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지해변산책로와 태종대(太宗臺)
여행일 : ‘18. 1. 23(화) 소재지 : 부산시 영도구 산행코스 : 반도보라아파트→부산체육고→중리해안→감지해변 산책로(2.1km)→감지해안→태종대 주차장→전망대→등대→자갈마당→주차장(소요시간 : 약 2시간 1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오륙도와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암석해안의 명승지로, 영도의 남단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면적 53만 2390평에 최고지점인 태종산의 높이가 250m쯤 되는데, 산 전역이 수십 년 된 울창한 송림(松林)으로 싸여 있으며, 바다에 면한 돌출부는 기암절벽(奇巖絶壁)으로 이루어졌다. 태종대라는 이름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전국의 명승지를 다니던 중 이곳 영도의 절경에 도취되어 쉬어갔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태종에 얽힌 얘기도 전해진다. 1419년 큰 가뭄이 들었는데, 그해 5월에 태종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음력 5월 초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그 이후로 동래 부사도 태종을 본받아 가뭄이 들 때마다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는데, 이로 인해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해금강(海金剛)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여러 모양의 바위와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 숲이 푸른 바닷물과 잘 조화를 이루며, 태종대에 이르는 산 중턱에는 4.3㎞의 순환관광도로가 나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11월 1일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 제17호로 지정되었다.
▼ 봉래산의 산행이 끝나면 다음은 태종대 투어로 이어진다. 버스로 태종대주차장까지 이동시켜주는데 후미그룹이 산에서 내려오려면 30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그러느니 차라리 태종대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물론 먼저 도착해 있던 일행 서너 명과 함께이다. 산에서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도로(함지로)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 후, 얼마간 걸으면 ‘부산 체육중·고등학교’가 나온다. ▼ 부산체고의 담장을 따르다가 영도여고가 보였다싶으면 담장을 오른편에 끼고 90도를 돌아 ‘중리북로 21번길’을 따른다. 잠시 후 ‘부산남고삼거리’를 만났다싶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중리해안이 나타난다. 해안으로 내려가는 들머리에 ‘중리 맛집거리’라고 적힌 표지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참! 오는 길에 ‘보물섬 영도’의 이야기를 적은 안내판도 만날 수 있었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통해 영도의 옛 이야기 100개를 전하고 있는데, 그중 23번째 이야기인 ‘절영도진(絶影島鎭)’을 설명한 안내판을 길가에 세워놓은 것이다. 안내판이 전하는 얘기는 이렇다. 개항(開港)으로 일본인의 숫자가 늘자 그들이 사용할 신탄(薪炭 ,장작과 숯)이 부족해졌던 모양이다. 이에 일본에서 절영도의 나무를 베어 충당하겠다고 조정에 청원했는데, 조선 정부가 이를 거부하고 무분별한 벌채(伐採)를 막기 위해 포이포진과 개운포진 그리고 서평포진을 통합하여 절영도진(絶影島鎭)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1881년(고종 18)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15년간 운영되었다고 한다. 진의 최고책임자는 첨사(僉使)였는데 이곳으로 발령이 난 사람들은 두 번을 울었다고 한다. 부임해 섬에 들어오면서 울창한 숲으로 인해 귀양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울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섬 주위 어장에서 받아들이는 두둑한 세수입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까워 울었다는 것이다. ▼ 주차장에는 인근의 맛집들을 소개하는 ‘갈맷길 중리맛집 특화거리’ 안내판 외에도 ‘갈맷길 안내도’가 따로 세워져 있다. 잠시 후 걷게 될 길이니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갈맷길 3-3구간(10Km)을 지도에 그린 다음 절영해안산책로, 중리해녀촌, 감지해변산책로, 태종대전망대 등 각 지점의 주요한 포인트들을 표기해 두었다. 또한 이곳 갈맷길 영도코스가 ‘전국 5대 해안누리길’에 선정되었다는 자랑도 빼먹지 않고 늘어놓았다. 참고로 ‘부산 갈맷길’이란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로 사포지향(四抱之鄕 : 바다, 강, 산, 온천)인 부산의 지역적 특성을 담고 있는 부산판 ‘올레길’로 보면 되겠다. 2009년과 2010년, 정부의 ‘일자리 창출사업’인 ‘희망근로사업’의 일환으로 그린웨이(greenway, 산책로)를 조성했는데, 해안길과 숲길, 강변길, 도심길로 이루어진 길이 278.8km의 둘레길이 9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 ‘해녀촌’이 있다는 중리포구는 텅 비어있다. 선착장에 대여섯 척의 어선이 매어져 있을 따름이다. 