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관문 코린토스(Korinthos)
부와 환락의 상징이자 그리스의 열쇠도시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탕녀의 지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면 탕녀와 결합하는 자는 그와 한몸이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둘이 한몸이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48쪽)
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은 이런 편지를 썼을까?
코린토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명이 넘는 여사제(국가 공인 창부)들이 관능적인 춤으로 넋 나간 사내들의 주머니를 털던 장소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신도들에게 ‘제발 정신줄 좀 놓지 말라’는 근심과 경고를 담은 편지를 수차례나 썼을까?
코린토스인들은 기원전 338년 처음 성채에서 밀려난 이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노르만, 프랑크, 베네치아, 터기에 교대로 능욕당하며 19세기에 이를 때까지 굴종의 역사를 이어갔다. 사라센, 슬라브, 훈족을 비롯한 북방의 이민족들에게 당한 노략질을 제외하고도 그 정도다.(40쪽)
한번 잃어버리면 쉽게 되찾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땅, 내 나라다.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민족은 노예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며, 분열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역사의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모든 이들이 정복하기를 열망했던 땅, 모든 지배자들이 함락하고 싶었던 성채, 사람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쌓고 싶어 했지만 난공불락이란 없었다. 인간이 쌓아올린 것들 중에 무너지지 않는 것은 없으며, 지키려는 것 중에 영원한 것도 없다.
코린토스 박물관에서 주목해야 할 유물은 도자기 전시실이다. 당시 그리스의 도자기들은 예술적 가치 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의 도자기는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배에 실어 흑해와 이집트로 가서 곡물을 바꿔오는 교역에서 컨테이너의 역할을 했고, 농장이나 가정에서는 생산한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보관하는 저장고의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73쪽) 포도주가 쉽게 변질되지 않도록 공기 투과성이 높은 질 좋은 항아리 자체가 주요 교역품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중 최고로 치는 것이 바로 코린토스 도자기였다.
예술과 기술의 차이는 대상에서 어떤 얼굴을 보느냐 하는 것이다. 즉 남들은 무심결에 지나치는 사물의 이면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느냐 하는 관점의 차이 말이다. 기술자는 대상을 정교하게 모방하지만 예술가는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재해석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탁월할 경우에 예술이 당대를 넘어 영원한 시대성을 얻게 된다는 뜻이리라.(77쪽)
카이사르가 부하들이 살 땅을 이곳(코린토스)에 마련해주려고 재건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코린토스의 지정학적 매력과 환락에 대한 추억이 그곳을 다시 로마식으로 재건하고픈 욕망으로 치환됐을 것이다. (79쪽)
유럽과 아시아의 상인들이 모두 모여들었던 코린토스는 동서양의 문화와 신화 그리고 종교들이 뒤섞여 있던 곳이다. 특히 코린토스가 로마에 점령당한 이후 이곳은 이교도들의 신앙과 관습이 유연하게 뒤섞여 세상의 모든 신과 그들의 창조물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의 핏속에는 초기 사도 바울의 설교가 쉽게 스며들었다고 한다.(85쪽)
바울의 전도는 이교도 문화에 수용적인 코린토스인들과 달리 율법을 앞세운 근본주의자들인 이곳의 유대인에게 거부되었다. 결국 유대교의 랍비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간 대제사장 가야바처럼 바울을 코린토스의 총독 갈리오 앞에 끌고 갔다. 유대인들에게 핵심 문제는 ‘예수를 메시아로 볼 것인가’라는 점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가’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갈리오는 빌라도처럼 ‘율법의 문제는 로마인의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울을 방면했고, 이때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연설한 난간이 바로 베마다. (86쪽)
그리스 신전(아폴론 신전- 코린토스의 거의 유일한 그리스 유적)과 로마 신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로마의 신전은 북적이는 시장과 상가 혹은 관공서가 늘어선 광장 어디에나 세워졌지만, 그리스의 신전은 그 입지에서부터 자연과의 탁월한 조화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신전 어디에서도 그것을 넘어 바다나 평원이 보이지 않는 곳이 드물다.(87쪽)
코린토스는 천혜의 지정학적 장점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위치라는 의미의 이면엔 지정학적으로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실제로 코린토스의 방벽은 아티카를 유린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도 주춤거리게 만들었고, 오스만투르크의 강력한 육군도 엄청난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는 돌파할 수 없었다. 즉 아티카에서 펠로폰네소스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코린토스의 방벽을 넘어야만 했다. 그 때문에 펠로폰네소스의 최강국 스파르타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코린토스를 항상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 했고, 코린토스의 정치체제에도 일일이 간섭을 일삼으며 ‘가치 동맹’을 강요했다.(108쪽)
코린토스에서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능력보다 대중에게서 공적 헌신성을 인정 받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자선’이라는 말의 어원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121쪽)
지도자는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더군다나 무모하게도 역사와 직접 대화하려는 지도자는 위험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지도자의 욕심은 눈을 멀게 하고 이성을 마비시켜 반드시 무모한 결정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역사에 남겨야 할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동시대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최초로’라는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는 유아적 도취에 빠진 지도자를 둔 국민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126쪽)
2. 네메아
네메아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크레타산과 더불어 그리스인들이 손꼽는 최고의 와인 중 하나다.
으레 그렇듯 영웅(콜로코트로니스)의 삶은 늘 질시의 대상이 되고 그로 인한 비탄과 고뇌가 운명처럼 함께 하는 모양이다. (148쪽)
3. 스파르타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헌신은 가족의 범위를 넘어 서는 것이었다. 모든 시민은 평등했고,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반면 노예나 반자유민들에게는 엄격하고 냉정했으며 잔인했다.) 권리와 특권은 반드시 의무와 함께했고 심지어 왕이라 하더라도 특혜를 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시민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 힘이었으며, 그들이 가진 용맹의 원천이었다. 스파르타와 맞선 적들이 공포에 질려 줄행랑을 칠 때 그들은 본원적 공포를 극복하고 당당히 맞선 것이다. 내가 등을 돌리면 동료가 죽고, 우리가 패배하면 공동체가 죽는다는 그 초월적 헌신성은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내 목에 칼을 들이대면 벌벌 떨지만 그 칼이 사랑하는 이에게 겨누어지면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 인간이듯, 스파르타인들은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성벽을 쌓은 셈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417쪽)
4. 에필로그
코린토스에서 페리안드로스와 참주제를 돌아보고, 네메아에서 영웅을 되새기며, 아르고스에서 신화 속에 음각된 역사의 진실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더불어 스파르타에서 리쿠르고스와 레오니ㅏ스, 무엇보다 헬레네로 집약되는 탁월함, 그 인간적 상승의 길이 전하는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야한다.
제1부 펠로폰네소스 편 세 권, 제2부 아티카 편 네 권, 제3부 테살로니티 편 한 권, 제4부 마그나 그라이키아 편 두 권 등 모두 열 권의 책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432쪽)
'위대한 여행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닮아 그리스 여행을 통해 깊이 있는 통찰과 사색을 하고 있는 박경철 님의 후속작이 기대된다. 타 문명권의 역사와 속살을 드러내주는 그의 작품을 통해 안방에서 노력없이 달콤한 맛을 느끼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