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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동석입니다. 소소한 일상부터 고민,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까지 솔직하게 기록했습니다. 부족한 점도 많겠지만, 따뜻한 시선과 응원으로 지켜봐 주세요.
<이동석은 누구인가(1)>
내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나는 다사다난한 시간과 공간을 지나왔다. 고향 충주에서 보냈던 따듯한 어린 시절을 박차고, 아무것도 모른 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뜬금없는 용기가 나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청년기의 많은 시간은 '도전정신'으로 넘쳐났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님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웠던 것은 내 인생의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청춘을 불사르며 소탈함과 진정성으로 무장한 미국 정치문화를 온몸으로 겪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등장하는 역사적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다.
기자가 된 이후로는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감시하는 책임감과 끝까지 원칙을 지키는 언론의 강직한 철학을 배웠고, 국회를 출입하며 현실정치의 한계와 문제들을 깨달았다. 대통령실에서는 국정 전반을 조망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쌓았다. 이후 행정부인 해양수산부에서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난제를 헤쳐 가며 새로운 세상에 눈뜨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다채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항상 새로운 숙제를 부여받았고,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과제에 직면해야 했다.
그때마다 내가 갈망했던 것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사색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대안이었다. 책상머리에서 펼쳐진 사상의 파편이나 진영 논리에 구속되기보다는 인간의 실제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내가 지치기보다는 즐거워했다는 점이다. 부여된 어려움과 상황과 조건들을 탓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고 해답을 추구하며, 고민을 축적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 속에서 나는 일하고 성취하는 기쁨을 얻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괴테는 말했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가야 할 길이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막연함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살면서 많은 문제가 있었고, 수많은 해법을 모색했으며, 많은 대안을 추구했지만 어느 한 가지도 완전무결한 정답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형성된 난관들을 긍정적인 관점과 밝은 표정, 낙관적 의지로 돌파해 왔다. 그때마다 나와 함께 해준 나의 인연들이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통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신념은 언제부터인가 내 삶을 지켜준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이제 막 졸업한 중학생이 아무것도 모른 채, 겁도 없이 이역만리 유학길을 떠났던 그때처럼, 나는 또다시 새로운 숙제를 찾아 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나의 치열함 속에서 대한민국과 충주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바뀔 것으로 믿는다.
<이동석은 누구인가(2)>
어릴 때 나는 그야말로 우렁찼다. 친구들과 놀다 다치면 동네가 떠날 정도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어르신들은 울음소리 하나만큼은 '대한민국 1등'이라고 말씀하셨다. 충주 지현동에 위치한 '상지맨숀'은 나의 인생의 첫 놀이터였다. 동네 친구들과 비석, 구슬치기를 하는 것은 인생의 전부였다.
충주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새로운 친구들과 아주 잘 지냈다. 2학년 때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다고 성인이 돼서야 어머님께 전해 들었다. 2학년 담임선생님이셨던 최연자 선생님은 "동석이가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다"며 "짝꿍을 시켜줬더니 아주 좋아하더라"라고 어머님께 말씀하셨다고 한다. 친구의 이름은 기억나질 않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의 풋풋한 나의 모습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남산초등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 살미면 수회리에서 통학을 시작했다. 당시 부모님께서 마당바위주유소를 경영하고 있어 주유소 건물 2층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당바위주유소 근처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하던 동네 슈퍼 하나 없었고, 친구들마저 근처에 살지 않았다.
매일 등교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거의 1시간을 달려야 남산초등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어린 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먼 거리를 통학했다.
어린아이가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니니까 기사님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다 알아보셨다. 나는 버스에서 잠에 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행히 기사님들이 깨워주셔서 종점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나중에는 아예 버스를 탈 때마다 우렁찬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도착하면 꼭 깨워주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겁도 없이 미국으로 혼자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장거리 통학을 하며 자연스레 얻게 된 용기와 세상에 대한 신뢰감 덕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나는 때마침 교현동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교현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친구들과 이별의 아픔을 겪은 것도 잠시, 곧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부모님께 받은 용돈으로 친구들과 과자를 사 먹기도 하고, 축구도 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들의 호응을 얻었고, 전학한 지 1년 만에 반장 선거에 도전해 당선되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나의 인생의 첫 전성기는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인 것 같다. '밸런타인데이'에 무려 5명이 넘는 여학생에게 초콜릿을 받았다. 선물 역시 많이 받았다. 아무래도 전학생이라 새로운 얼굴이 학교에 나타나니 큰 관심을 받은 것 같다.