정비공사가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곳에 있던 해녀촌도 이곳에서 200m쯤 떨어진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중리해녀촌’은 일제 때 제주에서 올라온 해녀들이 자리 잡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검은 햇빛가림막 아래서 나이 든 해녀들이 물질해 잡아 온 해산물을 바로 손질해 내놓는 풍경이 특징이라고도 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사투리와 함께 말이다. 그녀들이 차려주는 해산물을 안주 삼아 간단하게 한잔하고 길을 나서려고 했던 내 계획이 일거에 어긋나버리는 순간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 갈맷길의 입구에는 길이 폐쇄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공사 때문이라며 우회(迂回)를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라는 안내는 보이지 않는다. 경고판을 무시하고 곧장 갈맷길을 따르는 이유이다. 우리 같은 초행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공사구간을 통과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거리가 짧을 뿐만 아니라,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이다. ▼ 잠시 후 공사구간이 끝나는 지점의 산자락에서 갈맷길의 들머리를 만나게 된다. 들머리에 ‘봉래산 숲길’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14코스인 ‘감지해변산책로’로 총 거리는 2.1Km라고 한다. 난이도(難易度)는 ‘하(下)’급으로 표기되어 있다.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책로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 말을 증명리라도 하려는 듯 산길은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일행과 함께 담소를 하면서 걸어도 충분할 만큼 길의 폭도 널찍하다. 안전성도 확보되어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 산비탈의 경사가 조금만 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밧줄난간을 매어 놓았다. ▼ 15분쯤 진행했을까 널찍한 포장임도(이정표 : 감지해변 1.58Km/ 중리해녀촌 0.47Km)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올라왔던 방향에 갈맷길 폐쇄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임도를 계속 따르라는 얘기일 것이다. 왼편 감지해변 방향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길은 걷기가 한결 더 편해진다. 참! 이곳으로 오는 길에 삼거리(이정표 : 감지해변→ 1.78Km/ 중리산삼거리← 0.4Km/ 중리해녀촌↓ 0.2Km)를 만났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그곳에도 역시 갈맷길 폐쇄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 임도에 들어서면서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대형 선박들이 두둥실 떠있는 바다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 풍광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이내 헬기장에 올라선다. 엄청나게 널따란데, 헬기장의 특징대로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드넓은 바다로 눈길을 돌리니 화물선과 원양어선 등 대형 선박들이 섬처럼 무리를 이루며 떠 있다. 수리나 급유를 위해 부산항을 찾아오는 배들이 잠시 닻을 내리고 머무는 곳, 묘박지(錨泊地)란다. 그 오른편에는 봉래산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흙산인줄만 알았더니 곳곳에 바위지대가 파고들었다. ▼ 또 다시 길을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감지해변→ 1.13Km/ 경마장← 0.92Km/ 중리해녀촌↓ 0.99Km)를 보니 갈려나가는 길이 경마장으로 연결된다고 표기되어 있다. 이곳 부산에도 서울과는 별도로 경마장이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 조금 더 걸으면 오른편 벼랑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는 조망을 돕기 위해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망원렌즈를 통해 나타나는 풍경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아까 헬기장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 봉래산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빼면 말이다. ▼ 얼마간 더 걷자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에도 역시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 앞에는 ‘갈매길’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영도의 지형도에다 갈맷길 3-3구간과 함께 영도에서 ‘천혜의 절경’으로 꼽히는 15개 경관이 있는 위치를 그려 넣었다. 그 경관의 사진까지 개제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전망대에 오르니 조금 전의 전망대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아니 발아래에 잘 지어진 팔각정자가 보인다는 게 아까와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옆에 보이는 건물은 외관으로 보아 공중화장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감지해변산책로’는 공중화장실까지 갖춘 명품 둘레길이 분명하다. ▼ 눈요기를 즐기며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예쁜 외형의 정자(亭子)가 길손을 맞는다. 