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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선교 스크랩 한국 개신교의 역사 (도입시기와 인물)
초대짱 추천 0 조회 31 12.09.30 10: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 개신교의 역사 (도입시기와 인물)

 

최초로 개신교가 한국에 전해진때는 1866년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서 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결과로

자생적으로 평양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후 1885년 언더우드, 아펜셀러 목사등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개신교가 전파되어 한국에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각 교파별 개신교 도입 역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  

때는 1866년, 병인 해였다. 그 해는 유달리 서양 열강들이 조선을 귀찮게 굴었다. 다사다난했던 대원군 집권 3년째인

병인년에는 병인박해와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바로 종교적으로 혹세무민 하고 정치적으로 모반의 우려가 있다고 해서

새해 벽두부터 9명의 프랑스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이것을 계기로 복수의 칼을 품은 프랑스 함대가 9월에 강화도에 상륙,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만다.

이때부터 외세에 대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미국배가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다.

저 멀리서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대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의 위력으로 보아 대단한 무기임에 틀림이 없다.

“저놈들,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이었어.” “어떻게 할까요, 장군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저놈들도 지난번 그놈들과 한 패거리인 게 틀림이 없다. 이곳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도록 불화살을 쏴라.”


  서양의 최신식 화포와 불화살의 대결은 싸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가 유유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대동강

모래톱에 걸려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군인들은 작은 배에 장작을 싣고 불을 질러 그 배를 전소시켜 버렸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선원들 대부분이 불붙은 선박위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고 말았고, 목숨이라도 부지 하고자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은 생포되어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몽둥이로 맞아 죽든지 목 베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배의 이름은 ‘제너럴셔먼 호’였다. 그러는 중에 한 사람이 강물에 뛰어든다. 조선 군인들은 곧장 그를 생포했다.

그때까지 그는 가슴 속에 성경책을 꼭 품고 있었다. 조선 군인들은 그런 그를 잡아 대동강 변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도마스 목사전> 중에서...

  그 사람의 목을 친 박춘권이란 사람의 말이다.

그런데 한낱 조선군인의 이름이 어떻게 기록으로 세세히 남아 있게 되었을까?

그의 목을 친 이 박춘권이란 사람이 훗날 예수님을 믿고 요즘의 장로님과도 같은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죽은 사람은 바로 제너럴셔면 호의 통역관으로 승선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이다.

1863년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땅에 도착한 토마스는 그로부터 2년뒤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조선에 꼭 가보고 싶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작은 목선을 타고 186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그러나 서울 쪽으로 내려오다 큰 풍랑을 만나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중국 땅에 머물게 된다.


  그러는 중에 토마스 선교사는 우연히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황해도 장연에서 목선을 타고 필사적으로 탈출한 김자평,

최선일 등 천주교인 2명을 만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자극을 받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더확고히 하고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조선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자원하여 그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성경책을 가지고서 말이다.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2일, 우려했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그 순간 까지도 복음을 전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 계속해서 영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성도들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토마스 선교사가 보낸 편지를 읽고 함께 기도와 물질로 도와주었다.

그 편지에는 처음 기나긴 항해 끝에 중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엇을 전했는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아들에게서 온 편지에는 며느리가 풍토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한 편지를 읽을 때 아버지 목사님과 교인들은 가슴을 치며 함께 아파하고 무릎 꿇고 밤새 기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이라는 미전도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나라에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써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조선으로 가기 위해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주 잔인하고 사악한 대학살이 최근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아 제가 조선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1866.8.1)
 
  편지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아버지 토마스 목사님과 하노버교회의 교인들은 토마스가 어찌됐는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고 연락은 끊어졌다. 그러던 중에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도착하긴 했는데 그곳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목이 잘려나간 아들의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성도들은 조선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내 아들을 목 베어 죽인

민족이지만,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조선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27살의 나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평양 대동강 변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위에서 말한 박춘권 뿐 아니라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의 설립자가 되었고,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또한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종이가 너무 좋다고 그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 벽지를 바른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로버트 토마스 1840년 9월7일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4살에 고향인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했다. 3년뒤, 1866년 8월9일 제너럴셔먼 호에

