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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참봉(莊陵參奉) 연대별 인명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실록의 순 추출 )
*조선왕조실록 홈-우측 승정원일기 클릭-검색어 莊陵參奉
*○숙종 22년 1696년 양익지(梁益祉)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비록 후손이 있으나 작은 녹봉도 얻지 못하여 모두 떠돌아다니며 곤궁함과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유사에게 그들의 소재를 물어 위급함을 구휼하게 하소서. 또 이것은 청백리에 뽑힌 자와는 차등이 있으니, 자손을 녹용(錄用)함은 비록 먼 후손에게 미칠 수는 없으나 만약 그 아들과 사손(嗣孫) 중에 직책을 맡을 만한 자가 있다면 또한 해조(該曹)로 하여금 찾아서 조용(調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좋다.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공의 셋째 아들인 생원 익지(益祉)가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순서에 따라 의금부 도사로 승진하였다. 익지는 선대의 교훈을 익혀서 벼슬이 낮다 하여 스스로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능을 지키는 병졸들이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는데, 불행히 병에 걸려 관청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 한국문집총간 > 약천집 > 藥泉集第二十 > 墓碣銘 >慶尙左水使梁公墓碣銘(경상좌도 수사 양공(梁公) 묘갈명) >
*○양칙 (梁侙) : 1686년(숙종 12) 경상좌수사로 있다가 토질(土疾)을 얻어 죽자, 좌의정 남구만(南九萬) 등이 청백리(淸白吏)로 추천하여 양칙의 염근(廉謹: 청렴하고 신중함)에 대하여 특별히 포증(褒贈: 상을 내리고 벼슬을 추증함)하고, 상수(喪需: 장례에 필요한 물품)를 지급하여 운구하도록 하였다. 1696년에 남구만이 “양칙 등이 청렴하여 지금 그 처자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자 구휼하게 하고, 친자(親子)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종 24년 (1698) 11월, 박명겸(朴命謙)이 말하기를. 무인년 동짓달(숙종 24년 1698년 11월)에 저의 아비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으므로,~<실록 숙종 27년 신사(1701) 10월 26일(기묘)> * 박명겸(朴命謙)의 부친 이름은 여러 기록에서 찾아내지 못하였다.
*○ 숙종 25년(1699) 3월 2일 박팽년(朴彭年)의 9세손인 박경여(朴慶餘)를 장릉참봉으로 삼았다.
숙종 25년 기묘 3월 2일에 대왕의 능을 봉하여 능호를 ‘장(莊)’이라 하고, 2월 20일에 왕후의 능을 봉하여 능호를 ‘사(思)’라 하고, 박경여(朴慶餘 고 참판(故叅判) 박팽년(朴彭年)의 9세손)로 장릉 참봉을 명하고, 정일녕(鄭一寧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8세손)으로 사릉 참봉을 삼았다. 노산부인 송씨의 묘가 노산의 조카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의 선산 안에 있으니, 양주(楊州) 건천면(乾川面)이다. 부인은 생시에 성안에서 살려 하지 않고, 동교(東郊)에서 산의 능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조가(朝家)에서 동문 밖에 집을 지어주고 영빈(英嬪) 정동(貞洞)이라고 동네 이름을 불렀는데 부인이 따로 초가 두어 칸을 지어서 거처하고 흰옷과 채소 반찬으로 평생을 마치었다.후사는 정미수에게 맡겼으므로, 노산과 부인의 신주가 정씨 집에 있어서, 정씨 자손이 해마다 제사지냈다 한다. 《정해평가전(鄭海平家傳)》 《노릉지》. 고전원문 > 연려실기술 > 燃藜室記述卷之四 > 端宗朝故事本末 > 복위하고 봉릉(封陵)하다
171. 숙종 25년 6월 25일 임술 1699년 / 李守大爲莊陵參奉 이수대(李守大)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72. 숙종 25년 7월 8일 을해 1699년 ○ 府啓, 請安置罪人睦來善, 移配罪人李玄逸放歸田里之命。蔭官初入仕, 各別擇差事, 頃日聖敎, 不啻申明, 至於齋郞, 尤不可以冗雜之類, 苟然充擬也。新授莊陵參奉李守大, 本以不文白徒, 處身行事, 全無士子貌樣, 設令其先祖, 有一時可紀之勞, 收錄之典, 不當及於如此之類, 除目之下, 物情爲駭。請莊陵參奉李守大汰去。答曰, 不允。
사헌부가 아뢰기를, 안치한 죄인 목내선(睦來善)을 이배(移配) 한 죄인 이현일(李玄逸)을 방귀전리(放歸田里)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음관(蔭官)으로 처음 입사(入仕) 한 사람을 각별히 가려 차임하도록 지난번에 성상의 하교가 거듭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재랑(齋郞)의 경우는 더욱이 쓸데없이 잡잡한 부류로 구차하게 채워 의망할 수 없습니다. 새로 제수된 장릉 참봉(莊陵參奉) 이수대(李守大)는 본래 문도(文徒)가 없는 백도(白徒)로 처신하는 데에 있어 선비의 모습이 전혀 없으니, 설령 그 선조(先祖)가 한때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더라도 거두어 녹용(錄用) 하는 은전이 이와 같은 부류에게 미쳐서는 안 되고, 제목(除目)이 내려지자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깁니다.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수대(李守大)를 태거(汰去) 하소서. 답(答)은 윤허하지 않는다.
173. 숙종 25년 7월 11일 무인 1699년 ○ 府啓, 請還收安置罪人睦來善, 移配罪人李玄逸放歸田里之命。請莊陵參奉李守大汰去。答曰, 勿煩 사헌부가 아뢰기를, 안치한 죄인 목내선(睦來善)을 옮겨 정배(定配. 죄인(罪人)을 지방(地方)이나 섬으로 보내 정(定)해진 기간(期間) 동안 그 지역(地域) 내에서 감시(監視)를 받으며 생활(生活)하게 하던 일) 한 죄인 이현일(李玄逸)을 방귀전리(放歸田里. 벼슬을 삭탈(削奪)하고 제 고향(故鄕)으로 내쫓던 형벌(刑罰)) 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소서.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수대(李守大)를 태거(汰去. 파면(罷免)) 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75. 숙종 25년 7월 14일 신사 1699년 / 鄭台耉爲莊陵參奉 정태구(鄭台耉)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76. 숙종 25년 윤7월 7일 계묘 1699년 / 梁益祉爲莊陵參奉 양익지(梁益祉)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7. 숙종 26년 9월 30일 기미 1700년 ○ 今日入侍時, 左議政李世白所啓, 莊陵參奉, 適來見臣言, 淸冷浦, 乃端宗大王初住之所, 而其遺址, 仍爲空閑, 作田堇可七八日耕, 若屬之本陵, 使新入守護軍輩, 耕食資生, 則事甚便好云。此地旣爲空閑之處, 使之因屬本陵, 亦似當然, 故敢達矣。上曰, 所達是矣。依爲之。禮曹 金霔 校正。日記廳郞廳 李運海 書。
오늘 입시할 때 좌의정 이세백이 아뢴 내용에,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마침 와서 말하였습니다. 청냉포(淸冷浦)는 바로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처음 머문 곳인데 그 유지(遺址)가 그대로 공한지(空閑地)가 되어 겨우 7, 8일 경작을 할 수 있으니, 만약 본릉(本陵)에 소속시켜 새로 수호군(守護軍) 들에게 생계를 꾸려 먹게 한다면 일이 매우 편리하고 좋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은 이미 공한지(空閑地)가 되었으니 그로 하여금 본릉에 속하게 하는 것이 또한 당연할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옳다. 그대로 하라.
예조에서 김주(金酒)가 교정하고, 일승청 낭청(日記廳 郎 廳) 이운해(李運海)가 쓰다.
8. 숙종 27년 8월 10일 을축 1701년 / 鄭泰廷爲莊陵參奉 정태정(鄭泰廷)이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9. 숙종 28년 1월 15일 정유 1702년○ 金鎭龜曰, 卽接莊陵參奉所報, 則丁字閣薍簾蘆簟, 已爲傷弊, 趁卽備送, 禁火諸缺豆毛, 亦依他陵例造送云, 而缺陵寢有異缺陵所絶遠, 簾簟等物, 或可備缺簾簟與豆毛, 遠缺致未易。分付本道監司, 丁字閣所用薍簾蘆蕈及缺火諸具, 以某樣穀物, 料理造送進排, 而所入物力, 使之啓聞缺。上曰, 此與近陵有異, 依所達分付本道, 進排, 可也。김진귀가 아뢰기를, 방금 장릉참봉(莊陵參奉)의 보고를 보니, 정자각(丁字閣)의 완렴(薍 簾)과 노삿대(蘆簟 憝)는 이미 상해를 입었으므로 즉시 갖추어 보내고, 화재 여러 가지 털어 놓은 콩과 털도 다른 릉의 예에 따라 만들어 보냈다고 합니다만, 능침을 이지러뜨리는 것과는 다르며, 수렴관과 삿자리 등의 물건은 혹 수렴관과 깃털을 갖추어 놓기도 쉽지 않습니다. 본도의 감사에게 분부하여 정자각(丁字閣)에 소용의 갈렴(薍 簾)과 노단(蘆緞) 및 불이 나는 여러 가지 기구를 아무 곡물의 곡물을 마련하여 조정하여 만들어 진배(進排) 하게 하고, 들어가는 물자와 인력은 아뢰게 하라. 상이 이르기를, 이는 가까운 능과는 다르니, 진달한 대로 본도에 분부하여 진배하게 하라고 하였다.
10. 숙종 28년 3월 21일 임인 1702년 / 莊陵參奉趙光錫 장릉참봉(莊陵參奉) 조광석(趙光錫)
11. 숙종 29년 7월 19일 계해 1703년 / 李秀賢爲莊陵參奉 이수현(李秀賢)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2. 숙종 30년 8월 7일 갑술 1704년 / 李世胄爲莊陵參奉 이세주(李世胄)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3. 숙종 31년 2월 29일 계사 1705년 / 李熙疇爲莊陵參奉 이희주(李熙疇)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4. 숙종 33년 7월 14일 갑자 1707년 / 李世瑋爲莊陵參奉 이세위(李世瑋)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5. 숙종 35년 10월 24일 신유 1709년 / 李寯爲莊陵參奉 이준(李寯)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6. 숙종 36년 4월 2일 정유 1710년 ○ 又以義禁府言啓曰, 以江原監司狀啓, 刑曹粘目, 莊陵參奉權允經, 移本府處置事, 允下矣。權允經時在慶尙道咸昌地本家云, 依例發遣府羅將拿來, 何如? 傳曰, 允。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강원 감사의 장계를 첨부한 형조의 계목과 관련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 권윤경(權允經)을 본부로 옮겨 처치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권윤경은 현재 경상도 함창(咸昌)의 본가에 있다고 하니, 규례대로 본부의 나장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7. 숙종 38년 1월 26일 경술 1712년 / 李守謙爲莊陵參奉 이수겸(李守謙)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8. 숙종 39년 1월 9일 정해 1713년 ○ 吏批啓曰, 莊陵參奉李柬, 身病甚重, 不得察任云, 改差, 何如? 傳曰, 允。이비가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간(李柬)이 신병이 매우 중하여 직임을 살필 수 없다고 하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이간(李柬)이 아뢰기를, 임진년(1712, 숙종38)에 장릉 참봉(莊陵參奉)이 되었고,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2월 19일 >.
*이간 (李柬) 1677년(숙종 3)~1727년(영조 3).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 아버지는 부호군 이태형(李泰亨)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1710년(숙종 36) 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16년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 때 이간의 나이가 적은데도 계급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717년 종부시정을 제수받고, 1725년(영조 1) 회덕현감·경연관을 거쳐 충청도도사 겸 해운관·익위사익위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저서로는 『외암유고(巍巖遺稿)』가 있다. 1777년(정조 1) 이조참판·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온양의 외암서원(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한국역대인물DB>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이간(李柬)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배출된 윤봉구(尹鳳九), 한원진(韓元震), 이간(李柬), 채지홍(蔡之洪), 이이근(李頤根), 현상벽(玄尙璧), 최징후(崔徵厚), 성만징(成晚徵) 8명의 학자를 가리키는 말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고도 한다. 권상하는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을 잇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전(嫡傳)으로서 17세기 이후 성리학 이론을 심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일성록 > 정조 > 정조 16년 임자 > 11월 23일 [주-D001] 팔학사(八學士) >
*《일성록》 정조 19년 11월 25일 기사에서 정조가 양전(兩銓)에게 먼 지방의 사람을 수용(收用)하라고 신칙하고 이어서 지방관으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수소문하여 보고하라고 명한 바 있다.
*일성록 > 정조 > 정조 20년 병진 > 3월 3일 > 유학 이건주(李建胄)는 48세로, 평소의 품행과 절의가 단정하고 확고하여 능히 선대의 사업을 따랐고 온양(溫陽)에 살고 있으며, 고 자의(諮議) 이간(李柬)의 손자입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향당에 알려지고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3인이 각각 품은 뜻을 알 수 있다. 바로 직접 대면하고서 그들의 말을 들어 보고 싶다. 모두 도신으로 하여금 속히 올려보내게 하라고 해당 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19. 숙종 39년 1월 10일 무자 1713년 / 朴浩爲莊陵參奉 박호(朴浩)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박호 (朴浩) : 1653년(효종 4)~1718년(숙종 44).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호연(浩然), 호는 파은(坡隱). 동지중추부사 박창하(朴昌夏)의 아들이다.1678년(숙종 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평소 영예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진념하여 경전은 물론 제자서(諸子書)에도 많은 연구를 하였다. 1713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파은유고(坡隱遺稿)』가 있다.<한국역대인물DB>
21. 숙종 39년 4월 1일 무신 1713년 / 宋性源爲莊陵參奉 송성원(宋性源)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2. 숙종 40년 11월 21일 기미 1714년 / 李奎祥爲莊陵參奉 이규상(李奎祥)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숙종 42년 병신년(1716) 오윤주(吳胤周)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
고전번역서 > 도암집 > 도암집 제34권 / 묘갈(墓碣)/ 첨정 오공 묘갈〔僉正吳公墓碣〕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2월 5일(계유) / 봉화 현감 오윤주(吳胤周)~ 기사 참조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1월 26일 > 오윤주(吳胤周)를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단부(單付)하였다.
*경술년(1670, 현종11)~계해년(1743) 8월 20일. 74세졸.<한국문집총간 > 도암집 > 陶菴先生集卷三十四 > 墓碣[四]>
23. 숙종 44년 윤8월 22일 정묘 1718년 / 老職에 대한 上言 중 기한 내에 現身하지 않은 것 등은 法例를 어겼기 때문에 시행하지 않겠다는 吏曹의 달. 이사제(李思悌)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5. 숙종 46년 2월 10일 정미 1720년 / 禹世準爲莊陵參奉 우세준(禹世準)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경종 1년 1721년 이수겸(李守謙).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11월 11일 임오 1734년 기사 참조)
26. 경종 1년 3월 18일 기묘 1721년 / 李頤幹爲莊陵參奉 이이간(李頤幹)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된다.
