 들어갔더니 늦었다고 처음부터 기압을 주었다. 기압이 끝난 후 영장을 내고 나의 이름을 대었더니 갑자기 양팔이 붙들려졌다. 정보과 직원이 미리 와서 데리고 갈 양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왜 이러시오. 군대에 들어간다는데 왜 못 가게 하는 거요."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정보과 형사가,
"너같은 자식이 군대에 가면 다 빨갱이 물이 들어 군대에 보낼 수 없어."
하고는 수갑을 채웠다. 그 순간 인간적 모멸감과 분노가 치솟았다.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무어라 호소하여야 할지 몰랐다. 나는 사정을 하였다. 병역의무를 마칠 테니 군대에 보내달라고 하였지만 영장은 국방부로 넘어가지 않고 병무계로 다시 넘어가고 말았다. 목포에서 완도로 데리고 가던 중 나를 이런 식으로 매장하려고 하냐며 머리깎고 왔지 않느냐, 나를 내버려 두라고 하소연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정보과 형사는 미검자 수배령자들 이해관계가 결합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선 정보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완도 경찰서로 데리고 가더니 유치장에 가두고 말았다. 왜 광주에 보내주지 않간냐고 따졌더니 아무 말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하였다. 그날이 전두환이 광주에 온 날이었기 때문에 그날을 피해 완도에 둔 것이었다. 다음날 완도에서 광주 서부경찰서에 인계되어 일정한 절차도 밟지 않고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미검자에 대한 공고령이 떨어졌음에도 구속의 기준이 떨어지지 않아 무작정 유치장에 갖히게 된 나는 법적 절차도 밟지 않고 4개월 가량 유치장 생활을 했다. 그때 고문이나 취조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나중에 석방되어 나올 즈음 법대 학생과장님과 교수님이 찾아와 신원보증을 하겠다고 하였으며 위로도 해주었다. 불구속 기소로 나와 재판은 받지 않았고 집행유예로 소요 및 계엄포고령 위반의 요식을 받고 나왔다.
1983년에 복학하여 1984년 9월에 코스모스 졸업을 하였다. 복학하기 전 1982년에 상아탑학원에서 방학을 이용해 검정고시를 지도한 것이 인연이 되어 학교를 졸업한 뒤 입시학원에서 강사를 하였다.
1980년 5월만 생각하면 부끄러워
지금 1980년 5월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고 욕됨을 감추기 어렵다. 5월 22일부터 27일 사이 광주에 남아 현장에서 온몸으로 투쟁하지 못한 자책을 느끼고 있다. 학생들이 시작한 싸움을 수습하지 못한 죄책감만 든다. 먼저 간 영령들의 뜻을 받들어 현재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 민주화 실행에 앞장서 조국 민주화와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원강사 대우는 근무하는 자들의 책임과 직업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하여 뿌리를 내리는 것이 선행되었을 때 인간의 노동이 상품으로서 화폐의 척도로 재어지는 것이 아닌 참인간교육의 지표에 이를 것이다. 현재의 포부는 입시학원 뿐만 아니라 각 외국어학원, 고시학원 더 나아가 유아원의 교사들까지 각 직장별 노조를 만들려 하고 있다.
그리고 1980년 학생회 임원이었던 친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이 있는데 시대상황 속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논의하고,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자원봉사대 30명을 조직하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만든 스크랩을 각 지역에 나가 배포하며 5월의 참상을 알렸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 때는 유세장에 다니면서 1980년 5월의 참상과 비디오 상영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홍보활동을 벌였다. 무엇보다 시민정신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고 군부독재의 종식을 위해 뭉치자는 데 의의를 찾고 있다.
박관현 열사의 기념사업회를 주관하여 올해(1988년) 6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광주시민의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 싸우다 간 고인의 넋을 기리며 이 시대 살아 있는 자로서 끊임없는 비민주적 처사에 방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만이 욕됨을 씻어낼 것이다.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활기찬 월요일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