동승하여,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대동강에서 27살의 나이로 순교했다.>

 

1. 장로교

(1)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 선교 활동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 동안 선배 선교사 인 헤본(James C. H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드디어 아펜셀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발을 내딛었고,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6년 5월 11일부터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입국하자마자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업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1887넌 가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개성, 솔내, 펑양,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여행은 솔내에 있는 교인들의 초청에 의한 것으로서 솔내 교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1889년 봄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신혼의 부인과 함께 신혼 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약 600여명의 병자를 돌아보았다. 언더우드 목사는 의학을 공부한 바 있고 그의 부인은 릴리아스 호튼 의사의

미망인이었다. 이들은 1889년 4월 27일에 의주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세례 배푸는 것을 금하였기에 이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쪽으로 가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부른다.


(2) 호주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 (J. Henry Davis)

가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 열은 매우 왕성하였다.
  데이비스 목사는 1857년 빅토리아주의 멜보른(Melbourne)에서 출생하였으며 멜보른 대학을 졸업하여 그곳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 후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도중에 그만두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바라 대학에 가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처음에 인도로 갔으나 18개월이 지나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부득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기운이 조성되었으며,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 (Too-rack)교회와 협력하여

선교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고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되었다.
  데이비스 목사는 먼저 한국에 도래하여 선교사업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협의하여 부산을

중심 하여 남부지역에서 선교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서울이나 서부지역 등 다른 지역은 이미 선교사들이

자리잡고 선교사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중복이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서였다.


  당시 부산에 머물고 있었던 게일[James Gale]선교사는 데이비스 목사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다.

긴 여행을 보행으로 하여 피로에 지친 나머지 급성 폐렴에 천연두까지 겹쳐 소생할 가망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1890년 4월 15일 데이비스 목사는 한국선교의 청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별세의 보도가 호주에 전달되자 전국의 교회는 깊은 애도 속에 잠겼다. 비록 선교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호주의 본국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그러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뒤를 이어 선교사를 파송 해야 한다고 강렬한 선교 열이 고조되어

엥겔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1907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자, 엥겔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회를 대표한 파송 교수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그리고 교회사를 주로 강의하였다. 그는 30여 년을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원어를 하는 신학교들을

특별히 취급한다든지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에게는 철저한 징벌을 가하는 등으로 강직한 일면의 성품을 보여주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엥겔 목사는 191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17년에는 경남 노회를 창설하면서 제1,2,3대의

노회장을 연임하면서 호주 장로교 파송 선교사로서의 위상을 격상하였고 또한 지방교회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고

꾸준히 수행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3)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때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 후에 남장로교 총회 외지선교회에 선교사로 한국에 보내달라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아직 한국 선교사업은 착수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레이놀드와 젼킨은 한국 선교의 실현을 위하여 매일 3시에 기숙사에서 합심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레이놀드는 세 사람의 선교 동지와 함께 각지를 순회하면서 언더우드 목사를 강사로 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열심히 강조하였다. 교회 신문에도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발표하였다.
  드디어 독지가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뉴욕에 사는 죤 언더우드(John T. Under
wood)란 사람으로 2만5천 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하여 사용해 달라고 기탁하였다. 그렇게 되자 외지 선교회에서도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드디어 1892년 2월에 레이놀드 부부와 젼킨부부 그리고 데이트와 그의 누이 동생 매티 데이트(Mattie S.Tate)

데이비스(L.Linnie Davis) 등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해 10월 18일에 그리고 나머지 몇 사람은 11월 3일에 서울에 각각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 장로회의 한국 선교의 막은 올려진 것이다. 그들은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말을 익힌

다음에 선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주로 호남지역인  전라도 일원을 선교구역으로 생각하여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도착한 그 해 연말 크리스마스 후에 미국 북 장로회 파송인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주 지방을 방문하여 선교 적지로서의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젼킨과 테이트 목사가 함께 전주를

