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편 소설(中篇小說)
그 황량(荒凉)한 날들의 기록
김광한
지금 이 세상에 없는 너에게 무슨 쓸 말이 있겠냐만 그래도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펜을 든 거야. 나의 이 글에 다소라도 너를 위한 위선과 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내를 갖고 읽어주렴 ‥‥‥
이 글이 우리가 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가졌던 감정의 앙 금이라도 좋고‥‥‥‥ 그건 네 뜻에 맡기겠다.
그러나 다만 세상에 없는 네가 나를 위해 어떻게 내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그 지표를 나름대로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건 그렇고. 언젠가 너는 내가신고 다니던 나일론 양말을 무척 탐낸 적이 있었지.
나는 네 눈치를 알고서 그 양말을 벗어준 적이 있었다. 벌써 30년도 넘는 우리의 가난한 시대의 이야기라 요즘 아이들은 이해가 잘 되질 않겠다.
나는 반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운동화를 신은 위에 퍼런 물감 칠을 발 위에 그려 넣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내 나일론 양말을 부러워했기 때문에 일종의 위장이었지.
그때가 봄철이었는데 마침 소풍날이었지. 소풍은 봉은사로 갔는데 거길 가자면 용산에서 새벽에 동대문까지 걸어서 거기서 자동차를 타고 뚝섬에서 내려 다시 나룻배를 타야만 했어. 그런데 배가 무거워 강의 얕은 곳에서 그만 내려야 하는데 천상 운동화를 벗어 물 속을 헤집고 걸어야만 했지. 그때 탄로가 났던 거야 운동화 신은 부분이 하얗게 드러나 금방 물감 칠한 곳이 드러나 보였던 거야. 내 나일론 양말을 부러워했던 한 반 종근이가 큰 소리로 광고를 했지.
"야! 저 새끼 이제 보니 맨발이잖아! 맨발. 봐라! 맨발."
그때의 참담한 심정은 말할 수 없구나. 창피하고 당혹스럽고, 담임선생님의 웃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던 거야. 내 가난을 남들에게 드러내 보였다는 자책감에서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았지.
그때부터 내 별명이 '맨발'이 된 거야. 맨발이란 꼬리표는 줄곧 따라 다녔다. 내가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의 모자를 쓰고 폼을 잡고 동네에 들어서면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동네의 아이들이 자신의 열등의식을 갖고 나를 공격하기 위해,
"이거 보아하니 맨발이 아냐."
하며 악수를 청할 때 나는 오히려 반가운 생각이 들곤 했었다. 적어도 그들의 마음속엔 출세하고 가진 자들이 상투적으로 내뱉는 김 국장이라든가 김 사장이란 호칭보다 허위와 가식이 없는 도장부스럼에 기계 충 난 순수했던 내 어릴 적 기억이 되풀이되기 때문이었지.
그 시대에 '대영빵'이 있었지. 아마도 너 역시 몇 번 맛을 봤을 거야. 그 시큼하고 술맛 나는 냄새를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허기진 배에 주먹보다 더 큰 대영빵은 왜 그리도 맛이 있었는지 꿀맛 같았지.
요즘 애들이야 공짜로 줘도 먹지 않겠지만 허기진 우리시대의 아이들에겐 대영빵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는 맛과 같았다.
그 때가 여름방학이었는데 생물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셔서 학교 측에 뭔가 보여 주려고 미술에 소질이 있는 몇 명을 선발해 인체도감을 차트로 그려 복도에 전시하려고 했던 거야. 그때 내가 선발된 거야, 아니 선발되었다기보다 지원했던 거지. 왜냐고? 방학 중에 그림을 그리는데 협조한 학생은 점심에 대영빵을 두 개 주었다는 점에서였지. 그림에 소질도 없는 내가 지원하게 된 것은 순전히 대영빵 두 개를 얻어먹는다는 것 때문이었지.
그림이란 대부분 구불구불하고 징그러운 창자라든가, 췌 장, 위장, 간 등 인체를 이루고 있는 장기였는데 제일 그리기 힘든 것이 작은 창자였었지.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 대신 빵 두개를 주었는데 하나를 맛있게 먹고 나서 또 하나를 먹으려다가 네 생각이 나더구나 그래서 빵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저녁나절 너에 게 주었는데 그 후부터 너는 나를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지. 아니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빵을 기다린다는 표현이 옳겠다.
"형, 빵 가져왔어?"
동생의 정한 눈으로 보아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부스러진 방을 내주곤 했지. 보름이 지나자 일거리가 거의 끝나갔다. 인체도감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에게 미리 이야기했다.
"오늘이 마지막이 야. 내일부터는 없다."
동생은 큰 실망을 한 듯,
"그럼, 내일은 없는 거야."
"그래. 일거리가 끝났어."
"씨, 또 있었으면 좋겠다."
하며서 내가 준 빵을 세 등분으로 쪼개었다. 그리고 내게 한 조각을 주었다. 먹으라는 거였지. 너는 나머지 빵을 이튿날 먹겠다면서 숨겨 두었는데 그만 눈치를 챈 쥐가 체가고 말았다. 동생의 분노는 대단했지.