중학교는 '충일중학교'로 입학했다. 중학교 자체에 남자 밖에 없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정말 재미난 생활을 보냈다. 나는 줄곧 반장에 뽑혔는데, 성격이 원만했던지라 친구들이 싸우면 중재 역할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옆집에 살던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나이는 같았지만, 한 학년 위였던 친구였다. 그런데 하루는 매일 보던 친구가 갑자기 보이질 않았다. '왜 안 보이는 걸까?' 궁금했지만, 마땅히 물어볼 사람은 없었는데 그렇게 결국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1년 후에 갑자기 그 친구가 나타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안 보였어?" 그러자 놀라운 답변에 돌아왔다. "나 미국 갔었잖아. 그것도 몰랐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청주도 아니고, 서울도 아니고 미국이라니.
중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부모님께 "저 유학 보내 주세요!"라고 먼저 말씀을 드렸다. 내 생각에는 부모님께서 당연히 "안 돼!" 이럴 줄 알았는데, 부모님은 "그래 한번 해보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동석은 누구인가(3)>
결국, 미국 유학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중학교 졸업 후 불과 2주 만에 미국 길에 올랐다.
내가 미국에 갈 때만 해도 '인천국제공항'이 없을 때였다. 김포공항만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유학길에 오를 때는 '조기유학'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기였고, 내가 미국으로 떠나고 몇 년 뒤 조기유학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일찍 유학길에 올랐던 셈이다. 그것도 서울도 몇 번 가보지 않은 충주 출신 중학생이 미국으로 고등학교를 가게 된 거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했던가?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걸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딱 부러지게 밀고 나간 행동이었지만, 그 일로 인해 초래될 후과는 심각했다. 그 당시 나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충일중학교 3학년 이동석은 미국 캘리포니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홀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간 비행 끝에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을 때, 로스앤젤레스(LA) 공항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요즘 많이 들고 다니는 캐리어가 아닌, 이른바 '이민가방'을 질질 끌며 공항 게이트로 나왔다. 15살 이동석은 미국 땅에 홀로 내렸다. 부모님이 함께 오시면 비용이 2~3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결국 나 혼자 미국에 도착했던 것이다.
원래 LA는 1년 중에 1~2주 정도만 비가 올 정도로 거의 비가 안 오는 곳이다. 그리고 1년에 내릴 비가 대부분 2월 중순에 몰아서 오는 편인데 내가 도착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미국에 내린 첫날 LA에는 장대비가 내렸다. 나를 픽업하기 위해 공항에는 사전에 약속한 관계자가 나와 있었다. 나는 유학원에서 미리 알려준 대로 행동했다.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누군가 서 있을 테니 그 사람을 따라가라!'
하지만 그때부터 말 못 할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의 원인 중에는 나를 마중 나온 분의 외모 탓도 있었다. 레슬링 선수 같은 큰 덩치에 키는 190cm가 넘었을 정도로 큰 할아버지였다. 정말 만화에서나 볼 법한 덩치 좋고, 우락부락한 외모의 그분이 내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를 들고 계셨다. 나는 멋도 모르고 그분을 따라갔다.
하지만 속으로 바짝 겁을 먹었다. "내가 여기에서 납치되면 어떡하지?", "부모님이 내 전화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런 생각뿐이었다.
주룩주룩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1시간 30분을 달려 캘리포니아 외곽의 옥스나드(Oxnard)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하기까지 어린 나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당시는 핸드폰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는 어둑한 빗길을 달리는 동안 난생처음 보는 미국 할아버지 옆자리에서 떨리는 가슴을 숨긴 채, 머릿속으로는 온갖 무서운 상상을 펼치며 너무나 긴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항에서 홈스테이까지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은 미국에서 생활한 10여 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내가 도착한 곳은 이른바 '홈스테이'라 불리는 미국의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그 집에 도착해서 아주머니를 만나자마자 내가 처음 한 말이 "텔리폰! 텔레폰 플리즈!"였다.
정말로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크게 외쳤다. 그리고는 충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지났을까. 한국은 새벽 시간이었지만, 부모님도 내 전화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목이 메어 통화 불능 상태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두 방울 흘렀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결국 울음이 터졌다. 사실 공항에서 부모님을 떠나올 때만 해도 괜찮았다. 어린 마음에 그냥 들떠 있을 분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해 부모님과 통화할 때는 감정이 솟구쳤다. 그러나 절대 울음소리를 낼 수 없었다. 부모님께 울음을 목소리로 전하기 싫어서 입을 막으면서 전화 통화를 했다. 그때 나는 강해졌다. "내가 울면 부모님이 슬퍼하실 거야" 중학교를 막 졸업한 나는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최대한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주 짧게 통화를 했다.