정자의 해안 쪽으로는 데크를 둘렀다. 전망대의 역할을 겸하라는 모양이다. 이곳에서의 조망 역시 아까의 전망대들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아니 확실히 다른 점도 있다. 감지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몽돌해안의 끝에는 작은 선착장이 만들어져 있다. 태종대 일대의 경관을 배를 타고 둘러보는 유람선들이 출발하는 곳이라고 한다. 유람선을 탈 경우 등대와 자살바위, 신선바위, 망부석, 아치섬, 태종대의 해안절벽, 해송 숲 등 태종대가 품은 천혜의 절경들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 잠시 해안길을 따른다. 왼편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점심때라선지 호객을 하는 아주머니들도 보인다. 하지만 우린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태종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는데 주어진 시간이 고작 2시간 반 뿐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점심을 먹을 시간까지고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으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널찍한 도로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널찍한 주차장이 나온다. ‘대한민국 명승 제17호’로 지정된 태종대(太宗臺)의 주차장이다. 걷기를 시작하고 45분이 걸렸다. 태종대는 삼면이 첨예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식애(海蝕崖)로서 1969년 1월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해안지형 가운데 관광지로서 개발이 가장 잘 된 곳으로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 주차장 앞에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란 태종대 표지석(太宗臺)이 세워져 있다. 태종대를 찾는 사람들이 인증사진을 찍는 곳이다. 태종대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태종대입네 하는 표지석을 따로 만들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길가에는 ‘태종대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 정귀문 작사, 김리학 작곡에 노래는 약사가수로 잘 알려진 황원태가 불렀단다. 노랫말을 읽어보니 아름다운 태종대를 노래하면서도 그곳이 부산의 영도에 있다는 점을 유난히도 강조하고 있다. 이왕에 나온 김에 영도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자. 영도는 따뜻한데다 먹을거리가 많아서 신석기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 흔적은 동삼동 패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조 중기까지는 나라에서 국마장(國馬場)을 경영할 만큼 명마 사육의 최적지였다. 원래의 이름이 ‘절영도(絶影島)’였던 이유이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명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올 정도라는 의미로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 자를 붙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후 섬을 비우는 공도책(空島策)에 따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절도(無人絶島)가 되었고, 1981년에야 절영도진(絶影島陣)이라는 첨사영(僉使營)이 들어섰다. 초라한 갯가에 지나지 않던 영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개항의 파고에 휩싸인 뒤 일본에게 군사적 요충지로 삼켜진다. 영도에서 길러진 군마가 만주 등지로 가서 침략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렇게 영도는 개화기의 한국에서 수탈과 근대 문명의 1번지라는 이중적인 이름을 숙명처럼 껴안았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영도가 부산 내륙을 방위한 병풍이었다는 의미도 된다. 영도가 없었다면 부산은 태평양의 거친 물살과 매서운 해풍에 고스란히 노출됐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부산이 받을 풍파를 먼저 받아 삭혀냈고, 부산이 감당해야 할 시련의 많은 부분을 혼자 짊어져 온 곳’이라는 부산 출신 최영철 시인의 시선을 꼭 빌리지 않더라도 조갑상 작가 말대로 ‘영도야말로 부산 역사의 축소판이다.’로 요약해 볼 수 있다. ▼ 태종대를 둘러보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두 발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태종대를 즐기는 방법이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간이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유람선을 타고 바다 위에서 태종대의 속살을 엿보는 방법이다. 배 삯이 좀 비싸기는 하지만 유람선을 따라 쫓아다니는 갈매기들과 새우깡 하나를 가운데 놓고 겨뤄보는 이색적인 경험도 할 수 있다. 마지막 방법은 유원지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다누비 열차’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태종대표지석에서 태종대 방향으로 150m쯤 올라가면 열차의 승강장이 있다. 