27. 경종 1년 4월 6일 병신 1721년 / 李觀命 등이 사은함
○ 謝恩, 兼知春秋李觀命·閔鎭遠, 實錄兼春秋兪拓基·趙文命·洪龍祚·任徵夏, 兵曹參議申思喆, 監察徐行遠, 慶基殿參奉金銅龍, 新昌縣監趙鳴國, 莊陵參奉李頤幹, 兼春秋金龍慶。겸춘추 이관명(李觀命)과 민진원(閔鎭遠), 실록청 겸춘추(實錄廳兼春秋) 유척기(兪拓基)・ 조문명(趙文命)・ 홍용조(洪龍祚)・ 임징하(任徵夏), 병조 참의 신사철(申思喆), 감찰 서행원(徐行遠),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김동룡(金銅龍), 신창 현감(新昌縣監) 조명국(趙鳴國),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이간(李 頤 幹), 겸춘추 김용경(金龍慶)이 단부(單付 : 단망(單望)으로 관원(官員)을 골라 정(定)하던 일.)하였다. 謝恩 : 은혜(恩惠)에 감사(感謝)함
28. 경종 2년 1월 28일 갑인 1722년 。莊陵參奉禹世凖。 장릉참봉 우세준
31. 경종 2년 2월 15일 경오 1722년 / 柳運爲莊陵參奉 유운(柳運)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32. 경종 2년 11월 20일 신축 1722년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순간(李順幹)~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통하여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 경종실록
33. 경종 3년 4월 13일 임술 1723년 / 金道成爲莊陵參奉, 金顯國爲莊陵參奉 (김도성(金道成)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고, 김현국(金顯國)도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34. 경종 3년 5월 11일 기축 1723년 ○ 김현국(金顯國) 장릉참봉(莊陵參奉)을 개차(改差)하다. 吏批啓曰, 新除授莊陵參奉金顯國呈狀內, 除目之下, 旣致人言, 斯速入啓處置云, 今姑改差, 何如? 傳曰, 允。이비가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 참봉(莊陵參奉) 김현국(金顯國)의 정장에 제목(除目)이 내려오자 사람들의 말을 하였으니, 속히 입계하여 처치해 주소에서라고 하였으니, 지금 우선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35. 경종 3년 5월 12일 경인 1723년 / 洪禹龍爲莊陵參奉 홍우룡(洪禹龍) 장릉참봉(莊陵參奉)
36. 경종 3년 5월 21일 기해 1723년 경종 3년 5월 21일 기해 1723년 박서(朴瑞)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박서(朴瑞)를 임명
濬源殿參奉朴瑞, 莊陵參奉洪禹龍相換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 박서(朴瑞), 장릉 참봉(莊陵參奉) 홍우룡(洪禹龍)을 서로 바꾸었다. *즉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박서(朴瑞)를 임명하였다.
*濬源殿(준원전. 濬 칠 준 源 근원 원 殿 전각 전) : 함경남도(咸鏡南道) 영흥군(永興郡) 순녕면(順寧面)에 있던 전각(殿閣). 조선(朝鮮) 시대(時代) 태조(太祖) 5(1396)년에 건립(建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탄생(誕生) 때 태(胎)를 묻었던 곳에 세운, 조선(朝鮮) 시대(時代) 발상(發祥)을 기념(紀念ㆍ記念)하던 전각(殿閣). 그 수법(手法)이 간결(簡潔)ㆍ장중하여 조선(朝鮮) 시대(時代) 초기(初期)의 특색(特色)을 잘 나타내고 있음. <네이버사전>
○ 영조 1년 을사(1725) 2월 5일(계유) / 봉화 현감 오윤주(吳胤周)가 나아가 직명과 성명을 아뢰었다. 상이 이력을 물으니, 오윤주가 아뢰기를, “신은 처음에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전설사 별검, 금부 도사, 의영고 주부, 전생서 주부, 석성 현감(石城縣監) 등의 직임을 거쳐 이번에 본직에 제수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떠한 소회가 있는가?” 하니, 오윤주가 아뢰기를, “신이 아직 부임하지 않은지라 고을의 폐단과 백성의 고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내려간 뒤에 크게 변통할 일이 있으면 도신으로 하여금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의 직임은 가볍지 않으니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봉행하고 오늘 인견한 뜻을 더욱 체념(體念)하도록 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
38. 영조 1년 2월 19일 정유[정해] 1725년 / 晝講(주강)에 李坰進伏曰, 臣始仕爲莊陵參奉, 陞宗廟副奉事, 今方待罪尙書院直長矣。이경(李坰)이 나아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이 처음 벼슬하여 장릉 참봉(莊陵參奉)이 되었고, 종묘서 부봉사로 승진하였다가 지금 상서원 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습니다.
上曰, 職掌。상이 이르기를, 담당(擔當)하는 직무(職務)의 분담(分擔). 坰曰, 凡百安寶及馬牌出納而已矣。이경이 아뢰기를, 갖가지 어보(御寶)를 찍고 마패(馬牌)를 출납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上曰, 職掌[所懷]。상이 이르기를, 직책은 곧 소회를 펼치는 날이다. 坰曰, 本院別無弊端矣。이경이 아뢰기를, 본원은 별로 폐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39. 영조 1년 3월 7일〈을사〉 1725년 / 李徵龜爲莊陵參奉 이징귀(李徵龜)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41. 영조 1년 7월 29일 갑자 1725년 / 李坰爲莊陵參奉 이경(李坰)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42. 영조 2년 2월 8일 신사[신미] 1726년 / 李榗爲莊陵參奉 이진(李 榗)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정미년(丁未年 1727, 영조3) 장릉 참봉 이진李榗이 생질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에게 부탁하여 엄흥도를 위해 전傳을 지었고, 아울러 단종께 제향을 올린 고故 판서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의 사적을 기록했다. <엄호장에 대한 대강을 기록하다>[병술1766, 영조42] 황윤석 - 역주 장릉지속편 220~226쪽
44. 영조 2년 6월 25일 병술 1726년 / 元泰揆爲莊陵參奉 원태규(元泰揆)는 장릉 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48. 영조 4년 1월 21일 임신 1728년 戊申正月二十一日巳時, 上御熙政堂。~ 李坰進伏曰, 臣始仕爲莊陵參奉, 陞宗廟副奉事, 今方待罪尙書院直長矣。무신년 정월 21일 사시(巳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이경(李坰)이 나아와 엎드려 아뢰기를, 신이 처음 벼슬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고, 종묘서 부봉사로 승진하였다가 지금 상서원 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습니다.
49. 영조 4년 2월 3일 갑신 1728년 / 安處仁爲莊陵參奉 안처인(安處仁)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53. 영조 5년 7월 12일 을묘 1729년 / 李萬秋爲莊陵參奉 이만추(李萬秋)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54. 영조 5년 윤7월 20일 임진 1729년 / 李益采爲莊陵參奉 이익채(李益采)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56. 영조 7년 3월 18일 신사 1731년 / 金道復·李楺爲莊陵參奉 김도복(金道復)과 이유(李 楺)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는 57세 때인 1732년(영조 8)에는 큰 형 강(漮)의 말을 듣고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나갔으며~
| 이유 (李渘) 1675년(숙종 1)~1753년(영조 29). 이칭 : 이태수(李太守), 소악루(小岳樓)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구(仲久), 호는 호소와(號笑窩), 소악루(小岳樓). 양천(陽川) 출신.조선 후기 영조 연간에 동복 현감을 역임한 문신이자 「충효가」 · 「망미인가」 등을 창작한 문인이다. 57세 때인 1732년에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벼슬에 처음 나갔으며, 59세 때인 1735년에 동복 현감을 지냈다. 이곳 백성들이 그의 업적을 기려 비를 세워 칭송했다. 63세 이후로는 양천으로 귀향하고 「귀거래사」를 지었다. 시회(詩會)와 금가(琴歌)로 말년을 보냈다. 병계 윤봉구, 남당 한원진, 회헌 조관빈, 포암 윤봉조, 사천 이병연 등과 교유하였다. 묘는 은행정리(銀杏亭里)에 있다. 정종의 제4왕자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9세손으로 그의 5대 조부인 대구부사 이준도(李遵道, 1532∼1584)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절친한 벗이었다. 이준도의 손자이자 이유의 증조부인 이명운(李命運)은 1613년에 광해군이 모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연안 김씨(延安金氏)를 폐위하려 하자 홍문관 교리 벼슬을 버리고 양천현 현내면 고양리 한강 기슭으로 물러 나와 살게 되었다. 따라서 세거지는 양천(옛 이름은 파릉(巴陵)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궁산이다.)이다. 그의 집안은 율곡계의 조선 성리학통을 대대로 계승하였으며 이유 자신도 「옥경몽유가」에서 언급하였듯이 “일찍이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벼슬에 뜻이 없어 오직 성리학의 연구와 시(詩)와 풍류(風流)로 일세(一世)에 이름을 떨치니 세상에서 강산주인(江山主人)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39세가 되던 1714년(숙종 40)에 생원과 세마위수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57세 때인 1732년(영조 8)에는 큰 형 강(漮)의 말을 듣고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나갔으며 금부도사 · 감찰을 역임했다. 장릉 참봉 재임 시절에 단종의 슬픈 사연을 닮은 시조 「자규삼첩(子規三疊)」과 사군(四郡)의 수려한 경치를 닮은 기행가사인 「사군별곡(四郡別曲)」을 지었다. 양천에 있던 악양루 옛 터에 소악루를 재건하였다.59∼62세 때인 1735년(영조 9)∼1738년(영조 14)에는 동복(옛 이름은 복천, 현 전남 화순군 동복면이다.)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곳 백성들이 그의 업적을 기려 비를 세워 칭송했다. 이 시기에 이곳 백성들을 교화하고 훈육할 목적으로 가사 「충효가(忠孝歌)」를 지었다.63∼78세 때인 1738∼1753년(영조 29)에는 양천으로 귀향하고 「귀거래사(歸去來詞)」를 지었다. 소악루를 중심으로 학문과 창작활동을 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악루에서 당대의 시인묵객들과 시회(詩會)와 금가(琴歌)로 말년을 보냈다. 자신을 ‘강산주인’이라 부르고 병계 윤봉구, 남당 한원진, 회헌 조관빈, 포암 윤봉조, 사천 이병연 등과 교유하였다. 이 시기에 스스로 적선이 되어 천상의 세계를 형상화한 가사 「옥경몽유가(玉京夢遊歌)」를, 군주를 사모하는 「망미인가(望美人歌)」를 창작하였다. 묘는 은행정리(銀杏亭里)에 있다. 상훈과 추모 : 1978년 2월 28일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혜음령 남쪽에 제단을 세워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 「소악루현액기(小岳樓縣額記)」.『시헌서이사본가사집(時憲書裏寫本歌詞集)』.『동복현읍지(同福縣邑誌)』 『사천시초(槎川詩抄)』.『양천군읍지(陽川郡邑誌)』. 전주이씨선성군파선원속보(全州李氏宣城君派璿源續譜)』.『포암집(圃巖集)』 집필자 : 김팔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규삼첩 (子規三疊) : 1732년경에 이유(李渘, 1675∼1753)가 지은 시조. 3대 시조집인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실려 전한다. 총 3장의 연시조인데 작자가 장릉 참봉이던 57세 때, 영월 땅을 지나면서 불행했던 단종을 생각하고 지었다. 『해동가요』의 관련 기록을 보면, “옛날 단종대왕이 영월 매죽루(梅竹樓)에 있을 적에 자규사(子規詞)를 지었는데, 비록 여항(閭巷)의 아녀자들도 들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왕손인데 적막한 묘사(廟祠)를 지키면서 청령포(淸泠浦)를 지날 때면 눈물지었다. 게다가 여기서 자규의 울음을 들었음에랴. 그래서 이 노래를 지어서 슬퍼하고 이름하여 ‘자규삼첩(子規三疊)’이라 한다.”라 창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1장은 매죽루(梅竹樓)에 서서 무심히 우는 소쩍새의 울음 소리에 귀양 온 어린 단종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며, 2장은 소쩍새의 애절한 울음에, 불쌍한 임금을 생각하며 우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늘이 시켜서 운 것이라며 자신의 감회를 토로한다. 3장은 슬픔을 배가시키는 두견새에 대한 호소다. 자규의 울음소리에 이입되어 어린 임금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담았다. 왕손인 이유는 *12살의 어린 나이로 비명에 죽어야 했던 단종에 대한 남다른 연군의 정(戀君之情)을 쉬운 우리말을 구사하여 절절한 시어로 잘 나타내었다. * *12살의=17세의 참고문헌 『해동가요(海東歌謠)』.『시헌서이사본가사집(時憲書裏寫本歌詞集)』.『한국고전시가연구』(강전섭, 경인문화사, 1995) 「새로 발견된 소악루 이유의 가사 몇 편에 대하여」(김팔남, 『고시가연구』 18, 한국고시가문학회, 2006) 「소악루(小岳樓) 이유(李渘)의 〈자규삼첩(子規三疊)〉과 〈사군별곡(四郡別曲)〉에 대하여」(강전섭, 『고시가연구』 12, 2003) 「석하 소장 고시헌서철에 필사된 시가작품」(박규홍, 『서지학보』 8, 한국서지학회, 1992) 집필자 : 김팔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60. 영조 8년 윤5월 18일 계묘 1732년 / 沈鋿·張海翼爲莊陵參奉 심상(沈爽)과 장해익(張海翼)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61. 영조 8년 윤5월 29일 갑인 1732년 /任述爲莊陵參奉, 임술(任述)은 장릉참봉(莊陵參奉) 이 되었다.
62. 영조 8년 8월 30일 갑신 1732년 ○ 齋郞, 乃是蔭路初選而終爲守令階梯, 則其不可不擇也, 明矣。莊陵參奉任述, 本以江上牟利之輩, 多行非理, 爲世嗤點, 除目之下, 物議喧藉, 久而未已, 請莊陵參奉任述汰去。재랑(齋郞)은 음로(蔭路)로 처음 선발되어 끝내 수령이 되는 자리이니, 잘 선택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장릉참봉(莊陵參奉) 임술(任述)은 본래 강가의 모리배들이 사리에 맞지 않는 짓을 많이 행하여 세상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이 되었으며, 제목(除目)이 내려지자 물의(物議)가 왁자하게 떠들썩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장릉 참봉(莊陵參奉) 임술(任述)을 태거(汰去) 하소서.
*○ 영조 8년 8월 30일 갑신 1732년 / 장릉 참봉(莊陵參奉) 임술(任述) 사헌부【장령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임술(任述)은 본래 강상(江上) 위에서 모리(牟利)나 하는 무리로서 많은 비리를 저질렀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시키소서. 지난번 무장현(茂長縣)에서 세태(稅太)222) 를 돈으로 만들어 1천 3백 냥을 사인(私人)에게 맡겨 상납하게 했는데 중간에서 훔쳐 먹은 것이 7백여 냥이나 되었으니, 그의 죄범을 논한다면 강도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부(地部)223) 의 초기(草記)에서는 범연하게 중하게 과죄(科罪)하기를 청하고, 그 허다한 전화(錢貨)를 도로 본고을에서 징수하였으니 민폐(民弊)가 적지 않습니다. 청컨대, 무장현에서 보낸 사인을 포청(捕廳)으로 이송시켜 도적을 다스리는 율(律)로 다스려 철저히 조사해서 추징(推徵)하게 하소서. 그리고 현감 장세량(張世良)은 파직시켜 경솔하게 사인에게 맡긴 죄를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말단의 두 건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영조실록32권>
63. 영조 8년 9월 11일 을미 1732년 / 尹鳳威爲莊陵參奉 윤봉위(尹鳳威)를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64. 영조 8년 9월 15일 기해 1732년 ○ 柳萬重,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尹鳳威呈狀內, 宿抱奇疾, 年且衰邁, 入秋以來, 添得寒感, 實無從宦之望, 斯速入啓處置云, 改差, 何如? 傳曰, 允。유만중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윤봉위(尹鳳威)의 정장(呈状)에 숙포(宿抱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가 기이한 병에 걸렸고 나이도 노쇠하여 가을에 들어선 이후로 한감(寒感 추위를 무릅써서 든 고뿔.)까지 더해져 실로 벼슬자리에 갈 가망이 없으니 속히 입계하여 처치해 주소에서라고 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65. 영조 8년 9월 16일 경자 1732년 / 趙寬爲莊陵參奉 조관(趙寬)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된다.
