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개경과 서경 등 주요 지명의 고찰 (2)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강역을 아래와 같이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를 비롯하여 5도(道)와 북계(北界), 동계(東界)로 구분하여 소속하는 각 지명들의 연혁이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
동계(東界),
북계(北界)
그런데 상기한 5도 양계는 대체로 현재의 우리나라 땅에 적절하게 안배되어 소속되는 있는 각 지명들을 배치하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간 밝혀낼 수 있었던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고려하면서 고려시대의 각 지명들의 위치를 추정해 보면, 모든 지명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변이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동계(東界)에 속하는 지명들 중에는 윤관의 9성에 해당하는 지명들 뿐만아니라, 고려의 서쪽 지역에 있었던 지명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동계(東界)에 속하는 지명들이 실제 동쪽에 있었던 지역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동계(東界)'란 마치 북쪽 지역에서부터 동쪽 지역에 걸쳐진 지역인양 명칭이 붙어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동계(東界)에 속하는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비록 남아있는 기록들이 대단히 부실하지마는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을 최대한 발굴하여 추정할 수 있는 지명들은 윤관이 쌓은 9성 지역과 안변부에 소속되어 있는 화주(和州)와 등주(登州)로서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고려 지명 추정지역
즉,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동계(東界)의 연혁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 14년(995년)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 정종 2년(1036년)에 동계[東界, 북계(北界)와 더불어 양계(兩界)라 하였다.]라고 불렀고, 문종 원년(1047년)에 동북면[東北面, 혹 동면(東面)·동로(東路)·동북로(東北路)·동북계(東北界)라고도 불렀다.]이라고 불렀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지역은 동여진(東女眞)에 편입되었다. 예종 2년(1107년)에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원수(元帥)가 되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으며, 공험진(公嶮鎭)의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명종 8년(1178년)에 이르러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다.
고종 45년(1258년)에 몽고(蒙古) 병사가 침입하자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반란을 일으켜 병마사(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고에 귀부하였다. 몽고는 이내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惣管府)를 설치하였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고종) 46년(1259년)에 충청도의 영월(寧越)·평창(平昌)을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충청도로 되돌렸다. 원종 4년(1263년)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다. 충렬왕 16년(1390년)에 영월·평창을 다시 내속(來屬)시켰다.
공민왕 5년(1356년)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불렀다. 7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를 보내어 쌍성(雙城)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때에 지도(地圖)를 순찰하여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의 여러 성(城)을 수복하였다.
이전에 삭방도는 도련포(都連浦)를 경계로 삼아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정주(定州)·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에 설치한 세 관문(關門)이 원나라에 편입된 지 99년이 되었다. 이때에 비로소 수복하였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강역(疆域)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렀다. (공민왕) 9년(1360년)에는 삭방강릉도라 불렀다.
이로써 살펴보면, 철령(鐵嶺) 이북은 삭방도가 되고, 이남은 강릉도가 된다. 고려 때에 혹 삭방도, 혹 강릉도, 혹 합쳐서 삭방강릉도, 혹 강릉삭방도, 또는 연해명주도라 불렀다.
한 번 나누고 한 번 합침에 따라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
관할하는 도호부(都護府)가 1개, 방어군(防禦郡)이 9개, 진(鎭)이 10개, 현(縣)이 25개이다. 예종 때에 설치한 것이 대도호부(大都護府) 1개, 방어군(防禦郡) 4개, 진(鎭) 6개이다. 공민왕 이후로 둔 것이 부(府) 2개이다."
또 동계(東界)에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를 비롯하여 안변도호부가 관할하는 화주(和州)·고주(高州)·의주(宜州)·문주(文州)·장주(長州)·정주(定州)·예주(預州)·덕주(德州)·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장평진(長平鎭)·용진진(龍津鎭)·영흥진(永興鎭)·정변진(靜邊鎭)·운림진(雲林鎭)·영풍진(永豐鎭)·애수진(隘守鎭) 등이 열거되어 있다.
또 동계(東界)에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가 포함되어 있는데, 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숭령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선화진(宣化鎭) 등이 열거되어 있다.