<이동석은 누구인가(4)>
미국 도착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지만, 막상 도착한 미국의 가정집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이튿날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는데, 보지도 못한 신기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타난 한 친구. 하숙집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미국 친구와 대화는 불가능했다. 충주에서 영어 학원을 다니긴 했지만,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친구는 나에게 계속 나가자고 손짓을 했다. 나 역시 손짓, 발짓해 가며 친구와 친해졌다. 그 친구가 나의 첫 미국 친구였다.
미국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는 없었다. 미국 학교 개학 시기가 9월인 데다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교 입학을 위해 랭귀지 스쿨을 6개월 동안 다녔다. 랭귀지 스쿨에서도 나는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 당시만 해도 유학을 가는 방식이 대개 대학교를 다니다가 중간에 어학연수를 가는 식이었다. 나처럼 중학교를 졸업하고 날아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워낙 일찌감치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내 또래의 한국 학생을 별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랭귀지 스쿨에는 일본 학생 10여 명 외에 손으로 꼽을 만한 정도의 한국 학생,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캘리포니아 옥스나드라는 지역 자체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고, 한국에서 온 이민자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그 시절에 나는 스스로 전기료, 수도세 등을 처리했어야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런 청구서가 우편으로 날아왔고, 그 종이를 받으면 내가 수표를 적어서 다시 보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부모님이 다 해 주셨을 일들은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영어도 잘 모르는 아이가 혼자서 처리해야 할 때마다, 난 비로소 내가 부모님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 혼자 와 있음을 절감했다. 음식도 문제였다. 홈스테이에서 생활하는 동안 처음 6개월 동안은 한국 음식을 거의 먹을 수 없었다. 매일 파스타 같은 미국 음식을 먹어야 했다. 내 입맛에 맞고 익숙하게 먹었던 한국 음식은 아예 접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적응도 빨랐다. 한 번은 신라면을 먹다가 울기도 했다. 미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신라면을 먹었는데 눈물이 났다. 감격해서 운 것이 아니었다. 너무 매워서 울었다. 그 사이에 그만큼 입맛이 변했던 거다.
6개월 동안 랭귀지 스쿨을 다니며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당연히 짧은 어학연수도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한참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였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친구들과 사귀지 못했던 고충은 생각보다 컸다. 말도 글도 잘 통하지 않으니 또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가 매우 힘들었다. 자칫하면 적응을 못 하고 교실 구석에서 혼자 떨어져 지내는 외로운 아이가 될 수도 있었다. 때는 2001년 9월, 6개월 동안의 랭귀지 스쿨을 마치고, 드디어 미국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미국 친구들과 나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 이전에 시선의 장벽이 존재했다. 아이들은 나를 신기하게 보았다. 마치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동양인이 별로 없을 때였다. 학교에 가니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신기한 눈빛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 입장에서는 동양인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친구들이 와서 심지어는 머리카락도 만져보고 눈도 만져봤다. 특히 아이들에겐 쌍꺼풀도 없고 찢어진 눈이 신기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손으로 눈을 옆으로 찢는 제스처를 하며 나를 놀려대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놀림도 많이 받았다.
<이동석은 누구인가(5)>
나를 바라보는 또래 아이들의 시선에 너무 긴장했던 경험이 있었다. 바로 9.11 테러였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전역을 강타한 사상 초유의 비행기 테러가 발생했다. 그런데 내가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9월 11일 오전, 컴퓨터 수업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TV에서 전쟁이 났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다. 그때 자막 한 줄이 지나갔다. "용의자는 동양인으로 추정된다" 그 자막을 본 순간,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TV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선과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동급생들의 시선이 엇갈렸다. 나는 아직 그들과 섞일 수 없고, 어쩌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 기억이 어린 시절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남았다. 얼마 후 범인은 동양인이 아니라 아랍계로 결론이 났지만, 9.11 테러는 어린 나로선 걱정과 공포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날, 친구들이 나를 바라봤던 시선과 그 공간에서 펼쳐진 묘한 분위기가 내 머릿속에 신기할 정도로 또렷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오죽했으면 아직도 종종 꿈에 등장할 정도로 나는 그때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충격을 느꼈다. 그때까지 미국 유학 생활의 최대 위기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텃세'도 느껴졌고, 나를 이방인으로 대하는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내 힘으로 극복해야만 했다. 나 스스로 자청해서 만든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유학을 온 것이고, 이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온전히 나의 책임'이라는 현실적인 판단, 그 하나의 의지로 나는 이런저런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그래서 영어는 못하지만 손짓 발짓 다 하면서 미국 아이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노력한 만큼 성과는 있었다. 나는 초기의 어려움을 조금씩 헤쳐 나가며 고등학교 생활에 점점 익숙해졌다.