이놈의 쥐잡기만 해봐라!, 하며 쥐틀을 놓아두었는데 동생은 방을 훔쳐 먹은 쥐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마리가 재수 없게 잡혔다. 동생은 쥐틀을 들고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전도관 앞 벼랑 창으로 갔지. 수장을 하겠다는 거였어. 동생은 쥐틀을 안에 든 쥐와 함께 강물에 담갔다. 숨이 막혀 쥐가 물에서 퍼덕거렸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는 눈총이 애처로웠는데 동생은,
"요놈의 새끼. 살려줄 줄 알고, 어디 맛 좀 봐라!"
하면서 꼬챙이로 쥐의 여기저기를 푹푹 찔렀지.
"너무 잔인하지 않니?"
"형, 이런 나쁜 놈은 죽어야 돼!"
기진맥진한 쥐가 쓰러지자 그제서야 그는 쥐틀에서 빼내 그걸 발길로 차 강물에 던졌지. 그날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살아가면서 그와 나는 외양과 체구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부터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나의 우유부단하고, 적극적이지 못하고, 게으르고, 쉽게 포기하고, 절망하고, 악착같지 못한 성격을 늘 질책 했다.
"형은 말이야, 내 맘에 안 들어. 그렇게 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 좀더 잡고 늘어지라구."
내가 군대를 다녀와 복교를 했을 때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용산 철도국 공작청에 다니는 아버지의 빈약한 수입으로는 동생까지 진학시키는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성적이 신통찮은 걸 핑계로 취직을 하라고 하자 분노한 동생은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힘으로 동생을 개선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큰 소리가 나자 다락 속으로 숨었지.
"아버지란 사람 나와! 나오란 말야! 형은 대학을 보내고 난 뭐야. 난 주워 왔냔 말야!"
아버지는 동생이 잠든 때에야 비로소 다락문을 열고 엉거주춤 기어 내려오셨는데 눈가에 아직도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당신의 무능 때문에 빛은 분란과 치욕을 속없는 눈물로 달래었던 것이다.
집안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았던 내가 졸업을 해도 별 신통한 결과가 없자 가족들의 실망은 컸고, 이번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급 공무원(당시) 시험에 합격해 우체국에 근무하는 동생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눈치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보면,
"너는 뭐하는 거냐. 동생을 봐라,"
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자 우연히 대중잡지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60년대의 잡지란 것이 뻔한 것 아니겠냐. 쥐 꼬리만한 월급도 나오는 둥 마는 둥 미루는 수가 많고, 그런 내가 그 직장마저 부당하게 쫓겨나자 용산 우체국에 근무하는 동생을 찾아갔다. 내용증명을 띄우겠다는 거였지. 가로에 몇 자 세로에 몇 줄 하는 식으로 동생은 친절히 가르쳐 주었는데 그 뒷말이 내게 영 개운치 않았던 거야.
"형, 이런 거 쓰는 사람들 많이 봤는데 대부분 나쁜 사람들이더군. 형도 그래?"
"아냐, 밀린 월급을 찾으려는 거야."
그는 고개를 갸우뚱대며 수상쩍은 눈치였다.
장남인 내가 중매결혼을 하자 그와 나는 당분간 남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형수인 아내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시골 태생이고 학력도 변변치 않은 아내와 나를 비교했을 때 어쩐지 손해가 난다는 식이었다.
"형은 말이야, 얼굴도 미남이고, 대학도 졸업했잖아요. 형수는 도대체 뭐야. 우리 김해 김 씨 중에 제일 나은데."
동생이 내게 갖고 있는 핏줄의 땡김이란 자신의 이익과 는 별개였던 것 같았다. 그 후, 아내가 동생에게 좀더 친절 했더라면 감정의 변화가 왔겠지만,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이고 외양마저 판이한 동생에게 아내는 그렇지 못했던 거야.
생긴 게 꼭 사극 영화의 엑스트라 같다는 등 성질이라도 조곤조곤 해야 봐주지 하는 등의 자극적인 말이 가끔씩 그의 귀에 전해지자 동생이 형수에게 갖는 감정은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동생은 내게 직접 하진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가끔씩 입에 담지 못할 소리로 아내를 질타했는데 그것은 형수가 나를 구박한다는 것이었지.
종이와 연관된, 경제적으로 빈약한 회사를 옮겨 다니다 보니 가끔씩 실업자가 되면서부터 나의 욕망이란 점차 희석 돼 자포자기에 빠졌을 때 아내는 노골적으로 가난과 함께 인격까지 질타를 했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아래 동네 정미소 막내한테 가는 건데 ‥‥‥‥"
어쩌구 하며 강렬한 언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었지. 동생은 이런 나를 측은하게 여겼는지 전화할 때마다,
"형 요즘 밥이나 제 때 먹어? 밥 잘 챙겨 먹구 속상 하 다구 술 마시지 말아요."
