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당대의 조직폭력배 김태촌이 출감(出監)을 했다는 기사가 언론을 탔다.
그가 무슨 '로빈 훋'이나 되나? 언론들은 그래서 즐거운가.
그의 일생에서 무엇을 그리 엿 볼게 있는가. 반평생을 옥(獄)살이로 보내고, 어느새 초로(初老)의 길에 들어서, 60이 다 된 나이에도 '보스'로 일반의 호기심 대상이 된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얼마 전까지는 '김두한'의 스토리가 마치 의협(義俠)지 속의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등장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화(美化)시킨다해도 그저 깡패는 깡패일 뿐이다. 상업주의에 빠져 흥미 본위로 만든 TV-드라마는 역사마저 왜곡을 밥 먹듯 하며 미화시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쳐도 당국은 한번도 그 난맥상을 가지고 문제삼아 본,
일이 없는 결코 것 같다.
오늘날의 학교 안 폭력이 왜 근절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왜 중학교 아이들의 집단 강간사건이 수시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나. 이거 다 명명백백한 모방범죄다
당국이라는 것이 손놓고 맥없이 바라보다가, 그저. 관객이나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이니...
어찌 생각하면 그들은 틀림없는 공범(共犯)관계라 해도 지나칠 것 같지가 않다.
나의 개고기시절에는 참으로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이었는데,
왜 그리 깡패는 도처에 많았는지 모른다. 그것도 하나의 필요악(必要惡)인가.
그 시절엔 '깡패'가 많았다. '소위' '학삐리'라고 부르는 풋내기 깡다구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이제 막 코흘리개를 졸업한 꼬맹이들도 툭하면 '너 어디 나가니? 난 어디 나간다'는 게 인사다. 말투만 놓고 본다면 마치 직장이름처럼 줏어 대는 그 '나가는 데'라는 게 황당하다. 우선 종로부근만 하더라도 'YMCA''문화극장'평화극장'중앙극장'등 극장이나,
공공기관들이 소위 그들의 '나가는 데' 였다. 동네는 동네대로, '뉴욕' '풍년''선다래'등등,
빵집은 빵집대로 조무래기 깡패들의 집합소였다. 비록 '똘만이'에 불과하지만 그들 세계에도 명성은 있었다. 광화문 '똥개' '정광이' 초동의 '콧물'[원 별명들도 지저분하지]. 문화극장 '상철이' 빅토리 '꼬마' EMI의 '곰보'[얼굴이 마마로 얽은]. 지금시대 젊은이들이 들으면 혹 그런 장소들을 그 누군가 깡패들에게 제공을 했었나?
아니면 '세'를 놓았었나?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저.
그 똘만이들이 자기네 안방처럼 마음대로 부르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다. 사는 동네가 어느 곳. 하고 이야기만 하더라도 아이들끼리라면 무조건 깡패로 인식이 되었다. 그렇다고 '횟칼'을 쓴 것도 아니고 각목을 쓴 것도 아니다. '맞짱'으로 승부를 정했고, 빤찌 센 놈을 알아주는 풍조였다.
'다구리[집단패싸움]'싸움이 붙으면 무기가 '장돌[큼지막한 돌]'밖에 없었다.
가꾸목[각목(角木)]을 들거나, 좀 치사한 놈들이 '아이구찌'나 '잭 나이프'를 과시용으로 차고 다녔다.
'학삐리'깡패들은 차림새에서 온다.
맘보바지, 나팔바지. '코 구두'나 '고무장화' 목에는 아무 때나 붕대를 감고 다녔다.
꼭 다쳐서 맨 게 아니라 '폼' 좀 나라고 맨 것인데...글세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걸음걸이는 '8자'라야 되고 양손은 항상 엄지가 하늘로 향하고 네 손가락과는 멀리 떼어 있어야 했다. 모자의 '챙'은 짧다 못해 없는 것 같은 것이 유행이었고,
어떤 놈들은 멀쩡한 모자를 찢어서 얼기설기 기워서 쓰고 다녔다. 아- '껌'도 아구창이 날아갈 정도로 씹어댔다..[생전 안 뱉는다, 붙였다 또 씹고]
여자는 '깔치' 남자는 '덥치' 문자 그대로 순진한 발상에서 나온듯 하다.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깡패'의 이야기가 온종일 주제였다. 별로 깡패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부촌(富村) 가회동에도 있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부르던, 우리들 눈에는 그들은 '영웅'이었다. 우리보다 좀 윗 또래들은 고등학교..재학생들.
"도상 막걸리''대동아 원자탄''중동의 와세다, YMCA 세찬이' 인근 삼청동의 '쌍기'.
우리는 마치 그들을 무슨 장군의 이름처럼 외우고 다녔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그렇다고 무슨 '취미' 같은 건 꿈도 못 꾸던 그 시절의 그 상황에서,
그렇게 불렀지만 사실 나쁜 짓만 상습적으로 저지르던 깡패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다가도 동네 어른을 보면 뒤돌아 서서 감추거나 손가락을 까맣게 태우면서도, 몰래 꼬불쳐 신속하게 껐다. 뒤에서는 '꼰대' 어쩌고 하다가도 낮 익은 동네 어른들을 보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은 전후(戰後)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던 상황이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매우 불투명했다.
젊은이들의 분출되지 못한 야망이 가슴마다 사화산(死火山)처럼 남아있었다. 사회에 대한, 혹은 가난 또는 세상만사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이 사무쳐도 촛불 같은 거.
생각조차 못했다. 동정심을 바라며 '쑈'같은 거 절대 안 했다.
요즘 조직 폭력배들은 검사와 골프 치고, 경찰간부와 요정출입도 한다지?.. 정치인?
자유당 정치인들의 타락상도 널리 알려져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김대업' 같은 '불한당'을 고용하여, 무조건 이기고 보자며,
더러운 방법으로 상대방 후보를 궁지에 몰아넣는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정동영 같은 노인폄훼와 패륜(悖倫)은 더더욱 없었고, '노사모' 같은 '자생(自生) 빨갱이'도 물론 없었다.
자유당이 아무리 악했다 해도 '열린당'의 요즘 행태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래서 그 시절 무지했던 그러나 의리 있고 정의감도 있었던 깡패들이 무지 그립다.
그 흘러간 세월도 그립다. 세월이 요즘 같아서야...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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