이때 친구들에게 내가 점수를 땄던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수학 실력이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중학교 수학 수준이 미국의 고등학교 수학보다 꽤 높았기 때문에 나의 수학 성적은 다른 과목에 비해 좋게 나왔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미국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의외의 좋은 점이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수학을 잘하니까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다. 물론 수학 시간 역시 선생님은 영어로 강의하셨기 때문에 나에게는 수학 시간이라기보다는 영어 시간에 가까웠지만, 충주에서 배웠던 수학 덕분에 공부를 따라잡기가 다른 과목에 비해 수월했다.
처음에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자 나중에는 아예 추가로 다른 외국어 공부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우리나라 제2외국어 수업처럼 의무적으로 외국어 과목을 들어야 했다. 물론 나는 예외에 속했다. 이미 영어권에서 볼 때 외국어였던 한국어를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제2외국어 수업을 자청했다. 나는 외국어 수업으로 '스페인어'를 택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스페인어만 해도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페인어가 거의 만국 공용어 수준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대학교 때 가장 행복했다. 아름다운 캠퍼스에 닐씨까지 완벽했고, 친구들과 어울리던 시절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남아있다. 나에게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캠퍼스 자체가 해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밤마다 잠자리에 누우면 고요하게 파도 소리가 들렸다. 처음 학교를 들어가서 받았던 충격은 친구들이 여름옷만 입고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산타바버라 지역은 1년 내내 따뜻하고 온화한 지역이라 겨울이 있다고는 해도 그냥 긴팔을 입고 다니면 될 정도로 살짝 서늘한 수준에 불과하다. 학교는 너무나 자유로운 곳이었고, 학생들은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놀 땐 놀면서 젊음을 만끽했다.
<이동석은 누구인가(6)>
대학 시절, 주미한국대사관 총영사관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 그것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공직 경험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인 UCSB에서는 학교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UC 계열 학생 200여 명을 뽑아 워싱턴 D.C.로 보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캘리포니아 산타바버라가 미국의 서부 해안가라면, 워싱턴 D.C.는 동부의 끝이었다.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인턴십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셈이다. 워싱턴 D.C.에서 200명이 합숙 생활을 하면서 별도로 마련된 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으며 미국 법무부, 국무부, 백악관, 의회 등 기관에서 6개월 동안 인턴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선발되었는데, 워싱턴 D.C.에서 주어진 나의 근무지는 '주미한국대사관'이었다.
주한미국대사관 인턴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국회의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홍정욱 의원과 각별한 친분을 쌓은 일이었다. 국회에서 국정감사가 시작되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미주반, 유럽반, 동아시아반 등으로 나뉘어 해외 대사관에 대한 국정감사를 진행한다. 그런데 내가 인턴을 하고 있던 시절, 당시 외통위 미주반 국감으로 홍정욱 의원님이 미국을 방문했다. 나는 수행팀을 맡았다. 대사관 인턴 신분으로 홍정욱 의원님을 마중 나가서 며칠 동안 함께 수행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되었다.
홍정욱 의원님과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유학 선배라서 그런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동질감 같은 것이 있었다. 홍정욱 의원님 역시 미국 조기유학이 전혀 보편적이지 않았던 1985년, 구정중학교 3학년 때 홀로 유학을 왔기 때문에 나와는 처음부터 공통점이 많았다. 당시 홍 의원님의 아버지인 남궁원 배우는 자녀의 막대한 유학비용을 충당하느라 밤무대 행사를 다니거나 이미지에 안 맞는 아동 영화 '우뢰매'에도 출연했다고 했다. 홍 의원님은 그런 아버지에게 매우 죄송스러워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보니 홍 의원님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기도 했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미국은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GRE(대학원 자격시험) 시험을 봐야 한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대학교 3학년 가을에 GRE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에 나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가며 학업에 열중했다. 드디어 대학원 시험을 치르는 날. 시험을 보기 위해 운전을 하고 가는데, 아뿔싸 경찰이 차를 멈취 세웠다. 내가 신호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나는 시험에 늦을 것 같아 조마조마한 상황이었는데, 경찰관님은 느긋하기만 했다. "경찰관님 제가 지금 대학원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인데요"라고 읍소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래 이것도 내 운명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시험장에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 그런데 신기했다. 시험에 다 아는 내용만 나온 것이다. 가장 두려웠던 영어 단어 부분에서 희한하게도 아는 단어가 줄지어 나왔다. 결과는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점수가 나왔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원 10곳에 지원했다.
이듬해 2월, 지원했던 대학원 통지서가 하나둘 도착했다. 당시 누나가 뉴욕대학교 치과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어 되도록이면 뉴욕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10곳 중 6곳에서 떨어졌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불안이 밀려왔다. '아! 이대로 한국에 귀국해야 하는 것인가'
드디어 도착한 7번 째 통지서.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온 통지서였다.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축하합니다' 단어만 보고 길거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제일 가고 싶어 했던 뉴욕대학교에서 합격 통보가 온 것이었다. 곧바로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뉴욕대에 합격했습니다" 나머지 3곳에서도 줄지어 합격 통지서가 왔지만, 내가 선택한 학교는 뉴욕대학교였다.