하며 경어와 반말을 써가며 충고해 주었다. 그는 내게 형이 아니라 '엉'이라는 어중간한 용어를 썼었다. 엉은 분명 형보다 격이 낮은 용어로 형으로서 변변치 못한 사회활동을 하는 내게 붙여준 것이었다.
동생은 그때쯤 다니던 우체국에서 세무서로 자리를 옮겼고, 세무서에 다니는 동안 나는 그가 장가를 들 것을 기대 했다. 특히 생활에 찌들은 잡지사의 친구들에게 동생의 세무서 이야기는 관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월급은 몇 푼 안 되지. 그런데 생기는 게 많아. 그만큼 사회가 썩은 거야."
하며 슬쩍 사회를 비판하면서 그의 위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좋았던 것이다. 그런 동생이 어느 날 다니던 세무서에 사표를 던졌다는 말은 내게 슬픔과 함께 분노의 감정을 유발했지. 나는 처음으로 네게 화를 냈다.
"넌 임마! 모든 게 다 틀렸어! 주제파악을 해봐라! 고등학교 졸업한 주제에 세무서라면 어디 그게 아무나 가는 자리냐. 너한테 중매장이들이 덤벼드는 것, 네가 세무서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다른 이유가 없어. 생각해 봐라. 아무리 수입이 많다고 해도 남대문 시장에서 호떡을 구어 판다면 누가 시집오겠니? 다시 생각해봐?"
늘 기세가 당당하던 그도 내 말에 기가 죽었다.
"형, 나도 많이 생각해 봤어. 정말 그 짓은 못하겠어. 형처럼 성당엔 안 다니지만 기본적인 양심이란 게 있어. 그놈들 정말 못 봐주겠어. 이번엔 감사가 있는데 감사에 찍히면 먹은 놈은 다 빠지고 나만 쇠고랑이야. 그래서 그만두는 거야."
결벽증이 유달리 심한 그에게 부정이란 남의 이야기였고, 나는 이미 어지간히 세속의 때가 붙어 구린내 나고 비린내 나는 돈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집대로 세무서를 그만 두었고 따라서 중매쟁이의 발길도 끊겼고 그 후 우유배달을 한답시고, 우유보급소에 나가 목 좋은 아파트 단지를 기웃거렸다.
그런 그가 무척 딱하게 보였다. 허름한 바지에 고물 오토바이를 구입해 새벽에 나가 아침에 들어오면서 가끔 집에 들러 불평을 털어 놓는데 그의 불평이란 새벽녘에 오토바이에 실린 우유 통을 어떤 얌체가 집어간다든가, 5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여자가 두 달 치 우유 값을 떼어 먹고 도망을 했다든가 하는 온통 우유에 관한 것들이었다.
가끔씩 정치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판도 일삼았다. 김영삼이가 어떻다든가 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이야기했는데 그건 반골형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동생이 제도권에서 이탈되어 올바른 눈을 갖게 됐다는 걸 기뻐했지만, 한편 그의 어떤지 순탄치 못할 장래에 대해 은근히 걱정을 했었다.
나는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 길을 오갈 때마다 그의 허름한 차림새와 특히 너덜너덜한 운동화가 눈에 거슬렀다. 왜소하고 조금 모자란 얼굴에는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양복에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림이 못 마땅했던 거야. 동생이 우유 배달을 시작하고부터 아내가 동생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
"우유배달원 주제에 ‥‥‥‥"
아내의 급격한 동생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탐탁치 않았 지만 꾹 참고 있어야만 했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뭘 그러지 말아요. 싸지 싸. 그렇게 억지를 쓰니까 될 것도 안 돼. 이젠 장가가긴 다 틀렸지 뭐예요. 누가 왜 우유 배달꾼한테 ‥‥‥‥"
하며 아내는 동생에 대한 감정을 우유 배달꾼이란 말을 힘주어 하는 것으로 끝냈던 것이다.
아내와 동생 간의 불화가 결정적으로 격화된 것은 그 해 추석날이었다. 장남인 나로서는 매번 여러 번의 제사를 지내야 했고,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온다는 말이 있듯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추석, 한식, 구정 등 쉴새없이 돌아오는 제사가 수입이 신통치 않은 내겐 큰 부담이 되었다.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자 월급 한 푼 못 받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내게 아내는 눈총을 주었고,
"에그 지겨워! 이놈의 제사 "
하면서 그 길로 친정으로 가버린 일이 있었다.
동네 포장마차에서 술을 퍼마시고 집에 누워 있는 내게 동생은 그랬을 것이라면서,
"엉! 도망갔지. 그것 봐. 내 말이 옳지. 엉은 처음부터 장가를 잘못 든 거야. 펜팔하던 그 여자 같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냐! 이 쌍년! 만나기만 해봐라. 내가 아가릴 찢어 놓을 테니까!"
하며 흥분을 했다.
"야 그래도 형순데 너무 심하지 않냐?"
"엉은 몰라. 형수라면 다 형순 줄 알아. 제 날짜에 월급을 못 받았다구 내빼는 년이 어디 있나, 남대문에 가서 지나는 사람들한테 인터뷰해봐. 에이그‥‥‥‥."
