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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의 번역 문제
(마 19:16; 막 10:17; 눅 18:18; 10:25)
1. 서론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하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하여 신약학 논의의 새로운 장을 연 샌더스(E. P. Sanders)는 1세기 유대교 신앙의 근본 전 제를 이른바 ‘언약의 율법사상’(covenetal nomism)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1)여기에 담긴 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 하시어 언약을 체결하시고 그들이 지켜야 할 계명들을 주셨다. 이 계명을 순 종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따르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징벌이 따른다. 하지 만 율법의 계명을 준수하려는 노력은 언약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형성 하지 그것을 얻지는 못한다.2) 이 ‘언약의 율법사상’을 기초로 샌더스는, 예컨 대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갈2:16하 등)와 같이 바울이 취했던 율법에 대한 태도와 구원론적 진술들을 완 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한다. 말하자면 율법 준수는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지 칭의(稱義)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의 사상은 당 시 통상적 유대교(common Judaism)의-계명을 준수하는 행위는 심판을 통해 상급을 받을 수 있듯이 계명에 반하는 행위는 형벌을 가져온다는-견해와 충 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3)
조지 니켈스버그(George W. E. Nickelsburg)는 좀 더 넓은 초기유대교의 신 학적 문맥에서 샌더스의 명제를 수용한다. 토라의 계명들은 하나님과 이스라 엘의 계약관계를 표현하는 관념의 일부에 불과하고, 이 계약관념은 구약성서 에 보편화되어 있다고 그는 판단한다.4) 이것은 특히 신명기에서 ‘선택-계명-순종(불순종)-복주심(심판)’이라는 도식으로 가장 명확하게 설명된다. 물론 불순종을 회개하고 토라에 다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불순종-심판-회개-용서-계약 관계의 회복’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념의 중추는 토라 에 순종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동시에 이 행위에 하나님의 은총(선택)이 전제 될 수밖에 없음도 분명하다.5)
한마디로, 유대교의 근본 토대는 율법을 통해 은혜를 얻는 그런 율법주의(legalism)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요청’으로서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이 ‘언약의 율법사상’이 주장하는 바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교 역시 기독 교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종교’이지 ‘율법의 종교’는 아니라는 말이다.
샌더스의 주장은 바울서신을 해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 국의 유명한 신약학자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1982년 맨체스터 강연 에서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바울이 유대교와 율법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관한‘유대적 편협주의’(Jewish particularism)를 거부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다. 유대인들은 할례, 음식, 절기와 같은 ‘선택의 표지들’을 이스라엘의 특권 이라고 주장함으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데, 바울은 그러한 관점에 서 돌아섰다는 것이다.6) 이른바 이 ‘새 관점’은 오늘날 바울신학의 화두가 되 고 있다.
여기에 저명한 영국의 신약학자 라이트(N. T. Wright)도 가세했는데,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의 본질은 율법이지만, 율법이 이스라엘의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계획을 내 포한다고 생각한다.7) 그래서 로마서 4장에 표현되는 바울의 주장도 아브라 함의 언약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계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을 통하여 회복될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 창조의 ‘전령’이기에 바울의 궁극적 관심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현실적으로는 이방인 선교였다고 주장한다.8) 그는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분 시켜주는 ‘선택과 율법 준수’의 범주를 개인적인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이스 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세계 구속적 차원으로 확대한다. 여기서 인간은 그리 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지만, 믿음은 단지 구원을 얻는 ‘시금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란 ‘성령을 통해 사랑 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을 의미한다.9)
샌더스로부터 라이트에 이르는 이러한 ‘새 관점’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다.제임스 던의 제자 시몬 개터코울(Simon J. Gathercole)은 종말론적 배경에서 유대교의 구원론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 위 논문 1-4장에서 유대교 문헌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며, 유대교에서 종말 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수여될 종국적인 구원은 단지 하나님의 선택만 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에도 근거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0) 그러면서 당시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 개개인이 그들의 행위에 따라 영생에 이르거나 심판에 처할 수도 있다는 유대교의 종말론적 구원론과 공통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1) 이렇게 유대교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하 되 종말론적인 심판을 통과해서 온전한 의에 이르는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의에 관한 바울의 사상(‘믿음→의롭게 하심→율법 순 종’)에서 믿음은 물론이지만, 율법 준수도 단지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12)
최근 던은 이러한 풍부한 신학적 논쟁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바울에 관 한 새 관점 이라는 논문집을 출간하며, 서론에서 새로운 논의를 제공하고 있 다.13) 여기서 던은 그간 새 관점을 이른바 ‘반-루터주의’로 보는 오해를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그는 바울을 유대교의 ‘언약의 율법사상’의 배경에서 이해 해야 하며, 이것이 바울이 주장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약화 시키는 것이 아님을 항변한다.14) 동시에 그것이 개인보다는 이스라엘에 관한 문제라는 자신의 처음 입장을 견지한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현안문제는 여 전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세윤의 주장을 반박 하며, ‘믿음 대(對) 율법’에 관한 바울의 태도는 이방인 선교가 진행되며 정립 되었다는 주장을 견지한다.15) 하지만 던은 개터코울의 반론은 적극적으로 수 용한다. 그리하여 ‘언약의 율법사상’이 마지막 심판에서의 칭의를 포함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작 이를 공유하고 있었던 바울의 관 심은 이방인의 칭의, 즉 ‘개종 칭의’(conversion justification)에 있었지 ‘마지 막 칭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견지한다.16)
필자는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론에서 종말론적 관점은 매우 중차대 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온 이스라엘이 장차 올 시대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 이다’(미쉬나, 산헤드린 10.1)라는 유대교의 종말론적 구원론은 보편적 소망 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율법을 범하여 심판을 받을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었 다. 당시유대교신학의중추라할수있는‘토라순종’은종말론적구원에이 르는 전 과정으로서 ‘영생을 상속함’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종 말론적 관점에서 구원론을 이해한다면, 유대교와 기독교 양자에서 ‘언약의 율법사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다만 초기 기독교의 경우 언약의 대상을 유대 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방인)에게도 확장되는 것에 특수성을 가지 고 있었다 하겠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초기 기독교의 구원론의 그런 포괄성을 표현하는 언어였다.