뉴욕대 대학원 진학은 나의 개인사적으로는 역사적인 일이자, 영광스러웠던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반기문 총장님을 만난 이후, '뉴욕으로 가겠다'라고 했던 다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이동석은 누구인가(7)>
뉴욕대 대학원 합격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거의 모든 세계인이 한 번쯤 동경해 본 곳, 뉴욕에서의 학업의 열정을 불태우고 싶다는 기대감과 의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뉴욕의 한복판에서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더 많이 배우고, 더 생생히 체험하고 싶었다. 그러나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다. 뉴욕대학교는 사립학교 중에서도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학교다. 학비뿐 아니라 생활비도 문제였다. 누나도 함께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부담도 두 배로 들어가야 했다. 경제적 부담은 실제로 만만치 않았다. 뉴욕의 학비와 생활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나와 누나는 작은 방을 얻어 함께 쓰며 되도록 비용을 줄여 나갔다.
누나와 나는 고교 시절 같이 지내다가 대학 진학과 함께 떨여졌는데 이제 뉴욕에서 또다시 한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나와 누나는 도시락을 많이 싸서 다녔다. 유학 생활이라면 호화로운 생활을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비가 너무 비싼 나머지 생활면에서는 굉장히 어렵다. 연구실에서도 유학생들끼리 도시락을 같이 먹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대부분 식사는 집에서 해 먹거나 근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특히 누나의 도시락을 싸주는 날이 많았다. 보통 한국의 문화에서는 형이나 누이가 동생의 도시락을 싸주는 경우가 많지만, 뉴욕에서 우리 남매는 남동생인 내가 음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요리하기를 워낙 좋아했고, 누나는 치대 면허 시험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는 종종 뉴욕대 치대 동료들에게 "남동생이 도시락을 싸줬다"며 자랑을 했고, 누나 동료들은 그 모습을 부러워했다. 당시 나는 양식보다는 볶음밥 같은 한식을 도시락으로 많이 만들었다. 이 때문에 난데없는 요리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살던 곳의 바로 옆집은 인도에서 온 이민자들이 머물던 집이었다. 거의 매일 카레 냄새가 심하게 진동했다. 나는 카레에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도 카레에 맞선 비장의 카드는 다름 아닌 한국의 '청국장'이었다. 카레와 청국장의 대결이 뉴욕의 아파트에서 펼쳐진 것이다. 승리는 '청국장'이었다.
뉴욕은 내가 한적하게 대학 시절을 보냈던 캘리포니아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너무도 달랐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는 해변에서 먹고 놀고 했지만, 뉴욕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으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뭐가 얼마나 바쁘길래 저렇게 살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신호도 잘 지키지 않았다. 신호들이 있지만 그걸 무시하고 사람들은 그냥 뛰어다녔다. 그것이 일종의 뉴욕 문화였다. 한국의 '빨리빨리' 같은 문화가 뉴욕에도 팽배했다. 서울에 처음 온 사람들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고 하던데 내가 처음 본 뉴욕의 모습이 정확히 그랬다. "도시니까 바쁘게 사는구나"
캘리포니아에 비하면 뉴욕대학교는 캠퍼스 분위기도 전혀 나질 않았다. 학교 생활은 직장에 출퇴근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뉴욕대 같은 경우는 곳곳에 건물이 있을 뿐, 캠퍼스가 따로 없어서 학교 수업을 받기보다는 출근하는 기분이 들었다. 국제정치 대학원에 입학한 동기는 약 20명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매일 같이 국제정치를 논하는 토론이 계속되었고,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유일한 돌파구는 그냥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다.
<이동석은 누구인가(8)>
뉴욕대학교 대학원 시절 나는 선거에 나가 당선되는 경험을 했다. 대학원 한인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한인 학생회장은 재학생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재학생을 상대로 선거운동도 해야 한다. 선거는 힘들지 않고 재미있었다. 뉴욕대학교 대학원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한인 학생수가 많은 곳이다. 전체 유권자 수는 대략 1천 명 정도 되지만, 1천 명이 다 투표하는 것은 아니고 약 300~400명 정도 투표를 한다. 나는 유권자인 학생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선거운동을 했다.
뉴욕대 대학원 한인 학생회에서 함께 활동한 임원진의 화력은 대단했다. 강우성 부회장님을 비롯한 임원진의 능력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한인 학생회장을 하며 가장 의미 있는 활동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의 역사왜곡 시도인 '동북공정'을 차단하기 위해 '핼러윈 퍼레이드'를 벌인 일이었다.