하며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분노했다.
아내는 닷새 만에 돌아왔고, 돌아온 아내에게 동생이 찾아와 대판싸움을 벌였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창피해 나는 숨어버렸다. 서로의 말이 거칠어지자 그만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무능과 모자람과 우유부단함을 질책할 따름이었다. 동생은 오토바이를 바깥에 세워둔 채 모여든 이웃사람들에게 신나게 떠들었다.
"들어보십시오. 이 여자! 남편이 돈 못 번다고 나가서 제사 안 지내고 며칠씩 있다가 들어온 여자예요. 명색이 천주교 신자라고 창피하지도 않아! 며칠동안 뭘 했는지 우리가 알기나 알아! "
그러자 아내가 거품을 물고 대들며 이미 형수와 시동생 의 사이는 끝났다는 것이다.
"야, 그래 며칠씩 나갔다 들어왔다. 넌 뭐가 잘 났냐! 우유 배달꾼 주제에 ‥‥‥‥"
"어, 저거 봐. 그래도 떠들어. 시골 같으면 조리질 당해! 벌건 대낮에 ‥‥‥‥"
하며 동생은 아내의 외박을 부정적인데 맞추었고 아내는 우유 배달꾼에 초점을 두었다.
나는 더 이상 숨어 있기가 민망해 방에서 나와 이들을 뜯어 말렸다. 그리고 우선 손아래인 동생을 질타했다. 아내에게 들으란 이야기였다.
"야 임마! 형수한테 그렇게 주둥이를 험하게 놀리면 어 떡해! 버르장머리 없이."
이 말에 아내의 심기가 다소 누그러졌는지,
"글쎄 말이에요. 너무 심해요. 내가 형수는 형순데."
하며 내 편이 됐다. 동생은 내 말이 편파적이라 여겼는지 다소 원망 섞인 투로 울면서,
"엉! 엉은 말야! 나와 같은 김해 김씨지, 저 여잔 안동 권가란 말야! 엉은 언제나 우리 식구지만 저 여잔 달라. 분명히 엉에게 충고하는데 집문서 잘 보관 하라구. 저 여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구. 내 이만 갈 텐데 엉도 조심해!"
하며 오토바이에 가속을 내어 사라졌다.
동생은 나와 자신과의 핏줄을 끔찍이 여겼고 자신의 형 인 내게 섭섭하게 대한 아내를 부당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가 오토바이 사고로 뇌를 다쳐 구로동 고려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나는 아내에게 문병을 가자고 했다. 아내의 화는 그때까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그만 용서하시오."
아내의 대꾸는 달랐다.
"용서 못해요. 가려면 혼자 가요."
내가 구로동 병원 10층 중환자실로 갔을 때 동생은 머리 에 붕대를 감고 환자들 틈에서 천정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첫 마디가,
"엉, 잘못했어. 생각해 보니 형수한테 너무 심하게 대한 것 같아. 대신 이야기해 줘요,"
하며 내 손을 잡았다. 그 손길이 무척 따뜻했다.
동생의 뇌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미 형수에 대한 감정에서 벗어나 있었다.
"엉, 퇴원하면 예수라도 믿어야겠어. 남들 교회에 다니는 것 보면 부러워 죽겠어. 교회 다니면 내 성격도 고쳐 질테니. 엉, 내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우?"
"아냐, 성격이 급한 게 탈이지. 교회를 가겠다니 반가운 일이다. 생각 같아서는 성당엘 다녀라, 나처럼."
"성당은 수속이 복잡해서 싫어. 한 번 가봤더니 앉았다 일어섰다 별짓 다하던데."
"생리를 알면 이해가 될 거야. 나도 처음엔 그랬어."
"그럴까?"
동생은 퇴원 하자마자 이웃 성당에 교리신청을 했다. 그 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성당에 가서 예비자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엉, 성당에 못 가겠어. 생리에 맞지 않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지만 협잡질해서 잘 사는 놈들은 여전히 잘 살고 우리 같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못 살고 이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 아냐?"
"그래서 미래란 것이 있잖아."
"죽은 담에 누가 알아. 한 줌의 뼈다구에 불과한 걸. 거기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우?"
"그걸 믿는 것이 신자들이지"
나는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지.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성격이 급하고 엉덩이가 가벼운 그에게 교리기간 6개월이란 무척 긴 시간이었다. 그는 두 달쯤 다니다가 그만두었고, 이번엔 교회를 나갔다.
개척교회를 몇 개월 나가자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인지 성경구절도 모르는 그에게 '집사' 직분을 주었다. 그는 집사란 감투를 쓰고 교회에 더욱 열심이었고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생각했다.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쌍해, 엉도 웬만하면 우리 교회에 나가요."
하며 나까지 전도하려는 그가 무척 신통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교회의 목사가 끝내 교회 건물을 팔아버리고 잠적을 하자 동생은 이번에는 교회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체에 대해서까지 불신을 했다. 처음부터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만도 못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색안경을 쓰고 보았고,
"저치 사기꾼 아냐."