67. 영조 8년 11월 23일 병오 1732년 / 徐命維爲莊陵參奉 서명유(徐命維)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68. 영조 9년 7월 14일 계사 1733년 / 李潝爲莊陵參奉 이흡(李 潝)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69. 영조 10년 4월 21일 병인 1734년 顯行退, 海翼進伏。上問職姓名, 對曰, 司宰奉事臣張海翼。問履歷, 對曰, 壬子六月, 莊陵參奉除授, 癸丑六月, 陞拜本職矣。上曰, 京人乎? 鄕人乎? 金聖應曰, 訓鍊大將張鵬翼之弟也。한현행이 물러가고, 해익이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직명과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재감 봉사 장해익(張海翼) 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력(履歷)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임자(壬子 1732) 6월에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계축년(癸丑年 1733)는 6월에 본직에 승진되어 제수되었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인(京人) 인가? 향인(鄕人) 인가? 라고 하였다.김성응이 아뢰기를, 훈련대장 장붕익(張鵬翼)의 아우입니다.라고 하였다.
70. 영조 10년 10월 3일 을사 1734년 / 尹德春爲莊陵參奉 윤덕춘(尹德春)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삼았다.
71. 영조 10년 11월 11일 임오 1734년 歸厚署別提李守謙進伏。上曰, 職姓名? 守謙仰對。上曰, 履歷? 守謙曰, 臣於壬辰, 除莊陵參奉, 仕滿, 陞內資寺奉事, 臣以未經痘患, 不得謝恩。辛丑, 除昌陵參奉, 又以痘患, 不得謝恩。癸卯, 除典設司別檢, 未仕滿, 又以痘患, 受由遞職。乙巳, 除康陵奉事, 仕滿, 陞漢城府參軍, 未仕滿, 又以痘患, 受由下鄕, 因銓曹陳達, 蒙恩出六, 爲義禁府都事, 會有宗廟擧動, 以在外遞職。戊申, 除司憲府監察, 移除儀賓府都事, 庚戌, 除定山縣監, 因災傷遞罷, 今番都政, 待罪本職矣。귀후서 별제 이수겸이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관직과 성명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이수겸(李守謙)이 우러러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력을 말하라고 하였다. 이수겸(李守謙)이 아뢰기를, 신이 임진년(1712년 숙종38년)에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고 사일(仕日)이 차서 내정 봉사(內資寺奉事)로 승진하였는데, 신은 아직 두환을 앓지 않아 사은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축년(경종 1년 1721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고, 또 두환(痘患) 때문에 사은하지 못하였다.
계묘(癸卯 경종 3년 1723년)에 전설사(典設司) 별검(別檢)을 제수하였으나 임기가 차지 않았고, 또 두환(痘患) 때문에 말미를 받아 체직되었습니다. 先正遺範, 家庭間, 有能傳授而遵守者乎? 守謙曰, 不肖孱孫, 何敢以不忝先訓, 仰達乎? 上曰, 爲科工乎? 守謙曰, 臣自少時, 多病失學, 無所工之事矣。上曰, 年齒, 幾何? 守謙曰, 六十一歲矣。上曰, 年則多, 而貌不衰矣。因筵臣所達, 知爾未經痘疫, 久留供職, 似難矣。此後痘息之後, 有職名, 則上來宜矣。守謙曰, 庸下蔭官除命之下, 安敢退坐乎? 守謙退。선정신의 남긴 모범이 가정에서 전수받아 지키는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이수겸이 아뢰기를, 못나고 잔약한 손자가 어찌 감히 선조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러러 아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거 공부를 하였는가? 이수겸이 아뢰기를, 신은 젊었을 때부터 병중에 병이 많이 나서 공부하지 못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이는 몇 세인가라고 하였다. 이수겸이 아뢰기를, 61세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이는 많아 모습이 쇠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뢴 바로 인하여 그대가 아직 두역을 앓지 않았음을 알고 오래 머물면서 직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차후로는 천연두 이후로 직명이 있으면 올라오는 것이 마땅하다. 이수겸이 아뢰기를, 용렬한 음관(蔭官)으로서 제수하는 명이 내렸는데 어찌 감히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수겸이 물러났다.
*17. 숙종 38년 1월 26일 경술 1712년 / 李守謙爲莊陵參奉 이수겸(李守謙)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72. 영조 11년 6월 13일 신사 1735년 / 李坰爲莊陵參奉 이경(李坰)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74. 영조 11년 6월 21일 기축 1735년 / ○ 順陵參奉兪郁基, 莊陵參奉李坰相換。순릉참봉(順陵參奉) 유욱기(兪郁基)와 장릉참봉(莊陵參奉) 이경(李坰)을 서로 바꾸었다.
*○ 영조 12년 6월 2일 을축 1736년 / 鄭壽仁爲莊陵參奉, 李光庭爲莊陵參奉 정수인(鄭壽仁)과 이광정(李光庭)을 장릉참봉으로 삼았다.
*○영조 12년 병진년(1736)에 이광정(李光庭)이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공이 약관의 나이였을 때, 꿈속에서 단종(端宗)을 모시고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등 신하들과 함께 노닐었는데, 꿈에서 깨어나서도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하였다. 그 뒤 오래지 않아 단종이 복위되면서 경과(慶科)를 베풀었고, 공이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니, 마치 벌어진 일이 꿈과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이에 마침내 장릉의 직소에 부임하였다. 고전원문 > 대산집 > 大山集 卷五十 > 行狀 >눌옹 이공 행장〔訥翁李公行狀〕
*이광정 (李光庭) 1674년(현종 15)~1756년(영조 32) 82세 . 『눌은집』을 저술한 학자. 문장가. 주요 관직 : 안동부도훈장(安東府都訓長).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문과도사 이시암(李時馣)의 손자로 아버지는 이후룡(李後龍)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이다. 백부 이선룡(李先龍)의 양자로 갔다. 증조부 이택(李澤)이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을 피해 안동부 내성현으로 내려오면서부터 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정통 유학서 뿐만 아니라, 『장자(莊子)』·『초사(楚辭)』·『사기(史記)』·『좌씨춘추(左氏春秋)』와 같은 책을 탐독하여 고문에 능하였으며 훌륭한 문장을 많이 지었다.
1699년(숙종 25)에 진사가 되었으나, 생부모와 양부모 상(喪)을 연이어 당하자,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태백산 자락 소천산(小川山)으로 들어가 젊은이를 가르치면서 문장가로서의 일생을 보냈다. 만년에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의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았는데, 이 때 이광정을 스승으로 모셔 안동부도훈장(安東府都訓長)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에도 문학과 행의(行誼)가 산남(山南)의 제일이라고 하여 천거되었다. 이후에 김재로(金在魯)가 영백(嶺伯)으로서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도 천거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성수침(成守琛)이 그 자리를 사양하였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그 뒤에도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당시 재상이던 조영국(趙榮國)은 이광정이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이와 같이 이광정은 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 인물로 알려졌다.
문집으로는 『눌은집』이 있다. 그 가운데 「노파의 다섯가지 즐거움」을 비롯한 21편의 우언(寓言)이 담긴 『망양록(亡羊錄)』과 「강상여자가」·「향랑요」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퇴계학풍이 지배적인 안동 지방에서 제자인 문장가 권만(權萬)과 도학자 이상정(李象靖) 간에 문학사상 논쟁이 벌어졌을 때, “문학과 도학 중 어느 것이 중하다 가볍다 할 수 없다.”고 하여 문학의 자율적 가치를 옹호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한국역대인물DB>
77. 영조 13년 12월 29일 임자 1737년 / 朴時應爲莊陵參奉 박시응(朴時應)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78. 영조 14년 3월 6일 무오 1738년 / ○ 又啓曰, 莊陵參奉朴時膺, 除授後過限未上來,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또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박시응(朴時膺)이 제수된 뒤에 기한이 지났는데도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79. 영조 14년 3월 10일 임술 1738년 / 金一基爲莊陵參奉 김일기(金一基)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 吏批 이비 : 이조(吏曹)에서 인사(人事)에 관하여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여 윤허(允許)를 받는 기구. 또는 그에 관한 문건(文件).
80. 영조 14년 6월 25일 병오 1738년 / 安商楫爲莊陵參奉, 안상즙(安商楫)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81. 영조 15년 7월 28일 임신 1739년 / 金台南爲莊陵參奉 김태남(金台南)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영조 15년 기미(1739) 7월 29일. 이해 3월 11일에 유학 김태남이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달 11일에 영조가 김태남의 상소에 감명받아 이조에 살펴서 의망하라고 명하였고, 이달 28일에 이조에서 김태남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承政院日記 英祖 15年 3月 11日, 7月 11日ㆍ28日》
82. 영조 16년 2월 9일 경진 1740년 / 鄭泰熙爲莊陵參奉 정태희(鄭泰熙)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84. 영조 18년 3월 3일 임술 1742년 / 羅蔘爲莊陵參奉, 나삼(羅蔘)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된다.
86. 영조 18년 9월 21일 정축 1742년 / 李世德爲莊陵參奉 이세덕(李世德)은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다.
88. 영조 19년 8월 9일 기미 1743년 / 趙國觀爲莊陵參奉 조국관(趙國觀)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89. 영조 20년 3월 13일 신묘 1744년 / 王鼎元爲莊陵參奉 왕정원(王鼎元)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90. 영조 21년 1월 28일 경자 1745년 / 林鼎佐爲莊陵參奉 임정좌(林鼎佐)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91. 영조 21년 2월 9일 신해 1745년 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의 상소문에 장릉참봉 임정좌에 대하여 말하다.
且臣於莊陵參奉林廷佐事, 有不察之失。臣聞忠愍公林慶業, 其家零替, 香火將絶, 而有奉祀者之故, 檢擬於齋郞矣。天點旣下之後, 追聞廷佐身故已久。其昏謬做錯之狀, 此亦侏儒觀一節之驗也。百爾思量, 有遞而已。또 신(이조 판서 이주진(李周鎭))은 장릉참봉(莊陵參奉) 임정좌(林廷佐)의 일에 대해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습니다. 신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이 그 집안이 영락하여 제사가 장차 끊어질 것이라고 들었는데 제사를 모시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재랑(齋郞)의 의망(擬望)에 의망되었습니다.
천점(하늘의 멀리 뵈는 곳)이 이미 내려진 뒤에도 들으니, 임정좌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가 어리석어 착오를 저지른 실상은 또한 좀벌레를 잡았기 때문에 한 가지 징험이 되는 것입니다. 백번을 생각해도 체차만 할 뿐입니다.
敢瀝血懇, 仰瀆崇聽。伏乞聖慈, 曲垂諒察, 亟許鐫遞, 仍治臣前後違慢之罪, 以肅朝綱, 以安賤分, 千萬幸甚。臣無任云云。答曰, 省疏具悉。于今冢宰, 捨卿誰先? 公心不察, 亦何傷乎? 卿其勿辭, 從速察職。감히 간절한 마음을 피력하여 우러러 성상께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굽어살펴 속히 체차해 주시고, 이어 그동안 명을 어긴 신의 죄를 다스려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미천한 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견딜 수 없다고 운운하였다.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오늘날의 총재(冢 宰) 라면 경을 놔두고 누구에게 먼저 하겠는가? 공심(公心)이 불찰하니 또한 무슨 해가 되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임을 살피라.
92. 영조 21년 3월 5일 정축 1745년 / 林廷燮爲莊陵參奉 임정섭(林廷燮)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93. 영조 22년 7월 29일 계해 1746년 / 崔錫泰爲莊陵參奉 최석태(崔錫泰)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94. 영조 22년 8월 19일 임오 1746년 / 啓曰, 莊陵參奉崔錫泰呈狀內, 身病甚重, 不得察任云。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최석태(崔錫泰)의 정장에 신병이 매우 위중하여 직임을 살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95. 영조 22년 9월 3일 병신 1746년 / 尹昌殷爲莊陵參奉 윤창은(尹昌殷)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96. 영조 24년 6월 21일 갑술 1748년 / 羅錫綱爲莊陵參奉 나석강(羅錫綱)이 장릉 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97. 영조 26년 1월 26일 경오 1750년 / 張大智爲莊陵參奉 장대지(張大智)는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98. 영조 26년 2월 21일 갑오 1750년 / ○ 魏昌祖, 以禮曹言啓曰, 今此寒食祭享時, 各陵兩官, 不可不備員, 而新除授莊陵參奉張大志身死云。위창조(魏昌祖)가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이번 한식제(寒食祭) 때에 각 능(陵)과 양 관(官)의 인원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데,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장대지(張大志)가 죽었다고 합니다.
99. 영조 26년 2월 21일 갑오 1750년 / 以張達星爲莊陵參奉 장달성(張達星)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01. 영조 26년 4월 14일 병술 1750년 / 李世澤爲莊陵參奉 이세택(李世澤)이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다.
*이세택 (李世澤) 1716년(숙종 42)~1777년(정조 1) . 우부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 예안 출신. 이황(李滉)의 8대손이며, 이영철(李英哲)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경(李檠)이고, 아버지는 감역 이수항(李守恒)이며, 어머니는 안노석(安老石)의 딸이다.
1750년(영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뒤, 1753년(영조 29) 정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검열·교리를 거쳐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을 제수받았을 때,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유배되었었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에 응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채제공(蔡濟恭)이 서찰을 내어 이세택이 정계에 응하지 않았음을 칭찬하였다 한다.
1768년 인동부사로 있을 적에 살옥(殺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다고 탄핵을 받고 단양에 유배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의 탄압을 받았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규탄하여 죄상을 밝혔다. 이어 『명의록』을 편찬할 때에 찬집당상이 되었다. 시문집으로 『조은유고(釣隱遺稿)』가 전한다.<한국역대인물DB>
102. 영조 26년 6월 19일 경인 1750년 / 鄭宅祚爲莊陵參奉 정택하(鄭宅祚)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03. 영조 28년 10월 10일 정유 1752년 / 南得老·韓錫恒爲莊陵參奉 남득로(南得老)와 한석항(韓錫恒)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04. 영조 29년 9월 28일 경진 1753년 ○ 韓光肇, 以義禁府言達曰, 莊陵參奉韓錫恒·南得老等拿來事, 徽旨達下矣。한광조가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 참봉(莊陵參奉) 한석항(韓錫恒) ㆍ남득로(南得老) 등을 잡아오도록 휘지(徽旨)가 내렸습니다라고 하였다.
105. 영조 30년 2월 25일 을사 1754년 / 權選爲莊陵參奉 권선(權選)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06. 영조 30년 3월 27일 정축 1754년 ○ 又啓曰, 卽接莊陵牒報, 則參奉權選, 除授後過限未肅拜, 今姑改差, 何如? 傳曰, 允。또 아뢰기를, 방금 장릉(莊陵)의 첩보(牒報)를 받아 보니, 참봉 권선(權選)이 제수된 뒤에 기한이 지났는데 아직도 숙배하지 않으니, 지금 우선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07. 영조 30년 5월 7일 을유 1754년 / 成宇柱爲莊陵參奉, 성우주(成宇柱)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08. 영조 30년 7월 29일 병자[병오] 1754년 ○ 又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韓錫恒, 以三十朔窠之職, 兩次居中, 不可仍置。依例罷職, 何如? 傳曰, 允。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 참봉(莊陵參奉) 한석항(韓錫恒)은 30개월 동안의 직임에 있으면서 두 차례 중(中)을 맞았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규례대로 파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09. 영조 30년 8월 8일 을묘 1754년 林瑞樞爲莊陵參奉 임서추(林瑞樞)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10. 영조 30년 12월 14일 무오 1754년 / 朴鳳錫爲莊陵參奉 박봉석(朴鳳錫)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11. 영조 30년 12월 28일 임신 1754년 / 朴師行·崔道興爲莊陵參奉 박사행(朴師行)과 최도흥(崔道興)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12. 영조 30년 12월 28일 임신 1754년 / 又啓曰, 新除授莊陵參奉朴鳳錫呈狀內, 身病甚重, 勢難察任云。또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박봉석(朴鳳錫)의 정장에 신병이 매우 중하여 직임을 살피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였습니다.
113. 영조 32년 6월 25일 신유 1756년 / 張壽崙爲莊陵參奉 장수륜(張壽崙)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14. 영조 32년 12월 25일 무자 1756년 / 李䋚爲莊陵參奉 이만(李 䋚)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15. 영조 33년 2월 21일 계미 1757년 / 윤집(尹鏶)을 장릉참봉에 임명.