2011년 당시는 한참 '동북공정' 관련 역사 이슈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고구려'가 본래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등 많은 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고국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중국의 역사왜곡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때 학생회 임원 회의에서 강우성 부회장님이 '핼러윈데이를 이용해 동북공정의 진실을 알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뉴욕에서는 해마다 10월 31일이 되면 유명한 핼러윈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핼러윈데이를 맞아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각종 기괴한 분장을 하고 퍼레이드를 펼치는데, 그 퍼레이드가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방송된다.
매년 10월 31일 핼러윈마다 어른이건 아이건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핼러윈 퍼레이드에는 코스튬을 입고 있는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전 미국인이 시청하는 이 퍼레이드를 이용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저지하는 이벤트로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 중에 때마침 SBS에서 '연개소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랐다.
'고구려 갑옷을 입고 핼러윈 퍼레이드를 하자. 그럼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라는 사실이 전 세계적으로 홍보가 될 것이다'
너무나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곧바로 한국에 있는 연개소문 PD에게 연락을 했다. "저희들은 뉴욕대 대학원 한인 학생회입니다.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과 역사왜곡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의 역사를 알리는 한인학생회 주최의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갑옷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SBS에서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심지어는 방송국에서 배송비까지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다음(DAUM) 아고라에서 국민 성금을 받을 수 있었다.
"뉴욕대 대학원 한인 학생회에서 고구려 갑옷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자 합니다. 뉴욕 핼러윈 퍼레이드에서 외국인들에게 고구려 갑옷을 입히는 퍼레이드를 준비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의 압도적인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성금 모금 공지를 내가 여기저기서 호응이 왔다. 기억하기로는 당시 약 5백만 원 정도의 돈이 모이기도 했다. 학생회가 추진한 이벤트로는 실로 엄청난 성공이었다.
드디어 핼러윈 퍼레이드 당일. 우리는 UN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각 나라의 대학생 친구들을 불러서 고구려 갑옷을 입히고 핼러윈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외국인들 100여 명이 고구려 장군의 갑옷을 입고 퍼레이드를 하자 단번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미국인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갑옷 차림에 궁금해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설명을 해 나갔다. '왜 고구려가 논란이 되는지' 우리는 고구려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유인물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날 대한민국 모든 9시 뉴스는 이 사건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역대 뉴욕대 대학원 한인 학생회가 개최한 행사가 이렇게 큰 화제를 모은 적은 없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차단하기 위해 기획했던 '고구려 갑옷 퍼레이드'는 나의 대학원 시절 가장 의미 깊은 사건이었다.
<이동석은 누구인가(9)>
뉴욕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잠시 동안 진로 고민이 있었다. 앞으로 미국에서 계속 뿌리를 내려야 할까,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녔기 때문에 나 역시 당연히 미국에서 직업을 얻고 회사를 다니며 꿈을 펼치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국으로 돌아가 내가 미국에서 배우고 학습한 경험을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2011년 초, 나는 귀국을 택했다. 대학원 졸업 후 내가 택한 진로는 직장도 아니고 학교도 아닌 '군대'였다. 내가 무조건적 귀국을 선택했던 이유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반드시 군대를 가야 한다, 무조건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그런 신념 하나는 확고했었다. 그 원칙 때문에 나는 군 입대 영장을 받기 위해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나는 20대를 벗어나 거의 서른 살을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11년 정도 외국 생활을 하다 보니 한국 정서에 서툰 면이 많았다. 특히 영어가 입에 붙어버린 나의 어투가 문제였다.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 한국어를 많이 쓰지 않다 보니 문화 차이, 언어의 장벽이 또 생긴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나이 문제였다. 귀국하자마자 군대를 갔지만, 이미 너무 늦은 나이(28살)이었다. 동기들보다 7~8살쯤 많은 나이였다. 당연히 선임들은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었다. 처음에는 그 점이 어려웠다.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선임한테 존댓말을 써야 되고, 선임은 나한테 반말을 했다. 심지어는 소대장님도 나보다 2~3살 어렸고, 중대장님이 한두 살 많았을 정도였다.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번은 7살 어린 선임에게 식판으로 맞기도 했다. "제대로 안 하냐!"는 핀잔과 함께. 나는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더군다나 내가 배치받은 자대는 최전방이었다. 우리 부대는 파주 쪽 방어를 맡고 있는 1사단(전진부대)였고, 내 근무지는 GOP 안에 있었다. 도라전망대, 제3땅굴 등이 모두 우리 부대의 관할 지역이었고, 우리는 해당 지역을 돌아가며 순환 근무했다. 생각건대, 군대 생활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몇 번의 인턴 생활을 해보긴 했지만, 그때까지 나는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군대는 상하관계로 묶여 있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배워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이 어린 친구들 앞에서 내가 낮아질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배워볼 수 있는 그런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군대에서 모셨던 상사, 지휘관들과 현재까지도 자주 통화하고 좋은 관계로 남아있는 정도로 나는 원만한 군 시절을 보냈다. 특히 터줏대감이시던 정종원 원사님은 아버지처럼 나를 잘 대해 주셨다. 남자들은 군대 전역 이후, 다시 입대하는 악몽을 한 번씩 꾸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런 꿈을 꿨지만, 그 꿈속에서 조차 별로 슬프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나는 조직 안에서 잘 적응했고, 어쩌면 버려지는 시간으로 여겼을 수도 있던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 많은 의미를 찾아 나갔다. 그렇게 나는 군대 안에서 다시금 나의 또 다른 꿈을 준비해 나갔다.