옆에 있는 매표소에서 1인당 3천 원짜리 승차권을 사면된다. ▼ 우린 '다누비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해안산책로를 걸어오는데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허나 조금 더 여유를 갖고 태종대의 숨은 비경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는 것도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겠다. 매 15분마다 출발하는 이 열차는 전망대와 등대, 그리고 태종사입구 등 3번을 멈춘다.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유원지를 둘러보면 된다. ▼ 태종대 광장에서 시작되는 산책로는 둥글게 연결되기 때문에 좌우 어느 방향으로 출발하든 따라 진행하면 광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 승강장에서 태종대유원지에 있는 전망대까지는 대략 1.8Km 정도, 느림보 ‘다누비 열차’는 10분쯤 달리더니 전망대 앞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다음 정류장인 등대까지는 거리가 가까우니 걸어서 이동하는 게 편리하다는 멘트로 빠뜨리지 않는다. 참! 깜빡 잊을 뻔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열차 안의 스피커를 통해 태종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 전망대는 멀리 수평선이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순환도로 서남쪽 끝 부근에 지어져 있다. 까마득한 단애(斷崖)의 위에 지어진 3층짜리 건물에는 전망대와 레스토랑, 간이매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망대가 건립된 자리는 본래 자살바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바위가 있던 곳이다. 1970년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극심한 생활고나 실연 등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 낭떠러지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사회문제를 불러일으키곤 했었다. ▼ 전망대에 서면 자그만 등대 하나를 머리에 이고 있는 ’생도(生島)‘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 뒤로는 한없이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생도(生島)는 물결이 칠 때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생김새가 마치 주전자를 엎어놓은 형상과 같다 하여 '주전자섬'으로도 불린다. 유분도(鍮盆島)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으니 참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섬은 우리나라 13개 영해기점(領海起點) 무인도서(無人島嶼) 가운데 하나로, 생도에서부터 3해리(약 5.56㎞)까지의 바다가 우리나라의 영해(領海)에 속한다. 대부분의 영해기점 무인도서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생도는 태종대에서 1.4km 가량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유일하게 육지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가 있다. ▼ 전망대 앞에는 석상(石像) 하나가 서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두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인데, ’모녀상(母女像)‘이라는 의젓한 이름까지 갖고 있단다. 이 석상이 세워진 이유가 참 갸륵하다. 전망대 옆의 자살바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용해 그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숫자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 전망대에서 산책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다누비열차‘ 승강장을 만나고, 이어서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도 등대‘ 입구가 나타난다. 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에다 나무계단을 깔았다. 누군가 이곳 태종대에는 생달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200여 종의 수목이 자라고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는 60여 종의 새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새의 자태는커녕 지저귀는 소리까지도 들려오지 않는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이라 다들 따뜻한 남쪽나라라도 찾아갔나 보다. ▼ 수목이 우거진 가파른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문처럼 생긴 조형물을 만난다. 세 곳에서 올라온 기둥이 위에서 한곳으로 모이는 모양새이다. 바닥에는 ‘영도등대 해양문화공간’이라고 적혀있다. 5년쯤 전인가 국토해양부에서 해안경관이 수려한 등대 가운데 연간 1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8개 유인등대(有人燈臺)를 '등대 해양문화공간'으로 지정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당시 기사에서는 이들 등대는 주변 자연경관과 역사성 등 지역 특성이 감안된 주제에 맞춰 스토리텔링 등 각기 차별화된 콘텐츠가 가미돼 개발된다고 했다. 