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사진> 박완서, 이호철 등저, 샘터 (2004)
한창 KTX 공사로 근처가 복잡하던 구미역이었다.
디자인 회사 재직 시절, 구미공단에 있는 삼성전자 무선통신사업부를 들락거리며
그해 봄에 개통한 KTX는 정말 원없이 타고 다녔다. 늘 예약만 해주는 경리 직원이, 나를 너무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는, 올라올 때는 잠자기에 허리 아프다는 핑계로, 푹신한 새마을호를 끊어달라는 사치스러운 요구를 하던 나날이었다.
도대체 삼성이 뭐길래, 오전 10시에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회의를 하자는 건지,
헐레벌떡 뛰어가 회의를 마치고 구미역으로 돌아왔는데,
서울오는 열차 시간이 많이 남아 3시간 정도 텀이 생겼다.
혼자 놀기는 워낙 잘 하는데다가, 다소 장소가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낯선 곳이었고,
구미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몇시간을 달래기 위해 세시간 정도면 너끈히 끝낼만한 가벼운 책을 사러 종종 들리던
나름대로 단골 서점까지 생긴터, 그날도 그 서점에 가서 책을 하나 집어들었는데 바로 <이 한장의 사진>이었다.
별다방 콩다방은 찾을 수 없는 그곳이었기에,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카페를 한군데 찾아,
킬링 타임용으로 산 책 치고는 정말 월척이다 싶을만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다.
박완서, 김용택, 최인호, 안도현, 윤대녕, 김별아, 신현림씨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들어봤음직한 문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사연 있는 사진 한장씩을 소개하며 쓴 에세이 형식이었는데,
글로 먹고 사는 양반들은 본업의 장르가 아니더라도 참 글을 맛있고 재밌게 쓴다.
특히 어느 시인의 대학동기 중에, 헐리웃 진출을 꿈꾸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던 연극영화과 친구의 사연이 떠오른다.
공부라는 것은 그들의 인생목록에 없을법한 수많은 남학생들을 도서관 앞으로 이끈 그 미인 친구의 얘기에,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재된 사진은, 오드리 햅번의 아들 집에서 그 미인 친구가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책 편집상 흑백이었고, 남자처럼 숏컷을 한 평범한 차림이었지만, 참 똘똘하고 야무져 보이는 미인형이었다.
그 친구는 헐리웃 진출 대신 외항사 승무원으로 들어가, 그 회사의 중역으로 있던 외국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둘이 서로 반한 것은, 서로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모습에서 였다고 한다.
지금은 외국에 거주하며 아이를 셋 둔 엄마가 되었는데,
가끔 우리나라에 들리면 사는 형편도 넉넉한 그 미인 친구는 남대문 시장에 가서 흥정하며 사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훈훈하게 보이는듯한 말투로 묘사하고 있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도 늘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왜 그리 당차게 했었는지는 모르겠다.
스물일곱 그 시절, 내가 책을 열심히 읽는 모습을 보여 반하게 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던 사실을,
이제 보니 까맣게 있고 있었다.
당시 구미에는 나름대로 서울의 명동과 비교되는 거리가 있었고, 그곳에는 몇군데 맛집이 있었는데,
다 찌그러진 냄비에 지리를 맛깔나게 끓여주던 <싱글벙글>이라는 복어집이 유명했다.
얼마전 서초역을 지나다가 싱글벙글 복어 간판을 스치듯 보면서,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그 단어가 새삼 떠올랐다. 싱글벙글 복어..
구미에서 유명하던 싱글벙글 복어집이 서울까지 진출한 시간 동안,
당시 한창 짓고 있어 정신없고 지저분하던 구미역 KTX 역사는 지금은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을 테고,
권상우가 투우사로 나오던 광고, 세상에나, 카메라 렌즈를 돌릴 수 있었던 엄청난 휴대폰은, 이제는 플렉서블 상용화에 임박해있고,
내 마음 속에 이 한장의 사진으로 남겨둔 그 사람도, 어디에선가 잘 지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