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출애굽기 4 : 2, 20
제목: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일시: 2011. 11. 13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모세하면 어떠한 모습이 연상이 되는가? 힌 수염을 날리고 푸대자락 같은 옷을 입고 지팡이를 잡고 눈을 부릅뜨면서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모습으로 출렁이는 파도를 일으키며 홍해를 가르고 있는 모세의 모습이다. 오늘은 그러한 모세의 모습에서 지팡이에 우리의 시선을 맞출까 한다.
모세의 지팡이는 출애굽기 4장에 처음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바로와 이스라엘백성에게 보낼 때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지팡이를 지목하신 것이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그 지팡이는 평범한 나무막대기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Mission을 이루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갈 때 그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후, 모세의 손에 있던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가 된다. 그 지팡이로 나일강을 치니 강이 피로 변했다(출7:20). 지팡이를 잡고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니 개구리들이 올라와 애굽 땅을 덮었다(출8:5). 모세가 여호와의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니 그것이 애굽 온 땅에 이가 되었다(출8:16절).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하늘에서 우박과 불덩이가 섞여 내리기도 했다(출9:23).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동풍이 일어나 메뚜기떼가 애굽 땅을 덮었다(출10:13). 뭐니 뭐니 해도 모세의 기적의 하이라이트는 홍해를 가른 일이다. 그때도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II. 모세의 기적의 지팡이는 그의 일상생활이었다.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당시 유목민의 일상적인 생활필수품이었다. 그것은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과 소와 가축을 치던 지팡이였다. 그 지팡이는 다른 목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평범한 마른 나무 막대기였다. 그 지팡이는 이드로의 사위이자 십보라의 남편 “모세의 지팡이”였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어 그에게 특별한 Mission을 맡기실 때 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이 그게 진짜 몰라서 물었겠는가!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든 지팡이가 그냥 평범한 나무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런 나무 막대기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모세는 처음에 하나님의 그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0, 13절)라고 말하고 있다. 모세 역시 마른 막대기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이제 모세는 그의 평범한 지팡이에 임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제 모세의 일상생활은 매일 기적의 삶이 될 것이다. 모세의 평범한 지팡이는 기적의 지팡이가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붙잡은 지팡이이기 때문이다. 지팡이는 모세가 붙잡고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기에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교회 표어가운데 기억나는 표어가 2006년도 표어이다. [기적이 일상생활인 2006년]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 해 계시면 기적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될 것이다. 저는 기적이 일상생활이 되기에 너무 놀래도 하나님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물론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과 능력에 놀랠 수 있고 감탄할 수 있지만, 너무 진지하게 놀래면 하나님은 기분이 상해하실 것 같다. “왜 그렇게 놀래, 아니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는가?” “기도해 놓고 왜 그리 놀래? 그럴 줄 몰랐는가?”라고 하나님이 되물으시면 뭐라고 하겠는가?
저는 동그랗게 생긴 것은 대부분 좋아하는데 축구 말고 탁구 역시 좋아한다. 요즘은 많이 치지 못하는데, 신학교 다닐 때는 탁구는 저의 주 종목이었다. 학교를 갈 때 수업 준비와 더불어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은 탁구라켓이었다. 그때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라켓은 버터플라이였다. 라켓과 고무라바를 따로 사서 접착제로 잘 붙여 선수용처럼 만들어 쓰곤 했다. 그 라켓을 들고 학교 탁구장에 들어가면 마치 서부의 총잡이가 선술집에 들어선 것처럼 많은 이들이 좍 바라본다. 그때 불문룰과 같이 “한 게임 부를까요”라고 하면서 들어가면 된다. 지면 탈락이고 이기면 자기가 치고 싶을 때까지 친다. 한번은 우연히 교수님과 치게 되었는데, 치는데 저와 제대로 게임이 될 수 없다. 치면서 그는 종종 나이스 볼이라고 한다. 저는 그때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저에게는 나이스 볼이 아니고 평범한 볼이지 교수님한테나 나이스 볼이지요.” 그분이 저를 제대로 평가해 주신다면 “역시...” 이런 식으로 나와야지. 하나님과 탁구를 친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드라이브를 넣으시면 나이스 볼이라고 한다. 못 잡아낼 만한 볼을 넘기시면 우리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나이스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저 평범하게 치실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나이스 하셨다. 그의 기적이 이스라엘을 놀래킬만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평범한 일이었다. 이제 모세는 기적의 인물이 된다. 그의 지팡이는 능력의 지팡이가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로 삼으실 때 일상생활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기적이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III. 모세의 지팡이인가? 하나님의 지팡이인가?
