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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 대교구 평신도 사도직협의회 하상신앙대학 제 8 강의
+++=*** 평신도의 소명과 자세 ***=+++
+=*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 용훈 주교님의 강의에서 =*+
세상과 교회는 기본적으로 혼인으로 형성되는 가정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한다.
부모가 이룩한 가정을 통해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여러 모습의 소명과 직무를 받는다.
각 개인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로 불림 받아 소임을 수행하게 된다.
가정에서 사제직을 수행할 자식을 교회에 봉헌하지 않으면 교계제도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가정이 지닌 의미는 고귀하고 성스럽다.
그래서 구원을 가르치는 학교인 교회는 남녀가 맺는 혼인을 일곱 성사 중의
하나로 들어 높이고 있다. 교회는 수많은 문헌과 가르침을 통해
가정의 중요성과 그 건전한 생활을 독려하고 있다.
가정이 건강한 것은 세상과 교회에 그만큼 튼실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이며,
인격적으로 성숙을 지향하면서 자신을 聖化할 의무를 갖고 있다.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편적 성화소명을 부여받고 있다.
어떤 신분이나 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完德으로 부름 받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신분과 직무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어떤 차별과 귀천(貴賤)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분의 다양성은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해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숫자에 있어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평신도와 소수로 이루어진 속한 성직자들은
한 마음 한 몸으로 연결되어 서로 친교와 나눔과 섬김을 통해
교회의 발전과 세상의 평화 정착을 위해 투신해야 할 것이다.
+=* 평신도와 그 정체성 *=+
평신도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소명은 무엇인가?
교회법전 제2권 ‘하느님의 백성’, 제1편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례로 그리스도께 합체됨으로써
(per baptismumChristo incorporati)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고,
또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고유한 조건에 따라 실행하도록 소명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첫걸음을 떼는 것은 바로 세례이다.
한 인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합체되고,
교회 안에서 그 고유한 의무와 권리를 갖는 인격체가 된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서 있던 비개방적이며
폐쇄적인 체제를 탈피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구원의 성사임을 확인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삶과 성경의 정신에 따라 교회가 ‘원천으로의 복귀’를 꾀해야 하고,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위해
‘시대의 표징’을 신속하고 발 빠르게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례 받은 모든 신자는 교회의 주체인 동시에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교회의 사명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복음의 전파와 영적인 성숙과 성화,
그리고 현세의 질서를 그리스도화하는 것인데,
이 사도직을 성직자와 평신도가 공동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는 각각 고유한 사도를 잘 이행하도록
그들의 은사를 인정해 주고,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헌장에서는 평신도들이 사목자들로부터
교회의 영적인 보화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밝히고,
자신의 능력에 합당하게 교회의 과제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평신도는 세상 한 가운데에 살고 있다.
이는 평신도의 삶의 자리가 세상이며,
그 세상 안에서 부르심을 받으며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평신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 교령에서는 세계를 전체교회의 활동영역으로 보고 있으며,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성사라고 정의한다.
평신도는 소위 세속적인 삶의 영역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 소명을 완수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사도직 활동은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리고 영적인 질서와 현세질서 안에서 자기 임무를 실행하는 것이다.
평신도 사도직의 목표도 이와 동일하다.
특별히 현세 질서의 그리스도화는 전적으로 평신도들에게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정,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제도들과 국제적 기구들이
공동선에 기여하고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평신도 사도직의 실천은
가정과 사회 환경, 국가적이며 국제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도직을 수행할 때에 평신도들은 성직 위계와의 일치를 보전하여야 하며,
사도직 단체들은 상호 존경과 일치의 정신으로 협력해야 한다.
평신도는 더 이상 기도하고, 헌금하고, 복종만 하는 보잘 것 없는 속된 신분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사명을 자신의 고유한 사명으로 알고
수행하도록 부름 받은 소중한 신분을 갖고 있다.
오늘날 평신도들은 자신의 신원에 대한 자각과 부여된 사명 및 역할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제도주의적인 교회관의 상징인 성직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대화와 협력과 연대를 통해 세상과 교회를 위한 사목활동을 전개하고,
친교적 교회를 건설하고 성사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의 행동을 긴박하게 요청하는 가장 심각한 분야는 세속주의와
종교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욕구, 인간의 존엄성, 분쟁과 평화라고 보고 있다.
은사가 참으로 성령에게서 나오는 은혜이고
성령의 진정한 인도에 따라 행사되는 한,
그것은 사도직의 활력과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성덕을 위한 매우 풍요로운 은총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죄의 세력이 신자들과 공동체의 생활을 방해하고 어지럽히는 수도 있으므로
옳고 그른 은사에 대한 식별이 필요하다.