즉,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가 관할하는 지명들은 모두 윤관이 1107년에 여진을 정벌하고 쌓은 성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윤관이 쌓은 성들은 모두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장가구시 주변 인근지역에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으며, 현재의 장가구시에 길주(吉州)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선화진(宣化鎭)은 현재의 산서성 장가구시 선화현으로서 아직도 현대지도에 선화(宣化)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상기한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가 관할했던 지역들은 거의 대부분 공민왕이 1356년에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되찾은 지역들이라고 한다.
그간 쌍성총관부는 등주(登州) 주변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상기한 동계(東界)의 연혁에 따르면, 몽고가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화주(和州)와 등주(登州)가 서로 인근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등주(登州)는 대진국(발해)의 대조영이 698년에 처음에 나라를 세웠던 천혜의 요새지 동모산이 있는 지역으로서 대무예가 732년에 장문휴를 보내 공격했던 등주(登州)와 인접한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상기한 『고려사』 지리지 동계(東界)에 따르면, 화주(和州)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화주(和州)는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혹은 장령진(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당문(唐文)이라 불렀고[당(唐)은 당(堂)으로도 쓴다.],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화주(和州)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년)에 화주(和州)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고 고쳤다. 현종 9년(1018년)에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강등시키고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고종 때에 몽고(蒙古)에 편입되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되었다.
화주(和州)가 이로 인해 등주(登州)에 합병되었지만 여전히 방어사로 불렀다. 뒤에 통주(通州)에 합병되었다. 충렬왕 때에 복구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에 군사를 보내어 수복하고 화주목(和州牧)으로 하였다. (공민왕)18년(1369년)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키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횡강(橫江)이 있다."
즉, 화주(和州)가 고구려 때 장령진(長嶺鎭)이었다면, 대진국(발해) 때 해(海, 현 황하) 이북을 거의 모두 통일하고 5경 15부 62주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장령부와 위치가 거의 유사하다.
또 화주(和州)가 1369년에 화령부(和寧府)가 되었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국호를 정할 때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정하게 되었는데, 화령(和寧)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외할아버지의 고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화주(和州)는 현재의 산서성 화순현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곳에 흐르는 횡강(橫江)이란 바로 요수(遼水)의 상류에 해당하는 현재의 청장하(淸漳河)로 추정할 수 있으며, 화주(和州)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북계(北界)에는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와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서경이 평양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현재의 이북 평양에 고려 서경(西京이 있었으며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이라고 꾸며논 것임을 알아챌 수 있지 않은가?
즉, 고려의 개성부(開城府), 즉, 개경(開京)은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낙랑 땅에 있었는데, 서경이 어떻게 평양에 있었겠는가?
그러나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이 990년 10월에 요성(遼城)에 행차하는데, 바로 서도유수관(西都留守官)에게 잠시라도 임소(任所)를 떠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요성(遼城)이 서도(西都), 즉, 서경(西京)으로서 요동성(遼東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고구려 요동성은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요동성이 바로 서경(西京)으로서 서도(西都)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 북계(北界)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에 따르면, 평양부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략) 태조 원년(918년)에 평양이 황폐하다 하여 염주(鹽州)·배주(白州)·황주(黃州)·해주(海州)·봉주(鳳州)의 백성들을 옮겨 그곳을 채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서경(西京)이 되었다. 광종 11년(960년)에 서도(西都)라 고쳐 불렀다. 성종 14년(995년)에 서경유수(西京留守)라 불렀다. 목종 원년(998년)에 또 호경(鎬京)이라 고쳤다.(중략)"
즉, 고려 서경으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주변 지역에는 염주(鹽州)·배주(白州)·황주(黃州)·해주(海州)·봉주(鳳州)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지명들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북계(北界)에 속했다는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동에 해당하는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의 서쪽 지역(요동)에 해당하는 지역이 북계(北界)에 속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의 바로 북쪽에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쌍성총관부에 해당하는 화주(和州)와 등주(登州) 등이 동계(東界)에 속하는 지명으로서 현재의 하북성 형태시 주변 지역에 놓여 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북계(北界)와 동계(東界)에 속하는 지명들은 서로 혼재되어 있으며, 실질적으로 북계(北界)와 동계(東界)의 의미가 없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북계(北界)에 속했다는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는 현재의 하북성 탁주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근거는 바로 영주(寧州)의 연혁이다.
