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고조선 석향
지금부터 2,500년 전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로 노자, 공자가 도덕과 학문을 가르치고, 우리나라는 고조선 44세 구물 단군이 지린성 장춘의 백악산 아사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랴오닝성 개원시에서 제3왕조인 장단경 아사달 시대를 연 때이다.
그렇다면 2,500년 전 울릉도는 어떠했을까? 그때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울창한 향나무섬이었을 거다. 그때 뿌리내려 2,500년을 살아온 향나무가 있으니 말이다.
고조선 시대에 사할린과 왜 열도에 조몬족이 살았다. 특이하게 얼굴이 희고 온몸에 털이 많았으며 여왕이 다스렸다고 하니 모계 씨족사회였다. ‘서진’의 ‘진수’가 쓴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이다. ‘244년 왕기가 위궁(고구려 동천왕)을 토벌하러 옥저 동해안에 도착했고 노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느냐 물으니 바다 동쪽에 섬(울릉도)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나 여자만 있고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울릉도는 모계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한 영웅이 우산국을 세우고 왕이 되니 ‘우해’이다. 이 우해가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고 대마국 왕의 셋째딸 ‘풍미’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그 풍미에게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다, 512년 6월 신라 장군 ‘이사부’에게 나라를 잃었다. 이때 우산국의 문화를 잘 아는 강릉 태수 이사부는 나무 사자를 배에 싣고 와 ‘이 맹수로 모두 밟아 죽이겠다.’는 계략을 썼다. 아마도 이 무렵부터 울릉도의 향기로운 향나무가 신라 왕실을 향기롭게 했을 것이다.
김부식 삼국사기의 향 전래 기록이다. ‘눌지마립간(417∼458) 때, 양(梁)나라 사신이 의복과 향물을 가져왔다. 왕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라 여러 사람에게 두루 물었다. 묵호자가 말하였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는데, 이른바 신성에 정성을 닿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묵호자는 5세기에 고구려에서 포교하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알린 중국의 고승이다. 또 양나라는 중국 중남부에서 베트남 하노이 남부까지 56년간 다스렸던 제국이다.
그리고 이사부가 울릉도를 점령한 뒤의 기록이다. ‘612년(진평왕 34) 전란에 김유신이 향불을 피워 하늘에 고하여 빌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때의 향은 울릉도 향나무였을 것이다.
나무 속살이 붉은 보라여서 자단이라고도 하는 향나무는 아열대가 원산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똑같은 향을 풍기는 신비한 나무이다. 특히 불에다 사르면 더욱 향기롭다. 따라서 중요한 의례나 의식에서 향로에 향을 피우니 이는 ‘신의 향기’였다. 4세기의 고구려 안악 3호분의 벽화 ‘부인도’에서 향로를 받든 시녀의 모습은 일상생활에까지 향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향나무를 땅속에 묻거나 줄기의 상처에서 수지를 얻었다. 이 수지가 침향이며, 짙은 향의 귀한 약재였다. 천수 백 년이면 침향이 될 거라 여기고, 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각처의 해안에 향나무를 묻고 비를 세웠다.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에도 1309년 동해안의 지방관들이 이상사회를 미륵부처께 서원하며 2,500그루의 향나무를 동해안에 묻고 고성 사선봉에 매향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침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울릉도의 향나무를 석향이라 한다. 이 울릉도의 석향은 조선 왕실의 진상품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수없이 파헤치고 잘렸으며, 한국전쟁 무렵까지 소금을 굽는 장작으로 썼다니, 이 글을 쓰기조차 부끄럽다. 그렇게 울릉도의 울울창창 석향숲은 역사의 뒤안길에 있다. 하지만 도동항을 내려다보는 2,500살 석향을 향해 엎드리나니, 이제부터라도 석향 자손들이 다시 그날의 석향 우거진 숲섬 모습을 되찾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