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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분황사의 천수대비전에 기도드리니 눈먼아이가 눈을 뜨다
분황사의 천수대비전에 기도드리니 눈먼아이가 눈을 뜨다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때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자 문득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註 415415 선덕여왕 3년(634)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시내의 황룡사지 북쪽에 있다.닫기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대비(千手大悲)註 416416 천수대비는 관세음보살의 한 모습이다. 관세음보살이 과거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구제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보통 천수상은 두 눈, 두 손 밖 양쪽에 각각 20수(手)가 있고, 손바닥마다 각각 25수(手)가 있으므로 결국 합해서 천수가 된다.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큰 작용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지옥의 고통을 해탈케 하여 모든 소원을 성취케 한다고 한다(이민수 역, ≪삼국유사≫, 1983, 259쪽).닫기 앞에 나아가서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불러 빌게 하니 마침내 눈이 밝아졌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을 구부리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빌어 사뢰나이다
천 손의 천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길 [바라나이다]
둘 먼 내라
하나라도 은밀히 고칠네라, 아아
나에게 끼쳐 주신다면
놓아주시고 베푼 자비야말로 뿌리되오리라
註 415
선덕여왕 3년(634)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시내의 황룡사지 북쪽에 있다.
註 416
천수대비는 관세음보살의 한 모습이다. 관세음보살이 과거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구제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보통 천수상은 두 눈, 두 손 밖 양쪽에 각각 20수(手)가 있고, 손바닥마다 각각 25수(手)가 있으므로 결국 합해서 천수가 된다.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큰 작용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지옥의 고통을 해탈케 하여 모든 소원을 성취케 한다고 한다(이민수 역, ≪삼국유사≫, 1983, 259쪽).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의식구·불화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지명 : 한기리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 盲兒得眼)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죽마 타고 파피리 불려 언덕에서 놀더니
일조에 두 눈에 총기를 잃었구나
관음의 자비로운 눈길 아니시면
버들가지 날리는 봄날을 얼마나 헛되이 보냈으리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의상법사와 원효법사가 관음보살을 견신하고자 하다
의상법사와 원효법사가 관음보살을 견신하고자 하다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옛날 의상(義湘)註 417417 속성은 김씨이고 귀족 출신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이자, 원효와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문무왕 원년(660)에 당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 개조인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종을 배우고 문무왕 10년 귀국하여 부석사와 낙산사를 창건하여 신라 화엄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방으로의 불교 확산을 주도하여 신라 변방 지역에 많은 사원을 창건하였다(박태원, 「한국 고대불교의 통합사상-원효와 의상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4, 한국사상사학회, 2000| 김두진,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성격≫, ≪한국학논총≫ 17, 1995| 정병삼, ≪의상 전기의 제문제≫, ≪한국학연구≫ 1, 1991 ).닫기법사가 처음으로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大悲]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고 듣고, 이로 인하여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대개 서역(西域)의 보타낙가산(寶陁洛伽山)註 418418 관세음보살이 있다는 산 이름이다.닫기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 하는 것은 백의보살[白衣大士]註 419419 당·송 이후 민간에서 신앙되던 33종류의 관세음보살의 하나로, 항상 흰옷을 입고 흰 연꽃에 앉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다.닫기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를 빌어 이름 지은 것이다.
[그가] 재계(齋戒)한지 7일째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위에 띄웠더니 용천(龍天)의 8부(八部)註 420420 팔부중을 이르는 말로 용신팔부(龍神八部)라고도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장(神將), 즉 천(天), 용(龍),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건달바(乾闥婆),마후라가(摩睺羅迦)를 말한다.닫기 시종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므로 의상이 받아 물러났다. 동해(東海)의 용 역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나서 곧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 상을 빚어 모시니 [그]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엄연히 하늘이 낸 듯 하였다. 그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다. 그제야 그 땅이 [관음] 진신의 주처임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고 하고, 법사는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이어 와서 [관음의 진신을] 보고 절하기를 구하여 당초에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가운데서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벼를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이 장난말로 벼가 흉작이라고 대답하였다. [법사가] 또 길을 가서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건(月水帛)註 421421 여자가 월경할 때 사용하던 도구이다.닫기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마실 물을 청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드렸다. 법사는 이를 엎질러 버리고 냇물을 떠서 마셨다. 때마침 들 가운데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불러 말하기를, “제호화상(醍醐和尙)註 422422 불성(佛性)을 비유해서 이른 말인데, 여기에서 제호화상은 원효를 가리킨다.닫기은 그만두시오?”라고 하고는 홀연히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 소나무 아래에 벗은 신발 한 짝이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 [상]의 자리 아래에 또 이전에 본 벗은 신발 한 짝이 있었다. 그제서야 앞에서 만난 성스러운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하였다. 법사가 성굴(聖崛)에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참모습을 보고자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註 417
속성은 김씨이고 귀족 출신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이자, 원효와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문무왕 원년(660)에 당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 개조인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종을 배우고 문무왕 10년 귀국하여 부석사와 낙산사를 창건하여 신라 화엄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방으로의 불교 확산을 주도하여 신라 변방 지역에 많은 사원을 창건하였다(박태원, 「한국 고대불교의 통합사상-원효와 의상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4, 한국사상사학회, 2000| 김두진,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성격≫, ≪한국학논총≫ 17, 1995| 정병삼, ≪의상 전기의 제문제≫, ≪한국학연구≫ 1, 1991 ).
註 418
관세음보살이 있다는 산 이름이다.
註 419
당·송 이후 민간에서 신앙되던 33종류의 관세음보살의 하나로, 항상 흰옷을 입고 흰 연꽃에 앉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려진다.
註 420
팔부중을 이르는 말로 용신팔부(龍神八部)라고도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장(神將), 즉 천(天), 용(龍),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건달바(乾闥婆),마후라가(摩睺羅迦)를 말한다.
註 421
여자가 월경할 때 사용하던 도구이다.