傳曰, 仍爲之。 慶基殿參奉尹鏶, 莊陵參奉張壽崙相換 그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윤집(尹鏶)과 장릉 참봉(莊陵參奉) 장수륜(張壽崙)을 서로 바꾸었다.
116. 영조 33년 10월 28일 정해 1757년 / 郭鎭億爲莊陵參奉 곽진억(郭鎭億)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17. 영조 34년 10월 18일 신미 1758년 / 安載健爲莊陵參奉, 안재건(安載健)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18. 영조 34년 10월 18일 신미 1758년 / 박광주(朴光胄)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임명. 宗白曰, 朴光胄, 頃因承傳, 擬差英陵參奉矣。莊陵參奉, 今適有窠, 相換, 何如? 上曰, 相換可也。이종백이 아뢰기를, 박광주(朴光胄)는 전에 승전(承傳)으로 인하여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의망하여 차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마침 빈자리가 있으니 서로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상이 이르기를, 서로 바꾸라고 하였다.
119. 영조 35년 12월 28일 갑진 1759년 / 金焴爲莊陵參奉 김육(金堉)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20. 영조 37년 6월 24일 신묘 1761년 / 韓汝斗爲莊陵參奉 한여두(韓汝斗)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21. 영조 37년 10월 5일 경오 1761년 ○ 又以吏曹言達曰, 新除授莊陵參奉韓汝斗, 除授後過限未肅拜, 依例改差, 何如? 令曰, 依。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한여두(韓汝斗)가 제수된 뒤에 기한이 지났는데 아직도 숙배하지 않았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영(令)을 내리라고 명하기를,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122. 영조 37년 10월 17일 임오 1761년 / 洪載淵爲莊陵參奉 홍재연(洪載淵)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23. 영조 38년 1월 16일 경술 1762년 / 李寅爕爲莊陵參奉 이인섭(李寅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된다.
125. 영조 39년 6월 20일 병오 1763년 / 韓重燝爲莊陵參奉 한중경(韓重 燝)은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다.
126. 영조 39년 9월 17일 신미 1763년 / 溵曰, 莊陵參奉, 每以遐方人差送, 守僕輩, 亦皆貿貿愚氓, 殆不識陵寢事體之爲尊嚴, 灑掃等節, 所見亦多未安, 此後則本陵參奉, 以京華人, 各別擇差之意, 申飭銓曹, 何如? 上曰, 所奏誠是, 另飭銓曹, 俾無此弊。이은이 아뢰기를, 장릉(莊陵)의 한식제(寒食祭)에 쓸 향과 축문에 서리 한 명을 보내어 보내는 것은 일의 체모로 볼 때 참으로 온당치 못하니, 이후로는 다른 능의 예에 따라 본릉의 관원으로 하여금 배진하도록 영구히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옳으니 그리하라고 하였다.
이은이 아뢰기를, 장릉 참봉(莊陵參奉)은 매번 먼 지방 사람을 차송(差送) 하고, 수복(守僕) 들도 모두 무식한 백성을 무식하게 사서 거의 능침(陵寢)의 사체(事體)가 존엄함을 알지 못하고, 쇄소(灑掃 물을 뿌리고 비로 쓰는 일.) 하는 등의 절차도 매우 온당치 못하니, 이후로는 본릉 참봉은 서울의 화인(華人 중국인)으로 각별히 가려 차임하도록 전조(銓曹. 이조(吏曹) )에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옳으니, 따로 전조에 신칙하여 이러한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溵曰, 莊陵處在遠地, 居常奉護之節, 或多疎忽, 禮官五年一次奉審, 道臣春秋巡歷奉審, 旣甚間闊, 地方官則其在咫尺之地, 而初不關涉於陵事, 故雖有申飭者, 漠然不相與聞, 外方檢飭之道, 終莫如本邑守令, 此後則地方官, 三朔一次與參奉, 眼同奉審後, 勿論有頉無頉, 報于道臣, 則道臣隨卽狀聞事, 定式施行, 何如? 上曰, 所陳誠好矣, 依爲之。이은이 말하기를, 장릉(莊陵)은 먼 곳에 있어서 늘 받들어 보호하는 절차가 혹 많이 허술하고, 예관(禮官)은 5년에 한 차례 봉심(奉審) 하였고, 도신(道臣)은 봄가을에 순력(巡歷) 하여 봉심(奉審) 하는 일이 매우 간활(間闊 먼 기간의 사이) 하였고, 지방관(地方官)은 지척인 곳에서도 처음에는 능사(陵事)에 관섭(關涉)을 한 적이 없었으므로, 도신(道臣)이 신칙한 뒤에는 까마득히 서로 들을 수 없었으며, 지방에서 검칙하는 방도는 끝내 본읍의 수령만 한 것이 없으니, 이후로는 지방관(地方官)이 3개월에 한 번 참여하고 참봉이 함께 봉심한 뒤에는 아무런 탈이 없음을 막론하고 지방에서 검칙하는 방도는 끝내 본읍의 수령만 한 것이 없으니, 이후로는 지방관(地方官)이 3개월에 한 번 참여하고 참봉이 함께 봉심한 뒤에는 아무런 탈이 없음을 막론하고 지방에서 검칙하는 방도는 끝내 본읍의 수령만 한 것이 없으니, 이후로는 지방관(地方탈이 있는 것을 도신에게 보고하면 도신이 즉시 장계로 보고하도록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참으로 좋으니, 그리하라고 하였다.
溵曰, 臣於今行, 登審淸泠浦, 則衰草荒原, 瓦甓頹積, 樵牧相尋, 行路咨嗟, 此旣當時所御之舊基, 則恐不宜一任其堙沒, 臣意則姑待年豐, 令道臣立小碑於遺址, 以爲表識之地, 似宜矣。上曰, 依所陳, 令道臣擧行, 可也。이은이 말하기를, 신이 이번 사행(使行)에 청령포(淸泠浦)를 살펴보았더니, 노쇠한 풀과 기와와 벽돌이 무너지고 나무꾼과 목동이 서로 찾아 길 가는 사람과 탄식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 입었던 옛터로, 그때그때 막아서는 안 될 듯하니, 신의 생각에는 우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도신으로 하여금 유지(遺址)에 작은 비를 세우고 표식(表識) 할 바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도신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고 하였다.
上親書淸泠浦遺址碑前面以下, 溵領受而退。上命承旨書之曰, 寧越遺址碑文書下, 令道臣碑與閣, 勿爲豐侈, 依豐壤例, 待春建閣豎碑, 而噫, 此時豈使本府之民, 自監營, 雇軍擧行, 用儲置米, 碑石·籠臺, 勿爲浮取, 以私儲取用, 除加簷事, 分付。出榻敎 諸臣以次退出。임금이 청령포(淸泠浦)의 유지(遺址) 인 비문(碑文)의 앞면을 친히 쓰자 이은이 받고서 물러갔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차라리 영월(寧越)의 유지(遺址) 문서에 대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비문과 각을 풍성하게 하지 말고 풍양(豐壤)의 예에 따라 봄을 기다려 비석을 세우게 하되, 아, 이때에 어찌 본부의 백성으로 하여금 감영에서 고군(雇軍 임시(臨時)로 고용(雇用)한 군병(軍兵))을 하여 거행하게 하며 저치미(儲置米 비상시(非常時)에 대비(對備)하여 나라에서 비축(備蓄)하던 쌀), 비석과 농대(籠臺)를 띄워서 취하지 말고 사저로 비축해 두고 첨가해 가져다 첨가해 쓰도록 분부하라. 탑교(榻敎 임금이 의정(議政)을 불러서 친히 전(傳)하는 왕명(王命)) 를 낸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승정원일기 1222책 (탈초본 68책)>
○上御夕講。 講訖, 同經筵李溵以禮堂奉審莊陵, 還奏曰: "寒食香祝, 使書吏齎送者, 事體未安。 請依他陵例, 使本陵官陪進。 且其禮官之五年奉審, 道臣之春秋奉審, 旣甚間闊, 此後請令地方官三朔一次, 與參奉同爲奉審, 轉報道臣, 隨卽狀聞。" 上竝從之。 又奏曰: "淸泠浦卽其當時所御之舊基, 而衰草荒原, 行路咨嗟, 請令道臣立碑, 以爲表識之地。" 上從之。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갔다. 강을 마치고 나서 동경연 이은(李溵)이 예조 당상으로서 장릉(莊陵)을 봉심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한식(寒食)에 쓸 향과 축문(祝文)을 서리(書吏)를 시켜 보내는 것은 사체에 있어 미안스럽습니다. 청컨대 다른 능(陵)의 준례에 의거하여 본릉(本陵)의 관원으로 하여금 배진(陪進)하게 하소서. 그리고 예관(禮官)이 5년에 한 번씩 봉심하고 도신(道臣)이 춘추(春秋)로 봉심하게 되어 있는 것은 이미 기간이 너무 머니, 이 뒤로는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3개월에 1차례씩 참봉(參奉)과 함께 봉심하여 도신(道臣)에게 전보(轉報)하면 도신은 그에 따라 즉시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청령포(淸冷浦)는 곧 당시에 〈단종(端宗)께서〉 임어하셨던 구기(舊基)인데 시든 풀과 거친 언덕뿐이어서 길가는 사람들이 서글픈 탄식을 하고 있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비(碑)를 세우게 해서 표지(表識)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조실록102권, 영조 39년 9월 17일 신미 2/2 기사 / 1763년 청 건륭(乾隆) 28년>
127. 영조 40년 6월 30일 경술 1764년 / 高晢爲莊陵參奉 장릉참봉에 고절(高晢)을 임명한다.
128. 영조 42년 6월 14일 임자 1766년○ 李性遂,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韓重燥呈狀內, 矣身衰病, 轉益沈篤, 萬無供職之望云, 身病旣如此, 則不可强令察任,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이성수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한중계(韓重啓)의 정장(呈 状)에, 제가 쇠약하고 병들어 점점 더 위독해져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하였는데, 신병이 이미 이와 같다면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할 수는 없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29. 영조 42년 6월 16일 갑인 1766년 / 崔守謙爲莊陵參奉 최수겸(崔守謙)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30. 영조 42년 6월 18일 병진 1766년 / 黃胤錫爲莊陵參 황윤석(黃胤錫)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황윤석 (黃胤錫) 1729년(영조 5)~1791년(정조 15) 62세 졸. 『이재유고』, 『이재속고』, 『이수신편』 등을 저술한 학자. 운학자(韻學者).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서명산인(西溟散人)·운포주인(雲浦主人)·월송외사(越松外史).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별제를 거쳐 익위사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 3)에 목천현감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 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理學)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저서로는 『이재유고(頤齋遺稿)』·『이재속고(頤齋續稿)』·『이수신편(理藪新編)』·『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한국역대인물DB>
*장릉참봉 재임시에 찬술한 시문(詩文)이 여러편 있다.
131. 영조 44년 6월 17일 계유 1768년 / 姜世東爲莊陵參奉 강세동(姜世東)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34. 영조 45년 12월 18일 병인 1769년 / 李泰漢爲莊陵參奉 이태한(李泰漢)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35. 영조 46년 3월 20일 정유 1770년 / 李德中爲莊陵參奉 이덕중(李德中)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36. 영조 46년 4월 24일 신미 1770년 ○ 尹東暹,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李德中除授後, 過限未肅拜,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윤동섬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덕중(李德中)이 제수된 뒤에 기한이 지나도록 아직 숙배하지 않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38. 영조 48년 7월 28일 신유 1772년 / 姜鳳羽爲莊陵參奉 강봉우(姜鳳羽)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40. 영조 49년 8월 2일 무자 1773년. 相福曰, 臣適見全羅監司元義孫狀啓, 則兪漢師, 因傳敎放逐於全州矣。此人以慶基殿參奉, 入直於本殿, 未赴圓點科, 勢固然矣, 而泰陵參奉朴右源, 亦入直齋所, 司饔奉事李崇運, 亦下直下去柴場, 而同被罪罰云矣。尙喆曰, 臣亦聞莊陵參奉金重祚, 與此同矣。上曰, 此則蕩滌, 可也。김상복이 아뢰기를, 신이 마침 전라 감사 원의손(元義孫)의 장계를 보니, 유한사(兪漢師)가 전교로 인하여 전주(全州)로 내쫓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경기전 참봉으로 본전에 입직하고 원점과의 시험에 응시하지 않는 것은 형세상 본디 그럴 수밖에 없으나, 태릉 참봉(泰陵參奉) 박우원(朴右源) 또한 숙소에 입직하고, 사옹원 봉사 이숭운(李崇運) 역시 하직하러 시장(柴場)으로 내려가 함께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상철이 아뢰기를, 신도 장릉 참봉(莊陵參奉) 김중조(金重祚)가 이것과 같다고 들었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탕척하라고 하였다.
*蕩滌(탕척), 草記蕩滌 초기탕척 : 죄(罪)를 짓고 벼슬에서 파면(罷免)되었던 자(者)에 대하여 일정(一定)한 기한(期限)이 지난 뒤에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여 사면(赦免)해 주고 다시 관리(官吏)로 임명(任命)하던 일.
141. 영조 51년 1월 14일 임술 1775년 / 李趾和爲莊陵參奉 이지화(李趾和)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42. 영조 51년 2월 29일 정미 1775년 / 辛鼎三爲莊陵參奉 신정삼( 辛鼎三)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된다.
143. 영조 51년 3월 10일 정사 1775년 / 啓曰, 莊陵參奉辛鼎三, 齡呈狀內, 身病甚重, 勢難察任云, 竝今姑改差, 何如? 傳曰, 允。洪彦燮爲莊陵參奉。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신정삼(辛鼎三)의 정장에 신병이 매우 중하여 직임을 살피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니, 우선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홍언섭(洪彦燮)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단부하였다.
*홍언섭(洪彦燮) 1745년(영조 21)~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원리(元理)이다. 본관은 남양(南陽[唐])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부친은 홍상정(洪相鼎)이다. 1774년(영조 50) 식년시에 생원 2등 24위로 합격하였다. 1787년(정조 11) 천안군수(天安郡守)로 재직 중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승하 소식을 접하고 벼슬을 버린 뒤 조정에 올라와 자정(自靖)의 의리로서 임지에 내려가지 않았다. 이에 왕이 거듭 물러날 것을 명하였으나, 꼼짝하지 않았고, 이후 임지(任地)였던 곳에 귀양 보내졌다가 곧 풀려나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재차 다시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주도록 상소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한국역대인물DB>
144. 영조 51년 6월 20일 병신 1775년 / 韓重裕爲莊陵參奉 한중유(韓重裕)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45. 정조 2년 7월 1일 무자 1778년 / 安錫銓爲莊陵參奉, 안석임(安錫任)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일성록, 승정원일기 >
146. 정조 2년 7월 26일 계축 1778년 / 崔興遠爲莊陵參奉 최흥원(崔興遠)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47. 정조 2년 10월 12일 무진 1778년○ 李在學, 以吏曹言啓曰, 新除授莊陵參奉崔興遠, 除拜後過限未肅拜,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이재학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 참봉(莊陵參奉) 최흥원(崔興遠)은 제수된 뒤 기한이 지나도록 아직 숙배하지 않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 무술년(1778, 정조2) 〔答崔汝浩 戊戌〕 최여호께 답함
도백과 암행 어사의 천거로 최흥원이 1778년(정조2) 봄에 경모궁 수봉관(景慕宮守奉官)에 제수되고, 가을에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百弗菴先生言行錄 卷2 墓誌銘》- 고전번역서 > 대산집 > 대산집 제9권 > 서
*최흥원 (崔興遠) 1705년(숙종 31)~1786년(정조 10) 81세 졸. 조선후기 주부, 공조좌랑, 세자익위사익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 대구 출신. 할아버지는 최수학(崔壽學)이고, 아버지는 최정석(崔鼎錫)이며, 어머니는 진사 조숭(趙崈)의 딸이다.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교관(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주부·공조좌랑을 거쳐 1784년 세자익위사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대대로 달성의 칠계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백성들의 살기 어려운 정상을 보고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규약을 세우고 강학(講學)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며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안정을 얻게 하였다. 이것이 당시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이며 100여 년 동안 지속된 유명한 향약이다.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고, 이듬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한국역대인물DB>
○ 정조 2년 무술(1778) 10월 12일(무진) 장릉참봉(莊陵參奉) 최흥원(崔興遠)과 희릉참봉(禧陵參奉) 남용만(南龍萬)을 개차하였다.< 일성록>
148. 정조 2년 11월 1일 정해 1778년 / 尹寅喆爲莊陵參奉 윤인철(尹寅喆)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 정조 2년 무술(1778) 11월 1일(정해) 윤인철(尹寅喆)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일성록>
149. 정조 2년 12월 24일 경진 1778년 / 李太亨爲莊陵參奉 이태형(李太亨)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50. 정조 3년 12월 15일 정묘[을축] 1779년 ○ 李義翊, 以禮曹言啓曰, 今此本曹所屬官員等褒貶時, 莊陵參奉尹寅喆, 通禮院兼引儀尹之衡, 與參判臣李在簡, 有應避之嫌, 不得同議磨勘, 別啓本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이의익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이번 본조에 소속된 관원들에 대한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善)하고 악(惡)함을 판단(判斷)하여 결정(決定)함) 때에 장릉참봉(莊陵參奉) 윤인철(尹寅喆)과 통례원 겸인의 윤지형(尹之衡)과 참판 이재간(李在簡)이 상피(相避) 해야 할 혐의가 있어 함께 의논하여 마감할 수 없으니, 별도로 계본(啓本)을 만들어 들이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전교하기를, 알았다.