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엉도 이제 성당에 나가지 마슈. 죄다 도둑놈들이야, 그런 사람들 사귀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그동안 동생은 몇 번의 결혼할 기회를 가졌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다. 그의 조급한 성격과 직업과 외양이 큰 원인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중심이 잡히지 않은 얼굴과 우유 배달이란 직업이 큰 핸디캡 이었다.
"형을 보면 동생을 알 수가 있다는데 이건 소련에서 이민 왔는지 ‥‥‥‥"
그래서인지 동생은 더욱 분발해 자신의 수입을 올렸다.
우유 배달 일년 만에 그는 제법 큰 규모의 우유 보급소를 차렸고 보급소장이란 어엿한 명함까지 새겼다. 가끔씩 그는 남모르게 내 주머니에 용돈 하라고 몇 만원씩 찔러주었는데 그때마다,
"이 돈 형수한테 주지 말어. 그 여자한테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아. 형이 없으면 괄시받아."
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해 가을, 몇 달 동안 일자리를 잃고 있다가 찾은 일자 리가 청계천의 덤핑 일이었다. 정식으로 낸 남의 책을 적당 히 문맥을 고쳐 값싼 종이에 인쇄해 대량으로 팔아먹는 일종의 표절이었는데 이것으로 돈을 번 사장은 그 동네에서 유지로 존경받는 교회의 장로였다.
내가 맡은 소설은 수호지였다. 수호지의 문구를 다른 말로 바꿔 저작권법을 피해 가자는 속셈이었다. 한 장에 2백 원 준다는 원고를 밤을 새워 썼고 아내는 한 장에 2백 원이란 말을 듣고 한 장씩 세어 가며 돈의 액수를 환산하고 있었다.
"오백 장 썼으면 10만원 벌었네."
원고 매수가 늘어나고부터 나에 대한 궁시렁 거리는 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천 장이면 이십 만원인데 그것만 가지면 연탄은 들여 놓겠네."
이런 식이었다.
어느 날 동생이 찾아와 쭈그려 앉아 원고를 쓰는 내게 말했다.
"엉 소설 쓰는 거유?"
"아냐. 그냥 잡문이지."
"그거 쓰면 돈이 생겨요?"
"약간."
그는 내가 문과대학을 졸업하고 선생이나 교수로 가는 걸 원했었다. 우리 집안에 대학출신이 눈 씻고 봐도 없다는 말을 툭하면 했었고 질시와 선망과 그리고 가끔 내가 처한 불운과 처지를 비아냥거리기도 했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충고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다.
"한 장에 얼마 받을 거유?"
"이백 원."
이백 원이라는 말에 그는 내게 측은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차라리 나하고 우유 배달이나 합시다. 그것 갖고 먹고 살겠수?"
하며 내가 쓴 원고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수호지 아냐? 무송이 나오는 것."
"맞아. 호랑이 한 마리 잡은 무송을 두 마리 잡았다고 쓰 는 거야."
"일테면 공갈치는 거 아냐?"
"윤문하는 거지?"
"윤문?"
"적당히 베끼는 거지."
남이 쓴 책을 표절하여 다시 싼 값으로 내 팔아먹는 청계천 일대의 덤핑 장사들 가운데 윤 사장이 제일 많이 돈을 벌었다. 그는 싸구려 작가들을 동원해 섹스피어 작품까지 다시 만들어 냈다. 윤 사장은 그 근처에서 제일 큰 교회의 장로였다.
그는 출근하는 직원들의 의중도 묻지 않고 하루의 일과를 기도로 시작했는데,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이 책이 널리 팔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널리 펴게 하시며,"
하며 숨도 안 쉬고 내뱉곤 했다. 이런 윤 사장의 일을 거들어 주고 잔돈푼을 얻어 쓴다는 것이 치욕적이었으나 그 시대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보따리나 되는 원고를 윤 사장에게 갖다 줬을 때 그는 읽어 보지도 않고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
"이건 문맥이 영 엉망이 아냐? 이런 글은 짜장면집 국수 때리는 애들이 더 잘 써. 내 그놈들을 동원하려면 얼마든지 동원해. 봐주려고 했더니."
하면서 원고료를 절반으로 깎기 일쑤였다. 손가락이 부르트고 팔이 마비되면서 쓴 내 원고는 며칠 후 저녘 나절 리어카 장사의 좌판 위에 얹혀져 팔리고 있었다.
그걸 볼 때 마음은 늘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 세종대왕께서 집현전의 학자들과 각고 끝에 창제한 훈민정음이 책 사기꾼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나는 점차 자포자기 가 되었다.
80년대 초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통폐합이 있었고 내가 다니던 잡지사가 없어져 버렸다. 그즈음 나는 모든 생의 의욕을 잃고 알코올 기에 빠져 있었다.
