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기-7 구주(九州 규슈)
九州는 일본 남쪽의 큰 섬으로 따뜻한 지방이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현해탄을 건너면 쉽게 교역이 가능하다.
구주에서는 오늘날에도 고대 우리 선조들이 건너 다니던 증표를 땅속에서도 보이고 있어, 옛 무덤이 발굴될 때마다 일본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까지도 놀라게 하고 있다.
“일본문화의 원류는 한국”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로부터의 문화 외에도 또 다른 여러 방면에서 받아들인 문화들을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의 일본문화로 승화시켜 오늘날 우리와 견주어 손색없는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아니, 다시 말하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문화재를, 더 정갈하게 관리하고 있고, 새로 자꾸 만들고 있다.
그들은 이집트 피라밋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세계 최대 무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가지고 있고, 하늘로 높이 솟아올라간 수많은 성(城)을 가지고 있고, 역사가 오래된 사찰도 부지기수이고, 새로 건축하는 웬만한 사찰은 규모가 대단히 크다.
九州에 있는 ‘야하다 제철소’는 현대의 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대규모 공장이다. 전철역을 세 개나 지나야 끝이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이 공장은 일본을 세계최대의 철강 생산국으로 만드는 핵심 공장이었고, 그 중에는 1901年에 건립된 용광로가 있어, 우리의 포항제철이 1968년경 설립된 것과 약 70년 가까운 차이가 있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서글픔이 엄습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만든 우리가, 100년 전에만 해도 그들을 가르쳐 주던 우리가….
임진왜란이며, 한일합방이며, 많은 수난과 수탈을 당하고, 좋은 것은 다 뺏기고, 천지에 바보처럼 동족끼리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수백만 인명을 잃으면서 전쟁을 겪었는데, 6.25 때 이들은 또 이때를 놓칠세라 군수품 조달로 돈을 벌었다.
일본의 철강생산능력은 년 1억톤인데, 포철 제품 200만톤이 일본으로 수출되자 이들은 입을 모아 “부메랑 효과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삼천리 강토에 철도를 부설하고 많은 산물을 헐 값에 긁어가던 자들이 이제는 “한국을 개화시켰다”고 억지를 늘어놓고 있으니, 우리가 당시에 미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것은 한민족을 개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많은 것을 한 번에 대량 수송하거나, 신속하게 군 부대가 이동하는 수단으로 부설한 것이 철도이니 말이다, 그런 식의 식민지배가 이어졌으면서도, 한국을 개화시켰다는 논리로 침략을 합리화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야하다 제철소를 지나 일본에서도 대여섯 번째 크다는 야스카와(安川) 전기제작소에 도착하였다.
전철역 바로 가까이 위치한 安川電氣 본사 정문에는 일장기와 더불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한국사람인 내가 온다고 저 야단으로 반가와 하는 줄 알았더니, 처음 오시는 손님에게 호감을 갖도록, 사원들이 분임토의를 하여 만든 아이디어라네! 그 얘기를 들으니 놀랍고 고마웠다.
회사 개요를 설명해 주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술자 출신으로, 어떤 이는 “나의 아버지가 수풍(水豊)Dam 건설에 참여했다”는 둥 우리나라와 연관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한국을 다녀간 어느 기술자의 귀국보고서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소감을 붙이고 있었다.
*“가방을 사무실에 놓고 현장을 다녀오니 지갑이 없어지고 말았다. 한국에서 현금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얻었다”.
공장견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역에 나왔을 때는 여러 명의 귀여운 여고생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검은 주름치마에 검은 저고리에 하얀 동정이 달린 것을 보니 한국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말을 걸 수 없었다. 동포이면서도 모른 체해야 하는 아픈 마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지!
같은 전차를 타고서도 줄곧 그 여학생들을 눈여겨보면서 동족의 타오르는 동포애를 금할 길 없었다. 전차가 움직이고 조금 지났을 때 창가에 큰 한글간판이 보여 황소 눈을 하고 바라보니 “어버이 김일성 수령동지 감사합니다”라는 조총련 계열 학교의 간판이 보였다. 이 학생들의 학교-조총련-민단-남과북-이데올로기-동포-동족 등 내 머리는 온통 복잡했다.
