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07.日. 그러니까 2년 뒤에도 당신과 내가 정상적인 코 숨쉬기로 살아갈 수 있을까?
05월07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벨라거사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여의如意롭게 치러낸 신도님들을 위해 신도회 회장님께서 저녁만찬을 준비했다고 해서 일요법회 도반님들과 모임장소인 한농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번 하안거夏安居에 방부房付들인 두 분 스님과 행자님은 절에서 공양을 올리고 공양주 보살님까지 포함한 다른 분들은 백운스님을 모시고 절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고북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음식점의 밥상은 절 공양간에서 접하는 밥상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상床이라도 책을 놓으면 책상冊床이고, 차를 놓으면 찻상茶床이고, 술을 놓으면 주안상酒案床이고, 밥을 놓으면 밥상食卓이 됩니다. 일요법회 도반님들 중에는 고향에 내려갔던 정덕거사님과 묘길수보살님이 당진으로 귀가하던 길에 들려주었고, 김화백님은 한창 바쁜 작업실에서, 그리고 팔봉거사님과 무량덕보살님은 집안일을 마치고 바로 달려와 주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人心난다.는 말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잘 차려놓은 잔칫집 같은 먹는 분위기는 누구에게나 참으로 좋습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사님들도, 보살님들도, 스님들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먹는 일은 생명을 이어가는 본능이기도 하지만 지치거나 억눌린 몸과 마음의 치유의 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먹는 방법과 습관은 사람마다 다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가 식습관을 형성하고 그 식습관들이 건강으로 직결이 됩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몸과 마음에서 받아들이는 방식과 섭식체계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음식이 같은 건강을 담보擔保하지는 않습니다.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고, 감사하고, 즐겁고, 알맞게 먹을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한 자세이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먹다보면 여건이나 상황이 누구에게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많이 가끔 먹는 사람, 많이 자주 먹는 사람, 조금씩 자주 먹는 사람, 조금씩 가끔 먹는 사람, 걸신들린 사람, 그도 저도 잘 안 먹는 사람, 폭식증暴食症, 거식증拒食症 등등에다가 먹을 것에 집착하는 사람, 먹을 것에 관대한 사람, 먹을 것에 편집적인 사람, 먹을 것에 인색한 사람, 먹을 것에 공격적인 사람, 먹을 것에 방어적인 사람, 먹을 것에 감성적인 사람, 먹을 것에 이성적인 사람, 먹을 것에 낙관적인 사람, 먹을 것에 비관적인 사람, 먹을 것에 담대한 사람, 먹을 것에 초조한 사람, 먹을 것을 사랑하는 사람, 먹을 것을 혐오하는 사람, 음식과 대화하는 사람, 음식과 싸우는 사람, 음식을 부리는 사람, 음식의 눈치를 보는 사람, 먹고 나서 만족하는 사람, 먹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 먹고 나서 느긋해지는 사람, 먹고 나서 짜증내는 사람, 등등 개개인마다 여러 가지 형태와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밥상위에 반찬으로 올라온 갱개미찜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오리의 충청도 방언이 갱개미이므로 가오리찜이라면 잘 알 수 있겠습니다. 스마트폰 크기만 하게 잘라서 쪄낸 갱개미에 양념장을 살짝 뿌려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게 시선을 압박해오고 있었습니다. 홍어회나 홍어찜, 홍어무침을 무척 무척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무엇보다 젓가락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음식이었습니다. 불고체면不顧體面하고 젓가락으로 절반을 뚝 잘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보았습니다. 갱개미 살이 결 따라 입안에 싸악~ 감돌아들며 부드럽게 연골이 아사삭~ 씹히면서 얼큰한 맛이 미묘한 흥취興趣처럼 살짝 도는 품이 누구라도 좋아할 단계의 삭힌 정도에다 알맞게 잘 쪄냈습니다. 결국 두 번이나 식당보살님께 추가를 부탁했고 나중에는 옆 밥상에 있는 갱개미찜까지 넘겨다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꽃게장의 붉은 색이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게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밥상위에 게장이 올라오더라도 거의 손을 대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게장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게장의 어떤 맛 때문에 그렇게들 좋아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게장이 밥상에 올라오면 한 번씩 먹어보게 되었습니다. 밀가루가 많이 섞인 녹두전이 있었고, 식초와 겨자로 맛을 낸 해파리무침이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우뭇가사리 냉국도 맛이 있겠고 멸치볶음을 좋아하는 나는 달착지근한 볶음멸치를 씹는 맛도 괜찮았습니다. 사람의 입이라는 것이 말하는 기능과 음식을 먹는 기능이 가장 큰 두 가지 효용效用이라면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는 것은 입의 가치와 격을 살려주는 식食과 언言이 통합統合되는 마침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밥을 먹을 때는 밥만을 주로 먹고, 말을 할 때는 말만 주로하기 때문에 식사를 하면서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밥을 먹으면서 말을 하려면 말만을 할 때에 비해 적절한 단어나 좋은 문장을 생각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無意識中에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밥을 먹을 때면 말까지도 본능적으로 섞고 싶지 않을 만큼 밥 먹는 시간이 소중한 시간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녁 회식이 끝난 후에 백운스님과 공양주보살님은 절로 돌아가시고 일요법회 도반님들은 김화백님 작업실로 자리를 옮겨 의자를 당겨 앉아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자리가 일요법회시간에 논의나 토론하기가 쉽지 않았던 경전經典 안팎의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우리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우주시대인 현대 불교에 와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기본조건은 무엇인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뒤 보드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 직선거리로 210Km, 당시 통행길로 320Km의 먼 길을 걸어 구태여 다섯 비구比丘를 교화하러 바라나시의 교외郊外 동산인 사르나트까지 갔던 이유는 무엇일까, 운송수단인 교통과 의사 전달수단인 통신이 발달하고 세상이 지구촌으로 좁아져버린 현대에 와서 도인의 명맥이 끊어져버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하는 등의 격의 없는 대화는 우리들의 눈을 밝게 해주고 신심을 북돋워 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대화의 즐거움이 밤10시20분까지 김화백님 작업실 찻상의 둘레에 우리들을 고스란히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5월의 황금연휴로 인해 그 시간에도 지정체遲停滯 구간이 남아있는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 서울 집에 도착을 했더니 다음날 새벽1시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길고도 짧은 두 하루가 지나가고 마주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