오늘날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한 이런 풍부한 신학적 논쟁은 주로 바울신학에 한정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언약의 율법사상’이 공관복 음서의 ‘예수와 부자의 대화’(마 19:16-22//막 10:17-22//눅 18:18-23)는 물론,누가복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독특하게 결합되고 있는 ‘가장 큰 계명’ 논쟁(10:25-28)에서 드러나고 있음에 착안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본문 의 우리말 성서번역에 드러나는 ‘율법을 행함’과 ‘영생을 얻음’의 관계에 문 제의 초점이 있는데, 핵심은 율법 준수와 영생을 ‘얻는’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신학적 용어 ‘클레로노메오’ (klhronomew, )가 있다. ‘상속하다’를 의미하 는 이 단어는 공관복음서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나, 현재 공관복음서의 우리말 번역은 위에서 고찰한 ‘언약의 율법 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신학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특히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 용어 의 우리말 번역들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번역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이와 관련하여 ‘언약적 율법주의’와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두 가지 우리말 번역이 혼재하고 있다. 여기서 ‘nomism’은 ‘율법주의’(legalism)와 구별하기 위하여 샌더스가 채택한 신학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김세윤, 바울 신학과 새 관점 , 정옥배 역 (서울: 두란노, 2002). 그렇다고 ‘신율주의’라는 번역도 그리 적 당한 것 같지는 않다. 이한수, 로마서 주석 (서울: 이레서원, 2008). 샌더스는 초기유대교 에서 언약 관념이 율법 준수 신앙의 본질과 전제가 되었음을 말하려고 하기에, ‘율법주의’라 는 부정적인 관념을 피하여 필자는 이 글에서 ‘언약의 율법사상’으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2) 그는 이 명제를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75; 180-182; 419-430에서 우선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도출하였고, 유대교 일반으로 확장하였다. E. P. Sanders, Judaism: Practice and Belief 63 BCE-66CE (London; Philadelphia: SCM; Trinity Press, 1992), 241-278. 현재 신약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샌더스의 명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다만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론적인 다양성과 자료에 관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는 입장이다. E. P. Sanders, “The covenant as a Soteriological Category and the Nature of Salvation in Palestinian and Hellenistic Judaism”, R. Hamerton Kelly and R. Scroggs, eds., Jews, Greeks and Christians (Leiden: E. J. Brill, 1975), 40.
3) E. P. Sanders, 바울, 율법, 유대인 , 김진영 역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4), 163f.
4) 그는샌더스이외에도발처와멘덴홀의논의를수용하여초기유대교의신학을포괄적으로 서술한다. George W. E. Nickelsburg, 고대 유대이즘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 박요한 영식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8), 84와 각주 10. 5) Ibid., 86.
6) 천세종, “최근 바울신학 연구동향”, 「성서마당」 106 (2013), 78-91 (85).
7) 톰 라이트(N. T. Wright), 칭의를 말하다 , 최현만 역 (서울: 에클레시아북스, 2011), 85. 8) Ibid., 88.
9) Ibid.
10) Simon J. Gathercole, Where is Boasting? Early Jewish Soteriology and Pauls's Response in Romans 1-5 (Grand Rapids: Erdmans, 2002).
11) Ibid., 124-134.
12) Ibid., 243.
13) James D. 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Tübingen: Mohr Siebeck, 2005). 이 책은 이 새관점 및 그와 연관된 21개의 논문을 편집한 것인데, “1장 The New Perspective On Paul: Whence, What and Whither?”에서 반론들에 관한 대화와 논쟁을 전면 새로이 저술하고 있 다. 이 글과 관련하여서는 이 장만 언급하면 되는데, ‘새 관점’을 진진하게 탐구 번역하고 있는 최현만이 이 부분만을 깔끔하게 번역해 내었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평택: 에클레 시아북스, 2012).
14) Ibid., 15-44.
15) Ibid., 45-49.
16) Ibid., 81-89.
2. 본론
2.1. 문제 설정
먼저 개역개정 마가복음으로 본문 10:17-22을 설명해 보자. 어떤 한 부자 가 예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ti, poih,sw i[na zwhn. aiwv ,nion klhronomh,swÈ 10:17하)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알고 있 다”라고 말씀한다. 부자는 다시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 다”(10:19-20)라고 응수한다. 이에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기 위 해는 아직 한 가지 더 필요한 것, 즉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한다 고 말씀하고, 부자는 결국 슬픈 기색을 하며 떠나간다(10:21-22). 여기서 ‘무엇 을 행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관념은 예수의 대답은 물론 전체 대화에서 하나 의 전제가 되고, ‘영생을 얻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은 마태복음은 물론 누가복음의 병행본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 러면 이 대화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이번에는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도입부 10:25-28을 보자.이 본문은 ‘가장 큰 계명 논쟁’(마 22:34-40//막 12:28-31//눅 10:25-28)에 대한 누가의 ‘버전’이라 하겠다. 누가만이 독특하게 ‘가장 큰 계명’에 대해 묻지 않 고, ‘예수와 부자’의 대화처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다. 물론 이 대화도 ‘영생을 얻음’과 ‘계명을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전제에서 진행되는데, 여기서도 ‘클레로노메소’를 ‘얻다’로 번역한다.