즉, 영주(寧州)에 옛날에 살수(薩水)라고 부른 강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살수가 현재의 이북 천청강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 땅이 마치 현재의 우리나라 땅에 있었던 것처럼 꾸민 것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주(寧州)는 본래 고려의 팽원군(彭原郡)인데, 태조 14년(931년)에 안북부(安北府)를 두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영주(寧州)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현종 9년(1018년)에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라고 불렀으며, 공민왕 18년(1369년)에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고 한다.
따라서 영주(寧州)는 안주(安州)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안북부(安北府)였음을 알 수 있다.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는 25개주를 관할했으며, 진(鎭)이 12개이고, 현(縣)이 6개인데, 아래와 같이 총 46개의 지명들이 열거되어 있다.
"구주(龜州)·선주(宣州)·용주(龍州)·정주(靜州)·인주(麟州)·의주(義州)·삭주(朔州)·창주(昌州)·운주(雲州)·연주(延州)·박주(博州)·가주(嘉州)·곽주(郭州)·철주(鐵州)·영주(靈州)·맹주(孟州)·덕주(德州)·무주(撫州)·순주(順州)·위주(渭州)·태주(泰州)·성주(成州)·은주(殷州)·숙주(肅州)·자주(慈州)·영덕진(寧德鎭)·위원진(威遠鎭)·정융진(定戎鎭)·영삭진(寧朔鎭)·안의진(安義鎭)·청새진(淸塞鎭)·평로진(平虜鎭)·영원진(寧遠鎭)·조양진(朝陽鎭)·양암진(陽岩鎭)·수덕진(樹德鎭)·안융진(安戎鎭)·통해현(通海縣)·영청현(永淸縣)·함종현(咸從縣)·용강현(龍岡縣)·삼화현(三和縣)·삼등현(三登縣)·강계부(江界府)·이성부(泥城府)·수주(隨州) 등 46개 지명"
즉, 서희 장군이 쌓은 9개 성 중에서 귀주(龜州)·선주(宣州)·곽주(郭州)·영주(靈州)·맹주(猛州) 등 5개 주와 안의진(安義鎭)이 포함되어 있다.
또 고려 천리장성이 지나가는 17개 지명 중에서 정주(靜州)·삭주(朔州)·운주(雲州)·맹주(孟州) 등 5개 주와 영덕진(寧德鎭)·위원진(威遠鎭)·정융진(定戎鎭)·영삭진(寧朔鎭)·청새진(淸塞鎭)·평로진(平虜鎭)·영원진(寧遠鎭) 등 7개 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상기한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영주(寧州)에서 관할하는 지역 중에서 구주(龜州)는 정원부(定遠府)로 승격되었다가 정주(定州)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성주(成州)는 본래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의 고도(故都)라고 하니 현재의 산서성 령구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선주(宣州)는 통주(通州)라고도 했으며, 의주(義州)는 보주(保州) 또는 포주(抱州) 또는 파주(把州)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또 운주(雲州)는 운중(雲中) 또는 위화진(威化鎭)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또 가주(嘉州)는 태주(泰州)·박주(博州)·무주(撫州)·위주(渭州) 등과 합쳐졌다가 다시 나누어졌으므로 모두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또 영주(靈州)는 흥화진(興化鎭)이라고 한다.
또 맹주(孟州)는 은주(殷州)에 병합되었다가 안주(安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고 한다. 또 덕주(德州)는 장덕진(長德鎭)이라고도 하는데, 성주(成州)에 예속되었으며, 은주(殷州)도 성주(成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고 한다.
즉, 덕주(德州)·성주(成州)·은주(殷州)·안주(安州)·맹주(孟州) 등은 모두 인근 지역에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숙주(肅州)는 통덕진(通德鎭)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안의진(安義鎭)은 곽주(郭州) 소속이라고 한다.
또 정주(靜州)와 의주(義州)는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