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그리다
김흥열
그리움과 그림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사막으로 이어진 길에 그리움 그리는 모래언덕 물결 일으키는 곳 그리워한다는 것은 물결 무늬 열꽃이 피는 것이어서 모래는 작은 알갱이로 수억 년 동안 유랑한다 모래와 함께 수많은 문자들도 바람에 조금씩 문양과 의미를 바꾼다 어떤 것은 개미지옥에 잡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정오가 될 때 꽃으로 피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연에 따른다고 한다 모래 위에서 자칫 문자가 유랑하는 것과 옷을 갈아입는다는 사실을 무심 속에 흘려넣을지도 모른다 그 무심 속에 수련이 꽃을 피우고 그림을 살아나게 한다 잊는다는 것과 그리워한다는 것 사이에 그림이란 길이 생겨나는데 손끝으로 꽃잎의 납작한 혀를 만저보거나 바람의 입술이 키스해준 이들만 들어설 수 있다 언젠가 그림이 다른 그림에 포개질 때 쯤 감각이 그 사잇길에서 열꽃이 되어 볼을 비빈다 동공은 그때서야 그리움을 그린다
《김흥열의 시 <그리움, 그리다>의 문학적 비평》
1. 언어의 기원적 회귀: '그립다'와 '그리다'의 유기적 결합
김흥열 시인의 <그리움, 그리다>는 언어적 유희(Pun)를 넘어, '그리움'이라는 추상적 감정이 '그림'이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작품입니다. 이 시의 가장 큰 문학적 성취는 한국어의 고유한 특성, 즉 '그리워하다(Longing)'와 '그리다(Drawing)'의 어원적 동질성을 시적 서사로 완벽히 복원해냈다는 점에 있습니다.
* 기표와 기의의 유희: 시인은 단순히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리움과 그림 사이로 난 길"이라는 설정을 통해 감정(내면)과 행위(외면)를 하나의 선상에 놓습니다.
* 생성적 그리움: 일반적으로 그리움은 '과거'를 향한 정적인 감정으로 치환되기 쉽지만, 김흥열의 시에서 그리움은 모래언덕에 물결을 일으키고 문자를 유랑하게 만드는 동적인 창조 에너지로 묘사됩니다.
2. 사막의 공간학: 공허 위에 세워진 존재의 문양
시적 배경인 '사막'은 만물이 부재하는 공간인 동시에, 무엇이든 그려질 수 있는 무한한 캔버스를 의미합니다.
* 결핍 속의 풍요: 사막은 물이 없는 고통스러운 공간이지만, 시인은 그곳에서 '수련'이 꽃을 피우고 '그림'이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비어 있음(무심)*이 전제될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술적 형상화(그림)가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 모래와 문자: 사막의 모래알은 수억 년의 시간을 견딘 '그리움의 파편'입니다. 바람에 의해 문양이 바뀌는 모래는 고정되지 않는 기억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 인연의 결정론: "대부분 인연에 따른다"는 표현은 그리움의 대상이나 그 결과가 인간의 의지뿐만 아니라 거대한 우주적 질서(바람, 정오의 햇살 등)에 의해 결정됨을 시사합니다. 이는 그리움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존재론적 층위로 격상시킵니다.
3. 감각의 전이와 미학적 승화
비평적 관점에서 이 시는 '공감각적 심상'을 통해 관념적 슬픔을 구체적 예술로 변모시키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 신체화된 그리움: "꽃잎의 납작한 혀", "바람의 입술"과 같은 표현은 그리움을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닌, 촉각적 실체로 변환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리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 동공이 그리는 세계: 시의 종결부에서 "동공은 그때서야 그리움을 그린다"는 대목은 압권입니다. 눈은 외부를 수용하는 기관이지만, 시인은 이를 그리움을 투사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는 주체적 기관으로 정의합니다. 즉, 보는 것이 곧 그리는 것이라는 예술의 본질을 꿰뚫습니다.
4. 종합 비평: 망각과 기억의 사잇길에서 찾은 구원
김흥열의 시는 '잊는다는 것(망각)'과 '그리워한다는 것(기억)' 사이의 긴장을 '그림(예술)'이라는 제3의 길로 해결합니다.
* 비극적 초월: 그리움은 본래 결핍에서 오기에 고통스럽지만, 시인은 그 결핍의 공간(사막)에서 별을 만나고 꽃을 피워냅니다.
5. 운율적 특징
1). 반복과 변주: 'ㄱ'음의 음악성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시작되는 'ㄱ' 자음의 반복을 통해 시 전체에 일관된 울림을 부여합니다.
* 두운(Alliteration) 효과: '그리움', '그림', '길', '곳', '개미지옥', '꽃', '감각' 등 'ㄱ' 소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독자의 청각에 리듬감을 형성합니다. 이는 마치 사막의 모래알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미세한 파찰음과 같은 효과를 줍니다.
* 어휘의 변주: '그리움'이 '그림'으로, 다시 '그리다'로 변모하는 과정은 단어의 형태적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적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2). 산문적 호흡 속의 '물결' 리듬 (통사적 흐름)
이 시는 행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산문시적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문장의 호흡은 매우 유연하게 이어집니다.
* 연쇄적 문장 구조: "~하는 것이어서", "~유랑한다", "~바꾼다", "~한다고 한다"와 같이 문장이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연장적 호흡을 사용합니다. 이는 시 속에서 묘사되는 '사막의 모래 언덕'이나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룹니다.
* 호흡의 완급 조절: 긴 문장들 사이사이에 "대부분 인연에 따른다고 한다"와 같은 비교적 짧고 단정적인 문장을 배치하여,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산문적 흐름에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3). 심상과 리듬의 결합 (이미지 리듬)
시적 대상의 움직임 자체가 운율이 되는 '이미지적 리듬'이 돋보입니다.
* 순환적 구조: 시는 '그리움과 그림 사이의 길'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리움을 그리는 동공'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수미상관적 전개는 독자에게 안정감을 주며, 그리움이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의 리듬을 느끼게 합니다.
* 촉각적 리듬: "손끝으로... 만져보거나", "바람의 입술이 키스해주는" 등 신체 부위를 언급하는 구절에서는 언어의 템포가 느려지며 정교한 감각적 리듬이 형성됩니다.
운율적 특징의 종합 평
이 시의 운율은 단순히 소리의 반복에 그치지 않고, '사막의 모래바람'이라는 공간적 에너지를 언어의 호흡으로 치환한 결과물입니다. 독자는 시를 읽으며 마치 모래 언덕의 곡선을 따라 걷는 듯한 부드럽고도 끈질긴 리듬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
본 작품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을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론(詩論)'적 성격의 시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문양으로 읽어내려는 시인의 시선이 독자에게 깊은 위로와 미학적 카타르시스를 전달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움과 그림 사이'는 뛰어난 이미지와 철학적 사유가 응축된 밀도 높은 시입니다. 김흥열 시인은 그리움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포괄하는 보편적 주제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의 난해함은 깊이로 치환되며, 독자에게 끊임없이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힘 있는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