또한 지자체와의 협력을 통해 등대 주변지역의 관광시설을 확충하고 올레길 등 지역 탐방로에 등대를 주요 경유지로 포함시켜 등대 가는 길 등을 조성하는 한편 인터넷카페 등 방문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갖출 계획이라고도 했다. 당시 선정된 8개의 유인등대 중 하나가 이곳 ‘영도등대’였던가 보다. ▼ 몇 걸음 더 내려가니 해마(海馬)가 인사를 하고 있는 자그마한 광장이 나온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황동과 스테인리스를 재질로 사용한 지름 3.2m, 높이 6.9m의 탑(塔)이 세워져 있다. 김성용 한남대교수의 작품인데 중앙 원형의 키를 바닥의 패턴으로 하여 그 위에 닻의 형상을 표현하고, 닻의 아래 모습 부분은 바이킹과 판옥선의 이미지를 해학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 겨레의 유구한 해양의 역사를 지키고 민족을 보호하는 수호자를 표현했다고 하는데 난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뒤에 있는 공간은 10여 개의 흉상(胸像)들을 빙 둘러 배치했다. ‘해기사 명예의 전당’이란다. 그렇다면 저 흉상들은 뭔가 역사에 남을 공적들을 남긴 해기사(海技士)들일 게다. ▼ 오른편에 ‘그늘막 쉼터’도 만들어져 있다. 외형으로 보아 야외 공연장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지 않나 싶다. 맞다. 위에서 얘기했던 기사에서는 조성된 ‘등대 해양문화공간’에서는 지역 문화예술단체 및 교육기관과 연계한 바다미술학교, 해양문학교실 등 바다사랑 함양교육과 함께 음악공연 및 미술전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질 계획이라고 했었다. ▼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녀의 석상(石像)도 보인다. ‘바다의 날’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바다의 헌장 탑’이란다. 화강암을 소재로 쓴 김오성작가의 지름 1.8m, 높이 3m의 작품으로 '남녀가 돌고래가 미는 선박을 타고 노를 저어 파도를 헤쳐 나아가는 형상'을 새긴 것이란다. 조형물의 양측에는 바다헌장이 국문과 영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바다를 개척하는 인간의 노력을 형상화한 작품 속에 바다헌장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바다와 인간의 삶을 찬미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예술적 표현을 화강석에 옮겨 아름다운 미감을 최대한 높이고 세월의 풍화에도 영구히 보존될 수 있도록 창작됐다고 한다. ▼ '무한의 빛'이라는 조형물도 등장한다. 절벽에 위태롭게 달린 뾰족한 바늘 모양의 철심이 아찔한 느낌을 자아낸다. 빛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어떤 숨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영도등대 100주년을 기념하여 등대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세운 ‘무한의 빛’은 등대의 빛과 해양국가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단다. 조형물의 푸른색은 바다 또는 하늘을 의미하며 붉은색은 태양과 동백꽃을 상징함으로서 바다와 하늘을 뚫고 더욱 더 도약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단다. ▼ 조형물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영도 등대를 만날 수 있다. 이 등대는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06년에 일제의 대륙 진출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선박의 안전을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아픈 시기에 태어났을 뿐 등대에 무슨 죄가 있으랴. 아직도 부산항의 길목에서 영롱한 불빛을 밝혀오고 있다. 또한 지난 2004년에는 새로운 등대 시설물로 교체되어 부산지역의 새로운 해양관광 명소로 거듭났다. 새로 건립된 영도등대는 등대시설, 예술작품 전시실 그리고 자연사 박물관 등 3개동(연면적 72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대시설은 기존 등대와 같이 백색의 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높이가 35m이며 불빛은 40km까지 나간다. 참고로 영도등대의 처음 이름은 목장이라는 뜻의 ’목도등대(牧島燈臺)‘였다. 영도가 본디 목장지(牧場地)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후 1948년에 ’절영도 등대(絶影島 燈臺)‘로 변했고, 1974년 ’영도등대(影島燈臺)‘를 거쳐 1988년 현재의 이름인 ’영도항로표지관리소‘가 되었다. 등대의 내부 관람은 생략하기로 한다. 주어진 시간이 빠듯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다른 이의 글로써 이를 대신해 본다. <영도등대의 전시실(see&sea 갤러리)은 시민들과 방문객을 위해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으며 자연사 박물관은 등대 바로 옆 신선바위 등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과 백악기 공룡서식지로 추측되는 이곳을 기념하는 공룡화석 등을 전시하고 있다.> ▼ 난간 아래로 태종대 최대의 볼거리인 기암절벽이 펼쳐진다. 