註 422
불성(佛性)을 비유해서 이른 말인데, 여기에서 제호화상은 원효를 가리킨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정치>신이>생물>식물
색인어
이름 : 조신,의상(義湘)註 417417 속성은 김씨이고 귀족 출신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이자, 원효와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문무왕 원년(660)에 당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 개조인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종을 배우고 문무왕 10년 귀국하여 부석사와 낙산사를 창건하여 신라 화엄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방으로의 불교 확산을 주도하여 신라 변방 지역에 많은 사원을 창건하였다(박태원, 「한국 고대불교의 통합사상-원효와 의상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4, 한국사상사학회, 2000| 김두진,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성격≫, ≪한국학논총≫ 17, 1995| 정병삼, ≪의상 전기의 제문제≫, ≪한국학연구≫ 1, 1991 ).닫기법사,의상,법사,법사,법사,원효법사,법사,법사,법사,제호화상,법사,법사
국명 : 당
제4 탑상(塔像第四)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범일이 굴산사를 창건하다(847년 (음))
범일이 굴산사를 창건하다 ( 847년 (음) )
후에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註 423423 신라 때의 고승으로 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창조이다. 15세에 출가하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831년 2월에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이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범일은 대오각성하였다. 그 뒤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다가 유엄을 찾아가서 선문답을 나누고 크게 인가를 받았다. 847년에 귀국하여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무르면서 정진하다가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로 옮겨 40여년 동안 후학들을 교화하였다.닫기이 태화(太和)註 424424 당 문종의 연호로 827년~835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연간에 당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렀는데, 왼쪽 귀가 떨어진 한 사미(沙彌)가 여러 중의 말석에 앉았다가 조사에게 말하기를, “저도 역시 고향사람입니다. 집은 명주(溟州)註 425425 오늘날의 강원도 강릉 일대를 가리킨다.닫기 지경 익령현(翼嶺縣)註 426426 강원도 양양군 일대이다.닫기 덕기방(德耆坊)에 있사오니, 조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꼭 저의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범일은] 총석(叢席)註 427427 총림(叢林)의 뜻으로, 많은 승려들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한다.닫기을 두루 다니더니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어 이 일은 본전(本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회창(會昌)註 428428 당 무종(武宗)의 연호로 841년~846년에 사용하였다.닫기 7년 정묘(丁卯)註 429429 정묘년은 회창 7년이 아니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원년이라고 해야 옳다.닫기에 고국으로 돌아와 먼저 굴산사(崛山寺)註 430430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 사굴산에 있었던 사찰로 847년에 범일이 창건하였다. 창건한 이래 이 절은 선문구산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발전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미터에 이르렀고, 승려수도 200여명이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까지 흘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36년 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되었고, 이때 ’사굴산사‘라는 글씨가 발견됨으로써 이 절이 굴산사였음이 밝혀졌다.닫기를 창건하여 불교를 전하였다.
註 423
신라 때의 고승으로 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개창조이다. 15세에 출가하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831년 2월에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이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범일은 대오각성하였다. 그 뒤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다가 유엄을 찾아가서 선문답을 나누고 크게 인가를 받았다. 847년에 귀국하여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무르면서 정진하다가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로 옮겨 40여년 동안 후학들을 교화하였다.
註 424
당 문종의 연호로 827년~835년에 사용하였다.
註 425
오늘날의 강원도 강릉 일대를 가리킨다.
註 426
강원도 양양군 일대이다.
註 427
총림(叢林)의 뜻으로, 많은 승려들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한다.
註 428
당 무종(武宗)의 연호로 841년~846년에 사용하였다.
註 429
정묘년은 회창 7년이 아니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원년이라고 해야 옳다.
註 430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 사굴산에 있었던 사찰로 847년에 범일이 창건하였다. 창건한 이래 이 절은 선문구산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발전하였으며, 전성기에는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미터에 이르렀고, 승려수도 200여명이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까지 흘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36년 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되었고, 이때 ’사굴산사‘라는 글씨가 발견됨으로써 이 절이 굴산사였음이 밝혀졌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국명 : 당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낙산위에 불전을 짓고 정취보살의 상을 모시다(858년 2월 15일(음))
낙산위에 불전을 짓고 정취보살의 상을 모시다 ( 858년 02월15일(음) )
대중(大中)註 431431 당 선종(宣宗)의 연호로 847년(문성왕 9)~859년(헌안왕 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12년 무인(戊寅) 2월 15일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사미가 창 아래에 와서 말하기를, “옛날 명주 개국사에 있을 때 조사가 [나와] 약조하여 이미 허락한 바 있거늘 어찌하여 그리 지체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조사가 놀라서 깨어나 수십 인을 데리고 익령 지경에 가서 그의 집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랫마을에 살고 있어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하였다. 그 여인에게 한 아들이 있는데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항상 남쪽 돌다리 주변에 나가 놀더니, 그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나와 함께 노는 아이 가운데 금빛 나는 아이가 있다.”고 하였다.
[그] 어머니가 조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조사가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들과 함께 다리 밑에 가서 찾으니 물 가운데 돌부처 하나가 있어 꺼내었다. 왼쪽 귀가 떨어진 것이 이전에 본 사미와 같았는데 이는 곧 정취(正趣)보살의 상이었다. 이에 점치는 괘쪽을 만들어 절 지을 터를 점쳐보니, 낙산 위가 길하므로 [그곳에] 불전 세 칸을 짓고 그 보살상을 모셨다. 고본(고본)에는 범일의 사적이 앞에 적혀 있고,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사적이] 뒤에 적혀 있으나, 살펴보면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일은 [당]고종(高宗)때의 일이요, 범일은 회창(會昌) 이후의 일이니 서로 떨어지기가 1백 70여 년이나 된다. 그러므로 지금 먼저의 것은 버리고 차례를 바로 잡아 엮었다. 혹은 범일을 의상의 문인이라고 하나 잘못된 것이다.