동네 과부 아줌마집 포장마차에 들락거리면서부터 우리 시대에 호칭을 갖지 못한 사람들, 청소원, 경비원, 방범대 원 등과 어울려 하루의 긴 해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두 시간쯤 그들과 노닥거리며 지내다가 술이 취해 돌아와 한잠 자고, 일어나 다시 술 마시고 이렇게 세 차례가 되면 하루의 일과는 끝났는데 과부집의 지저분하게 걸려있는 달력의 날자엔 장부 대신 그날 마신 술값이 적혀 있었다. 어느 달에는 한 달 내내 X일 막걸리 4통,X일 막걸리 3통 등 싸인 펜으로 액수가 적혀 내 행적이 기록 되었다.
"김 씨, 이번 달엔 좀 갚아. 어려워서 그래,"
한 달 기간으로 나는 과부집에 외상값을 갚았는데 그 돈은 동생으로부터 빌린 것이었다.
"엉, 또 술값이지. 이젠 정신 차려야 되지 않수. 나이 값도 좀 해야지."
하며 그 달치의 외상값에 해당하는 돈을 탐탁치 않아 하며 캐비닛에서 꺼내 주었다. 나는 그 돈을 갖고 기세등등하게 오줌냄새로 범벅된 포장마차 집으로 갔고 거기서 방범대원 오 씨와 경비원 유 씨,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권 씨 등과 어울렸다.
그들은 아는 것이 많고 배움이 있는 내가 그들과 공통의 주제로 떠드는데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가을철, 똥 더미가 산처럼 쌓여진 변소 간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서 바라본 하늘은 왜 그리도 파란지, 그러다가 문득 처참한 생각이 들곤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나의 알코올 중독이 심화되어 가는 동안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나의 '기도원 수용'을 협의하기에 이르렀고, 그 직전 마침내 내 육신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대구에 가면 기도원이 있는데 알코올 중독자들만 수용한 대요. 시설도 좋고‥‥‥‥"
아내의 말에 동생이 화를 냈다.
"형수! 무슨 말이에요. 형이 폐인이 됐단 말예요."
그 후로부터 내 각고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술을 기적처럼 끊고, 직장을 다시 나가게 되었고 모든 것이 안정권에 들어오자 나는 이웃과 사회의 탓으로 돌리려던 내 출 세의 어긋남을 내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유보급소를 경영하던 동생의 결혼은 번번이 실패 했다. 나는 그가 가정을 꾸려 그만의 생활, 이를테면 성장해서 가족을 부양하면서 갖는 즐거움을 원했다. 헌 신발보다 KS 마크의 구두에다 외양이 떨어지는 얼굴을 들어 고치고 한 가족을 거느리고 아빠 소리를 듣는 동생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직 내 마음뿐이었다.
돈이 왜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천한 놈들에게 천한 대접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이 실감나게 되고부터 나의 40대는 훌쩍 반이나 지나버렸다.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실업자가 되고 나서부터 아내는 내 직장에 신뢰감을 상실했다. 그래서 한 것이 화장품 외판이었는데 그 화장품 외판이란 것이 어디 쉬운 것인가 나이가 들면서부터 디스크 증상이 왔고, 어느 날 쓰러져 입원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기회를 동생과 아내와의 화해의 좋은 기회로 알고 이를 주도했다.
"여보, 대용이가 문병 온다는데 괜찮겠수?"
아내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꼴 보기 싫어요. 이런 나를 비웃으려고?"
"너무 그러면 안 돼. 그 애의 순수하 마음을 형수인 당신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때가 됐잖아, 세월도 지났고,"
"아무튼 난 싫어요."
동생의 방문은 실현되지 못했다.
"형수가 그럽디까? 난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는 무척 서운한 표정이었다.
"대용아,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 어느 때인가 풀리겠지."
아내의 얼어붙은 마음이 풀리길 기대했으나 그건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예식장에 갔다가 어쩐지 볼길 한 생각이 들어 일찍 귀가 한 내게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대용 씨 보호자 댁이지요. 여기 양천 성모병원인데 김대용 씨가 교통사고로‥‥‥‥"
아! 나는 그날의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동생은 뇌수술 중이었고, 그를 싣고 온 교통순경이,
"보호자요?"
하고 물었다.
"워낙 상태가 안 좋아서 수술부터 시켰습니다."
하고 말했다.
"우측 대뇌가 함몰된 상태여서 다소 위험한 상태이지만 지금까지는 별 이상이 없습니다. 한 번 수술한 흔적이 있더군요."
일요일이라 배달원이 나오질 않아 동생은 손수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가다 좌석버스 뒷면에 받쳐진 것이다.
"괜찮은가요?"
"두고 봐야겠습니다."
수술은 다섯 시간 만에 끝났다. 그가 누워 있는 병실로 갔을 때 그는 머리를 모두 깎이고 양손은 침대 모서리에 결박 지워진 상태였다.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기 때문에 고정을 시켜 놓았던 것이다.
동생은 가끔씩 뜻 모를 말을 했고 또 가끔씩 나를 똑바로 보면서,
"너는 누구냐? 이 나쁜 놈아! "
하며 벼락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 때마다 나는 천지 모르는 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기겁을 하고 놀라곤 했다.
"조금 지나면 괜찮을 겁니다.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간호원이 말했다.