여기서 질문자는 이번엔 부자가 아니라 “율법사”(nomiko,j)였다. 그는 선한 의도에서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마 22:34f; 눅 10:25).17) 율법사의 도발적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가?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10:26)라고 반문한다. 누가는 여기서 ‘부자 관리와의 대화’ (눅 18:18-23)처럼 율법을 대표하는 십계명(막 2:7=출 20:12-16; 신 5:16-20; 24:14. LXX)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로 집약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26-27절=신 6:5; 레 19:18)을 연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 하며,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tou/to poi,ei kai. zh,sh|)고 대답하고 있 다. 이렇게 ‘영생을 얻는 문제’는 율법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과 직결된다.이어지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논쟁에 대한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 아인’의 비유가 제시된다. 이 논쟁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요지로 끝나고 있다(37절//28절). 그렇다면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결국 ‘영 생을얻음’은사랑의계명을행함에달려있게된셈이다.
이렇게 공관복음의 영생에 관한 대화에는 영원한 생명이 율법의 해석과 그 계명의 실천에 의존되어 있다는 유대인의 ‘언약의 율법사상’이 전제되어 있 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 사실을 간과할 경우 이 진지한 대화는 독자들에게 전 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되어,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구원론에 혼돈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왜냐하면 이 대화는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 인 우리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17) 마가복음은 “서기관 중 한 사람”(ei-j tw/n grammate,wn)이, 마태복음(본문비평으로 확정할 수 없는 상태)과 누가복음은 모두 “nomiko,j”가 질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개역개정 은 이 단어를 각각 다르게 “율법사”(마) 및 “율법교사”(눅)로 번역한다. 이는 ‘율법사’로 통일 시켜 번역하고, grammateu,j는 마가복음은 물론 신약전체에서 서기관보다는 ‘율법학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는 필자의 번역서 마르틴 헹엘(M. Hengel),유대교와 헬레니즘 1~3권, 박정수 역 (파주: 나남출판사, 2012)의 1권 역주, 216의 10을 보 라: ‘서기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grammat, euj의 어근은 히브리어 ‘소페르’(rpeso)에서 온 것 으로 우리말성서에서는 ‘서기관’(Schreiber)과 ‘율법학자’(Schriftgelehrte)로 혼용하여 번역 한다. 이 용어들은 동일한 직(職)을 지시하지만 서기관은 좀 더 국가적 관직으로서 공식부 문을,율법학자는 좀더 후대에 토라 경건이 일상화되면서 비공식 부문을 담당하는 사람을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R. Albertz, 이스라엘 종교사 ,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다 이제스트, 2004), 6장 2-3절; 393f. 등. 물론 두 명칭은 공유점을 가지는데, 이를테면 율법학 자로서 서기관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혼용되고 있지만, 신약시대에는 공식 부문인 서기관이 점점 약화되고 결정적으로 기원후 66년 유대 전쟁에서 제2성전이 파괴되 면서 사라지고, 율법학자로 남아 랍비 전통을 이어가기에 신약에서는 율법학자로 명명하는 것이 좋겠다.
2.2. 신약의 ‘클레로노메오’(klhronomew, )의 의미와 현재 우리말 번역
문제가 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의 ‘클레로노메소’(klhronomh,sw)는‘유산’ 혹은 ‘유업’이라는 뜻의 ‘klhronomi,a’에서 파생된 동사 ‘klhronome,w’의 가정법 단순과거형이다. 원래 ‘klhronomi,a’는 ‘klh/roj’에서 나왔는데, ‘klh/roj’는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어 ‘제비’(lr'wOG) 혹은 ‘소유/유산’(hl'x]n:)을 70인역에서 사용한 번역용어다.18) 총 129회 사용된 이 히브리어 어휘는 ‘제비/운명’으로 는 62회 ‘유산/소유’로는 49회가 사용되므로 의미상 분리될 수 없다. 구약성 서에서 이 단어는 주로 가나안 땅의 분배와 소유에 표현되고 있는데, 두 단어 가 공유하는 ‘땅의 소유’라는 관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관계에서 주 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이스라엘이 소유한 땅과 모든 유산이란 이스라엘이 ‘획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대대로‘유산으로 상속된다’는 의미를 배제할 수가 없다.