註 431
당 선종(宣宗)의 연호로 847년(문성왕 9)~859년(헌안왕 3년)에 사용하였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색인어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낙산에 화재가 있어 두 보살의 진용과 보주를 옮기다(1254년 10월 22일(음))
낙산에 화재가 있어 두 보살의 진용과 보주를 옮기다 ( 1254년 10월22일(음) )
그 뒤 백 여년이 지나 들불이 이 산에까지 옮아 붙었으나 오직 두 성전(聖殿)만은 화재를 면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버렸다. 몽고의 큰 병란[西山大兵]이 있은 이후 계축(癸丑)·갑인년(甲寅年) 사이에 두 보살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襄州城)註 432432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에 있었던 성곽이다.닫기으로 옮겼다. [몽고] 대군의 공격이 심히 급박하여 성이 바야흐로 함락할 즈음에 주지선사 아행(阿行) 옛이름은 희현(希玄)이 은합에 두 보주를 담아서 몸에 지니고 도망하려고 하니, 걸승(乞升)이라는 절의 종이 [이를] 빼앗아 땅에 깊이 묻고 서원하기를, “내가 만약 병란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여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고 하였다.
갑인(甲寅) 10월 22일 성이 함락되자 아행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하고 적병이 물러간 뒤 [땅 속에서] 파내어 명주도(溟洲道) 감창사(監倉使)註 433433 고려 양계 지방에 파견되었던 관리로 금석문에는 감세사(監稅使)로 나오기도 한다. 감창사는 춘추외산제고사(春秋外山祭告使)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임기 없이 관할 지역을 순행한 뒤 임무를 마쳤는지, 봄가을에 파견되어 6개월이라는 일정 기간 임지에 주재하였다가 후임자와 교대하는 지방관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닫기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註 434434 신라말·고려초 지방의 독자 세력인 성주나 장군을 칭하는 호족 아래에 소속된 관직의 하나이다. 당시 지방 세력은 독자적인 행정기구를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 재정사무을 담당하는 호부의 제1등 관등이 낭중이다. 983년(성종 2) 지방의 향직을 개편할 때 호정(戶正)으로 개칭되었다.닫기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였는데, 받아서 감창고(監倉庫)안에 간직하고 교대할 때마다 물려받았다.
무오(戊午 ; 1258) 11월에 이르러 본업의 노숙(老宿) 기림사(祇林寺) 주지 대선사 각유(覺猷)가 [왕께] 아뢰며 말하기를, “낙산사의 두 보주는 국가의 신보입니다. 양주성이 함락될 당시에 절의 노비인 걸승(乞升)이 성 가운데 묻어 두었다가 병사들이 물러간 뒤에 창고를 감독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주(溟州) 군영의 창고 가운데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로워 지키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기어 안치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여 야별초(夜別抄)註 435435 고려 고종 때 최우가 밤에 순행하며 도둑을 막기 위하여 조직한 특수한 부대이다.닫기 10명을 보내어 걸승을 거느리고 가서 명주성에서 보주를 거두어 내부(內府)註 436436 고려시대에 재화를 저장하고 공급하며, 상세를 징수하던 관청인 내부시(內府寺)를 말한다. 문종 때의 대부시(大府寺)가 1298년에 외부시(外府寺)로 바뀌고, 다시 대부시가 된 뒤, 1308년에 내부시로 되었다.닫기에 모셔 두었다. 이 때 심부름한 관원 열 명에게 각각 은(銀) 1근과 쌀 다섯 섬을 주었다.
註 432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에 있었던 성곽이다.
註 433
고려 양계 지방에 파견되었던 관리로 금석문에는 감세사(監稅使)로 나오기도 한다. 감창사는 춘추외산제고사(春秋外山祭告使)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임기 없이 관할 지역을 순행한 뒤 임무를 마쳤는지, 봄가을에 파견되어 6개월이라는 일정 기간 임지에 주재하였다가 후임자와 교대하는 지방관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註 434
신라말·고려초 지방의 독자 세력인 성주나 장군을 칭하는 호족 아래에 소속된 관직의 하나이다. 당시 지방 세력은 독자적인 행정기구를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 재정사무을 담당하는 호부의 제1등 관등이 낭중이다. 983년(성종 2) 지방의 향직을 개편할 때 호정(戶正)으로 개칭되었다.
註 435
고려 고종 때 최우가 밤에 순행하며 도둑을 막기 위하여 조직한 특수한 부대이다.
註 436
고려시대에 재화를 저장하고 공급하며, 상세를 징수하던 관청인 내부시(內府寺)를 말한다. 문종 때의 대부시(大府寺)가 1298년에 외부시(外府寺)로 바뀌고, 다시 대부시가 된 뒤, 1308년에 내부시로 되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색인어
이름 : 아행,걸승,아행,걸승,이녹수,각유,걸승,걸승지명 : 명주,명주성,명주성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승려 조신이 꿈을 꾼 후 세상의 덧없음을 알고 정토사를 지어 정진하다
승려 조신이 꿈을 꾼 후 세상의 덧없음을 알고 정토사를 지어 정진하다
옛날 신라가 수도였을 때 세달사(世逵寺) 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이다.의 장사(莊舍)가 명주내리군(㮈李郡)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명주에는 내리군은 없고 다만 내성군(㮈城郡)이 있을 뿐인데, [이것은] 본래 내생군(㮈生郡)으로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註 437437 지금의 강원도 춘천 일대이다.닫기 영내의 고을에 내령군(㮈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내이군(㮈已郡)으로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다. 여기서 내리군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에 있었다.
본사에서 승려 조신(調信)을 보내 장사의 관리인으로 삼았다. 조신이 장사에 와 있는 동안 태수(太守) 김흔(金昕)註 438438 태종무열왕이 9세손으로, 증조부는 이찬 주원(周元)이고, 할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소판 종기(宗基)이며,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파진찬 장여(璋如)이다. 822년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하고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이때 당나라의 목종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839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김양 등이 지휘하는 김우징의 군사를 대구에서 방어하다가 실패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뒤 소백산으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지내다가 849년 8얼 27일 47세로 죽었다.닫기공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매혹되어 있었다. [그는]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여러 번 나아가 희망한 바를 얻도록 몰래 빌었다. 그 사이 수년 동안 김흔의 딸은 출가하였으므로 이미 짝이 생겼다.