그의 벌거벗은 몸은 마치 개구리처럼 누워 있었는데 그 의 빈약한 체구와 조그맣고 까만 눈동자가 오갈 때마다 나는 눈물이 솟구쳤다. 어쩐지 그가 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면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우리는 형제입니다. 못 생긴 동생을 살려 주십시오. 저 애가 가정을 꾸미고, 저보다 잘난 애를 낳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내 부고를 그의 손으로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달케 해 주시고, 그리고 사망신고를 그 애가 하도록 나보다 더 오래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그건 내 기도에 불과했다. 동생을 본 아내가 말했다.
"못 살겠어요. 의사 말이 저런 상태 갖고선 살기 힘들데요."
나는 그 말에 화를 냈다.
"당신은 저 애가 죽기라도 하면 좋단 말이야! 이 옹졸한 여자야!"
"누가 그렇댔어요."
"아니면 뭐야! "
두어 시간 지나자 발작이 멎고 다시 눈을 떴다. 그 눈엔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성인과 같은 눈빛을 하고. 그 눈에는 사랑과 용서와 자애와 그릇됨을 비웃고 정의를 사랑하고 욕심의 어리석음을 실토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내 얼굴과 마주칠 때 내가 그에게 말했다.
"대용아! 내가 누군 줄 아니?"
"왜 몰라. 엉이지."
나는 침대 모서리에 결박된 손을 잡았다.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마치 어린애에게 묻듯 상냥하게 말했다.
"괜찮겠니?"
"괜찮아."
"이제야 말하지만 넌 나를 무척 미워했을 거야. 내가 너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데 대해 원망이 많았을 거야.
그 말에 그는 측은함과 동정 섞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내 손을 잡으려고 결박된 손을 버둥거렸다.
"그런 거 없어."
"왜 없겠니. 내가 나를 생각해도 미워 죽겠는 지경인데 안 그러니?"
"난 형이 어떤 사람인 줄 잘 알고 있었어, 형이 꼭 그린 말을 나한테 할 이유가 있겠어."
그는 내게 처음으로 형이란 말을 했다.
"아냐. 그건 내가 미안하다."
"난 말이야. 형이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방위라서가 보진 않았지만, 그때 내가 참석치 않은 것, 내가 형을 질투 했다고 생각한 것 아냐?"
"그렇지 않아. 그까짓 대학이 무슨 필요가 있냐? 차라리 네가 대학을 나왔다면 우리 집안이 더 잘 될 수도 있었을 거야. 집념이 강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너는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야 해. 내 바람은 그것뿐이야."
"잘 될까? 아홉수인데."
그 때 동생은 서른아홉이었다.
"아홉수가 뭐 대순가,"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울고 있었다.
그와 내가 갈등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온 것은 꽤 오랜 전부터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나왔고, 사정이 여의치 못해 그대로 사회생활로 틈입한 것이다. 그걸 나는 이해했다. 나는 그때마다 그의 몫을 내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장자의 우선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각기 다른 생활을 했고, 나는 자녀를 낳고 또 내 세계 속에 빠져들면서 가정을 위한 노력과 갈등과 고통 등을 맛보았고 그러는 동안 나이를 먹어 갔다. 간호원이 병실로 들어서면서 의사가 전한 쪽지를 전했다.
"보호자님 상태가 급박하니 가족과의 협의가 있어야겠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십시오."
나는 사태를 짐작했다.
그가 더 살 수 없음을 깨닫자 나머지 말에 대한 어떤 결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능하면 간단히 말했 다.
"너 나를 용서해 주겠니?"
그는 멀건이 나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형수도 용서해 주겠니?"
그는 머리를 저었다.
"왜?"
"형을 괄시하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괄시하지 않으면 될 것 아냐?"
그는 내 말에 기운을 차린 듯,
"그때 가봐서,"
"그럼 용서해 주겠다는 거냐?"
"그러지 뭐."
"그럼 됐어. 우리 성당 사람이 너를 보고 싶다고 하는 데."
나는 그에게 대세(大洗)를 주고 싶었다. 물론 내가 대세 를 주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남이 나을 것 같아 얼른 성당의 교우를 불렀다. 그는 내가 속한 레지오 단원이었다. 교우가 오자 동생은 손을 저었다. 교우는 내게,
"받기 싫은 모양이죠?"
하며 실망한 듯이 병실을 빠져 나갔다.
"왜 싫어?"
"난 죽지 않아,"
"그런 이야기가 아냐."
"형은 사람이 너무 착해. 그게 탈이야. 나는 그게 늘 못마땅했어. 형도 고칠 점이 많아."
"잘못한 점?"
"바로 그게 잘못한 점이니."
"대용아, 내가 나머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형 맘대로지."
나는 그 말에 울었다. 그의 팔은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병실엔 아무도 없었다. 두 번째로 간호원이 들어온 건 그 때였다.
"빨리 내려오시래요."
산소호흡기도 이미 필요 없었다.
그날 동생은 죽었다.
교통사고 처리 반으로 찾아가 사고의 원인 규명을 하고 나름대로 바쁜 며칠이 지났다.