151. 정조 4년 2월 4일 계축 1780년 / 朴敦浩爲莊陵參奉 박돈호(朴敦浩)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52. 정조 5년 12월 16일 갑신 1781년 / 尹行醇爲莊陵參奉 윤행순(尹行醇)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53. 정조 7년 9월 22일 경술 1783년 / 李淞爲莊陵參奉, 이송(李 淞)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54. 정조 7년 12월 18일 을해 1783년 ○ 李時秀,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李淞, 呈狀內, 俱以身病甚重, 勢難察任云, 竝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이시수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송(李 淞)의 정장에 모두 신병이 매우 중하여 직임을 살피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니, 모두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55. 정조 7년 12월 18일 을해 1783년 ○ 吏曹口傳政事, 以李尙榮爲莊陵參奉 이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이상영(李尙榮)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57. 정조 9년 6월 24일 신축 1785년 / 鄭在寬爲莊陵參奉 정재관(鄭在寬)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58. 정조 11년 6월 22일 무오 1787년 / 李世胤爲莊陵參奉 이세윤(李世胤)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59. 정조 13년 3월 2일 기미 1789년○ 金載瓚, 以禮曹言啓曰, 卽接莊陵參奉所報, 則本陵寒食祭享, 兩官當爲備員, 而同任令白大成, 居在平安道雲山地, 身病甚重, 上京無期云。莫重祭享, 兩官不可不備員, 令白大成, 今姑改差, 其代, 卽令該曹口傳差出, 及期下送, 以爲備員將事之地, 何如? 傳曰, 他官換差, 上來與否, 令吏曹問于本道, 狀聞, 可也。
김재찬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장릉참봉(莊陵參奉)의 보고를 보니 본릉(本陵)의 한식(寒食) 제향(祭享) 때에 두 관원이 인원을 갖추어야 하는데, 같은 임무를 띤 임인령이 평안도 운산(雲山)에 거주하고 있는데 신병이 매우 중하여 상경할 기약이 없다고 합니다.
*이세윤(李世胤) 1730년(영조 6)∼1798년(정조 22). 68세 졸.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경술(敬述)이고, 호는 역와(櫟窩)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예안면(禮安面)이다.
부친은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역임했던 이수연(李守淵)이고, 모친은 김화국(金華國)의 딸 광주김씨(光州金氏)이다. 형 이세면(李世勉)‧이세근(李世劤)과 동생 이세초(李世劭)가 있다.
1777년(정조 1) 증광시 생원 3등 9위로 합격하였으며, 적성현감(積城縣監)‧제용부봉사(濟用副奉事)‧장흥주부(長興主簿)‧감찰(監察)‧사직서령(社稷署令)‧장릉참봉(莊陵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적성현감으로 재임 중에는 백성들을 후덕하게 다스렸다. 이로 인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부터 성품이 청렴하고 몸가짐은 소탈하였으며, 본분을 지켜 선정(善政)을 펼쳤다고 평가받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강론과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훈고학(訓詁學)에 전념하였다.
문집으로 이중엽(李中燁)‧이중찬(李中燦)이 편집‧간행한 『역와문집(櫟窩文集)』이 전하는데, 그 중에서 주목할 작품으로 장릉참봉 재임 중 느낀 바를 기록한 「월중행록(越中行錄)」‧「속행록(續行錄)」,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의 학설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학설을 부정한 「답인(答人)」 등이 있다.
<한국역대인물DB>
160. 정조 13년 6월 20일 갑술 1789년 / 李鎭熙爲莊陵參奉 이진희(李鎭熙)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정조 13년(1789) 김형길(金珩吉, 1741~?).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맹강은 그의 자이다. 행의(行誼)가 일찍 드러났고 문예(文藝)를 대단치 않게 여겼으며, 충북 제천(堤川)에 거주하였고, 정조 13년(1789)에 진사시에 입격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 진잠 현감(鎭岑縣監) 등을 지냈다. 진잠은 충청도에 있었던 고을 이름이다.
<고전번역서 > 입재집 > 입재집 제4권 > 시> 진잠의 수령 김맹강 형길 이 벼슬길에 나간 뒤에 지어서 읊조린 약간 편을 보여 주며 화운을 요구하기에 그 운에 따라 지어서 부침〔鎭岑倅金孟剛 珩吉 以其筮仕後所得吟詠若干篇 投示要和 步其韻以寄〕
*○정조 15년 신해(1791) 1월 17일(임진) 주상이 신규의 집이 수원에 있다는 것을 듣고 대시(臺侍)를 특별히 추증하였다가 신규가 이미 승지에 추증되었다는 말이 있자, 그의 후손을 녹용(錄用)하여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신역 조선왕조실록 > 신역 정조실록 >
161. 정조 15년 1월 20일 을미 1791년 / 申應漢爲莊陵參奉 신응한(申應漢. 신규(申奎)의 증손)이 장릉 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上曰, 莊陵參奉申應漢入侍。出榻敎 賤臣承命出傳, 行左承旨洪聖淵, 莊陵參奉申應漢, 承命進伏。命應漢進奏職姓名訖。敎應漢曰, 爾於故縣監申奎, 爲曾孫乎? 應漢曰, 然矣。上曰, 奉祀孫, 誰也? 應漢曰, 臣之從姪光烈, 是也。上曰, 汝家宗孫, 年紀未滿云, 故特命以汝除職矣, 强近之親, 有立朝之人乎? 應漢曰, 持平臣膺祜, 爲十寸兄也。上曰, 駕過六臣之墓, 予懷曠感, 呼寫祭文, 將欲致祭, 適者齋儒, 際此呼籲, 事不偶然, 益覺爾祖之建白, 實多有賴, 故特有收用之命, 而汝之除莊陵參奉, 尤爲稀異, 爾須克念乃祖事, 至如修掃等事, 益加殫誠, 可也。命應漢先退。상이 이르기를, 장릉 참봉(莊陵參奉) 신응한(申應漢)이 입시하였다라고 하였다. 탑교(榻敎) 를 낸 천신(賤臣)이 명을 받들어 나가서 전하였고, 행 좌승지 홍성연(洪聖淵)과 장릉 참봉(莊陵參奉) 신응한(申應漢)이 명을 받들고 나아와 엎드렸다. 신응한이 나아와 직책과 성명을 아뢰었다. 응한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고 현감(縣監) 신규(申奎)에게 증손이 되었는가?
응한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사손은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응한이 아뢰기를, 신의 종질(從姪) 광렬(光烈)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의 집 종손(宗孫)이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하므로 특별히 그대의 관직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가까운 친족 중에서 조정에 선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응한이 아뢰기를, 지평에 응호(膺祜)는 10촌 형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어가가 육신(六臣)의 묘를 지나가느라 나의 감회가 나는 마음에 제문(祭文)을 불러 쓸 때에 치제(致祭) 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재유(齋儒) 들이 이렇게 호소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요, 그대의 조부가 건의한 것은 실로 의뢰할 만한 점이 많으므로 특별히 수용(收用) 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네가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된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니 그대는 그대들의 조상들의 일을 생각하여 청소하는 등의 일에 더욱 정성을 다하라. 신응한이 먼저 물러갔다.
163. 정조 16년 3월 5일 갑술 1792년○ 吏曹口傳政事, 禧陵參奉李志淳, 莊陵參奉申應漢相換。이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희릉참봉(禧陵參奉) 이지순(李志淳)과 장릉참봉(莊陵參奉) 신응한(申應漢)을 서로 바꾸었다.
164. 정조 16년 윤4월 27일 을미 1792년 / 莊陵參奉李志淳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지순(李志淳) 이다.
*이지순(李志淳) 1762년(영조 38)∼1807년(순조 7). 45세 졸.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치화(穉和)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부친은 군수(郡守) 이구응(李龜應)이다. 관직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제용부봉사(濟用副奉事)‧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한산군수(韓山郡守)‧경산현감(鯨山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재직하다가 병으로 은퇴한 뒤에도 글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옛 성현들의 유묵을 모아 25책에 이르는 첩으로 만들어서 소장하였으며, 매일 아침 성현들의 글을 모아 정리한 「대월록(對越錄)」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24세, 33세에 응시했던 과거시험에 제출한 답안지의 일부인 「명지(名紙)」 2건은, 증조‧조부‧부친‧외조부의 관직 및 본관이 기록되어 있어 가족관계를 살피는 확실한 자료이다.<한국역대인물DB>
166. 정조 18년 1월 6일 갑오 1794년 / 洪人河爲莊陵參奉 홍인하(洪人河)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67. 정조 18년 4월 28일 갑신 1794년 ○ 吏曹口傳政事, 莊陵參奉李彬。이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빈(李彬)을 단부하였다.
168. 정조 20년 1월 23일 경오 1796년 ○ 吏曹口傳政事, 趙基仁爲莊陵參奉。이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조기인(趙基仁)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 정조 20년(병진, 1796) 1월. ○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에 치제하고, 사손(祀孫) 기인(基仁)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고전원문 > 국조보감 > 國朝寶鑑卷之七十四 > 正祖朝六
170. 정조 20년 2월 12일 무자 1796년 / 莊陵參奉 趙基仁(장릉참봉 조기인)을 이재익(李在翼)으로 관직을 바꾸었다.○ 吏曹口傳政事, 莊陵參奉趙基仁, 氷庫別檢李在翼相換。이조가 구전 정사를 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 조기인(趙基仁)과 빙고 별검(氷庫別檢) 이재익(李在翼)을 서로 바꾸었다.
○정조 20년 병진(1796) 2월 12일(무자). 조기인(趙基仁)은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奉祀孫)이라 하여 1796년(정조20) 1월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 정조 20년(병진, 1796)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에 치제하고, 사손(祀孫) 기인(基仁)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이어 화성(華城) 수령에게 명하여 집 한 칸을 사도록 향불을 받들게 하였다.
- 고전번역서 > 국조보감 > 국조보감 제74권 > 정조조 6-
171. 정조 20년 12월 20일 신묘 1796년 / 李建胄爲莊陵參奉 이건주(李建胄)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72. 정조 20년 12월 20일 신묘 1796년 / 장릉참봉(莊陵參奉) 이건주(李建胄)를 가감역관 서협수(徐協修)로 서로 바꾸었다.
出榻敎 上曰, 莊陵參奉李建胄, 假監役徐協修相換。탑교(榻敎)를 내고, 임금이 장릉참봉(莊陵參奉) 이건주(李建胄)와 가감역관 서협수(徐協修)를 서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173. 정조 21년 2월 11일 임오 1797년 ○ 朴基正, 以吏曹言啓曰, 新除授莊陵參奉徐協修呈狀內, 矣身年旣衰耄, 病又沈痼, 素患痰喘之症, 當此節換之時, 有加無減, 萬無起動供職之望, 斯速入啓遞改云。身病旣如是沈篤, 有難强令察任, 改差, 何如? 傳曰, 允。박기정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서협수(徐協修)의 정장(呈狀) 내에, 신은 나이가 이미 노쇠하고 병이 또 고질이 되어 평소 앓던 담천(痰喘) 증세가 한창 바뀔 때를 당하여 더하기만 하고 줄어들지 않아 일어나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으니, 속히 입계하여 체차해 주소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신병이 이미 이처럼 위독하여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하기 어려우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74. 정조 21년 2월 13일 갑신 1797년 / 沈允之爲莊陵參奉 심윤지(沈允之)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75. 정조 21년 2월 18일 기축 1797년 / 장릉참봉 심윤지가 82새 노모 병환으로 부임치 못함에 개차를 원하는 영월부사 박기정의 장계에 대한 정조임금의 답변 ○ 朴基正, 以吏曹言啓曰, 新除授莊陵參奉沈允之呈狀內, 矣身老母, 今年八十二歲, 宿疾沈綿, 長在床褥, 矣身且無兄弟, 日夕持護, 而陵所距京, 爲四百餘里, 實無閱月離側之勢, 卽速入啓遞改云。其親病旣如是沈篤, 則有難强令察任, 改差, 何如? 傳曰, 允。박기정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윤지(沈允之)의 정장(呈 状)에 저의 노모가 올해 82세인데 숙병이 낫지 않아 오랫동안 병상에 있고, 저도 형제가 없어 밤낮으로 간호하고 있는데 능소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400여 리가 되어 실로 월리(月離)의 곁을 열 형편이 아니니, 속히 입계하여 체차해 주소에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버이의 병이 이미 이처럼 위독하다면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76. 정조 21년 2월 22일 계사 1797년 / 金珩吉爲莊陵參奉 김형길(金珩吉)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77. 정조 23년 6월 19일 병오 1799년 / 洪履黿爲莊陵參奉 홍이원(洪履黿)는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다.
178. 정조 23년 12월 20일 계묘 1799년 / 尹行澈爲莊陵參奉 윤행철(尹行澈)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80. 순조 2년 1월 10일 임오 1802년 / 申顯祿爲莊陵參奉 신현록(申顯祿)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된다.
*신현록(申顯祿) 1752년(영조 28)∼1828년(순조 28).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용회(用晦)이고, 호는 학사(鶴沙)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부친 신좌권(申佐權)과 모친 허집(許集)의 딸 양천허씨(陽川許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1년(정조 15) 중국으로부터 서양학자가 들어와 천주교세가 널리 퍼지자 이를 근심하여 배척하였다. 1804년(순조 4) 이후 금부도사(禁府都事)‧금오랑동부도사(金吾郞東部都事)‧사포서직장(司圃署直長)‧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등을 지냈다. 1805년(순조 5) 덕산현감(德山縣監) 재직 시절 백성들을 진휼하고 구제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 『학사집(鶴沙集)』이 있다. <한국역대인물DB>
○순조 2년 임술(1802) 1월 10일(임오) 신현록(申顯祿)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 일성록 > 순조 > 순조 2년 임술 > 1월 10일 >>
○순조 4년 갑자(1804) 7월 10일(병신) 이학부(李學溥)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일성록 > 순조 > 순조 4년 갑자 > 7월 10일 >
순조 4년 갑자(1804) 8월 15일(신미) 장릉참봉(莊陵參奉) 이학부(李學溥)를 개차(改差)하였다. 이학부가 신병(身病)을 이유로 정장(呈狀)하여, 이조가 계청(啓請)하여 개차한 것이다.