신약에서도 이러한 관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동사 ‘클레로노메오’ (klhronomew, )는 영어로는 ‘inherit,’ 독일어로는 ‘ererben’의 뜻으로 신약에는 전체 17번(부정사/분사 포함)이 나오는데, 우리말 개역개정 은 물론 표준 개정 도 ‘상속하다’ 혹은 ‘유업으로 받다’로 번역한다.19) 먼저, 고린도전서6:9-10에서 이방인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 향하여 2번 반복하여 “불의한 자 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용어가 사용 되고 있는 그 밖의 모든 본문, 즉 고린도전서 15:50(2회)과 갈라디아서 4:30; 5:21; 히브리서 1:4, 14; 6:12; 12:17; 베드로전서 3:9 그리고 요한계시록 21:7은 물론 마태복음 5:5; 19:27; 25:34에서도 한결같이 ‘유업을 얻는다’ 혹은 ‘상 속하다’로 번역하고 있다.20)
그런데 계명 준수와 연결되어 있는 공관복음서의 이 대화들에서만은(막10:17, 25; 눅 10:25; 18:18) ‘클레로노메오’(klhronomew, )를 ‘얻는다’고 번역하 고 있다. 개역개정 은 물론 표준개정 과 공동개정 까지도 그렇다. KJV이 나 NRS, ESV, NAS 등의 영역본 대부분은 이 단어를 “inherit”(상속하다)으로 번역하고 있다. 전통적인 독일어번역을 대변하는 LUT도 “ererben”(상속하 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현대적 표현을 선호하는 영어 CEV나 독일 어 EIN만이 우리말 성경과 같이 손쉬운 용어를 사용하여 각각 ‘have’와‘gewinnen’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갖다’ 혹은 ‘얻다’는 일반적인 표 현으로서는 이 고도의 신학적 용어 ‘클레로노메오’(klhronome,w)의 의미를 담아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말 의미로도 내가 노력하여 ‘얻거나 버는 것’과 부모로부터 ‘상속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얻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지만 ‘상속하는 것’은 정해진 상속의 대상자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왜 마가복음 10:17과 누가복음 10:25 및 18:18에서만 ‘얻는다’고 번역했을까?
우선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공관복음 병행구(마 19:16; 막10:17//눅 18:18)의 원문 번역을 비교분석해 보면, 마태복음의 번역이 마가복 음과 누가복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래서 아래에서는 마태복음 본문을 마가 및 누가복음과 대조하며 질문 자체의 의미를 밝히도록 하자.
18) F. Hermann, “klh/roj ktl)”, ThWNT III, 757-763(758). 총 129회에서 전자는 62회 후자는 49회가 사용된다.
19) 명사로서는어쩔수없이본래의뜻‘유산’혹은‘기업’(klhronomi,a)이나‘상속자’(klhronomo,j)로 번역하고 있다: 마 21:38//막 12:7//눅 20:14(포도원 품꾼 비유); 눅 12:13; 행 7:5; 20:32;롬 4:13f; 8:17; 갈 3:18, 29; 4:1, 7; 엡 1:14, 18; 5:5; 골 3:24; 딛 3:7; 히 1:2; 6:17; 9:15; 11:7f;약 2:5; 벧전 1:4 등.
20) 참고로, 현재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의 명사 혹은 동사가 유업 대신 ‘기업(基業)’(우리말 의 미로 “기초가 되는 사업” 혹은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 혹은 ‘기업으로 받다’로 번역되는 14번의 연관된 용어( 개역개정 기준)도 가능하면 ‘유업(遺業)’ 혹은 ‘유산(有 産)’으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마 5:5; 행 13:19; 20:32; 26:18; 엡 1:11, 14, 18; 5:5; 골1:12; 3:24; 히 1:4; 6:12, 17; 9:15).
2.3. 마태복음의 ‘klhronome,w’ 사용
2.3.1. ‘klhronomew, ’와 ‘e;cw’
정작 마태복음은 부자의 질문에서 논쟁이 되는 용어 ‘klhronome,w’가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태는 사실 복음서 가운데서 가장 자주, 그리고 의미심 장하게 이 용어를 사용한다. 우선, 산상수훈의 도입부 5:5에서 이 단어가 사용 되는데, 개역개정 은 이를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로 번 역한다. 다음으로 예수와 부자 청년의 대화(19:16-22)에 이어지는 제자도에 관한 담화(19:23-30)의 종결구 19:29에서도 “상속하다”로, 그리고 마지막으 로 종말강화의 ‘최후심판의 비유’의 종결구 25:34에서도 (예비된 나라를) “상 속하라”로 번역한다. 모두가 원래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번역하는 셈이다.
다음으로 개역개정 의 공관복음 병행본문(마 19:16-22 막 10:17-22 눅18:18- 23) 가운데 문제가 되는 도입부의 대화만을 비교해보자.
마 19:16f | 막 10:17f | 눅 18:18f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무슨선한일을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ti, agv aqo.n poih,sw i[na scw/ zwh.n aivw,nionÈ) |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ti, poih,sw i[na zwh.n aivw,nion klhronomhs, wÈ |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ti, poih,saj zwh.n aivw,nion klhronomh,swÈ)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
위의 표에서 공관복음 가운데 마가복음이 원래적인 표현을 보존하고 있고,마태복음 본문의 밑줄 친 부분은 마태의 독자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뚜렷하게 나타난다.21) 이 중에서 우선 마태는 독특하게 우리의 핵심 용어 ‘클레로노메 소’(klhronomh,sw) 대신 “scw/”(e;cw의 가정법 단순과거형)를 사용한다. ‘e;cw’는 특별한 신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일반적인 동사로 ‘가지 다/소유하다/있다’(have)에 해당한다.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일단은 마태복음 의 현재 우리말 번역 “얻다”가 완전히 오역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얻다”(scw/)에 동화되어 마가/누가복음의 “klhronomh,sw”도 “얻다”로 번역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본문비평을 예로 들자면, 의도 하지 않게 공관복음 병행 문장에 영향을 받아 필사 오류가 생기는 경우가 있 는데, 말하자면 이런 현상이 번역에서 일어났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본문 비평에서 교리적 숙고로 인한 의도적인 이독(異讀)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 이 번역에서도 일어났을 수 있다.22) 사실, ‘영생을 상속한다’는 어감이나 표 현은 그렇게 부드럽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거리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신학적 개념은 요한복음 3:16로 대표되는 믿 는 모든 자는 ‘영생을 얻다/갖다’(evcei/n thn. zw,hn)는 보편적인 진술23)과 대립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 보편적인 진술과 부합되는 마태 복음 번역을 그대로 마가/누가복음 번역에 그대로 사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현재 대부분의 영어 번역(ASV, KJV, NAS, NIV, NRS) 마 태복음은 ‘have’로, 마가/누가복음은 ‘inherit’으로 번역한다(독일어역 LUT도 참조).