[조신은]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음을 원망하여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립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그 사이 깜빡 잠이 들어 문득 꿈에 김씨의 딸이 의젓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며 웃는 얼굴로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상인의 얼굴을 알아 마음으로 사랑하였으니 잠시도 잊지 못하였으나 부모의 명에 못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사님과 죽어서] 한 무덤에 묻힐 반려가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신은 대단히 기뻐하며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사십 여년을 살고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 뿐이요. 나물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마침내 실의에 찬 두 사람은 서로 잡고 끌고 하며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사방을 떠돌아 다녔다. 이와 같이 10년을 사는 동안에 두루 초야를 유람하니 입은 옷은 갈갈이 찢어져 몸을 가릴 수 없었다. 마침 명주의 해현령(蟹峴嶺)을 지날 때 십오 세 된 큰 아이가 홀연히 굶어 죽었다. 통곡하며 [주검을] 거두어 길에 묻었다. 남은 네 자녀를 거느리고 [두 부부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우현(羽縣)이다.에 이르렀다. 길가에 띠풀을 묶어 집삼아 살았다. 부부는 늙고 또 병들고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열 살 짜리 딸 아이가 밥을 빌러 돌아다녔는데 마을 개에게 물려 앞에 누워 아픔을 호소하니, 부모가 목이 메어 흐느껴 울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부인이 괴로워 머뭇거리며 눈물을 훔치고 나서 창졸히 말하기를,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고 옷가지도 많고 아름다웠습니다. 맛 좋은 한가지의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고, 얼마 안 되는 옷가지도 당신과 나누어 입으면서 함께 산지 50년, [그 사이] 정은 더할 수 없이 깊어졌고, 사랑은 얽히고 묶였으니 가히 두터운 연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노쇠와 병고가 해가 거듭될수록 심해지고 추위와 배고픔은 날로 더욱 절박해지니 [한 칸의] 곁방살이, 한 병의 마실 것도 사람들이 용납하여 주지 않으니, 수많은 집 문 앞에서 당하는 그 수모는 산더미같이 무겁기만 합니다. 아이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쳤어도 면하게 할 수 없으니 어느 틈에 사랑함이 있어 부부의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이런 때인데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젊은 얼굴에 예쁜 웃음은 풀잎 위의 이슬 같고 지란(芝蘭)같은 백년가약은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 같습니다. 당신은 제가 짐이 되고 저는 당신 때문에 근심이 됩니다. 옛날의 즐거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이] 다름 아닌 우환에 접어드는 길목이었습니다. 당신과 제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지요? 뭇새가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어려울 때 버리고, 좋을 때 가까이 하는 일은 인정으로 차마 할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행하고 그치고 하는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명이 있는 것이니 청컨대 내 말을 좇아 헤어지기로 합시다.”라고 하였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을 나누어 막 가려고 할 때 아내가 말하기를, “저는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당신은 남쪽으로 가시지요.”라고 하며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갈라서 길을 떠나려 할 때 꿈을 깼다. 쇠잔한 등불은 가물거리고 밤은 비로써 새려고 하였다.
새벽이 되어서 보니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다. 넋 잃은 사람모양 더 이상 인간 세상에 뜻이 없었다. 세상살이의 괴로움에 이미 염증이 난 것이 마치 백 년의 쓰라림을 겪고 난 것 같았다. 탐욕하는 마음도 깨끗이 얼음 녹듯 사라져버렸다. [관음보살의] 거룩한 모습을 부끄럽게 여겨 [우러러] 대하며 참회하여 마지 않았다. 해현으로 가 [꿈속에서] 큰 아이를 파묻었던 자리를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서 이웃 절에 봉안하였다. 서울로 돌아가 장사관리의 책임을 벗고 나서 사재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았다. 그 뒤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논의하여 말한다. 이 [조신의]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곰곰이 궁리해보니, 어찌 반드시 조신스님의 꿈만 그렇겠는가? 현재도 모든 사람들이 인간세상이 즐거운 줄만 알고 기뻐 날뛰며 애쓰고 있으니, [이는] 오로지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이에 시를 지어 경계한다.
즐거운 한 때 한가롭더니
어느덧 근심 속에 늙어 파리하구나
한 끼 조밥 익기를 다시 기다릴 것도 없이註 439439 ≪枕中記≫에 보면, 중국 당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젊은이가 한단(邯鄲) 땅 어느 주막에서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베고 잠이 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80세 까지 살았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보니 아까 주인이 짓던 좁쌀밥이 채 익지도 않았더라는 것이니, 부귀와 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것이다.닫기
괴로운 인생이 한 마당 꿈임을 깨달았도다
몸 다스림의 잘잘못은 참된 뜻에 있거늘
홀아비는 여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에 그린다.
어떻게 하면 가을날 맑은 밤의 꿈이 올까
때때로 눈감고 청량(淸凉)에 이르네
註 437
지금의 강원도 춘천 일대이다.
註 438
태종무열왕이 9세손으로, 증조부는 이찬 주원(周元)이고, 할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소판 종기(宗基)이며,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파진찬 장여(璋如)이다. 822년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하고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이때 당나라의 목종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839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김양 등이 지휘하는 김우징의 군사를 대구에서 방어하다가 실패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뒤 소백산으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지내다가 849년 8얼 27일 47세로 죽었다.
註 439
≪枕中記≫에 보면, 중국 당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젊은이가 한단(邯鄲) 땅 어느 주막에서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빌어 베고 잠이 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80세 까지 살았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보니 아까 주인이 짓던 좁쌀밥이 채 익지도 않았더라는 것이니, 부귀와 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어산불영(魚山佛影) >보림의 설이 옛 기록에 전한다(1180년 (음))
보림의 설이 옛 기록에 전한다 ( 1180년 (음) )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말하길
“만어사(萬魚寺)註 440440 만어사가 아니라 만어산으로 표기해야 맞다. 만어산은 밀양시 단장면 법흥리와 삼랑진읍 우곡리·용전리의 경계선에 있다.닫기는 옛 자성산(慈成山)註 441441 경상남도 밀양시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옛 이름이 만어산(萬魚山)이라고 한다.닫기이요, 또 아야사산(阿耶斯山)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로 써야 한다. 이는 물고기를 말한다.인데 그 곁에 가라국(訶囉國)이 있었다. 옛날에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에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경내에 옥지(玉池)가 있어 [그]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다섯 나찰녀(羅刹女)註 442442 나찰은 불경에 불교를 방해했다가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는 귀신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나찰은 나찰사(羅刹斯)라고도 하며, 경전에 그들이 나찰여국(羅刹女國)에 살면서 인육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불경에는 팔대나찰녀, 십대나찰녀, 십이대나찰녀, 칠십일나찰녀 등이 등장하나 여기서는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과 같은 오나찰녀로 되어 있다.닫기가 있어 [독룡과] 왕래하고 서로 사귀었다. 때문에 때로 번개와 비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익지 않았다. 왕은 주술로 [이를] 금하려고 했으나 능히 할 수 없게 되자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께 청하여 설법을 한 후에야 나찰녀가 오계(五戒)註 443443 재가 남녀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규율로 불살생(不殺生), 불여취(不與取), 불사음(不邪婬),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를 말한다.닫기를 받고 그 뒤에는 재해가 없어졌다. 이로 인하여 동해(東海)의 어룡(魚龍)이 마침내 골짜기에 가득한 돌로 화하여 각기 종과 경쇠의 소리를 내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은고기이다.