은사의 진실성과 온당한 행사에 관한 판단은
교회의 사목자들에게 속하는 일이다.
어떠한 은사도 교회의 사목자들에 대한 순종을
면제하지는 않는다.
+=*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
평신도들이 분명한 윤리적 기준을 식별하는 시각과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신앙인들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결코 시대의 예언자로서, 한 시대의 양심과 윤리를 바로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부단히 건전한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원칙들을 제시해야 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은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후의 심판과 應報는 어떠할 것인가?
우리 자신의 기원이자 종착역이며 우리의 실존을 늘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마지막 신비는 무엇인가?
자유는 무엇이고, 하느님의 법에 포함된 진리와 자유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인간의 윤리적 영역과 발전에서 양심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복음에서 젊은이가 질문했던 것으로 종합될 수 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하신
그분의 과업을 받들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교회의 교도권이 식별의 과업을 계속 수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의 사명을 완수하시오”
(2티모 4,1-5: 티토 1,10.13-14참조).
+=* 인간의 자유 의지 *=+
인간의 자유는 어디까지 행사할 수 있는 것인가?
오늘날 자유를 절대적인 것으로 격상시켜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사조(思潮)가 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거나
무신론적인 이론과 실천으로 가는 아주 잘못된 방향이다.
곧 진리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들은 숨긴 채 주관적으로만 평가하고
이해하려는 성실성, 진실성, 편한 마음 등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다.
윤리적 판단을 주관적 사고와 사상에 맡겨둔다면 매우 독선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게 된다.
선악의 기준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특권을
개인의 양심에 허용하려는 경향에 떨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윤리 내지 개인윤리는 결국 인간 본성 자체의 부정을 낳고
결국 하느님까지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보편적인 인간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면
윤리적 상대주의에 떨어지게 된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의지 없이는 윤리 자체도 거론할 수 없다.
자유가 인간 자신의 이기주의적 만족을 위한 것이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악한 것이라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진다면 이는 방종이다.
“참된 자유는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징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원(自願)으로 창조주를 찾아 창조주를 따르며,
자유로이 완전하고 행복한 완성에 이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분명히 들어있는
표현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원천적인 사랑(amor fontalis) 때문에
구체적 선을 인간에게 계명으로 알리신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며, 반대로 인간의 자유를 보호한다.
그럼에도 일부 사회의 조류와 사상은 일정한 개인과 사회적 집단에게
선과 악의 결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가 선을 창조할 수 있고,
참 진리보다 우위에 놓일 수 있다는 말인가?
이를 받아들이면 자유는 그 자체로 윤리적 자율성을 주장하며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 인간의 이성과 영원법 *=+
인간 이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는 독립적인가,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는 것인가?
아래에서 하느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인간의 이성은 자립할 수 없는 것임을 기술하려고 한다.
누가 인간 이성은 더 이상 하느님의 지혜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원죄로 타락된 인간 본성은 윤리적 진리를 아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하느님의 계시는 여전히 요청된다.
이 세상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윤리 규범에 대한 이성의 완전한 자치권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는 윤리 규범은
순전히 인간적 윤리일 뿐이다.
바로 인간이 자율적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법에 불과하며,
그런 법의 원천은 오직 인간의 이성일 뿐이다.
하느님은 이런 법의 주인이실 수 없다.
인간 이성이 법을 정하고 그 자율권을 행사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원초적이고 전체적인 계명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영원법의 제정자가 아니며, 그런 법을 제정할 수도 없다.
일군의 학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은 일종의 권고나 잔소리에 불과하며
자율적인 이성만이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며
객관적이며 규범적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회와 그 교도권이 갖는 고유한 교리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부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인간 이성의 자율성에 대한 해석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다.
참된 자유는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내는 표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의사에 맡겨두기를 원하신다(집회 15,14참조).
이는 인간이 自願으로 창조주를 찾아 창조주를 따르며,
자유로이 완전하고 행복한 완성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지배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대한 왕권 내지 지배권의 행사는
인간에게 막중한 과제를 부여한다.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하신
창조주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자율성의 행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인간 공동체에 善益을 제공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 인간 자체는 스스로의 보살핌과 책임에 맡겨져 있다.
그렇다고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라는 의미가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는다거나,
인간이 창조주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피조물을 멋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런 개념은 결국 하느님마저 부정하는 것이다.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 자체의 정체도 흐려지고 맙니다.”
영원법이 어떻게 윤리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인간의 이성은 절대규범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으로 받았다.
윤리법은 하느님 안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항상 하느님 안에서 그 원천을 발견한다.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자연적인 이성으로 인하여 윤리법은 인간 고유의 법이 된다.
