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부설원기의 위서 논의 글에 대한 반박
최근에 연안차씨종친회 중앙본부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 (연안차씨종친회 중앙본부 cha.or.kr) 에 「차원부 설원기의 위서 논의」라는 글이 2017년 3월 2일자로 올라와 있다. 이 글의 결론을 요약하면 연안차씨 종친회 중앙본부 문헌 위원회에서 차원부 설원기 및 원파록의 위서 여부를 검토한 결과 “ 잘못은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다” 즉 차원부 설원기는 위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안차씨 종친회 중앙본부 문헌 위원회의 주장에 대하여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반박하고 한다.
“ 최초의 《설원기》에 대한 기록은 구봉령(1526~1586)의 《백담선생문집》 권9에 소개된 바 있다 ” (연안차씨 종친회 중앙본부 문헌 위원회 주장)
반박
1. 먼저 구봉령(능성구씨 1526-1586)이 쓴 “선조 고려 동평장사부군 묘표〔先祖高麗同平章事府君墓表〕” 에 보면 구예(具藝, 생몰미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구봉령(1526-1586)의 백담선생문집 제9권 “선조 고려 동평장사부군 묘표중에서 구예(具藝, 생몰미상)에 대한 기록
(원문)
公初自庶僚。竟致公輔。則其間豈無隆功盛烈。彪炳中外。嘉言善 行。薰染耳目。而惜其家牒毁缺。國乘茫昧。竟無傳焉。豈不痛哉。惟現於雪冤記者。謂公謹身下士。不忘其祖之寒賤。亦謂府院君。以王室椒親。位登樞密。當忠宣北朝之日。思王所嗜。則對鹽菁而灑涕。念已寒系。則聞螺角而下床。斯二父積德流光。豈無其遐云爾。則是特管中之豹。九苞之一毛耳。於公未足爲增損。而爲子孫者。沐浴餘澤。佩服先訓。思之思之。又重思之。則其於無忝之義。庶或近之矣。鳳齡猥以不肖。竊祿
(번역문: 한국고전종합DB)
아, 공은 처음 서리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공경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그 사이에 어찌 성대한 공렬을 세워 안팎으로 드러나고 좋은 말씀과 선한 행실이 사람들의 이목에 남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가첩(家牒)이 훼손되고 나라의 역사서가 거칠고 어두워 끝내 전하는 것이 없다.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오직 원통함을 씻은 기록(원문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惟現於雪冤記者 로 (차원부)설원기를 말하는데 한국고전종합 DB에서는 설원기를 원통함을 씻은 기록으로 번역하였다) 에 드러나는 것은 공은 근실한 하사(下士)로 그 선조의 한미함을 잊지 않았다고 할 수 있고, 또한 부원군은 왕실의 인척으로 지위가 추밀원에 올라서 충선왕이 북으로 원나라에 조회하던 날에 왕이 좋아했던 것을 생각하여 소금에 절인 무청을 보고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한미한 가문을 생각하면 나각(螺角)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는 두 아버지의 쌓은 덕이 빛을 낸 것이니 어찌 먼 후손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는 다만 대롱으로 표범을 보는 격이고 구포에 한 터럭이 될 뿐이니,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자손 된 사람이 남은 은택에 목욕하고 선조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생각하고 생각하며 또 생각하면 선조를 더럽히지 않는 뜻이 아마도 거기에 가까울 것이다.
❒ 차원부설원기 기(記)에 나오는 구예(具藝, 생몰미상)에 대한 기록
“차송우(? - 1268)는 고려 고종조의 훈구(勳舊) 노신이다. 전일에 권신 최충헌 자손 4대가 국권을 계속 잡아 조정의 기강을 어지렵혔는데 역적의 싹이 이미 중국에서 드러났었다. 공이 류경(1211-1289)등 10여 명과 같이 임금을 도와 대계를 결정하여 최의 등 뭇 흉측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옛날 정사를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위사(衛士)의 호칭을 받았다.
차송우는 왕씨의 지친으로 벼슬이 내시윤에 이르렀는데 내시는 내시윤(內侍尹)으로서 1품이나 2품등이 있어 겸직하였다. 궁중의 환관을 거느려 임금의 행동에 따라 지휘를 하는데 매우 가까운 종친이나 외척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공이 왕씨의 사직을 호위한 훈신(勳臣)으로 원나라 조정에 이름이 드러나 금은제기(金銀祭器)를 하사 받았는데 그의 아내 구씨(능성구씨 구예의 딸)가 꽃(妓女)을 질투하여 깨트리였으므로 물의가 생겨 임금을 움직여 그의 아내 지기(之己)가 영원히 부모의 은혜를 끊고 오로지 여자의 행실에만 고민한다고 벌을 주었다. 공이 또 부끄러워하고 송구(悚懼)하여 10여 년 간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질투하는 아내 성질의 어려움을 경계하였다.(공에게 아내 다섯 명이 있었다. 구씨가 아들 넷을 낳았다. 그 뒤에 두 집의 권신 딸에게 장가를 갔는데 끝이 좋지 않아 결국 내서 강윤소에게 참소를 입어 간신 임연에게 해를 입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혹은 공이 1백7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신라 본계에 있어서는 고려조 서희가 찬집한 찬집여사(撰集餘史)와 정시상의 서경잡지(西京雜記 ) 김방경의 초당일기(草堂日記)에 드러나 있다.
그 뿌리는 세은지관(世恩之觀)에서 태동하였고 신(신발)은 귀봉지계(龜封之階)에다 놓았다. 세은(世恩)이라는 것은 왕씨의 지친으로 대대로 왕씨의 국은을 입었다는 것을 일컫는다. 귀봉이라는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계단을 꾸미는 것이다. 종족(宗族)이 아니면 할 수 없다.