또 생각건대 대정(大定)註 444444 금의 세종(世宗)의 연호로 1161년(의종 15)~1187년(명종 17)에 사용하였다.닫기 20년 경자(庚子, 곧 명종(明宗) 10년에 처음으로 만어사를 창건하였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장계를 올린 글에, “[이] 산중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呵羅國)의 부처 그림자 사적과 꼭 부합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산의 곁 가까운 곳인 양주(梁州)註 445445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일대이다. 신라 문무왕 5년(665)에 상주(上州)·하주(下州)를 삽량주(歃良州)로 하였고, 경덕왕 때 양주(良州)로 개칭하였다. 양주(梁州)라는 표기는 고려 태조 23년(940) 이후이다.닫기 지경 옥지에도 독룡이 숨어 산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로부터 구름이 일어나 산정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가운데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로 [부처]그림자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는데 항상 물이 고여 끊이지 않았는데, [전해] 말하기를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던 곳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상은 모두 보림의 설이지만 지금 친히 와서 우러러 예배하여 보니 더욱 분명히 공경하여 믿을 만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골짜기 안의 돌이 거의 3분의 2가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곧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으니 혹은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하는 것 등이 그 하나이다. 북천축(北天竺)의 글은 뒤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註 440
만어사가 아니라 만어산으로 표기해야 맞다. 만어산은 밀양시 단장면 법흥리와 삼랑진읍 우곡리·용전리의 경계선에 있다.
註 441
경상남도 밀양시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옛 이름이 만어산(萬魚山)이라고 한다.
註 442
나찰은 불경에 불교를 방해했다가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는 귀신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나찰은 나찰사(羅刹斯)라고도 하며, 경전에 그들이 나찰여국(羅刹女國)에 살면서 인육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불경에는 팔대나찰녀, 십대나찰녀, 십이대나찰녀, 칠십일나찰녀 등이 등장하나 여기서는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과 같은 오나찰녀로 되어 있다.
註 443
재가 남녀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규율로 불살생(不殺生), 불여취(不與取), 불사음(不邪婬),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를 말한다.
註 444
금의 세종(世宗)의 연호로 1161년(의종 15)~1187년(명종 17)에 사용하였다.
註 445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일대이다. 신라 문무왕 5년(665)에 상주(上州)·하주(下州)를 삽량주(歃良州)로 하였고, 경덕왕 때 양주(良州)로 개칭하였다. 양주(梁州)라는 표기는 고려 태조 23년(940) 이후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정치>신이>기타>용
정치>신이>자연현상>땅·산·돌·물·바다
색인어
지명 : 만어사,자성산,아야사산,옥지,만어산,북천축,양주,옥지,북천축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어산불영(魚山佛影) >부처님의 일이 관불삼매경에 전하다
부처님의 일이 관불삼매경에 전하다
가함(可函)의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註 446446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의 약칭이다. 부처의 상호(相好) 및 공덕을 상념하고 관찰함으로써 해탈을 얻을 것을 가르치는 경전이다. 동진(東晋) 사람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에 의해 한역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경전 내용 중 만어산 이야기 부분만 요약되어 있다.닫기 제7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부처가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註 447447 ≪대당서역기≫에는 유사한 이야기로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이 등장한다. 나게라갈국은 인도 북방 국경에 있었던 나라이고,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잘랄라바드(Jallbd)를 중심으로 한 카불(Kabul)강 유역이라고 한다. 그곳은 이미 법현이 ≪불국기(佛國記)≫에서 서술한 나갈국(那竭國)과 같다. ≪관불삼매경≫에 보이는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은 법현과 현장이 서술한 기록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인지는 알 수 없다.닫기고선산(古仙山) 담복화(薝葍花)註 448448 ≪관불삼매경≫에는 ‘담복화(薝蔔華)’로 되어 있다. 인도에서 나는 크고 노란색 꽃이며, 헌화, 방향 등의 기능을 가지고 경전에 등장한다.닫기 숲의 독룡이 사는 못 곁, 푸른 연꽃이 핀 샘 북쪽 나찰혈(羅刹穴) 가운데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렀다. 이때 그 구멍에 다섯 나찰이 있어 여룡(女龍)으로 화하여 독룡과 교합하더니 용이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은 난폭한 행동을 하므로 기근과 질역이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서 신기(神祇)에게 빌며 제사하였으나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 이때 총명하고 지혜 많은 범지(梵志)註 449449 범사(梵士), 정예(淨裔), 전행(淨行)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성 중 승려 계급에 해당하는 바라문을 가리킨다.닫기가 왕에게 아뢰기를, “가비라국(迦毗羅)註 450450 가비라국은 지금의 네팔(Neal) 타라이(Tarai)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닫기정반왕(淨飯王)註 451451 정반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이며 가비라국 왕이다.닫기의 왕자가 지금 도를 이루어 이름을 석가문(釋迦文)이라고 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크게 기뻐하여 부처가 있는 쪽을 향해 절하고 말하기를, “오늘날 불일(佛日)이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 나라에는 이르지 아니하십니까?”고 하였다.