찾아가 시찰하였다. 1893년 2월 레이놀드 선교사는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선교 사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기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서해안 관문인 군산을 방문하고 그리고 연이어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쭉 순방하면서  무척 만족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한국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이념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는 1917년부터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어학과 함께 조직신학 분야를 담당하여 가르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 이념을 구체화할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그의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이념은 오직 성령 충만한 성신인으로 키워, 오직 한국교회를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선

성령  충만한 교회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레이놀드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교우지인 신학 지남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보수주의 신학노선의 많은 논문을 게재하여 한국교회를 그러한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은 영적 훈련 면은 우수하였으나 지적 훈련 면은 빈약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하에서 수난과 박해가 중첩되는 그 시기에 있어서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신앙노선은 필요하였다.

 신사참배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도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여 굴하지 아니하였다.


(4)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캐나다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에서 파송 된 정식 선교사단이 한국에 도래하기는 1898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맥켄지(William John MaKenzie,)목사가 개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생명을

희생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맥켄지 목사는 신학교 재학 시에 한국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한국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맥켄지는 총회 본부를 방문하여 저축한 돈 1백 달러를 내놓으면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아직 한국선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다.
  새 해가 되면서 그는 곧 서울을 떠나 2월에 황해도 솔내로 갔다. 맥켄지 선교사는 자연히 솔내교회의 초대 목사처럼

되었으며,  희생적인 헌신의 결과로 1895년 7월 3일 교회당을 신축하여 헌당 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교회당은 외국인

선교기관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 한국교인 스스로의 헌금으로 완공한 최초의 교회당이라고 하는데 뜻이 크다.


  멕켄지 목사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심 성의껏 그리스도를 전하는 생활에 헌신하여

우상 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속출케 하였다. 이렇듯이 숭고한 생활로 일관한 그가 1895년 7월 23일

너무나 무더운 여름날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일사병에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멕켄지 목사의 죽음의 소식은 캐나다 본국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그의 유서에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2천 달러의 남은 돈을 전부 바친다는 귀절이 있었다. 솔내교회 교인들은 맥켄지 목사의 신앙생활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표시하면서 선교사를 꼭 보내달라고  진정서를 캐나다 장로회 총회에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선교의

개시를 촉구하는 글이 교회 잡지에  많이 기고 되었으며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의사 부부와  푸트(W  R.Foote,)

목사 부부 그리고 맥래 (Duncan M. Mcrae) 목사 등이 선교사로 선임되어 캐나다 장로회 총회의 동해안 연합노회

 (The Synod of the Maritime Province)의 파송을 받아 1898년 9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 사업에 있어서 큰 공헌이 있다고 한다면 만주간도 지방에서의 선교활동을 간과해선 안 된다.

1912년에는 정식으로 캐나다 선교부가 용정에 설치되었으며 은진 중학교, 명신 여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일대

요람지가 되게 하였다. 특히 간도에 설치된 제창 병원은 의료 선교 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한국망명객들이 출입하며

독립운동을 숙의 하던 장소로 유명하게 등장하였는데 병원장 마틴(Stanly F.Martin) 선교사는 한국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깊어 솔선해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3.1운동의 추진을 위하여도 상당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5) 선교부들의 연합과 구역 분할 선교


여러 교파의 선교 단체가 속속 도래하게 되자 자칫 잘못하면 선교사들 사이에 불화와 대립이 발생할 염려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각 교파들 사이에 협동만  이루어진다면 모든 교인을 한데 묶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아니하였다.  1890년 [선교사 연합 공의회] (United Coyncil of Missions in  Korea)는 그것을 목적하여 탄생하였다.
창립  회합에서  미국  북장로회의 헤론(John W. Heron,)의사가 의장이 되었고,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가 서기로 선임되었으며, 언더우드 목사와 기포드 (D,L.Gifford)목사, 그리고 알렌(H.Newton Allen) 의사 등이