모세의 지팡이는 무엇인가? 마른 나무 막대기로 만든 지팡이이다. 모세의 지팡이로 할 수 있는 것이 뭔가? 양과 소를 모는 것이다. 힘이 없을 때 땅을 짚고 일어서게 하는 것일 것이다. 사나운 짐승이 접근할 때 위협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모세의 지팡이의 한계이다. “모세의 지팡이”가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고 티끌을 이로 만들고 홍해를 갈랐다고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이다. 모세의 지팡이로 그 모든 기적들을 설명할 수 없다. 모세의 지팡이가 그 능력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평범한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했을 때 비로소 그 기적은 설명될 수 있다. 설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모세의 지팡이라면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의 설명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지팡이라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하든지 설명하려고 한다. 어떻게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고 눈앞에 그런 표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어떻게 그 모든 기적을 일으키고 능력을 나타내었는지 우리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설명하는 것이 꽤 하나님을 위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일이다. 기적은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10가지 재앙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영국 일간지 Telegraph 인터넷판이 3월 28일(2010) 실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활주일 national geograephy에 방영될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은 10가지 재앙을 안 믿었는데, 이해할 설명이 나와서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BC 1200년 경에 람세스 2세 시대 화산폭팔의 재앙이 있었고 기후가 변했다고 한다. 기후가 올라가면 나일강이 마르고 유속이 느려지면서 독성이 강한 독초가 번성하며 이때 수초들이 죽을 때 나일강이 붉은색으로 변해 핏빛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어둠은 화산재이며 화산폭팔은 폭우를 동반해서 개구리 늘기도 한다. 10번째 장자의 죽음은 곡물에 달라붙어 있는 곰팡이로 인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10가지 재앙이 어떻게든지 일어났다는 것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고마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게 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은 작아지는 것이다. 다른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표적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의 지팡이”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지팡이의 능력을 자꾸 설명하려고 하면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모세의 기적을 달의 인력으로 설명하면 되겠는가? 조금 마음이 시원해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작아질 것이다.
아직도 비행기가 날라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 그 무거운 짐을 싣고 어찌 하늘에 뜬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작품인 새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새처럼 날고 싶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행기를 보라. 털도 없다. 뼈만 있다. 그 통뼈 속에 사람이 들어간다. 그리고 착륙을 위해서 활주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더욱 신비롭지 않는가! 독수리가 착륙하는 것을 보라. 오랜 세월이 지나면 희안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펄럭이는 비행기가 나올지 모르겠다. 얼마나 좋은 연료를 써서 나는가? 그러나 독수리는 그저 쥐 잡아먹고 벌레 잡아 먹고도 그렇게 잘 나른다. 파리가 먹는 것은 없으면서 그렇게 잘 나는 것을 보라. 곤충을 잡아 먹고도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는 모세의 기적을 말할 때 “모세의 지팡이”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보아야 한다. 그때 모든 것이 설명이 된다.
IV. 터어키 이스탄불에서 모세의 지팡이를 보았다. 도사님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냥 조그마한 막대기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가지 하나가 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짜 모세의 지팡이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누구하나 그것이 진짜 모세의 지팡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이다. 우리는 평범한 막대기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하나님의 막대기가 된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다. 양치고 소치는 지팡이가 바로를 치고 이스라엘을 이끄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다. 우리의 일상생활의 평범한 지팡이가 무엇인가? 우리의 지팡이가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되기를 바란다. 지팡이는 모세가 잡고 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잡혀 있기에 능력의 사람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