이때 여래는 6신통(六神通)註 452452 육통(六通)이라고도 한다. 경계를 가리지 않고 비행자재(飛行自在)하는 능력인 신족통(神足通), 온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인 천이통(天耳通), 다른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선악을 볼 수 있는 능력인 지타인심통(知他心通),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인 숙명통(宿命通), 일체의 물질 및 현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인 천안통(天眼通), 번뇌를 끊고, 또 이후 번뇌로 고민하지 않음을 확신하는 누진지통(漏盡智通)을 가리킨다.닫기을 터득한 비구들에게 명하여 자기의 뒤를 따르게 하고, 야건가라왕 불파부제(弗婆浮提)註 453453 ≪관불삼매경≫에도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닫기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때 세존은 이마에서 광명이 내비춰 1만이나 되는 여러 대화불(大化佛)註 454454 화불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는 일시적으로 부처 모습이 되어 중생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관불삼매경≫에서는 ‘일만팔천’으로 되어 있다.닫기이 되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과 나찰녀는 5체를 땅에 던져註 455455 두 무릎과 두 팔뚝, 머리를 땅에 대고 손을 뻗어 상대의 발을 받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거기에 대는 동작이다. 이것은 상대자의 최하부인 발에 신체 중 최상부인 머리를 가지고 절하는 것이므로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보이는 것이다.닫기 부처께 계받기를 청하였다. 부처는 곧 [이를] 위하여 3귀(三歸)註 456456 삼귀는 삼보인 불·법·승에 귀의한다는 뜻이다.닫기 5계(五戒)를 설하니, 용왕이 다 듣고 나서 꿇어 앉아 합장하고註 457457 양 무릎을 땅에 붙여 발가락으로 땅을 받치는 것을 장궤(長跪), 두 손바닥을 완전히 모으는 것을 합장(合掌)이라고 한다.닫기, 세존에게 여기에 상주하기를 권청하면서 “부처님께서 만약 계시지 않으면 제가 악심이 생겨 아뇩보리(阿耨菩提)註 458458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약칭이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무답정편지(無答正遍知)라고도 하며, 최상의 깨달음을 가리킨다.닫기를 성취할 도리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때 범천왕(梵天王)註 459459 팔리어 brahma의 음역이다, 고대 인도의 창조신 중 하나인데, 불교 신앙에 수용되면서 불법에 교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부처가 출세할 때는 항상 제일 먼저 설법을 청하였다고 한다.닫기이 다시 와서 부처께 절하고 청하기를, “바가바(婆伽婆)註 460460 부처를 가리킨다.닫기께서는 미래세의 여러 중생을 위하시므로 다만 편벽되게 이 작은 용 한 마리만을 위하지는 마소서”라고 하니, 백천 범왕(梵王)이 모두 이같이 청하였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註 461461 칠보로 장식한 자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귀중품은 경전마다 조금씩 다른데, ≪법화경≫에서는 금·은·유리·차거(硨磲)·마노·진주·매괴(玫瑰)을, ≪무량수경≫에서는 금·은·유리·산호·호박·차거(硨磲)·마노(≪無量壽經≫)를 들고 있다.닫기를 내어 여래께 바치니, 부처가 용왕에게 말하기를, “이 자리는 필요 없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의 석굴만을 가져다 내게 시주하라”고 하니, 용왕이 기뻐하였다. 고 한다.이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하기를,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안에 앉아 1천 5백 세를 지내리라”고 하고 부처는 몸을 솟구쳐 돌 안으로 들어갔다. [돌은] 마치 명경(明鏡)과 같아서 사람의 얼굴형상이 보이고, 여러 용들이 모두 나타나며, 부처는 돌 안에 있으면서 그 모습이 밖에까지 비쳐 나타났다.
이때 여러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 항상 불일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은 가부좌를 하고 석벽 안에 있었는데, 중생이 볼 때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천중이 부처 그림자에 공양하면 그림자가 또한 설법하였다.
또 이르기를, “부처가 바윗돌 위를 차면 곧 금과 옥의 소리가 났다.”고 하였다.
註 446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의 약칭이다. 부처의 상호(相好) 및 공덕을 상념하고 관찰함으로써 해탈을 얻을 것을 가르치는 경전이다. 동진(東晋) 사람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에 의해 한역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경전 내용 중 만어산 이야기 부분만 요약되어 있다.
註 447
≪대당서역기≫에는 유사한 이야기로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이 등장한다. 나게라갈국은 인도 북방 국경에 있었던 나라이고,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잘랄라바드(Jallbd)를 중심으로 한 카불(Kabul)강 유역이라고 한다. 그곳은 이미 법현이 ≪불국기(佛國記)≫에서 서술한 나갈국(那竭國)과 같다. ≪관불삼매경≫에 보이는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은 법현과 현장이 서술한 기록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인지는 알 수 없다.
註 448
≪관불삼매경≫에는 ‘담복화(薝蔔華)’로 되어 있다. 인도에서 나는 크고 노란색 꽃이며, 헌화, 방향 등의 기능을 가지고 경전에 등장한다.
註 449
범사(梵士), 정예(淨裔), 전행(淨行)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성 중 승려 계급에 해당하는 바라문을 가리킨다.
註 450
가비라국은 지금의 네팔(Neal) 타라이(Tarai)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註 451
정반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이며 가비라국 왕이다.
註 452
육통(六通)이라고도 한다. 경계를 가리지 않고 비행자재(飛行自在)하는 능력인 신족통(神足通), 온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인 천이통(天耳通), 다른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선악을 볼 수 있는 능력인 지타인심통(知他心通),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인 숙명통(宿命通), 일체의 물질 및 현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인 천안통(天眼通), 번뇌를 끊고, 또 이후 번뇌로 고민하지 않음을 확신하는 누진지통(漏盡智通)을 가리킨다.
註 453
≪관불삼매경≫에도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註 454
화불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여기서는 일시적으로 부처 모습이 되어 중생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관불삼매경≫에서는 ‘일만팔천’으로 되어 있다.
註 455
두 무릎과 두 팔뚝, 머리를 땅에 대고 손을 뻗어 상대의 발을 받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거기에 대는 동작이다. 이것은 상대자의 최하부인 발에 신체 중 최상부인 머리를 가지고 절하는 것이므로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보이는 것이다.