몸은 비록 귀하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람이 비록 천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궁핍한 외딴 마을에서 평범한 신분일 적의 뜻을 변치 않았다. 위포(韋布한색한 의복)의 뜻을 변치 않는 것은 귀해져도 평범할 때의 뜻을 변치 않고 외딴 마을에서 살 때의 은혜와 친구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인 구예도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전에는 공이 송우의 첩 손서였는데 뒤에는 공이 도리어 송우의 장인이 되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비난 하였다. 왕씨의 외척으로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으나 임금이 능원(陵園)에다 연회를 하사할 때 몸소 술을 노인에게 먼저 올렸다. 밥상에 무김치를 대하면 북쪽으로 간 임금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려 충선왕이 북쪽 원나라에 가 입조(入朝)했을 때이다.) 충선왕이 무김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공이 밥을 먹을 때에 반드시 무김치를 놓았는데 북쪽으로 간 임금을 사모하기 때문이었다.
아문(衙門관청)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平床)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리며 가난하게 살던 조상이 고초를 읊었던 생각을 늦추지 않았으니 공(具藝)의 윗대 조상은 능성의 아전이였다.
아문에 소라 소리가 나면 대뜸 평상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소라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내려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이다. 전일에 권신 임연 임유무 부자를 죽였으니 잔당을 섬멸하지 못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교만과 사치를 숭상하였다.
그러나 공은 가세가 너무 성대한 것을 경계하여 외람된 생각을 하지 않고 조상이 미천한 사람에게 굽혔던 뜻으로 공손히 기를 낮추어 자신의 귀한 티를 내지 않았는가 하면 그의 사위 송우가 해를 입은 것을 더욱 두려워하여 더더욱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었다. 비록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이 있었으나 공의 이름이 큰 문벌에 속해 있으므로 화를 면치 못할까 의심하여 날마다 시종(始終) 경선(慶善)을 유지 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민첨도 근신하고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미천한 조상을 잊지 않았다. 공이 할아버지를 이어 효도하고 문채를 갖추어 일신을 편안이 보존하였고 남을 이길까? 두려워하는 등 세심히 생각한 것은 신명(神明)스럽고 덕이 있었다.
2. 구봉령(1526-1586)이 그 선조인 구예(생몰미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차원부설원기”에 나오는 차송우(?-1268)의 장인 구예의 기록과 몇 가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고 구봉령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봉령도 “선조 고려 동평장사부군 묘표(이 묘표를 쓴 시기는 1576년부터 1586년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를 쓸 당시에 차원부설원기를 보았던 것 같다.
3. 구봉령의 구예에 대한 기술을 보면 차원부설원기 내용중에 “구예” 관련된 내용중 취사선택하여 좋은 점을 기술한 것으로 “구예”는 연안차씨 선조라는 차송우(?-1268)를 기술하는 글에서 나온다. 차원부 설원기에 나오는 차송우(?-1268)와 구예(?-?)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차송우(?-1268)의 장인이 구예이다.
(2) 그런데 원래 구예는 차송우의 첩 손자 사위다.
(3) 구예는 왕의 외척으로 벼슬이 추밀에 이르렀고 충선왕(1275-1325, 재위기간 1308-1313)이 원나라에 입조할 시 항상 밥상에 무김치를 두고 먹었는데 이는 충선왕이 무김치를 좋아했기 때문이며 그만큼 구예는 충선왕을 사모했다.
(4) 능성구씨는 원래 한미한 아전 출신이다.
4. 차원부 설원기에 나오는 차송우(?-1268)와 구예(?-?)는 같은 시대의 인물도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명을 참칭하여 만든 차원부 설원기에는 혼인관계를 조작하여 차송우의 장인이 구예라고 기술하다가 원래는 구예는 차송우의 첩 손자 사위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도대체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글이다.
(1) 구예는 생몰미상으로 고려사에도 나오지 않는 인물이지만 구예의 아들/사위등에 의하며 구예의 출생년도등을 추정할 수 있다.
(2) 구예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구예(생몰미상)-- (자) 구영검(?-1356) - (자) 구위등
(사위) 류계조(문화 1333-1374)
(사위) 임급(?-?)
(사위) 최안도(1294-1340) *묘지석 있고 묘지석에 장인 구예 대한 기록이 있다.
(사위) 차송우(?-1268) * 차원부 설원기 및 연안차씨 족보, 차원부 설원기등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능성구씨 족보에구예의 사위로 차송우가 올라가 있다.
(3) 이와 같은 구예의 가계도를 가지고 구예의 출생년도를 추정하면 1260년대~1270년대로 보이고 차송우는 1200년대 초반경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데 어찌 차송우가 구예의 사위가 될 수 있다 말인가?
5. 그런데 차원부 설원기에서는 연안차씨라는 차송우(?-1268)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차송우를 구예의 사위라고 하고 기술하고 있다. 차송우가 구예의 사위라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인데 왕에게 바쳐질 공문서에 위와 같이 혼인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차원부 설원기에 등장하는 연안차씨의 고려시대 계보 및 혼인관계는 대개가 다 사실과 다르고 거의 날조 수준에 가깝다. 왕명에 의하여 쓰여졌다면 차원부 설원기에 고려시대 연안차씨 관련 혼인관계가 몇 명 더 나오는데 이 또한 거짓이다. 백번 천번 양보하더라도 이러한 사실 때문에 차원부 설원기가 진짜라는 연안차씨 주장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차원부 설원기를 보면 차원부 아들 손자등을 바꾸어 기술하기도 하였다.
6. 이에 대하여 연안차씨 종친회 중앙본부 문헌 위원회는 차원부 설원기에 나오는 고려시대 연안차씨 혼인관계가 사실과 부합되는지 명확한 답변을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