182. 순조 4년 8월 15일 신미 1804년 ○ 金宗善, 以吏曹言啓曰, 新除授莊陵參奉李學傳呈狀內, 矣身素患痰癖之症, 當此換節之時, 一倍添劇, 時月之內, 萬無起動供職之望, 卽速入啓遞改云, 身病旣如是沈重, 則有難强令察任, 改差, 何如? 傳曰, 允。김종선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이학전(李學傳)의 정장에 저는 평소 담벽증(痰癖症)을 앓고 있는데 이런 환절기가 바뀌는 때에 배나 더 심해져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나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으니, 속히 입계하여 체차해 주소서라고 하였고, 신병이 이미 이처럼 위중한 이상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83. 순조 4년 8월 15일 신미 1804년 / 李韶九爲莊陵參奉 이소구(李韶九)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84. 순조 5년 10월 24일 계묘 1805년 ○ 莊陵參奉李韶九呈狀內, 矣身素患痰癖之症, 當寒添劇, 萬無束帶供職之望云。 身病俱如是沈篤, 則有難强令察任, 竝改差, 何如? 傳曰, 允。 今日政差出。장릉참봉(莊陵參奉) 이소구(李韶九)의 정장(呈狀 소장을 관청에 냄)에, 제가 평소 앓던 담벽증(痰癖症)이 추위에 더욱 심해져 의관을 갖추고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병이 모두 이처럼 위독하다면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오늘 정사에서 차출하라.
185. 순조 5년 10월 24일 계묘 1805년 徐有檠爲莊陵參奉。 서유경( 徐有檠 )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86. 순조 6년 2월 6일 갑신 1806년 莊陵參奉徐有檠呈狀內, 矣身素患痰癖之症, 當此換節之時, 一倍添劇, 時日之內, 萬無起動供職之望云。身病俱如是沈篤, 則有難强令察任, 竝改差, 何如? 傳曰, 允。장릉참봉(莊陵參奉) 서유경(徐有檠)의 정장(呈狀)에, 제가 평소 앓던 담벽증(痰癖症 담이 몸안에 머물러 생기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환절기를 당하여 한층 더 심해졌으니, 며칠 내로 일어나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병이 모두 이처럼 위독하다면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87. 순조 6년 2월 8일 병술 1806년 / 申縉爲莊陵參奉 신진(申縉)을 장릉참봉으로 삼았다.
188. 순조 6년 2월 11일 기축 1806년 ○ 莊陵參奉申縉呈狀內, 以爲矣身素患痰癖之症, 當此換節, 一倍添劇, 萬無束帶供職之望云。身病俱如是沈重, 則有難强令察任, 竝改差, 何如? 傳曰, 允。장릉참봉(莊陵參奉) 신진(申縉)의 정장에, 제가 평소 앓던 담벽증(痰癖症)이 환절기를 당하여 한층 더 심해져 의관을 갖추고 직임을 수행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병이 모두 이처럼 위중하면 억지로 직임을 살피게 하기 어려우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89. 순조 6년 2월 14일 임진 1806년 ○ 柳畊, 以禮曹言啓曰, 莊陵參奉申縉自吏曹入啓改差, 而今十八日寒食節享, 兩官當爲備員, 參奉有闕之代, 令該曹, 以在京無故人口傳差出, 何如? 傳曰, 允。유경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신진(申縉)이 이조(吏曹)에서 입계하여 개차하였는데, 이번 18일 한식절향(寒食節享)에 두 관원의 인원을 갖추어야 하니, 비어 있는 참봉의 후임을 해당 조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별다른 사정이 없는 사람을 구전으로 차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190. 순조 6년 2월 14일 임진 1806년 / 尹匡烈爲莊陵參奉 윤광렬(尹匡烈)이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다.
191. 순조 8년 6월 21일 을묘 1808년 / 李載延爲莊陵參奉 이재연(李載延)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92. 순조 10년 7월 11일 계해 1810년 / 李廣度爲莊陵參奉 이광도(李廣度)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93. 순조 10년 7월 17일 기사 1810년 / ○ 庚午七月十七日午時, 上御誠正閣。 守令·邊將·初仕人入侍時, 경오년 7월 17일 오시(午時)에 임금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갔다. 수령, 변장, 초사인이 입시하였다. 莊陵參奉李廣度 장릉참봉 이광도 등이 以次入來。차례로 들어왔다.
194. 순조 12년 6월 29일 경오 1812년 ○ 傳于韓致應曰,金錫海爲莊陵參奉 假引儀。한치응에게 전교하기를, ~ 김석해(金錫海) 장릉참봉(莊陵參奉)을 가인의(假引儀 :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임시(臨時)로 통례원(通禮院)에 속하여 대소(大小) 조회(朝會)의 의전(儀典)을 맡아보던 종구품(從九品) 벼슬) 로 삼았다.
195. 순조 14년 9월 11일 무술 1814년 / 洪耆周爲莊陵參奉。 홍기주(洪耆周)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96. 순조 14년 12월 25일 신사 1814년○ 又傳曰, 莊陵參奉洪耆周, 桂坊望擬入。또 전교하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홍기주(洪耆周)를 계방(桂坊 세자익위사(世子翊衞司)를 달리 이르던 말.)의 망(望)으로 의망하여 들이라고 하였다.
197. 순조 14년 12월 25일 신사 1814년 / 柳弘根爲莊陵參奉 유홍근(柳弘根)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98. 순조 16년 12월 22일 병신 1816년 / 李文容爲莊陵參奉 이문용(李文容)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199. 순조 19년 7월 17일 정축 1819년 / 李賢耆爲莊陵參奉 이현기(李賢耆)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00. 순조 19년 8월 10일 기해 1819년 / 沈獻永爲莊陵參奉 심헌영(沈獻永)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01. 순조 21년 8월 1일 무인 1821년 / 義禁府啓目, 又啓目, 莊陵參奉沈獻永原情云云。傳旨內辭緣, 泛稱遲晩, 刑推得情, 何如? 判付啓, 除刑推議處爲良如敎。의금부 계목에, 장릉참봉(莊陵參奉) 심헌영(沈獻永)이 원정(原情 사정(事情)을 하소연함.)에 운운하였습니다. 전지(傳旨) 내의 죄상에 대해 범범(泛稱 범창 : 넓은 범위(範圍)로 부르는 이름. 또는 두루 쓰이는 이름.)하게 지만(遲晩 : 지체되고 늦어짐.)이라고 하였으니, 형추하여 실정을 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판부(判付) 하기를, 형추(刑推 : 죄인(罪人)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는 그만두고 의처(議處 : 의논(議論)하여 처리(處理)함.)하라고 하였다.
202. 순조 23년 3월 6일 을해 1823년 / 趙𤦋鎭爲莊陵參奉。 조병진(趙𤦋鎭)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03. 순조 25년 12월 28일 경진 1825년 / 鄭埴爲莊陵參奉 정식(鄭埴)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204. 순조 28년 6월 24일 임진 1828년 / 尹秀寅爲莊陵參奉 윤수인(尹秀寅)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05. 순조 28년 6월 26일 갑오 1828년 / ○ 戊子六月二十六日辰時, 以次進伏。寧越府使閔鼎秀, 莊陵參奉尹秀寅,以次進伏。上曰, 史官分左右, 守令·邊將初仕人, 各奏職姓名。 鼎秀等, 以次奏職姓名。 仍卽退出, 命退, 承史以次退出。무자년 6월 26일 진시에, 영월부사( 寧越府使 ) 민정수( 閔鼎秀 )와 장릉참봉( 莊陵參奉 ) 윤수인( 尹秀寅 )이 차례로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이 좌우로 나뉘어 수령과 변장의 초사인들은 각기 직책과 성명을 아뢰라고 하였다. 송정수 등이 차례로 관직과 성명을 아뢰었다. 이어 즉시 물러 나가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206. 순조 28년 12월 15일 경진 1828년 / ○ 又以禮曹言啓曰, 今此所屬各司官員等褒貶時, 莊陵參奉尹秀寅, 與參議臣金裕憲, 有應避之嫌, 不得同議磨勘, 各爲別啓本以入之意, 敢啓。 傳曰, 知道。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이번에 소속된 각 관사 관원들의 포폄(褒貶 : 옳고 그름이나 선(善)하고 악(惡)함을 판단(判斷)하여 결정(決定)함.) 때에, 장릉참봉(莊陵參奉) 윤수인(尹秀寅)은 참의 김유신(金裕卿)과 상피(相避) 해야 할 혐의가 있어 함께 의논하여 마감할 수 없으니, 각각 별도로 계본(啓本)을 만들어 들이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전교하기를, 알았다.
207. 순조 30년 7월 3일 무오 1830년 / 鄭淳榮爲莊陵參奉 정순영(鄭淳榮)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208. 순조 32년 6월 25일 경자 1832년 / 高濟應爲莊陵參奉 고제응(高濟應)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209. 순조 32년 8월 9일 계미 1832년 ○ 又以吏曹言啓曰, 新除授莊陵參奉高濟應, 除拜後過限未肅拜,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고제응(高濟應)은 제수된 뒤 기한이 지나도록 아직 숙배하지 않았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10. 순조 32년 8월 13일 정해 1832년 / 李錫厚爲莊陵參奉 이석후(李錫厚)를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11. 순조 32년 9월 25일 무진 1832년 ○ 洪遠謨, 以吏曹言啓曰, 新除授莊陵參奉李錫厚除拜後, 過限未肅拜,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홍원모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석후(李錫厚)가 제수된 뒤에 기한이 지나도록 아직 숙배하지 않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12. 순조 32년 9월 25일 무진 1832년 / 金在鼎爲莊陵參奉 김재정(金在鼎)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13. 순조 32년 12월 20일 임술 1832년 / 柳徽文爲莊陵參奉 유휘문(柳徽文)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유휘문 (柳徽文) 1773년(영조 49)~1832년(순조 32). 59세 졸. 『호고와문집』, 『근사후편』, 『가례고증』 등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 호는 호고와(好古窩). 아버지는 통덕랑 유만휴(柳萬休)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김현동(金顯東)의 딸이다. 유장원(柳長源)의 문인이다. 1821년에 유장원이 지은 『예서통고(禮書通攷)』와 고조부 유정원(柳正源)의 『역해참고(易解參攷)』를 교정하였다. 1830년에 후릉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2년 뒤에 장릉참봉이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일생을 학문과 후진 양성에 바쳤으며 남한호(南漢皓) · 조승수(趙承粹) · 유식(柳栻) · 이병운(李秉運) · 이병원(李秉遠) · 유건휴(柳健休) · 유정문(柳鼎文) · 유치명(柳致明)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고산서당(高山書堂)을 비롯하여 여강(廬江) · 구계(龜溪) · 황산(黃山) · 고운(孤雲) 등 여러 서당에서 후진을 교육하였다. 경서와 제자서에 두루 밝았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호고와문집(好古窩文集)』 · 『주역경전통편(周易經傳通編)』 · 『계몽통해(啓蒙通解)』 · 『계몽익요(啓蒙翼要)』 · 『계몽고의(啓蒙攷疑)』 · 『근사보록(近思補錄)』 · 『근사후편(近思後編)』 · 『근사집해산보(近思集解刪補)』 · 『가례고증(家禮攷證)』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한국역대인물DB>
214. 순조 33년 1월 15일 정해 1833년 / 李博祥爲莊陵參奉 이박상(李博祥)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1858 [무오(戊午) 10월(十月)] 부임-함경도(咸鏡道) 문천군(文川郡) 문천부사(文川府使) <한국역대인물DB>
215. 순조 34년 1월 10일 병자 1834년 / 李正觀爲莊陵參奉 이정관(李正觀)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16. 헌종 2년 6월 25일 정축 1836년 / 李鍾祥爲莊陵參奉 이종상(李鍾祥)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17. 헌종 2년 8월 9일 경신 1836년 ○ 尹興圭, 以吏曹言啓曰, 新除授莊陵參奉李鍾祥, 以其親病, 呈狀乞遞,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윤흥규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종상(李鍾祥)이 어버이의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개령현감(開寧縣監) 1862[임술(壬戌)] 4월(四月), 1866 [병인(丙寅) 7월(七月)]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한국역대인물DB>
218. 헌종 2년 8월 9일 경신 1836년 / 洪遠燮爲莊陵參奉 홍원섭(洪遠燮)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19. 헌종 2년 9월 9일 기축 1836년 ○ 尹興圭,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洪遠燮, 以親病, 呈狀乞遞, 依例改差, 何如? 傳曰, 允。윤흥규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홍원섭(洪遠燮)이 어버이의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여, 규례대로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홍원섭 (洪遠燮) 1798년(정조 22)~미상.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강(而剛). 서울 출신. 홍수만(洪秀晩)의 아들이다. 목사를 지낸 뒤, 1848년(헌종 14) 경과 증광별시문과(慶科增廣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64년(고종 1) 대사헌, 1865년 이조참판을 거쳐, 1870년과 1872년 두 차례에 걸쳐 대사헌을 지냈다. 1873년 도총부도총관과 형조판서에, 1874년 공조판서와 한성부판윤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1875년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한국역대인물DB>
220. 헌종 2년 9월 13일 계사 1836년 / 李晉榮爲莊陵參奉 이진영(李晉榮)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221. 헌종 4년 12월 24일 신묘 1838년 / 李秀鎭爲莊陵參奉, 이수진(李秀鎭)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22. 헌종 5년 1월 27일 갑자 1839년 ○ 趙鶴年, 以吏批言啓曰, 莊陵參奉李秀鎭, 以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조학년이 이비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수진(李秀鎭)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23. 헌종 5년 1월 27일 갑자 1839년 / 具哲魯爲莊陵參奉 구철로(具哲魯)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24. 헌종 5년 2월 8일 갑술 1839년 ○ 李寅敎,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具哲魯,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이인교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구철로(具哲魯)가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25. 헌종 5년 2월 11일 정축 1839년 / ○ 吏曹口傳政事, 以趙寬和爲莊陵參奉。이조가 구전(口傳)을 하여, 조관화(趙寬和)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26. 헌종 9년 12월 26일 을축[갑자] 1843년 / 金成九爲莊陵參奉 김성구(金成九)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평안도(平安道) 구성시(龜城市) 구성부사(龜城府使), 경상도(慶尙道) 경상도중군(慶尙道中軍) 1875[을해(乙亥)] 7월(七月)
<한국역대인물DB>
228. 헌종 12년 2월 29일 을묘 1846년 / ○ 吏曹口傳政事, 以尹夔一爲莊陵參奉 이조가 구전(口傳)을 하여, 윤기일(尹夔一)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전라도(全羅道) 무장현감(茂長縣監) 1860[경신(庚申)] 11월(十一月),
경상도(慶尙道) 청송부사(靑松府使) 1861[신유(辛酉)] 11월(十一月)
경상도(慶尙道) 영천군수(榮川郡守) 1858[무오(戊午)] 9월(九月)
영동군(永同郡) 영동현감(永同縣監) 1855 [을묘(乙卯) 10월(十月)] <한국역대인물DB>
229. 헌종 13년 12월 30일 을해 1847년 / 金箕燾爲莊陵參奉 김기도(金箕燾)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30. 헌종 14년 1월 19일 갑오 1848년 / 韓正敎,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金箕燾,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한정교(韓正敎)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김기도(金箕燾)가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31. 헌종 14년 1월 19일 갑오 1848년 / 朴璜進爲莊陵參奉 박황진(朴璜進)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경기도(京畿道) 안산군수(安山郡守) 1856[병진(丙辰)] 6월(六月), 1869 [기사(己巳)] 정3품, <한국역대인물DB>
232. 철종 즉위년 12월 26일 기축 1849년 /朴大熙爲莊陵參奉 박대희(朴大熙)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34. 철종 2년 12월 27일 무신 1851년 / 南鍾夏爲莊陵參奉 남종하(南鍾夏)를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35. 철종 4년 6월 26일 기해 1853년 / 南鍾鶴爲莊陵參奉 남종학(南鍾鶴)을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남종학(南鍾鶴) 생졸미상(未詳), 본관 의령(宜寧), 자(字) 송수(松叟)
충청도(忠淸道) 황간현감(黃澗縣監) 1860 [경신(庚申)] 6월(六月), 충청도(忠淸道) 천안군수(天安郡守) 1862 [임술(壬戌)] 7월(七月)
경상도(慶尙道) 영해부사(寧海府使) 1864 [갑자(甲子)] 12월(十二月)
충청도(忠淸道) 청주목사(淸州牧使) 1867 [정묘(丁卯) 3월(三月)] <한국역대인물DB>
236. 철종 7년 6월 25일 경술 1856년 / 金鳳鎬爲莊陵參奉 김봉호(金鳳鎬)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김봉호(金鳳鎬) 본관 청풍(淸風) 생졸 미상(未詳), 자(字) 성기(聖岐)
경상도(慶尙道) 함창현감(咸昌縣監) 1866[병인(丙寅)] 7월(七月), 경기도(京畿道) 양천현령(陽川縣令) 1878 [무인(戊寅) 8월(八月)]
경기도(京畿道) 적성현감(積城縣監) 1879[기묘(己卯)] 6월(六月), 전라도(全羅道) 옥구현감(沃溝縣監) 1881[신사(辛巳)] 2월(二月)
<한국역대인물DB>
237. 철종 7년 10월 2일 병술 1856년 / 徐相鉉爲莊陵參奉 서상현(徐相鉉)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38. 철종 7년 10월 24일 무신 1856년 ○ 吏曹啓曰, 莊陵參奉徐相鉉,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이조가 아뢰기를, 장릉참봉 서상현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39. 철종 7년 10월 24일 무신 1856년 / 李身逵爲莊陵參奉 이신규(李身逵)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40. 철종 8년 3월 20일 임신 1857년 ○ 吏曹啓曰, 莊陵參奉李身逵, 以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이조가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신규(李身逵)가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이신규(李身逵) 1793년(정조 17)∼1868년(고종 5). 본관은 평창(平昌), 세례명은 도마.