신약성서 Nestle-Aland 27판에는 16절 “i[na scw/ zwh.n aivw,nionÈ”의 몇 가지 이문(異文)들이 본문 하단의 비평장치에 제시된다. 먼저 단순과거형 ‘scw/’ 대 신 현재형 ‘ecw’를 사용하는 사본들은 서방계 사본(W-zwhn ecw의 어순만 바 뀜)과1과13족및소문자사본들(f1.13 M)이있다.‘i[na’다음에직설법현재형 이 사용되는 것은 비평장치에만 나오는데, 이런 경우 신약에서는 대부분 필 사자들의 오류로 간주된다.24) 하지만 ‘e;cw’의 경우 가정법 현재형과 직설법 현재형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25) 본문의 비평장치의 많은 사 본이 간직하고 있는 이문이 단지 필사오류가 아니라 문법적으로 가정법 현재 로 옳게 쓰였다면, 그 뜻은 영생의 소유가 ‘일회적인 행위’(단순과거)보다는‘지속’(현재)의 의미를 강화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이본(異本)의 뜻은“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내게 영생이 있으리이까?”(ti, avgaqo.n poih,sw in[ a ec; w zwh.n aivw,nionÈ)의 어감을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scw/’ 대신 아예‘klhronomh,sw’를 사용하는 사본들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존재한다. 이는 병행 본문 특히 누가복음(poihsaj z) ai) klhronomhsw)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한 다.26) 또한 21:38하반절에는 ‘scw/’와 ‘klhronomh,sw’의 명사어원 ‘유산’ (klhronomi,a)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scw/men thn. klhronomi,an). 이 모든 본문 들은 결국 상속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scw/’를 사용하는 현재 본 문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아마도 행위의 신학을 강조하는 마태가 특별히 상속의 행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scw/’를 사용한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러 므로 본문과 비평장치를 종합하면 부자 청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지금(!)영생을 소유하려는 의지로 예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계명을 지키는 것 과 충돌되지 않는다. 마가/누가(“네가 계명을 아나니” 막 10:19//눅 18:20)와는 달리 마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eiv de. qe,leij eivj th.n zwh.n eivselqei/n( th,rhson ta.j env tolaj, Å 19:17하)는 독특한 표현을 부가하 고 있다. ‘생명’과 ‘계명 준수’를 직접 연관시키는 것은 당시 유대교의 통념과 다르지 않다. 마태는 처음부터 율법을 순종하는 것을 ‘선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영생을 소유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부자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달리 예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질문도 “무엇을 하여야”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슨 선한 일을 하여 야”(ti, agv aqo.n poih,sw)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 니라”를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로 에둘러 표현한다. 이렇게 마태는 기독론적 관점에서, 예수가 선(善)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해나간다.27)그는 여기서 하나님 혹은 예수가 ‘선한 자’라는 인식 자체를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善)은 오직 하 나님이며(암 5:14; 미 6:8) 더 나아가 기록된 하나님의 뜻, 즉 율법(토라)이기 에 ‘토라 이외에는 선한 것은 없다’(미쉬나 Abot 6,3; b. Ber. 28b)는28) 유대교 의통념을마태가공유하고있는것이라할수있다.
21)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EKK I (Neukirchen-Vlyen: Neukirchener Verlag, 1997), 120f; 도날드 헤그너, 마태복음 14-28 , 채천석 역, WBC 33상 (서울: 솔로몬 출판사, 2006), 879-881;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3, ICC (Edinburgh: T&T Clark, 1997), 38-43; E. Schweizer,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Göttingen/Zürich: Vandenhoeck & Ruprecht, 1986), 251f.
22) Bruce M. Metzger and Bart D. Ehrman, 신약의 본문 , 장성민 · 양형주 · 라병원 공역 (서울:한국성서학연구소, 2009), 368f.
23) 신약에서 “생명을 가짐”(ecv ei/n thn. zw,hn)이라는 표현은 거의 압도적으로 요한전승에서 사 용된다. 총 34번 중 요한복음에는 19번, 요한일서에 10번이나 사용되는데, 여기서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은 거의 “생명이 있음”으로 번역하지 “생명을 얻음”으로 번역하지 않는
다. 이는 우리말 표현도 그렇지만 요한 전승의 강조점이 종말론적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24) F. Blass, A. Debrunner und F. Rehkopf, Grammatik des Neutestamentlichen Griechiesch(Göttingen: Vandenhoech & Ruprecht, 2001. 18 Auf.), 299(6번).
25) Ibid.,300(12번)에나오는이런종류의목록에도마19:16은나오지않는다.
26) 이러한 경향은 א L 33 (579에서는 이들과 약간 다른 형태로 다시 poihsw z) ai) klhronomhsw가 나타남) 892와 성구집 2211과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이집트의 소수의 번역 본들의 변형된 형태(sy1s.c.hmg sams bo)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판단은 바로 앞 didaskale에agaqe를 첨가하는 이본들(C W Q f13 33 M lat sy sa mae bopt)에서 이미 누가복음과 시작하기 때문에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견해에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J. W. Wenham, “Why Do You as Me about the Good?”, NTS 28(1983), 116-25; 도널드 헤그너, 마태복음877 , 14-28
27) 예수가 반면 누가는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목적절(i[na)을 사용하지 않고 분사 “poih,saj”(직 역하자면 “행한 후에”)를 사용하여 문장을 좀 더 윤색할 뿐이다.