참석하였다. 마펫(Samuel A. Moffett)목사는 제2차 회합부터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회합은 호주 선교회의 유일의 대표인 데이비스 목사가 별세하게 되자 미국의 북장로회 만으로는 존재할

의의가 없어져 3, 4개월이 지나면서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2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도래하게 되어 1893년 1월 28일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the Presby-
terian Form of Government)가 빈튼 (C.C Vinton)박사의 집에서 회합하였는데, 여기에는 장로회 계통의 선교사들

전원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개혁 신앙과 장로회 정치를 준행 하는 하나의  한국교회를 조직하는 것] 을 목적으로 설정하였고 한국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기구가 정립되기 전까지 전국 교회에 대한 상회의 역할을 자연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회가 결코 공식적 기구는 아니었으며 다만 상호간의 친교와 상담과 조언하는 회합에 불과했고 권리 행사를

여전히 각자의 선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1893년 1월에 열린 첫 회의에서 미국 남장로회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남지방에서 선교하기로 약정되었고

미국 북장로회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모든 지역에서의 선교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부산 지역에서는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가 함께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는 두 선교회가 함께 상주하기로 하고 경상도 남부는

호주 장로회가 낙동강의  이북은  북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합의가 성립되었다.


2. 성결교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일본의 도쿄[] 간다구[]에 동양선교회 전도관을 세우고 일본인 목사

나카다[]의 후원 아래 동양일원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육에 힘쓰라는 선교회 본부의 지시도 있었으므로

전도관 1층에 성서학원을 개설, 성경 ·신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인 유학생 김상준() ·정빈() 등이 이 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자 1907년 염곡(:현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한 것이 한국성결교의 효시이다.

1911년 이명직()·이명헌() 등 5명이 동경성서학원을 마치고 귀국, 안수를 받고 장로사(:순회목사)가

되어 선교사들의 후원 아래 아현동 고개 위에 새로이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을 열면서 본격적인 목회자 양성과

노방전도() 등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21년 9월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교리를

내세운 ‘기독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가 탄생하였다. 1950년대 한국 교계를 휩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를 둘러

싸고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 현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및 중도파 등 몇 개파로 나뉘어져 있다.

 

3. 순복음교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과 함께 정동()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그 후 1932년 일본에서 돌아온 박성산() ·배부근()이 서빙고에 오순절교회를 설립하고 교세를

확장하던 중, 1945년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강제출국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광복과 더불어 일본에서 오순절계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곽봉조 ·윤성덕 ·김성환(金) 목사 등이

각기 고향에 교회를 세웠으나 6 ·25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오순절 운동이 직접적으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교회와 연결된 것은 미국 '하나님 성회' 소속 선교사 A.B

.체스넛이 내한하여 박성순 목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신앙동지를 규합,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을 창립하고 명칭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고 한 때부터이다.

같은 해, 교역자 양성을 위한 순복음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세확장에 힘쓰다가 1957년 신학교 맹휴사건으로 교단이

분열되었다. 그 후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Full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2001년 현재 교회수 1,417개, 목사수 3,534명, 교인수 110만 6712명이며, 교육기관으로 한세대학교,

신학교 3개 교가 있다. 이 밖에 5개의 농아교회, 경기도 파주시의 오산리 기도원과 2곳의 수양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222번지이다. 

 

4. 침례교

한국에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의 펜위크(Malcolm C. Fenwick)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평신도였기 때문에 선교사업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선교사 수업을 받은 후 189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순회 선교회를 설립하였고 원산에서는 성경학원을

세웠다. 이후 충청남도 공주와 칠산, 강경에 침례교회가 건립되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가 창립되었다가 1918년에

해체되었다. 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다시 조직되었으며 일제하의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4년 일제에 의해 종단

해체령이 내려졌다. 1951년 미국에서 선교사와 선교사업 지원을 받았으며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9년 한국 총회와 미국 남침례회 선교회의 갈등으로 교단이 분열되어 '대한기독교침례연맹(포항 지역)'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대전 지역)'의 두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두 그룹은 1968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9년 침례교회 110주년 행사가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에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가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gsseong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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