이승훈(李承薰, 1756년(영조 32)~ 1801년(순조 1) 4월 8일)의 아들이며, 모친은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이다.
1801년(순조 1)에 아버지( 이승훈李承薰 )가 순교(殉敎)하자 인천으로 이사하여 교리 전파에 힘을 쏟았다.
1838(현종 4) 조선교구 교구장인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1796-1839) 주교(主敎)가 속성과 신학(神學) 교육을 실시하자, 정하상(丁夏祥)‧이문우(李文祐) 등과 수학하다가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앵베르가 순교하자 중단하였다. 그 후 경향(京鄕)을 돌며 현석문(玄錫文)을 도와 순교자 자료를 교리사적 간행에 힘썼으며 1868년(고종 5)에 체포되어 서소문 밖 형장(刑場)에서 순교하였다. <한국역대인물DB>
이신규(李身逵)의 조부이자 이승훈(李承薰)의 부친인 이동욱(李東郁 1739~?)은 1789년 6월 20일 영월부사에 제수 받아 7월6일 부임하여~1791.3.11까지 재임하면서 강원관찰사 윤사국과 함께 자규루를 중건하였다. 1791년 3월11일 가선대부 좌승지로 영전되었다.[영월군·부읍지 선생안 139~140쪽]. <한국역대인물DB>
241. 철종 8년 3월 20일 임신 1857년 / 金好根爲莊陵參奉 김호근(金好根)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42. 철종 9년 7월 16일 기축 1858년 / 李承胄爲莊陵參奉 이승주(李承胄)를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43. 철종 11년 1월 15일 경진 1860년 ○ 又啓曰, 江原監司鄭始容狀啓內, 莊陵參奉李承胄罪狀, 令攸司稟處事, 啓下矣。 李承胄下去慶尙道善山地, 依例發遣府羅將拿來, 何如? 傳曰, 待待命拿囚。또 아뢰기를, 강원 감사 정시용(鄭始容)의 장계에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승주(李承胄)의 죄상을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한 일에 대해 계하하셨습니다. 이승주는 경상도 선산(善山)으로 내려갔으니 규례대로 본부의 나장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대명하기를 기다려 나수하라고 하였다.
244. 철종 11년 1월 25일 경인 1860년○ 又啓目, 莊陵參奉李承胄原情云云。 問目內辭緣, 泛稱遲晩, 刑推得情, 何如? 啓, 除刑推議處爲良如敎。또 계목에,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승주(李承胄)가 원정(原情)에 운운하였습니다. 문목(問目) 내의 죄상에 대해 범범하게 지만(遲晩)이라고 하였으니, 형추하여 실정을 캐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추는 그만두고 의처하라고 하였다.
245. 철종 11년 1월 29일 갑오 1860년 ○ 又照目粘連, 莊陵參奉李承胄矣本府議啓內, 仙寢莫重之地, 久不替直, 至登道啓, 囚供, 雖有可據, 法意在所, 難恕。 以此照律, 罪笞五十收贖, 附過還職, 私罪, 奉敎依允爲旀, 功減一等爲良如敎。또 본감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승주(李承胄)에 대한 본부의 의계(議啓)에, 선침(仙寢)이 막중한 곳에 오래도록 입직을 교체하지 않아 도계(道啓)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죄수의 공초(供招)에 근거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법에 있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으로 조율하니, 죄가 태오십(笞五十: 50대 매질)은 수속(收贖 : 죄인(罪人)이 죄(罪)를 면(免)하기 위하여 바치는 돈을 거두어들임) 하고 부과(附過 : 과실(過失)이 있을 때에 이를 바로 처벌(處罰)하지 아니하고 관원(官員) 명부(名簿)에 기록(記錄)하던 일) 하고 본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사죄(私罪) 이니, 봉교(奉敎) 하여 그대로 하며 공(功)으로 1등을 감하라.
* 이승주(李承胄) 생몰 미상(未詳), 본관 미상(未詳) ,
경상도(慶尙道) 군위현감(軍威縣監) 1875[을해(乙亥)] 1월(正月)<한국역대인물DB>
246. 철종 11년 12월 20일 기묘 1860년 / 崔孝述爲莊陵參奉 최효술(崔孝述)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47. 철종 12년 1월 16일 을사 1861년 ○ 吏曹啓曰, 莊陵參奉崔孝述,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이조가 아뢰기를, 장릉참봉 최효술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최효술 (崔孝述) 1786년(정조 10)~1870년(고종 7). 장릉참봉, 돈녕부도정, 부호군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헌집』 등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치선(穉善), 호는 지헌(止軒). 상주 출생. 아버지는 통덕랑 최식(崔湜)이며, 어머니는 진주정씨(晉州鄭氏)로 정종로(鄭宗魯)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래부사 이휘령(李彙寧), 어사 박규수(朴珪壽)와 임응준(任應準) 등이 번갈아 천거하여 1860년(철종 11)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그 뒤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는 사교(邪敎)를 극렬히 배척하는 주장을 폈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치명(柳致明)을 비롯하여 이병하(李秉夏)·이돈우(李敦禹)·이휘령·이원조(李源祚)·손양술(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아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음양역리학에 대하여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저서로는 『지헌집(止軒集)』 15권이 있다.<한국역대인물DB>
248. 철종 12년 1월 16일 을사 1861년 / 李鼎相爲莊陵參奉 이정상(李鼎相)은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49. 철종 12년 9월 5일 경인 1861년 ○ 黃鍾顯, 以吏曹言啓曰, 典設司別提白華洙, 莊陵參奉李鼎相俱以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황종현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백화수(白華洙),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정상(李鼎相)이 모두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 철종11년 경신년(1860)이정상(李鼎相) 장릉참봉(莊陵寢郞)。이원조(李源祚)의 장자(長子) 莊陵參奉壙記(장릉참봉광기)
*壙記(광기) : 시신을 묻기 위해 파 놓은 구덩이 기록
長子名鼎相字穉凝。戊辰九月生。乙未生員。庚申 莊陵寢郞。장자의 이름은 정상이며 자는 치응인데 무진년(1808, 순조8) 9월에 태어났다. 을미년(1835년. 헌종 1년(憲宗 元年)에 생원이 되었고 경신년(1860, 철종11)에는 장릉침랑(莊陵寢郞)이 되었다.
*○이원조(李源祚) : 1792~1871.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이다. 1809년(순조9) 문과에 급제했다. 저서로 《응와집(凝窩集)》이 있으며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한국문집총간 > 응와집 > 凝窩先生文集卷之十九 > 墓誌銘 >長子莊陵參奉壙記
*○경신년(1860, 철종11)에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는데, 봉직한 지 겨우 몇 개월만에 정사(呈辭)를 올려 친우(親友)에게 양보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정상(鼎相)이고 자는 치응(穉凝)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순조 무진년(1808, 순조8) 대포리(大浦里) 집에서 태어났다. < 한국문집총간 > 사미헌집 > 四未軒文集卷之十 > 墓碣銘 장릉 참봉 성산 이공 묘갈명 병서 〔莊陵參奉星山李公墓碣銘 幷敍〕 >
250. 철종 12년 9월 5일 경인 1861년 / 張福遠爲莊陵參奉。 장복원(張福遠)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251. 철종 12년 9월 13일 무술 1861년 ○ 又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張福遠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장복원(張福遠)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장복원(張福遠) 생몰, 본관 미상(未詳). 전라도(全羅道) 정읍현감(井邑縣監) 1872[임신(壬申)] 7월(七月) <한국역대인물DB>
252. 철종 12년 9월 13일 무술 1861년 / 金觀秀爲莊陵參奉。 김관수(金觀秀)를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253. 철종 12년 9월 30일 을묘 1861년 / ○ 徐衡淳,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金觀秀,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서형순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김관수(金觀秀)가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김관수(金觀秀) 생몰,본관 미상(未詳).
전라도(全羅道) 정읍현감(井邑縣監) 1865[을축(乙丑)] 6월(六月), 경상도(慶尙道) 현풍현감(玄風縣監) 1867[정묘(丁卯)] 12월(十二月)
강원도(江原道) 평창군수(平昌郡守) 1872[임신(壬申)] 7월(七月). 관직이칭 : 노산군수(魯山郡守). <한국역대인물DB>
254. 철종 12년 9월 30일 을묘 1861년 / 金左均爲莊陵參奉 김좌균(金左均)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55. 철종 12년 10월 3일 무오 1861년 ○ 洪承裕,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金左均, 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홍승유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 김좌균(金左均)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56. 철종 12년 10월 3일 무오 1861년 / 鄭仲愚爲莊陵參奉 정중우(鄭仲愚)는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된다.
*정중우(鄭仲愚) 생몰 미상(未詳), 본관 온양(溫陽). 경상도(慶尙道) 영덕현령(盈德縣令) 1868[무진(戊辰)] 12월(十二月)
<한국역대인물DB>
257. 고종 1년 1월 20일 임술 1864년 / 趙恒敎爲莊陵參奉 조항교(趙恒敎)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58. 고종 1년 1월 21일 계해 1864년 ○갑자년는 정월 21일 사시(巳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대왕대비전에 발을 드리우고, 수령(守令)・ 변장(邊將)으로서 초사인(初仕人)이 입시했을 때, 장릉참봉 조항교, 등 차례로 나아와 엎드렸다. 대왕대비전이 아뢰기를, 사관(史官)이 좌우로 나뉘어 앉았다고 하였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수령을 초사할 사람을 대령시켰는데, 그들로 하여금 차례차례 앞으로 나오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대왕대비전이 아뢰기를, 앞으로 나오게 하라고 하였다. 대왕대비전이 전교하기를, 수령은 바로 목민관(牧民官)이고, 변장은 곧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이고, 초사(初仕) 한 사람은 바로 앞으로 수령이 되는 자이니, 그 보답할 도리에 과연 모두 유념하였는가? 근래에 온갖 폐단이 염치를 손상하는 데에서 생겨났으니, 만약 장오를 범하여 죄과에 빠진다면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각각 힘써서 하라.
259. 고종 1년 10월 12일 기묘 1864년 ○ 吏曹啓曰, 莊陵參奉趙恒敎, 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이조가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조항교(趙恒敎)가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조항교(趙恒敎) 1825년(순조 25)~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경구(景久)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조사은(趙思殷)이고, 조부는 조기인(趙基仁)이다. 부친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용양위호군(行龍驤衛護軍) 조형복(趙亨復)과 모친 홍익건(洪益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은 조승교(趙升敎)이다. 서제(庶弟) 조풍교(趙豊敎)가 있다. 1848년(헌종 14) 증광시에서 생원 2등 17위로 합격하였다.
1864년(고종 1) 증광시에서 병과 24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866년(고종 3)에 김경균(金敬均)‧윤영신(尹榮信)‧조경호(趙慶鎬) 등과 함께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로 추천되었고, 도당록(都堂錄)에도 선발되었다. 이후 부응교(副應敎)‧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헌릉(獻陵) 등의 왕실 제사 때 집례(執禮)로 참여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다.<한국역대인물DB>
260. 고종 1년 10월 12일 기묘 1864년 / 李承岳爲莊陵參奉 이승악(李承岳)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61. 고종 1년 10월 15일 임오 1864년 ○ 吏曹啓曰, 莊陵參奉李承岳, 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이조가 아뢰기를, 장릉참봉 이승악(李承岳)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62. 고종 1년 10월 15일 임오 1864년 / 朴挺鉉爲莊陵參奉。 박정현(朴挺鉉)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63. 고종 3년 7월 15일 신미 1866년 / 李以斗爲莊陵參奉 이이두(李以斗)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이이두 (李以斗) 1807년(순조 7)~1873년(고종 10). 실용 의학서 『의감산정요결』을 편찬한 학자. 의학자.
자는 서칠(瑞七), 호는 서파(西坡). 경상북도 칠곡 출생.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10여세에 사서오경을 두루 읽고 천문·지리·의약·산술에도 능통하였다. 원래는 유학에 종사하였다. 후에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을 탐독하고 1849년(헌종 15) 자신이 실험한 경험방서 중에서 가장 긴요한 것을 발췌하고, 또 신방(新方)을 따로 구상하여 원방의 아래에 부기하고, 그 외에 잡방(雜方)과 속방(俗方)을 신방의 아래에 열거하여 『의감산정요결(醫鑑刪定要訣)』 3권을 편성하였다. 저서로는 『서파문집』 2권이 세상에 전한다. <한국역대인물DB>
264. 고종 5년 12월 24일 정묘 1868년 / 吳徽相爲莊陵參奉 오휘상(吳徽相)이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265. 고종 7년 5월 9일 갑술 1870년 / 宋在和爲莊陵參奉 송재화(宋在和)는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송재화(宋在和) 생몰, 본관 미상(未詳). 충청도(忠淸道) 직산현감(稷山縣監) [미상(未詳)].
제용감 봉사 (濟用監奉事) 각종 직물 따위를 진상하고 하사하는 일이나 채색이나 염색, 기계나 베틀 따위로 천을 짜는 일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고종 10년 계유(1873) 1월 13일<승정원일기>
의금부 도사 (義禁府都事) 고종 14년 7월 16일 기사 1877년 <승정원일기>
경상도(慶尙道) 문경현감(聞慶縣監) 1877[정축(丁丑)] 9월(九月).
전라도(全羅道) 부안현감(扶安縣監) 1880[경진(庚辰)] 1월(正月);
강원도(江原道) 고성군수(高城郡守) 1883[계미(癸未)] 12월(十二月) <한국역대인물DB>
266. 고종 9년 12월 12일 임술 1872년 / 李暉沼爲莊陵參奉 이휘소(李暉沼)는 장릉참봉(莊陵參奉) 이 되었다.
267. 고종 10년 1월 9일 기축 1873년 ○ 傳曰, 莊陵參奉李暉沼, 敦寧都正除授。전교하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휘소(李暉沼)를 돈녕부 도정에 제수하라고 하였다.