28) Berakh 28b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랍비 엘레아잘(기원후 90년경)이 병들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그를 문병하러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 셔서 우리가 그 길에서 장차 올 세상의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אבה םלועה ייהב הכזנו). 그는 이 렇게 대답했다. ‘너희의 동료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라. 너희의 자녀들이 (성경을 헛되이)읽지 않게 하고 학자의 제자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게 하라.’” Hermann L. Strack und P. Billerbeck,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1 (München: C. H. Beck, 1978. 7.Auf.), 808; 헤그너, 마태복음 14-28 , 881;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122.를 참고하라.
2.3.2. ‘klhronomew, ’의 신학적 의미
이제 마태복음 전체에서 ‘klhronome,w’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공관복음 본문은 모두 동일하게 3단락, 즉1 영생에 관한 부자와 예수의 대화(마 19:16-22//막 10:17-22//눅 18:18-23),2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비유(마 19:23-26//막 10:23-27//눅 18:24-27), 그리고 3 모두 모든 것을 버리고 예 수를 따른 제자들에 대한 종말론적 축복 선언(마 19:26-29//막 10:28-30//눅18:28-30)으로 구성되어 있다.29)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 24절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본문의 정중앙에 자리할 뿐만 아니라 전체의 주제가 된다.이렇게 마태는 예수와 부자 청년의 대화를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주제로 승 화시켜가고 있다. 그래서 첫 질문(16절)과 대화의 종결부의 선언(29절)사이,그 중심에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들어감”(eivselqein/ eivj th.n basilei,an tou/ qeou/) 19:23f. 비교 17b)이 정교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태는 24절에서 자신의 전형적인 강조 문구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pa,lin de. le,gw u`min/ )를 사용하 여 이 주제를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전체 대화의 소 재가 되는 재물 포기를 전적으로 제자도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지만, 마태는 이 소재를 처음부터 ‘영생의 상속/소유’의 행위에 관심을 두는 부자의 질문을“(하나님의 나라/영생)에 들어감”(eivselqein/ eijv )이라는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마태는 3번째 단락의 제자 담화를 맺는 19:29에서 다시 “영생을 상속하리 라”(zwh.n aivw,nion klhronomh,sei)는 표현을 사용한다. 반면 마가와 누가의 경 우 여기서는 ‘상속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동사 ‘la,bh|’ (取하다)를 사용한다.
마 19:29 | 막 10:30 | 눅 18:30 |
lh,myetai kai. zwh.n aivw,nion klhronomhs, ei | eva.n mh. la,bh|... | o[j ouvci. la,bh| |
...받게 되고 영생을 상속하리라 | ...와 영생을 | ...와 영생을 받지못할자 |
그러니까 마태는 일시적인 소유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scw/’)으로 부자의 질문의 한계를 드러내고, ‘클레로노메오’를 종말론적 심판의 관점에서 제자들 이 누릴 축복 선언에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게 사용하는 셈이다. 그래서 마태 는 ‘클레로노메소’(미래형)를 사용하여 종말론적인 미래를 표현한다. 마태복 음에서 ‘클레로노메오’는 모두 3번 사용되는데, 산상수훈의 서막 5:5에서도 이 용어(미래형)는 제자들의 종말론적인 축복을 선언하는데 사용된다. 뿐만 아니 라 마가복음 10:30이나 누가복음 18:30은 이 세상에서 누릴 백배의 ‘집과 가족 과 땅’을 “현세에 있어”(evn tw/| kairw|/ tout, w|)라고 표현하지만, 마태는 이것 생 략하고 종말론적인 축복으로 돌린다(마 19:29).30) 그런데 이 문장 바로 앞에는 마태만이 간직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심판에 관한 어록이 담겨 있다.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인자가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즉 이스라엘을 심판하 는 자리, 이를테면 ‘배심원’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스 라엘 전체가 유산을 상속한다는 유대교의 통념은 뒤집어지고, 도리어 이스라 엘이 심판대에 세워진다. 이미 세례요한의 메시지에서도 이러한 심판의 관념 이 표현되어 있다(마 3:8f). 마태복음 19:28은 누가복음 22:30과 병행을 이루 고 있는 예수의 말씀 전승에 속한다. 이 말씀과 관련된 마태복음의 특수 전승 들은 마태의 심판 사상의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 를 갈게 되리라”(8:11f).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doqh,setai e;qnei) 21:43)
두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상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 현한다. 더 나아가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민족에게 주어지리라(doqh,setai e;qnei)”, 즉 불특정 민족(e;qnoj)에게31) 주어진다는 선언이다. ‘클레로노메오’는 마지막으로 ‘인자의 종말론적 심판’을 묘사하는 종말강화에서 양과 염소 를 구별하듯이 이번엔 “모든 민족”(pa,nta ta. e;qnh) 25:32)을 심판하는 장면에 서 사용된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klhronomh,sate th.n h`toimasme,nhn u`mi/n basilei,an)25:34).