누가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이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았던들 미․소가 서로 한반도에 올라서진 않았을 것을.
누굴 원망해? 우리가 어리석지 않았다면 그렇게 안 되었을 텐데…
그렇다. 우리를 갈라놓은 원인제공자 일본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은 저 학생들과 나처럼, 한편에는 태극기, 한편에는 조총련 학교와 그 문구가 있는 앞을 지나가는 전차속에는 사상이 전혀 다른 동족이 타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그냥 가다가 그냥 헤어졌다.
그러니 철! 강철같이 뭉쳐야 한다!
1983.3.12
부슬부슬 봄비인가 보다. 토요일 밤의 이 빗소리가 퍽 뭔가 그리워지게 한다.
규슈의 엄청 크고 낡은 고가(古家) 이층에 홀로 자리잡은 내 하숙방은 춥고 썰렁하다.
이 하숙집은 하숙비가 싸서 좋다. 우연히 알게 되어 들어왔는데, 주인 할머니는 67세. 다나카(田中) 요시에.
같이 사는 가족 없이 혼자 살면서 무지하게 크고 썰렁한 2층 기와집에서, 나 말고도 몇 명의 하숙생을 뒷바라지를 해주며 사신다.
다른 하숙생들은 다 1층에 있고 나만 2층 다다미방에 있다.
이 할머니가 옛날 일정 때 한국의 충북 충주에서 18년 간 사셨단다.
한국사람들이 이를 가는 일본순사 나으리의 딸로 태어나, 18년 간 산 이 할머니는 일본보다는 한국의 모든 것이 더 좋다신다.
난들 그런 순사를 좋아할 리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자랐다는 할머니니까 나도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는 “충주에서 서울로 통하는 도로공사가 있어서 땅을 기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의식하신 듯, “나쁜 짓 안 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에 근무한 일본 순사가, 한국사람 기준으로, 나쁜 짓 안 했을 리 없지만, 난 이 할머니가 미운 마음은 없다.
할머니 친구가 가끔 놀러오시는데, ‘한국’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꼭 ‘조선’이라 부른다. 옛날 식민지의 추억으로 그러시나 하고 오해를 살만 했다.
규슈에는 왜정 때 한국에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 한국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 오랜 옛날부터 규슈는 기술자가 많았던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분들은 지금은 모두 70~80대에 들어섰고, 해방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들의 자녀에게서 기술을 배우러 내가 일본에 와 있는 것.
어느 날 할머니는 “뭘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시더니, 일부러 나를 데리고 재래시장에 가서 미역을 사다가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일본에서 먹어보는 한국 미역국. 맛은 좀 일본식이었지만 마음이 참 뜨뜻해졌다.
상인들에게 “한국 사람 왔다”고 나를 소개하시는 할머니는 마음이 무척 즐거우신 것 같았다. 한국과 인연이 깊고, 한국을 좋아하시는 할머니다.
아무튼 여기서 꼬박 한 달간 하숙했다.
*2002년 현재
*민둥산 금성분의 중요성은 인류문명의 자산이자 중국과 일본의 역사 침략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기에 이 고분의 중요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하다. 지금까지 금성분(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발생한 무덤이라고 주장을 하였으나 민둥산 고분으로 인하여 일본의 천황들은 백제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한성 백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일본 보다 시대가 앞선 것으로 일본의 고대국가를 세운 천황은 모두 백제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서도 복원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일본의 인덕 천황릉이 고분의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로 알려져 있지만, 하남시 민둥산 고분은 길이가 680m로서 인덕천황릉 486m보다 훨씬 크다. 경제적 가치는 아파트 개발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가적인 이익이 크다는 것도 상기해야 한다.
---한종섭 역사·문화 신지식인(한성백제문화연구회장)
*1970년 전후하여 당시에는 현금을 도난당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30~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식탁 위에 휴대폰을 두어도 아무도 채어가지 않는 나라라고, 외국인들이 신기하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