태종대의 파식대(波蝕台, wave-cut platform), 즉 암석 해안이 침식 작용을 받으면서 해식애 아래에 형성되는 평평한 침식면의 단구애(段丘崖, 단구면 끝에서 떨어지는 가파른 절벽)는 이처럼 수직에 가깝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의 기반암이 전체적으로 육지 쪽으로 기울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직방향으로 금(절리)이 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종대에서 동삼동까지만 분포하는 이곳의 퇴적암 암반은 약 1억년부터 8천만 년 전 사이(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것이란다. ▼ 등대에서는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아치형의 돌터널까지 만들어 나름대로 운치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런 풍경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터널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실루엣(silhouette)‘으로 처리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니 ’포토죤‘(photo zone)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 아치형 터널을 통과하자 멋지게 지어진 2층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커피와 과일주스, 스무디(smoothie) 등의 음료수와 토스트나 컵라면 등 간단한 식사를 파는 곳이니 카페라고 보면 되겠다. 이 카페의 옆으로 신선대 진입로가 나있다. ▼ 건너편에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神仙臺)가 보인다. 그 위에는 왜구에게 끌려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돌로 변하였다는 망부석이 있다. 가파른 절벽의 절리(節理)를 따라 내놓은 비좁은 길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나마 바깥쪽에 철봉(鐵棒) 난간을 만들어 보행자들의 위험성을 제거했다. 하지만 저 길은 이제 금단(禁斷)의 길이 되어버렸다. 경주 지진 등의 여파로 낙석 및 붕괴가 우려돼 진입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보강작업이 완료될 때‘까지로 기한을 잡고 있지만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무튼 신선대 위에서 바라보는 파도의 절경을 당분간 볼 수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신선대(神仙臺)는 해안단구(海岸段丘, marine terrace)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단구란 과거 해수면 근처에서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해식절벽이나 평평하게 깎인 계단모양의 지형이 지반이 융기하거나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태종대 해안단구의 특징은 이렇게 파도에 침식된 계단꼴의 바위들이 해안곳곳에서 발견되는 융기 파식대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 이젠 자갈마당만 남았다. 바닷가 암반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꽤나 긴 시멘트계단을 내려서야만 한다. 쉴 새 없이 파도가 들었다가 나가며 자갈들이 휩쓸리고 부딪치며 '사르르∼' 낮은 소리를 내는 물가에 허름한 가건물 식당 두어 채가 들어서 있다. 건물 앞에는 각종 해산물을 담은 그릇들 10여 개가 진열되어 있다. 손님이 고르면 요리를 해주는 방식인 모양이다. ▼ 자갈마당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천막촌에 들어가 조개구이 등의 해산물을 안주삼아 한잔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 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냥 멍게나 해삼만 먹을까도 해봤지만 집사람이 고개를 흔든다. 빨리 주차장으로 되돌아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는 것이다. ▼ 자갈마당에서의 조망도 괜찮은 편이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왼편 절벽너머로는 오륙도(五六島)가 위치한 부산만 일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동남쪽에는 일본의 대마도(對馬島)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거리가 56㎞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시야에 들어온단다. 다른 일행들의 말로는 오늘도 보였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 오른편 바다에서는 생도(生島)가 나도 여기 있다면 고개를 내민다. 생도는 인근의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이 심해질 때면 피신처로 이용했다는 섬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단다. 섬을 훼손하거나 야생 동·식물을 포획·채취하는 행위, 야영·취사 등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무인도서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절대보전 무인도서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란다. ▼ 자갈마당에서 투어는 끝을 맺는다. 이제는 돌아갈 일만 남았다는 얘기이다. 뒤돌아서니 하얀색 등대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아까 내려올 때보다 훨씬 더 우람한 모습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등대로 오르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만들어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
출처: 가을하늘네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
첫댓글 갈하늘님.사진에 세세한 설명까지 글솜씨가 대단하십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