註 456
삼귀는 삼보인 불·법·승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註 457
양 무릎을 땅에 붙여 발가락으로 땅을 받치는 것을 장궤(長跪), 두 손바닥을 완전히 모으는 것을 합장(合掌)이라고 한다.
註 458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약칭이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무답정편지(無答正遍知)라고도 하며, 최상의 깨달음을 가리킨다.
註 459
팔리어 brahma의 음역이다, 고대 인도의 창조신 중 하나인데, 불교 신앙에 수용되면서 불법에 교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부처가 출세할 때는 항상 제일 먼저 설법을 청하였다고 한다.
註 460
부처를 가리킨다.
註 461
칠보로 장식한 자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귀중품은 경전마다 조금씩 다른데, ≪법화경≫에서는 금·은·유리·차거(硨磲)·마노·진주·매괴(玫瑰)을, ≪무량수경≫에서는 금·은·유리·산호·호박·차거(硨磲)·마노(≪無量壽經≫)를 들고 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경논소
문화>사상>불교사상>의례·결사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색인어
서명 : 관불삼매경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어산불영(魚山佛影) >고승전과 서역전과 서역기에 부처님의 일이 전하다
고승전과 서역전과 서역기에 부처님의 일이 전하다
≪고승전(高僧傳)註 462462 남북조의 승려인 혜교가 저술한 ≪양고승전≫을 가리킨다.닫기≫에 이르기를, “혜원(惠遠)註 463463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334~416)이다.닫기이 천축(天竺)에 부처 그림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옛적에 용을 위하여 남겨둔 그림자로서 월지국(月支國)註 464464 월씨(月氏)라고도 한다. 서역에 있던 대국으로 진한시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하였다. 몽골고원과 천산산맥 이북 등을 근거지로 삼고 동호(東胡)와 흉노를 압박하였으나 도리어 흉노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 전반 대하국(大夏國)을 세우고 불교를 보호하였다. 그 후 기원 후 5세기경에 멸망하였다고 한다.닫기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옛 선인의 석실 안에 있다 고 한다.”고 하였다.
또 법현(法現)註 465465 동진 사람으로 399년 장안에서 인도로 떠났다가 413년 귀국하였고 그 다음해 ≪불국기(佛國記)≫를 서술하였다고 한다.닫기의 ≪서역전(西域傳)註 466466 법현의 ≪불국기≫를 가리킨다.닫기≫에 이르기를, “나갈국 지경에 이르면 나갈성 남족 반 유순(由旬)註 467467 거리의 단위이다. 고대의 성왕이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를 말하는데, 그 길이에 대한 설은 다양하다. ≪대당서역기≫에는 험한 정도에 따라 40리, 30리, 16리의 대중소로 구분하였는데, 당대에 1리가 약 600m이기 때문에 半由旬은 약 4.8~16km이다. 다만 동진 때의 유순과 당대의 유순이 같다는 전제로만 계산이 가능하므로 단정하기 어렵다.닫기되는 곳에 석실이 있으니, [그곳은] 박산(博山)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그림자를 남겨 두었다. 이 안에서 10여 보를 가서 이것을 보면 부처의 참모습처럼 광명이 찬란하나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진다. 여러 나라 왕들이 화공을 보내 [이를] 모사하게 했으나 비슷하게도 그릴 수 없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기를, 현겁(賢劫)의 천불註 468468 현겁(賢劫)은 불교적 시간 구분의 하나로,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비롯한 천 불이 나타나는 때를 말한다.닫기이 모두 이곳에 그림자를 남겨 두게 된다고 하고, 그림자의 서쪽 백 보쯤 되는 곳은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잘랐던 자리가 있다. 고 한다.”고 하였다.
성함(星函) ≪서역기(西域記)≫註 469469 당의 현장(玄奘)이 唐太宗의 勅命에 의해 撰한 ≪大唐西域記≫를 말한다. 이 책은 그가 629년 당을 출발하여 서역으로 가서 경전을 수집하고 여러 고승들을 방문한 뒤 645년 당나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서술하였다.닫기 제2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옛날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이 용은 소치는 사람으로 왕에게 유락(乳酪)을 공급하였는데, 진상하면서 잘못하여 견책을 받았다. 마음에 노여움과 원한을 품고 금전으로 꽃을 사서[부처께]공양하고, 솔도파(窣堵婆)註 470470 부도라고도 하며 부처와 고승의 사리 등을 넣기 위해 세워진 돌탑을 가리킨다.닫기에 수기(授記)註 471471 미래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예언을 받는다는 뜻이다.닫기하기를, “악룡이 되어 나라를 파괴하고 임금을 해치게 해 주소서”라고 하고, 곧 석벽으로 달려가 몸을 던져 죽었다. 드디어 이 굴에 살면서 대용왕이 되어 마침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가 이를 알고 신통력을 발하여 [그곳에] 이르니, 이 용이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을 버리고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청하기를, “여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셔서 항상 저의 공양을 받으소서”라고 하였다. 부처가 말하기를, “나는 적멸(寂滅)할 것이므로 너를 위하여 내 그림자를 남겨 두리라. 네가 만약 독한 분심이 일거든 늘 내 그림자를 보고 독한 마음을 응당 버리도록 하여라.”라고 하고는 정신을 가다듬고 홀로 석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곧 나타나고 가까이 가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를 발로 차면 칠보(七寶)가 되었다 고 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經文)으로서 대략 이와 같다. 해동(海東)註 472472 해동(海東)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발해 동방에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당대부터는 확실히 한반도의 왕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닫기 사람이 이 산을 아나사(阿那斯)라고 이름하였는데, 마땅히 마나사(摩那斯)라고 해야 한다. 이것을 번역하면 물고기이니, 대개 저 북천축의 사적을 취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註 462
남북조의 승려인 혜교가 저술한 ≪양고승전≫을 가리킨다.
註 463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334~416)이다.