이성의 자율성은 이성 그 자체가
가치나 윤리 규범들을 창조해 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참된 윤리적 자율성은 하느님의 계명,
곧 윤리법의 거부가 아닌 수용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법은
서로 만나고 교차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하느님께 대한 복종은 결코 타율이 아니다.
윤리생활이 인간에게 전권적이고 절대적이며 국외자적인 어떤 것,
인간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법에 인간이 자유롭게 복종함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하느님의 지혜와 섭리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은
테오노미아(theonmia. 神律)에 해당한다.
인간은 자연 이성과 하느님 계시의 빛을 받아
그 지식에 참여할 뿐이다.
자연 이성과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영원한 지혜에 대한 전제 조건과 암시들을 밝혀준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법에 복종한다고 하여 그 자유가 파괴되고 왜곡되거나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복종을 통해
인간 자유는 진리 안에 머물고 인간 품위에 걸맞게 된다.
‘홀로 선하신’ 한 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은 무엇보다 자연 이성의 빛을 받아 이루어진다.
이는 인간 안에 반영되는 하느님 모습의 광채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사용하는 자연 이성의 빛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빛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은 자연법에 속한다.
영원하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하느님의 법이 인간 생활의 최고 규범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당신의 법에 인간을 참여시키신다.
자연법은 하느님의 영원한 법의 인간적인 표현이다.
이성적 존재는 자연법을 통해 영원법에 참여한다.
사실 자연법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적혀 있고 새겨져 있으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명하는 것은 바로 인간 이성이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의 명령은 만일 그것이 더 높은 이성의 소리요 해석이 아니라면
더 이상 법적 효력을 지닐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마치 최고의 입법자인 것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한 법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의미에서는 자연법 그 자체가 영원한 법이다.
자연법은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지배자이신 분의
영원한 이성인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와 신앙의 빛을 받은 이성에 따를 때
선과 악을 식별함으로써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선택된 백성에게 내리신 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시나이산에서 내리신 십계명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법을 특별한 선물로, 그 선택됨과 신적 계약의 표지로 받아
이를 실행할 소명을 받았다.
“행복한 사람이여, 불신자들이 꾀하는 말을 그는 아니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망나니들 모임에 자리하지 않나니.
차라리 그의 낙(樂)은 주님의 법에 있어,
밤낮으로 주님의 법 묵상하도다” (시편 1,1-2).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도와주고, 주님의 법은 건실하여 둔한 자를 가르치고,
주님의 계명은 올바르니 마음을 즐겁게 하고,
주님의 법은 환하시니 눈을 밝혀주도다”(시편 18/19,8-9).
+=* 자연법의 보편성 *=+
인간의 자유 행위는 참된 선의 보편성을 뒷받침한다.
하느님을 섬기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마땅한 일이고 선한 일이다.
이런 적극적 계명들은 인간에게 구체적 행동을 하도록 명령한다.
이런 계명들은 보편적인 효력을 갖는다.
이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법은 실천 이성이 파악한 것들에 부응하며,
양심의 판단을 통해 개별적인 행위에 적용된다.
자연법의 소극적 계명들도 보편적인 효력을 지닌다.
이것들도 각 개인과 모든 사람,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
이는 예외 없이 언제나(semper et pro semper) 일정한 행위를 못하게 금지한다.
이 계명들을 범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경우에 금지된다.
소극적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적극적 계명을 행하는 것에 비해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적극적 계명을 제대로 준수하는 자는 소극적 계명을 어길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그 역동성에 있어 상한선은 없지만, 하한선은 있다.
그 하한선을 벗어나면 계명은 깨어진다.
현대인들은 자연법의 불변성과 객관적 윤리 규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은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다.
인간은 특정한 문화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이 한 문화에 의해 송두리째 규정되지는 않는다.
곧 문화의 발전은 인간 안에 그 문화를 초월하는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그 어떤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 본성은 그 자체가 문화의 척도요,
나아가 인간이 그 어떤 문화에도 갇힐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간 본성은 그 심오한 진리에 따라 삶으로써
이루어지는 인간의 품위를 확인시켜 준다.
교회는 세상의 변천 속에서도 불변하는 것이 많다는 사실과
그 불변의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혀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존재하신다.
진리를 표현하는 규범들은 본질적으로 유효하며,
‘같은 의미와 같은 내용’(eodemsensu dademque sententia)을 나타내도록
정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교도권이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해야 할 일이다.
+=* 국법과 도덕률 *=+
국법과 도덕률을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국법의 범위는 국민들의 기초적인 권리들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평화와 공중도덕을 증진시킴으로써 공동선을 보장하는 것이다.