“모든 민족들”은 앞서 설명한 대로 이방인으로서, 본문에서는 불특정 대상 을 지시한다.32) 이번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셈이 다. 물론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심판이 제외되지 않는다.33)
결국, 마태가 사용하는 ‘클레로노메오’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선택과 계약관념이 들어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는 결단을 통과하여 마침내 영생에 이르는 종말론적 구원의 전 과정을 표현하는 독특한 신학용어라 하겠 다. 물론, 계약의 유산을 받은 유대인이나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민족”(이방 인) 그 누구에게나 종말의 때에 심판을 통과해야 할 ‘상속의 완성’이 남아 있 게 된다. 여기에는 종말론적 구원에 이르는 필연적으로 긴장이 존재하는데,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계명의 준수 여부는 그 긴장의 본질에 해당한다.마태의 경우는 산상수훈에서 보이듯이 사랑의 계명으로 집약되고 개별적인 행위로 구체화된다(마 19:17하. 아래 2.3.4를 보라).
29)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이렇게 구분한다.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120;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3, 38; E. Schweizer,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Göttingen; Zürich: Vandenhoeck & Ruprecht,1986), 251f.
30) 마가복음에서도 이 용어의 종말론적 특징은 분명하다. J. H. Friedrich, “klhronome,w ktl)”, H.
Balz and G. Schneider, Hrg. Exeget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2 (Stuttgart; Berlin; Köln; Mainz: Kohlhammer, 1981), 298f.
31) 이스라엘이심판아래있다는사상은마태복음에가장뚜렷하게드러난다.이를가장잘보 여주는 중요한 사실은 “백성”으로 번역된 ‘e;qnoj’는 복수(‘ta. e;qnh’)로 사용될 때는 유대인 이 아닌 ‘이방인’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는 총 18회 쓰이고 있 는데, 3번(21:43; 24:7x2)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단수 로 쓰여도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24:7)라는 표현이나, “이 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18:17)처럼 이방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 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해도 무방하다.
32) U. Luz, Das Matthäusevangelium nach Matthäus 3, 521-525; 도날드 헤그너, 마태복음14-28 , 1134f; 여러 가지 해석에 대한 학자들의 분류에 대해서는 참조: W. D. Davies and Dale 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3, 422.
33) 마태복음 13:24-30; 36-43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이른바 ‘혼합된 몸’(corpus mixtum)이라는 마태의 교회론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도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3.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영생의 상속’이라는 유대교적 관념은 신약의 보편적인 주제인 ‘하 나님의 나라에 들어감’과 어떤 신학적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초기 유대 교에서 토라는 단지 ‘성문화된 율법’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과 이스라 엘의 계약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살아있는 실체였다. 토라의 본 질은 계약이요, 계약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 이를테면, 쿰란 공동체의 계약사 상은 ‘생명의 물의 원천’과 동일시된다(CD 4.8; 7.16; 19.33-35).34) 그래서 토 라는 구원과 생명의 길이었고, 인격화된 토라 존재론(Torah-Ontologie)으로까 지 발전된다.35) 자신들을 종말론적인 계약공동체로 생각하는 그들의 정체성 의 중심에는 토라가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는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새 로이 공동체에 가입하는 사람은 새로운 계약 안에 사는 것이고 생명의 기원 이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다.36)
신약은 유대교의 이런 생명 사상을 공유하면서도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종말에 일으키실 부활의 행위는 이미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사건에 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37) 죽었던 그가 살 아 있다는 것은 기독교적 선포의 핵심이 된다. 물론 공관복음의 예수의 설교 에서는 미래의 생명만이 언급된다. 왜냐하면 그의 선포에서 ‘영생에 들어감’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38) 따라서 그의 선포의 주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 적 생명과 대치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공관복음에서 영생은 곧 생명과 동일 어로 사용되고, 양자(兩者) 모두 종말론적인 심판과 구원의 배경에서 ‘들어가 다’라는 표현과 어울려 사용된다(마 18:8f//막 9:43, 45). 이렇게 공관복음에서 생명 개념은-우리의 본문에서와 같이-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되고 만다.39) 또 그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나라를 선취(先取)하는 종말론적 현재 사건에서 복음으로 선포되어 드러난다. 즉, 마태는 부자 청년의 ‘일회적 인’ 행동(‘scw/’)보다는, 미래적 심판의 관점에 서서 하나님의 나라에 마침내 들어가는 시금석을 현재의 결정적인 예수 추종의 결단에 두고 있는 셈이 다.40) 최종적 칭의는 이 순종의 행위와 분리할 수 없는데, 필자는 이것이야말 로 역사의 예수의 언어로 번역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34) 배재욱, “신약 성경의 생명 사상에 대한 고찰”, 「선교와 신학」, 22 (2008), 45-78(54); “초기 유대교, 예수와 바울의 생명 사상”, 「신약연구」11:1 (2012), 131-159.
35) M. Hengel, 유대교와 헬레니즘 , 3권, 167f.
36) 배재욱, “신약 성경의 생명 사상에 대한 고찰”, 55; Simon J. Gathercole, Where is Boasting?,91-96.
37) 육체적인 생명과 죽음의 근원에 대한 신약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생명과 죽음은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서 이해될 수 있기에 하나님께 속한다. 이 생명은 죽음에 복속된 육체에 사는 것으로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속한 참된 생명과 구분된 다. 하지만 미래적인 생명이 참되고 본래적인 것이기에 유대교에서 ‘생명’이라 함은 ‘불멸 의’라는 수식어 없이도 종종 ‘영원한 생명’이라 특징지어진다.신약에서도 영생은 죽음에 서부터의 구원과 결합되어, 인간은 영생을 ‘상속하고’, ‘받고’, ‘얻고’, ‘들어가게’ 된다. 생 명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서 인간에게 수여된 것처럼, 영원한 생명도 종말의 때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수여된다.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 님의 능력에 속한다(마 19:26 공관 병행). 그러므로 미래적 생명, 즉 영생의 소유와 보존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행위에 근거하게 된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 된 생명에 관한 온갖 다양한 표현은 여기서 나온다(요 3:15f; 행 3:15; 11:18; 15:7-9; 13:48;롬5;10;6:8ff; 8:2;10:9;엡3:2;7:2;골3:3f;딤전1:16;딤후1:10;딤후1:1;요일5:11;요일5:20 등). R. Bultmann, “za,w ktl)”, ThWNT II, 856-874 (864f).