닷새 후.
벽제 화장터에서 동생의 유해를 안고 아버지가 묻혀 있 는 묘지 아래쪽으로 갔다. 거기엔 동생이 캐다 심은 무궁화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따금 시든 꽃송이가 나방처럼 떨어졌다. 나는 오동나무 상자 안 노란 봉투에서 그의 한 줌도 안 되는 유해를 손으로 잡고 뿌렸다.
서북풍에 실려 유해는 모래가루처럼 흩어졌다. 남녘 여 기 저기를 떠다녔다. 그의 유해를 몇 번 집어 날리자 손바닥에 묻은 남은 가루가 웬 일인지 유난히 따뜻했다.
산자락 멀리 장난감 같은 버스가 쉴 새 없이 오갔고, 서 북풍에 비가 실려 왔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 줌도 안 되는 인 생의 함량에서 갈등과 미움과 증오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가를 생각해 보고, 또 내가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동생에겐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살아야 하고, 나머지 세월을 사는 동안 내가 속한 집단에서 충실해야만 한다. 자식들을 시집보낼 때까지, 외손자를 볼 때까지, 증손자를 안을 때까지, 그리고 사는 동안 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다. 장사도 해야 하고, 보잘 것 없지만 글도 써야 하고, 또 사람들과 사귀면서 사랑도 나누고‥‥.
미움보다도 될 수 있으면 그 시간에 사랑할 구실을 만들 면서, 또 용서할 구실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애초부터 없었던 갈등을 뇌리 속에서부터 박아내 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생의 장례가 불교식으로 치러진다는 말에 성당 사람들 은 한 명도 영안실로 찾아오질 않았다. 죽음에 가톨릭제가 있고 불교제가 있으련만 아무래도 그들의 행동이 섭섭하게 생각 들자 낌새를 알아차린 성당의 강 신부가 내 어깨를 잡았다.
"형제님, 섭섭하겠지만 그것도 용서 하시오."
"토마스 머튼 신부가 폭격기 조종사인 동생의 죽음을 보고 쓴 시랍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해서‥‥‥‥."
그리운 아우야.
내가 잠이 들지 못하면
나의 눈은 너의 무덤을 덮는 꽃
내가 빵을 먹을 수 없다면
나의 단식은 너의 죽은 자리의 버들가지가 되어 살리라
무더위 속에 나의 갈증을 풀 물을 찾지 못하면
나의 갈등은 가련한 여망과
너를 위한 샘이 되리라
어디에
열기 자욱한 황폐한 땅 어디에
네 가엾은 몸이 죽어버려져 있느냐?
처절한 재난의 살풍경 속 어디에
너의 불행한 얼이 길 잃고 헤매느냐!
나의 노동 안에 안식처를 찾으렴
나의 슬픔 속에 와 네 머리를 누이려마
차버린 내 살과 내 피를 받아
너를 위해 푹신한 침대를 사리라
나의 눈물과 내 죽음을 팔아
너를 위해 영원한 안식처를 사거라
전쟁터의 모든 이가 사살되고
군기가 먼지 속에 쓰러 질 때
네 십자가와 내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여전히 말하리라
그리스도께서 너와 나를 위해
우리 각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의 한 달간은 나에겐 빈 공간이었 다. 나는 성당 교우들의 초상집에 가 동생보다 더 일찍 죽 은 이를 위해 연도를 바쳤고, 장지에까지 따라가 두세 평에 묻히는 육신의 초라한 모습에서 생명의 덧없음을 느끼면서 위로를 받아야 했다.
소유한다는 것의 부질없음과, 시간에 밀려 사는 인생의 자초지종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것은 결국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 이 세상이 다 지나가고, 그리하여 물질이 소멸되고, 역사가 없
어지고, 시간마저 불필요하게 될 때, 한 줌의 재로 변하지 않을 만한 것은 추상적 이지만 사랑이란 것이었다. 그 사랑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까운,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가 까운 사람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것, 내가 동생을 칭찬하고 내 아내를 미워한 동생을 미워한 것보다, 둘 다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웠을까 라는 생각에서 나는 몇 줄의 글귀를 만들어 보았다. 물론 그것도 어디선가 듣고 있는 언어의 합성이겠지만. 시간이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뿐, 과거와 미래는 허공과 같으니 없는 속에 있고 있는 속에 없음이다. 그 가운데 할 것은 사랑이다.
그리운 아우야,
이제 나의 지리하고 따분하고 어쩌면 형의 입장만 합리 화한 것 같은 글을 맺겠다.
혹시 이 다음, 내 시간이 모두 지나가 버려 저승의 어느한 쪽 구석에서 만나더라도 결코 외면하지 말아 주기를 바 란다. 그리고 가끔씩 기도해 주렴.
너의 용서로 인해 산사람들 모두가사는 동안에 갖고 있 는 욕심의 헛됨과 갈등과 증오의 부질없음을 알게 되길 기원해 주길‥‥‥‥.
<끝>
|
첫댓글 아시아 문예에 들어갔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