국법의 목적은
참된 저의 안에서 질서 있는 사회 공존이 이루어지도록 보장함으로써,
모든 이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1디모 2,2)하는 것이다.
국법은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속한 기본권들을
국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이런 권리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모든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이 지닌 불가침권이다.
이런 근본적인 권리를 무시함으로써 일어나는 이웃 생명에 대한 공격을
개인의 권리로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낙태나 안락사에 대한 법적인 관용이
다른 이의 양심만을 존중하는 토대위에
서 있다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
요한 23세는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현대에서 공동선의 실현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보장함으로써 드러난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중요한 책무들은
무엇보다도 이런 권리들을 인식하고
존중하여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 공권력의 행위가 인권을 무시하거나 침범하게 되면,
그 직무 수행에 실패하는 것이며, 그런 잘못된 법령은 구속력을 상실하게 된다”
국법은 도덕률에 일치해서 존립한다.
“권력은 윤리적 질서에서 요청되는 것이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법과 명령들이 윤리적 질서나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입법된다면,
그런 권한은 양심을 구속할 힘을 갖지 못한다.
… 그런 경우에는 권력의 본질이 훼손될 뿐 아니라
불의한 남용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법은 올바른 이성과 일치하는 한도 내에서,
곧 영원법에 기초할 때 바른 법이다.
법이 이성과 모순될 때 악법이 되며,
이 경우 그 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라 폭력행위가 된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생명권은 모든 개인들에게 속한 권리이다.
그러기에 무고한 인간 존재를 낙태나 안락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법들은 인간의 고유한 생명 불가침권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불의한 요청을 합법화하고 인정하는 모든 국가는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과 모든 무고한 생명의 보호라는
근본 원칙에 위배되는
자살과 살인을 합법화하고 있다.
낙태와 안락사를 승인하고 증진하는 법들은
개인의 선익에 근본적으로 배치될 뿐 아니라,
공동선에도 반대되는 법들이다.
그런 법에는 진정한 법적 효력이 완전히 결핍되어 있다.
낙태와 안락사는 인간의 어떠한 법으로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범죄들이다.
이런 법들을 따라야 할 양심상의 의무는 없다.
반대로 양심적으로 그런 법들에 반대해야 할 중대하고도 명백한 의무가 있다.
이런 법들을 따르거나 옹호하는 선전운동에 참여
하거나 찬성하는 투표를 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법적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국법이 허용하다라도 하느님의 법에 위배되는 행위들에
명시적으로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양심상의 의무를 지닌다.
악에 대해 명시적으로 협력하는 행위는 합법적일 수 없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이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의사, 보건 담당자, 병원, 진료소, 요양시설 운영자들에게
생명을 거스르는 이런 행위들의 상담, 준비, 실행 단계에 대한 참여를
거부할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양심적인 거부권을 행사하는 이들은 법적 처벌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고,
법, 규정, 재정, 직업 등 어떤 불이익도 받지 말아야 한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는 책망도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여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승리 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 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귀 있는 삶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
-(묵시록3,19-22)-
+=* 하느님의 계명-인간에게 생명의 길이다. *=+
어떤 행위의 선택이 윤리적으로 불가하다고 선포하는 금령(禁令)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런 규정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외 없이 효력을 갖는다.
윤리적 금령들은 자유를 향해서 나아가는 여행의 시작이다.
“자유의 시작은 살인, 간음, 절도, 사기, 신성 모독 등과 같은
범죄로부터의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이러한 범죄로부터 벗어나면 자유를 향해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며,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살인하지 못한다’ 는 계명은
참된 자유를 향한 출발의 기준이며 규범이다.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의 생명들을
그의 동료 인간들, 형제자매들에게 맡기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의 요구에 따라
다른 모든 형제자매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증진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이 계명은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과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개인들에게 구속력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본래 계약의 방향으로
이 계명은 선의의 모든 이들의 도덕적 양심 안에서 소리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형제들의 생명이 약하거나 위협받고 있을 때
언제나 보호받고 증진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모든 이의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요청과 함께
불굴의 노력과 용기를 갖고 생명 증진과 보호를 위한 활동을 통해
여러 가지 죽음의 문화로 물든 이 시대가
참 진리와 사랑의 문화를 회복하도록 하라는 강력한 요구를 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평신도는
세상과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복음전파라는 중책을 수행하고 있다.
평신도는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물들이기 위해
성령과 신앙의 빛으로 조명 받은 윤리적 규범과 기준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긴박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는
인간 생명 경시 풍조인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생명 문화를 건설하는 일이다.
평신도들은 시대의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교회의 정신에 따라
세상의 악습을 제거하면서
사랑과 평온이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건설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 천주교 수원교구장 이 용훈 주교님 강의를 金福述 예로니모가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