38) Ibid., 867; G. Dalman, Worte Jesu (Leipzig: J. C. Hinrich's Buchhandlung, 1930), 127-132.
39) 배재욱,“신약성경의생명사상에대한고찰”,57f.
40) 막 10:9 “나와 복음을 위하여”, 눅 18:29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마 19:28f “인자가 자기 영광의보좌에앉을때에...나의이름을위하여”.
4. 결론
우리가 다룬 본문들인 공관복음의 부자와 예수의 대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번역하는 출발은, 그 저변에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론이 교차되고 있 음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진지한 질문의 당사자는 분명히 유대인이 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율법사와 예수의 대화(눅 10:25-28)에서도 마찬가 지였다. 그의 진지한 질문의 전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become)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being)의 삶에 관한 문제였다.계약 백성 이스라엘의 ‘자격’(status)의 유지는 토라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이스라엘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 가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41) 초기 기독교는 예수가 선 포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서 지금 이 세계로 돌입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마태는 ‘klhronome,w’(상속하 다)라는 용어를 부자 청년의 질문(19:16)에서 사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 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상급으로 수여하는 데 사용한다(19:29).여기에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유산을 공유하면서도 종말론적인 구원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함을 보여준다. 이제 하나님의 선택은 유대인 가운데서 도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수여되고, 더 나아가서 이방인에게로 확 장될수있게된다.
여기서 예수를 믿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즉 이방인들도 토라의 계명을 저버릴 수 없다(마 5:17-19)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유대인 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뜻을 추구하고 ‘이것을 행함으로 산다’(tou/to poi,ei kai. zh,sh|Å 눅 10:28). 이 신앙이야말로 1세기 유대교와 기독 교가 서 있었던 공통의 토대였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선한 일(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유 대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율법에 나 타난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영원한 생명을 (새로이) 획득하려 함은 아니지만,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현재적 생명(구원) 안에서 살아가려는 삶의 문제이다.동시에 이 대화는 이방인에게도 유효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결 단에 들어선 모든 사람에게 율법의 본질적 요구는 영생을 이어가는 삶의 과제가 된다. 이와 같은 복잡한 신학적 의미를 놓치지 않고 적절하고 바르게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자는 현재의 번역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막 10:17//눅 18:17. 비교. 눅 10:25)를 다음과 같이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성경 원문 | 개역개정 | 제안 |
표준개정 | 제안 | |
마 19:6 |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내게 영생이 있으리이까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내게 영원한 생명이 있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
막10:16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하리이까(유업으로 받으리이까)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 려면, | 내가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려면(유업으로 받으려면)무엇을 해야 합니까? |
부수적으로 개역개정 의 몇몇 곳에서 이 동사를 ‘기업/유산으로 받다’로 번역하는 경우도 ‘유업으로 받다’로 통일하는 것이 좋겠다(마 5:5; 고전15:50; 히 1:4).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2:7에서도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대신“축복을 상속받으려고”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되겠다. 이 외에도 표준개정 은 마태복음 5:5와 25:34에서 “klhronome,w”를 “차지하다”로 번역하는데, 다 른 곳에서와 같이 “상속하다”, 혹은 “유업으로 받다”(갈 4:30; 고전 6:9f; 갈5:21)로 통일적으로 번역하여야 하겠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론에 관한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는 신학적 용어‘klhronomew, ’는 비록 하나의 단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구원의 신앙 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신학 용어라 필자는 생각한다. 이 용어는 공관복 음서에서 영생에 관한 진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술어(述語)가 될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는 독특하게 예수의 지고한 부름이 담긴 ‘사랑의 이중계명’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까지 결합되어 있다. 제시된 번역의 차이가 비록 작고 미묘한 것 같지만, 이러한 번역은 구원을 향한 삶에서 믿음과 행함의 딜 레마를 경험하고 고민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믿음과 행함의 신학적 긴장을 유지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가는”(빌 2:12) 계기가 되기 를 소망한다.
41)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런 자신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는 최종적으로 “그리하 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kai. ou[twj pa/j VIsrah.l swqh,setai)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 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11:26-27)고 선언한다. 하지만‘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서 의견이 나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가능한가? 물론 기독교 신학자들은 전자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 떻게’라는 세부 각론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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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교수(성결대학교신학대학교수,신약학)/
첫댓글 공과금.지병'치료비.먹거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6번의 인슐린과 혈당체크 하루에 내몸을 10번을
찌르며 살다보니 많이 지치고 저혈당 쇼크등으로
머리도 이젠 예전같지 않고 어눌해지고 있어요...
카페운영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십시요
매일 이걸 해야하나 갈팡질팡하고 갈등합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사명인데 요즘은 너무힘드네요
카페운영을 위해 작은 성금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페에 후원을 하신분은 사랑회원(최우수)이 되십니다...
카페지기의 생활이 어렵습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도와주시면 카페 운영에 큰힘이 됩니다
카페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않좋아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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