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청주] 산 이들의 하느님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묵시 11, 4 - 12
† 복음 : 루카 20, 27 - 40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그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하였다.
★ 두 증인은 예언자의 사명을 다하는 하느님 백성을 가리킨다.
두 증인은 진리이신 주님을 증언하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을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신다.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김수환 추기경이 피정을 지도할 때, 추기경에 임명되기 오래전 사형
집행장에서 목격한 어느 사형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형수는 세례를 받고 교수대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교수대가 그만 고장이 나서 부서지는 바람에 그는 묶인 채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간수 하나가 와서는 사형수가 지금 밑에서 웃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교수대를 고치는 사이 사형수의 얼굴을 보니 아주 태연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을 가지십시오. 특별히 저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죽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활의 기쁨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이 몇 시입니까?”
하고 물으면서 “앞으로 30분 뒤면 저는 하늘 나라에 가 있겠습니다.
제가 주교님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죽게 될 사형수가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죽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는 이 장면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교도소 문을 나오면서 속으로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다면 …….’ 하고 생각했답니다. 부활에
대한 사형수의 확고한 믿음이 부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바탕이자 우리가 전하는 복음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은 죽은 것이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거짓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산 이들의 하느님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 20,27-40
산 이들의 하느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
(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40도 안된 나이에...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루카 20,27-40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40도 안된 나이에...>
작년 여름, 안타깝게도 40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한 형제를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병실을 방문할 때마다 매번 느꼈던
안타까움은 그분의 생명이 눈에 확 띄게 시시각각으로 여위어지는
것을 확인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암세포의 전이로 인한 고통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세는 참으로 의연했습니다. 그분은 묵주와 성서가 언제나 머리맡에
있어야만 안심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임종에 가까워지면서 그분이 특별히 가까이 했던 성서구절이
있었는데, 시편 23장이었습니다. 자주 암송했기에 나중에는 성서를
펴지 않고서도 다 외울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드디어 시편 23장을
다 외웠다고 자랑하시던 모습, 그리고 보란 듯이 제 앞에서 시편
23장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외우시던 모습은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먼저 떠나보내기가 너무도 안타까워 몸부림치는 가족들을 오히려
조용히 위로하고 격려하던 그분의 모습은 제게 참으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고통 가운데서도
평온했던 그분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참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닫습니다.
물론 그분은 오래가지 않아 극심한 고통으로 지친 몸을 조용히
내려놓고,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곳을 향해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게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을
떠나신 지,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벌써 일 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분의 고통가운데서도 평화로웠던 얼굴, 가족들을 위로했던 그분의
따뜻한 음성, 편안하고 소탈했던 그분의 분위기는 제게서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제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신앙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 그래! 어쩌면 부활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 누군가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가고 없지만,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삶의 향기가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부활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이웃을 위해 크게
한번 희생할 때, 참기 힘든 상황 앞에서 크게 한번 인내할 때,
한번 선행을 베풀 때, 한번 양보할 때, 우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안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각인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안에 부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매일 이 세상에서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잠시 지나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언젠가 썩어 없어질 나약한 육신의 안위를
위해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이 세상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부활의 참된 의미는 결코 예쁜 계란 바구니를 주고받는다든지
알렐루야를 크게 외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각자 안에 부활하시기 위해서 몸소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한 번 더 용서하고, 한 번 더 희생하고,
조금만 더 인내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인 "작은 부활"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매일 아침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되어
이웃에게 용기 있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그 순간 우리는 참으로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우리들의 편협되고 닫혀 있는 생각들을...
비행기를 타자마자 곧바로 나오는 방송 안내 멘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대략 이렇습니다.
“머리 위에 있는 선반에서 산소마스크가 떨어지면 먼저 쓰시고 주위의
다른 승객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나부터 먼저 산소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노약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이렇게 자기 자신만을
먼저 신경 쓴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17초 안에 산소마스크를 써야만 합니다. 기내에서는 산소 공급이 끊기면
17초 안에 의식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식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 17초가 지나면 그 누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어
이 땅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지금 내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순간의 만족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다고, 행복하지 못하다면서 이 세상의 삶을 낮게 평가하고
불평불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럴 경우 부활했을 때, 이 일곱 형제 중에서 누가 형수의
남편이 되느냐는 질문이지요. 그 누구와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부활 역시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모세의 율법은 당시 과부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보살펴야 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사두가이파들은 편협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편협되고 닫혀 있는 생각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뜻에 맞게 철저히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을 잘 사는 방법이며, 내가 이 땅에 창조된
의미를 살리는 길인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온 행동이다(파올로 프레이레).
이곳은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구역!!
기억의 파편(데비드 홀리스)
처음 몇 번은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이 몹시 두려웠다.
변화의 드라마를 살면서
늘 당혹스러웠다.
그때는 몰랐다.
대양의 파도가
모래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덮쳐버린 듯,
모든 곳이 이제 그 어떤 곳도 아니란 사실을.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자 기억을 잃은 순간은
점점 더 조용해지면서 나의 인식에서 멀어져갔다.
기찻길 옆에 살다 보면 점점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기차 소리처럼.
그러던 어느 날
“얼마나 자주 기억을 잃어버리나?”라고 묻는 친구의 질문에
기억이 단절된 순간을 생각해내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이 있는 곳을 명확히 인식하는 상태와 대비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지니며 그런 상태는 내 삶에서
굴뚝의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나는 이제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이 무의미한 곳에
느긋하게 닻을 내리고 살아간다.
나는 이제 필요할 때만 내가 있는 장소를 인식한다.
거기에는 놀라움도 두려움도 없다.
자동차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듯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는 몸짓만 있을 뿐이다.
50세가 되면서 기억을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한 시인 데비드 홀리스가
쓴 시입니다. 그는 이 시의 첫머리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난해
언젠가 이 시를 썼나 봅니다. 치매가 진행되는 과정을 그린 다른
시들과 함께 이 시가 책상 위에 있더군요.”
슬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기억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전주] 복음의 증인
그리스도교는 부활 종교다. 아직 신앙이 없던 시절, 갓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는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대체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그때 개신교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녀의 백합처럼 향긋한 웃음과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서 나도 친구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가 밀려왔다.
그녀는 “너 예수 믿어라.”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마치 큐피드의 화살처럼 내 심장에 깊이 꽂혔다. 늘 상대방의 말에
부정적인 나였는데 그녀의 말은 마치 구원의 밧줄처럼 내 칙칙한 영혼에
드리워졌다. 아무도 부술 수 없던 철옹성 같은 내 아집은 마치 바오로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나 거꾸러진 것처럼 무너져내렸다.
하느님의 구원작전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스럽다. 처음 신앙을 갖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은 왜 날 부르셨나요?” 하고 주님께 여쭈었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내 안에 들려왔다. 하느님은 ‘복음의
증인’으로 살라고 나를 부르신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들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한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모두가 부활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신현숙(전주교구 나운2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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