<이동석은 누구인가(10)>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군 시절부터 하기 시작했다.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했다. 신문 정독은 물론 매일 같이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 보면서 거의 학습을 하다시피 했다.
2013년 8월, 전역하자마자 곧바로 언론사에 취업의 문을 두드렸고, 매경미디어그룹의 종합편성 채널인 MBN에 합격해 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입사 후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사회부였다. 약 1년 정도 사회부 소속으로 일했다. 사회부 기자들에게는 언론계 은어로 '사스마리'라 불리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있다. 사건 사고 취재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경찰서 기자실에서 숙식하며 취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보통 새벽 2시에 잠에 들고 새벽 4~5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계속한다. (사스마리는 원래 경찰 출입기자를 뜻하는 일본 말로 사쓰마와리에서 나온 말인데 발음이 어려운 탓에 보통 사스마리라고 부른다) 요즘 이런 풍조가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사스마리 같은 극한 체험을 거쳐야 기자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사스마리보다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사 초기, 우리 사회에 큰 트라우마를 남긴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나의 기자 생활도 전기를 맞았다. 우리 기수는 2013년 하반기에 MBN에 입사했다. 2014년 4월에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나는 아직 '수습 기간'이었다. 세월호 사건과 함께 우리는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안산과 팽목항을 오고 가며 사건 취재에 매달렸다. 특히 거의 석 달 동안은 팽목항에 기거하면서 기사를 작성했다. 당시 기자들 중에서도 사고 충격으로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중에도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는 기자가 있을 정도였다. 이 문제는 나뿐만 아니라 함께 MBN에 입사한 동기들 모두에게 닥친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 기수는 스스로를 '세월호 기수'라고 불렀다.
초짜 기자 시절, 나를 가장 괴롭힌 일은 글쓰기였다. 10년 넘게 모국어와 담을 쌓고 외국 생활을 하다 귀국한 끝에 한국적인 맛을 잃고 지냈던 나의 말투는 군대 생활을 거치면서 많이 좋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기자는 글을 쓰는 직업이었다. 말과 달리 글은 별도의 훈련이 필요했다. 특히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귀국 전까지 대부분 영어로 쓰고 말하다가 한국어로 문장을 써야 되니 처음에는 내가 봐도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적절한 단어 사용을 못 하거나, 문법이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선배들한테 질책도 받고 혼도 많이 났다.
나는 정치부 출입기자 생활을 통해 실로 엄청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정치부 소속 기자는 20~30명으로 국회만 출입한 기자는 15명 내외였다. 선배, 후배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너무나도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며 MBN의 명성을 높이는데 힘을 쏟았다.
선배들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다. 지금은 소주 한잔하면서 안줏거리로 삼는 추억의 일부가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영어도 할 줄 모르면서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던 소년시절의 힘들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를 만큼, 글쓰기는 내 기자 생활의 도전과제였다.