註 464
월씨(月氏)라고도 한다. 서역에 있던 대국으로 진한시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하였다. 몽골고원과 천산산맥 이북 등을 근거지로 삼고 동호(東胡)와 흉노를 압박하였으나 도리어 흉노에게 쫓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 전반 대하국(大夏國)을 세우고 불교를 보호하였다. 그 후 기원 후 5세기경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註 465
동진 사람으로 399년 장안에서 인도로 떠났다가 413년 귀국하였고 그 다음해 ≪불국기(佛國記)≫를 서술하였다고 한다.
註 466
법현의 ≪불국기≫를 가리킨다.
註 467
거리의 단위이다. 고대의 성왕이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를 말하는데, 그 길이에 대한 설은 다양하다. ≪대당서역기≫에는 험한 정도에 따라 40리, 30리, 16리의 대중소로 구분하였는데, 당대에 1리가 약 600m이기 때문에 半由旬은 약 4.8~16km이다. 다만 동진 때의 유순과 당대의 유순이 같다는 전제로만 계산이 가능하므로 단정하기 어렵다.
註 468
현겁(賢劫)은 불교적 시간 구분의 하나로,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비롯한 천 불이 나타나는 때를 말한다.
註 469
당의 현장(玄奘)이 唐太宗의 勅命에 의해 撰한 ≪大唐西域記≫를 말한다. 이 책은 그가 629년 당을 출발하여 서역으로 가서 경전을 수집하고 여러 고승들을 방문한 뒤 645년 당나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註 470
부도라고도 하며 부처와 고승의 사리 등을 넣기 위해 세워진 돌탑을 가리킨다.
註 471
미래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예언을 받는다는 뜻이다.
註 472
해동(海東)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발해 동방에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당대부터는 확실히 한반도의 왕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의식구·불화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색인어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선덕왕대 자장법사가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당으로 가다(636년 (음))
선덕왕대 자장법사가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당으로 가다 ( 636년 (음) )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산중의 고전(古傳)註 473473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본문은 이것을 바탕으로 서술되었다고 생각되며, 말미의「보천유언(寶川遺言)」에 “보천암을 개창한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라고 한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산중고전」은 오대산 화장사의 유래를 설명한 문헌으로 생각된다.닫기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 성자의 거주처라고 이름 한 것은 자장(慈藏)註 474474 선덕여왕 5년인 635년에 당에 들어가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선덕여왕 12년(643) 장경(藏經) 일부와 불구(佛具)를 갖고 돌아왔다. 신라의 국통이 되었으며 통도사를 창건하였다.닫기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오대산(五臺山)註 475475 산서성 오대현(五台縣)에 있는 산으로 淸凉山이라고도 한다. 아미산(峨眉山), 보타산(普陀山)과 함께 중국불교의 3대 영산으로 손꼽힌다.닫기의 문수보살[文殊]註 476476 석가모니불의 보처로서 왼쪽에 있으며 지혜에 관한 일을 맡는다고 한다.닫기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註 477477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년~649년이다.닫기10년 병신(丙申) ≪당승전(唐僧傳)≫註 478478 도선(道宣)이 645년에 찬술한 고승전으로 양대(梁代)부터 당초(唐初)에 이르는 144년간(502~645)의 고승 약 500인의 행적을 모아 기록하였다.닫기에는 12년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에 따른다.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문수보살의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였더니, 홀연히 꿈에 대성(大聖)이 4구의 게(偈)註 479479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나 부처의 사상이 담긴 시구 등을 가리킨다.닫기를 주었다. 꿈을 깨고 보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梵語)이므로 해독하지 못하여 망연하였다.
다음날 아침 갑자기 한 스님이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에 이르러서 묻기를, “어찌하여 그리 근심하시오?”라고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꿈에 사구의 게(偈)를 받았는데 그 게가 모두 범어(梵語)이므로 해석할 수 없는 글들이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스님이 번역하여서 일러주기를, “가라파좌낭(呵囉婆佐囊)은 일체법(一切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㘑哆佉嘢)는 자성(自性)이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사가랑(曩伽呬伽曩)은 법성(法性)을 이와 같이 해석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라(達㘑盧舍那) 함은 즉 노사나(盧舍那)註 480480 범어 Vairocana의 음역으로 부처님의 진신을 나타내는 칭호이다.닫기를 본다는 말이외다.”라고 하고는 이어 그 스님이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께서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고, 1만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법사가] 영험 있는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 장차 고국(本國)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태화 연못가의 용이 나타나 재(齋)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용은 법사에게] 고하기를, “옛날 게(偈)를 전수한 노승이 바로 참 문수보살입니다.”고 하였다. 또 절을 창건하고 탑을 세울 것을 간절히 부탁하였는데, [그런 기사는]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註 473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본문은 이것을 바탕으로 서술되었다고 생각되며, 말미의「보천유언(寶川遺言)」에 “보천암을 개창한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라고 한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산중고전」은 오대산 화장사의 유래를 설명한 문헌으로 생각된다.
註 474
선덕여왕 5년인 635년에 당에 들어가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선덕여왕 12년(643) 장경(藏經) 일부와 불구(佛具)를 갖고 돌아왔다. 신라의 국통이 되었으며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註 475
산서성 오대현(五台縣)에 있는 산으로 淸凉山이라고도 한다. 아미산(峨眉山), 보타산(普陀山)과 함께 중국불교의 3대 영산으로 손꼽힌다.
註 476
석가모니불의 보처로서 왼쪽에 있으며 지혜에 관한 일을 맡는다고 한다.
註 477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년~649년이다.
註 478
도선(道宣)이 645년에 찬술한 고승전으로 양대(梁代)부터 당초(唐初)에 이르는 144년간(502~645)의 고승 약 500인의 행적을 모아 기록하였다.
註 479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나 부처의 사상이 담긴 시구 등을 가리킨다.
註 480
범어 Vairocana의 음역으로 부처님의 진신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색인어
이름 : 자장(慈藏)註 474474 선덕여왕 5년인 635년에 당에 들어가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선덕여왕 12년(643) 장경(藏經) 일부와 불구(佛具)를 갖고 돌아왔다. 신라의 국통이 되었으며 통도사를 창건하였다.닫기법사,법사,선덕왕,법사,법사
국명 :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