혼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나중에는 기자이면서 기사 쓰는 일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동료와 선배들이 많이 위로해 주고, 이끌어주셨다. 오죽했으면 '나는 힘든 길만 골라서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을 스스로 찾아다니다 보니, 남들이 못했던 경험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시간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힘들었던 시간은 결과적으로 내 인생의 약이 되고 힘이 되어준 '하드 트레이닝'의 시간이었다. 이런 계기가 없었다면 나는 성장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실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동석은 누구인가(11)>
나는 왜 정치권에 몸을 던졌을까? 정치는 어쩌면 운명처럼 나에게 다가온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정치를 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 모습에 동경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정치를 하며 항상 나에게 강조한 것은 국민에 대한 '존경'과 국민을 향한 '선행'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당연히 정치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을 때 특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아버지의 평소 가르침이 종종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떤 방향이 국가와 국민에게 더욱더 이로운 길인지?' 기자는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공적인 시선에서 기사를 써야 했다. 당연히 국가적 관점, 사회적인 시각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기자 생활을 하며 나는 정치에 대한 모순적인 생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 정치의 무능과 한계를 많이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좋은 정치'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점점 더 크게 실감하고 있었다. 기자가 된 뒤로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가 바라보고 옆에서 겪었던 현실 정치는 청년 시절 배우고 그려온 이상적 정치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며 여러 단위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의사결정에 관여하다 보니, 그때마다 3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실의 활동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국가 전반의 영역에서 영향을 미칠 정책을 생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국정 컨트롤 타워에서 한 명의 정책 입안자가 내놓은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수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직관적인 통찰력, 즉 본능적 감각이다. 고등학교 축구부 시절, 공을 패스할 때 우리 편 위치를 눈으로 보고 공을 차면 이미 늦었다. 내가 공을 잡는 순간 누군가 안으로 치고 들어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감각적으로 공을 밀어 넣어야 했다. 국정운영도 비슷하다.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는 기획력이다. 직관으로 포착한 의제를 기획력으로 구체화하고 판을 짜지 못하면 일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아무리 어떤 의제의 가치를 일찍 알아보고 유의미한 의제를 설정했다고 하더라도 기획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전략을 그려내지 못하면 일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세 번째 요소는 추진력이다. 국가 정책은 단순히 좋은 생각이나 아이디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이를 구현하려면 많은 기관과 조직의 동의를 얻고 제도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즉 구체적으로 일을 밀고 나가는 힘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2023년 6월 2일, 나는 대통령실에 사표를 냈다. 내가 사표를 쓴 이유는 오랫동안 내가 꿈꾸던 정치를 나의 힘으로 실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 정치의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 사람 냄새나는 정치를 구현하고 싶다는 나의 꿈은 그렇게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동석은 누구인가(마지막 편)>
나는 무엇보다 진영의 정치를 뛰어넘고 싶다. 나는 아예 반대 진영이라는 말을 극복하고 싶다. 내가 오랜 시간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출입하며 느낀 것은 여야의 극한 대치가 대한민국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물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여의도 문법'이 가르치는 정치란 한마디로 '진영의 정치학'이었다. 반대편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마치 정치의 일상이자, 정치의 본령처럼 간주된다.
막스 베버는 일찍이 정치가의 세 가지 자질을 요구했다. 그것은 바로 '정열과 책임감, 균형감각'이다. 정치인은 시대적 과제와 국민의 소망에 헌신할 수 있는 열정과 사실을 은폐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도덕적 자세, 그리고 인간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모든 것을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균형감각을 갖춰야 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을 정치의 본령으로 착각하고 있는 정치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정치인은 공정한 시각과 균형감각을 갖고, 고도의 역사적 책임감 속에서 때로는 같은 진영의 잘못도 지적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정치의 본분은 갈등을 갈등으로 푸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타협과 양보의 정신으로 갈등을 조정하고 결국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전략적 행위다. 정치적 견해는 다르지만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시비비의 정쟁에서 벗어나 관용과 배려의 자세로 서로 협상하고 양보하며 최선의 정책으로 국민 대중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 한다.
나는 '사람냄새'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언론계와 정치권에서 많은 말을 들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사람'이라는 평범한 말이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람이라는 말은 정치의 따뜻함을 담고 있다. 얼마 전까지 정치권에서 여당, 야당 의원들은 서로 싸우다가도 저녁에는 함께 소주를 마시며 오해를 풀었다. 지금은 이런 정치의 매력이 실종된 상태다. 그러다 보니 불신과 조롱만 가득하고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나는 오래된 정치의 매력을 다시 살리고 싶은 꿈이 있다. 사람냄새나는 그런 정치의 매력을.
어린 시절부터 타향살이를 하며 헤쳐 온 쉽지 않은 길은 대중의 아픔과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주었다. 기자 시절 사회부, 정치부를 섭렵하며 사회를 바라보는 다채롭고 풍부한 시각을 길렀고, 인수위와 대통령실에서는 국정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해양수산부에서 근무하며 국가 행정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며 행정의 무게와 책임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국민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실질적 해법과 대안이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 정치의 원천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나는 '사람냄새' 나는 인간적인 정치를 추구하고 싶다. 반목과 질시를 넘어 함께 꿈꾸고, 함께 길을 찾는 정치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나의 꿈'과 '충주 시민의 꿈'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이동석의 정치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이제 '사람냄새' 풍기는 정치를 시작하려 한다. 충북에서 가장 젊은 기초단체장 출마 예정자, '충주의 미래'를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이동석의 정치 행보에 많은 충주 시민분들이 함께 동석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