268. 고종 10년 1월 13일 계사 1873년 / 金庠敎爲莊陵參奉 김상교(金庠敎)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69. 고종 12년 12월 4일 정묘 1875년 / 宋萬燮爲莊陵參奉 송만섭(宋萬燮)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도목정사 (都目政事) 고종 15년 1878년 6월 (이조ㆍ병조에서 벼슬아치의 치적을 심사하여 면직하거나 승진시키던 일)
내자시 봉사(內資寺奉事) 고종 16년 4월 11일 1879년
(호조에 속하여 대궐에서 쓰는 여러 가지 식품, 직조(織造)와 내진연(內進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270. 고종 14년 7월 16일 기사 1877년 ○ 丁丑七月十六日午時, 上御暎花堂。義禁府都事臣宋在和。履歷, 庚午別薦, 同年五月政, 莊陵參奉初仕, 癸酉正月都政, 濟用監奉事除拜, 甲戌七月都政, 義盈庫直長移拜, 丙子七月都事[政], 移拜本職。職掌, 奉敎推鞫, 所懷無所仰達矣。仍卽退伏。정축년(1877) 7월 16일 오시(午時)에 상이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갔다. 의금부 도사 신 송재화(宋在和) 입니다. 이력(履歷), 경오(고종 7년 1870년) 별천(庚午別薦), 같은 해 5월 정사에서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초사(初仕) 되었고, 계유 정월 도목 정사에서 제용감 봉사로 제배되었고, 갑술년 7월 도목 정사에서 의영이고 직장으로 옮겨 제수되었고, 병자년 7월에 도사가 정사(政事)를 베풀었으며, 본직으로 옮겨 제수되었습니다. 담당은 왕명을 받들어 추국(推鞫) 하는 것이니, 소회가 아뢸 바가 없습니다. 곧 물러나 엎드렸다.
271. 고종 15년 6월 30일 무신 1878년 / 尹濟翼爲莊陵參奉 윤제익(尹濟翼)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72. 고종 15년 7월 1일 기유 1878년 ○ 戊寅七月初一日未時, 上御誠正閣。 守令·初仕人入侍時, 莊陵參奉尹濟翼,伏楹外訖。定熙曰, 守令·初仕人, 使之進前奏職姓名乎? 上可之。斗煥等以次進前奏職姓名, 退伏楹外訖。 定熙曰, 守令·初仕人, 使之退出乎? 上可之, 上曰, 史官就座。又命退, 承史以次退出。무인녀는 7월 1일 미시(未時)에 상(上)이 성정각(誠正閣)에 나아갔다. 수령과 초사인이 입시할 때에 장릉참봉(莊陵參奉) 윤제익(尹濟翼)이 기둥 밖에 엎드렸다. 정희가 아뢰기를, 수령과 초사한 사람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직책과 성명을 아뢰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이두환 등이 차례로 앞으로 나와 직과 성명을 아뢰고 기둥 밖에 물러나 엎드렸다. 정희가 아뢰기를, 수령과 초사인이니 물러가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상이 이르기를, 사관들은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윤제익(尹濟翼) :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고종 17년 경진(1880) 12월 29일. (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273. 고종 16년 4월 11일 갑인 1879년 ○ 己卯四月十一日午時, 上御熙政堂。 輪對官入侍時, 進伏楹外訖。 上曰, 史官分左右。萬燮進前奏曰, 內資寺奉事臣宋萬燮。 履歷, 乙亥十二月政, 莊陵參奉除拜, 戊寅六月都政, 本職除拜, 職掌, 油淸色, 時遺在眞油十二斗, 白淸一石二斗六升四合, 所懷無矣, 仍退伏楹外。上曰, 史官就座。 仍命退, 諸臣以次退出。기묘(己卯) 4월 11일 오시(午時)에 상(上)이 희정당에 거둥하였다. 윤대관(윤대(輪對)의 차례(次例)가 된 낭관(郞官).)이 입시할 때, 기둥 밖에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고 하였다. 만섭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내자시 봉사(內資寺奉事) 신 송만섭(宋萬燮) 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력(履歷)을 을해년(고종 12년 1875년) 12월 정사에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무인년 6월 도목 정사에서 본직에 제수되었고, 직장(職掌)이 유청색(油淸色) 이었는데 현재 유재(遺在)가 12두(斗), 백청(白淸) 1석 2두 6승 4홉(合), 소회(所懷)가 없으므로 그대로 기둥 밖에 물러나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274. 고종 17년 12월 29일 임술 1880년 / 洪祐龍爲莊陵參奉 홍우룡(洪祐龍)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75. 고종 17년 12월 30일 신해[계해] 1880년 ○ 庚辰十二月三十日申時, 上御興福軒。 守令初仕人入侍時, 以次進伏。莊陵參奉洪祐龍, 進伏楹外訖。 上曰, 史官分左右。 秉鎬曰, 守令初仕人, 使之進前, 奏職姓名乎? 上可之。以次進前奏職姓名, 退伏楹外訖。 秉鎬曰, 守令初仕人, 使之先退乎? 上可之。以次退出。장릉 참봉(莊陵參奉) 홍우룡(洪祐龍)이 나아가 기둥 밖에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고 하였다. 조병호가 아뢰기를, 수령은 초사인이니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직책과 성명을 아뢰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차례로 앞으로 나와 직과 성명을 아뢰고, 물러나와 기둥 밖에 엎드렸다. 조병호가 아뢰기를, 수령으로 초사했던 사람을 먼저 물러가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차례로 물러 나갔다.
홍우룡(洪祐龍)
경상도(慶尙道) 개령현감(開寧縣監) 1867[정묘(丁卯)] 6월(六月). 경기도(京畿道) 양천현령(陽川縣令) 1872 [임신(壬申) 7월(七月)]
충청도(忠淸道) 연산현감(連山縣監) 1874[갑술(甲戌)] 8월(八月). 황해도(黃海道) 배천군수(白川郡守) 1875[을해(乙亥)] 7월(七月)
충청도(忠淸道) 보은군수(報恩郡守) 1877[정축(丁丑)] 1월(正月). 전라도(全羅道) 함열현감(咸悅縣監) 1880[경진(庚辰)] 11월(十一月)
경기도(京畿道) 시흥현령(始興縣令) 1881[신사(辛巳)] 2월(二月). 충청도(忠淸道) 온양군수(溫陽郡守) [미상(未詳)]
<한국역대인물DB>
276. 고종 20년 6월 25일 계유 1883년 / 金鳳善爲莊陵參奉 김봉선(金鳳善)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77. 고종 22년 1월 17일 정사 1885년 ○ 李道宰, 以吏曹言啓曰, 敦寧府參奉李敬承,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 莊陵參奉金炳祖相換。이도재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돈녕부 참봉 이경승(李敬承)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장릉참봉(莊陵參奉) 김병조(金炳祖)와 서로 바꾸었다.
278. 고종 22년 1월 22일 임술 1885년 ○敦寧參奉李敬承, 莊陵參奉金炳祖相換事, 承傳。돈녕 참봉 이경승(李敬承)과 장릉참봉 김병조(金炳祖)를 서로 바꾸었는데, 전지를 받든 것이다.
*김병조(金炳祖) 생몰 미상(未詳) 본관 안동(安東) 청주(淸州) 목사(牧使) 1891 [신묘(辛卯)] <한국역대인물DB>
279. 고종 23년 4월 11일 갑술 1886년 / 韓晉錫爲莊陵參奉。 한진석(韓晉錫)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80. 고종 23년 4월 18일 신사 1886년 ○ 又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韓晉錫, 以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한진석(韓晉錫)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81. 고종 23년 4월 18일 신사 1886년 / 洪淳應爲莊陵參奉 홍순응(洪淳應)을 장릉참봉으로 삼았다.
282. 고종 23년 4월 22일 을유 1886년 ○ 朴齊純,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洪淳應, 以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박차순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홍순응(洪淳應)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83. 고종 23년 4월 22일 을유 1886년 ○ 任百璿爲莊陵參奉, 承傳 임백선( 任百璿 )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제수했다.
284. 고종 24년 4월 28일 을유 1887년 ○ 義禁府啓曰, 莊陵參奉李敬承, 以本陵松犯斫不能摘發罪, 方在待待命拿囚中矣。 卽接戶奴呈狀, 則李敬承, 今三月二十三日身死云, 罪名勿論, 何如? 傳曰, 允。의금부가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경승(李敬承)이 본릉(本陵)의 소나무를 벤 것을 적발하지 못한 죄로 지금 대명하기를 기다려 나수(拿囚 죄인을 잡아 가둠)하는 중입니다. 방금 호노(戶奴 이경승의 집 노비)의 정장(呈狀)을 보니, 이경승(李敬承)이 이번 3월 23일에 죽었다고 하니, 죄명(罪名)을 논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85. 고종 24년 윤4월 5일 임진 1887년 ○ 義禁府照目粘連, 莊陵令·莊陵參奉金鳳善, 孝陵令·徽慶園令李敎承等本府議啓內, 李寬英, 各陵職掌, 固宜謹嚴, 斫痕起墾, 或謂前等, 或謂公用, 外垓私塚, 雖云掘去, 株數現發, 旣有指的。 金鳳善, 在職雖云未久, 斫痕旣在摘發。의금부의 조목에 첨부된 장릉 영(莊陵令)・ 장릉참봉(莊陵參奉) 김봉선(金鳳善), 효릉 영(孝陵令)・ 휘경원(徽慶園) 영 이교승(李敎承) 등에 대한 본부의 의계 내에, 이관영(李寬英)은 각 능의 직장(職掌)은 진실로 삼가고 엄숙해야 하며, 흔적을 베고 개간한 것을 전등(前等) 이라 하며 혹은 공용(公用) 이라 하고, 외방의 해산(垓山)의 개인 무덤은 파낸다고 하나, 나무의 흔적이 적발된 것은 이미 지적한 것이 있습니다. 김봉선은 재직(在職) 한 지 비록 오래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벤 흔적이 적발된 것이다.
竝以此照律, 李寬英·金鳳善·李海祚·李觀永·李敎榮·李道振等, 以松雜大木十株以上律, 各杖一百收贖, 告身盡行追奪, 徒三年定配, 金商絢·金命洙·李象弼·李冕相·金堯莢等, 以中松五十株以上律, 各杖八十收贖, 奪告身三等, 禹錫河·李容久·鄭完淳·李錫僖·朱雲煥·李載敦·金炳卨·金瑨鉉·趙相晉·丁理燮·尹元善·李文榮·任箕常·李起銑·李敎承等, 私墾犯塚, 不能摘發, 以不應爲事理重律, 各杖八十收贖, 奪告身三等, 請竝只私罪。 奉敎依允。이에 조율(照律) 하게 하고, 이관영(李寬英)・ 김봉선(金鳳善)・ 이해조(李海祚)・ 이관영(李觀永)・ 이교영(李敎榮)・ 이도진(李道振) 등은 송잡ㆍ잡스러운 나무 10그루 이상인 경우에는 형률에 해당하게 하고, 각각 장일백은 수속(收贖) 하고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하고 도삼년(徒三年)으로 정배(定配) 하며, 김상현(金商賢)・ 김명수(金命洙)・ 이상필(李象弼)・ 이백지(李 冕相)・ 김요협(金堯莢) 등은 중송(中松) 50그루 이상의 율(律)을 적용한 후 각각 장 80은 수속(收贖) 하고 고신(告身) 3등(等)을 추탈하고, 우석하(禹錫河)・ 이용구(李容久)・ 정완순(鄭完淳)・ 이석반(李錫錫) 등은 중송(中松) 50주(株희(僖) ㆍ주운환(朱雲煥) ㆍ이재돈(李載敦) ㆍ김병설(金炳卨) ㆍ김진현(金振鉉) ㆍ조상진(趙相晉) ㆍ정이섭(丁理燮) ㆍ윤원선(尹元善) ㆍ이문영(李文榮) ㆍ임기상(任箕常) ㆍ이기선(李起銑) ㆍ이교승(李敎承) 등이 사사로이 개간한 무덤을 간소하여 적발하지 못했으므로, 사리상 부당한 형률을 적용하고 각각 장팔십은 수속(收贖) 하고 고신(告身) 3등을 추탈하는 데에 해당하니, 모두 사죄(私罪)로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전교를 받들어 그대로 윤허한다.
286. 고종 24년 7월 28일 계미 1887년 ○ 又啓曰, 罪人到配啓本, 例當禁府·刑曹, 各爲修啓, 而卽伏見黃海道罪人到配啓本啓下者, 則莊陵參奉金鳳善, 因義禁府關到配者, 不爲區別登聞, 混同修啓, 啓聞事體, 何等審愼, 而如是疎忽, 極爲未安。 原啓本還下送, 使之改修正上送。 臣之矇然入啓, 不勝惶悚。 該道臣, 不可無警, 推考, 何如? 傳曰, 從重推考, 爾亦推考。또 아뢰기를, 죄인이 배소에 도착했다는 계본은 으레 의금부와 형조에서 각각 계본을 작성해야 하는데, 방금 삼가 황해도 죄인이 배소에 도착하였다는 계본을 보니, 장릉참봉 김봉선(金鳳善)이 의금부에서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배소에 도착한 자를 구별하지 않고 등문(登聞) 하고 계문(啓聞) 하고 계문(啓聞) 하였으니, 일의 체모가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소홀히 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하였다.
원래의 계본을 도로 내려보내서 다시 바로잡아 올려 보내게 하라. 신이 어리석게 입계하였으니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해당 도신(道臣 관찰사)을 경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엄하게 추고하고 그대도 추고하라고 하였다.
287. 고종 25년 3월 9일 〈경신〉 1888년 ○ 李𨯶永, 以吏批言啓曰, 思陵參奉申學均,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莊陵參奉任百璿相換。이헌영이 이비의 말로 아뢰기를, 사릉 참봉(思陵參奉) 신학균(申學均)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임백선(任百璿)을 서로 바꾸었다.
288. 고종 25년 3월 9일 〈경신〉 1888년 ○ 吏批, 三政。思陵參奉申學均, 莊陵參奉任百璿, 已上相換事, 承傳。이비(吏批 이조(吏曹)에서, 주청(奏請)과 윤허(允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 삼정(三政 나라의 정사(政事) 가운데 가장 중요(重要)한 전정(田政))에서 사릉참봉(思陵參奉) 신학균(申學均)과 장릉참봉(莊陵參奉) 임백선(任百璿)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289. 고종 27년 7월 18일 병술 1890년 / 黃會淵爲莊陵參奉 황회연(黃會淵)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290. 고종 27년 7월 23일 신묘 1890년○ 金命基, 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黃會淵, 以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김명기가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황회연(黃會淵)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 황회연(黃會淵) 생몰 미상(未詳). 본관 창원(昌原). 시강원시독관(侍講院侍讀官) 1901 [신축(辛丑) 3월] <한국역대인물DB>
291. 고종 27년 7월 23일 신묘 1890년 / 金永胤爲莊陵參奉 김영윤(金永胤)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92. 고종 27년 7월 27일 을미 1890년 ○ 又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金永胤, 以身病, 呈狀乞遞, 竝改差, 何如? 傳曰, 允。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김영윤(金永胤)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93. 고종 27년 7월 27일 을미 1890년 / 金在健爲莊陵參奉 김재건(金在健)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94. 고종 27년 8월 4일 신축 1890년 ○ 又以吏曹言啓曰, 莊陵參奉金在健, 以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允。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김재건(金在健)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윤허한다고 하였다.
295. 고종 27년 8월 4일 신축 1890년 / 李升鉉爲莊陵參奉 이승현(李升鉉)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삼았다.
296. 고종 29년 7월 30일 을묘 1892년 / 李昌載爲莊陵參奉 이창재(李昌載)는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39년 임인(1902) 6월 2일(경인, 양력 7월 6일) 이창재(李昌載)를 육군 보병 참위에 임용하였다.
참위(參尉) : 대한제국 때에 위관 계급의 하나. 부위(部位)의 아래, 특무정교(特務正校)의 위이다.
고종 30년 1월 27일 신해 1893년 〈○〉 有政。 吏批, 趙性岳爲莊陵令。정사(政事)가 있으리라.
이비에서, 조성악(趙性岳)을 장릉 영(莊陵令)으로 삼았다.
고종 31년 1월 28일 병오 1894년 〈○〉 吏批, 以趙性岳爲機器司事。이비(吏批)에서 조성학(趙性岳)을 기계사사(機器通事)로 삼았다. *‘機器司事(기기사사)’는 조선 말기·근대 조정·관청에서 ‘기기국(機器局)’의 사사(司事) 직책
297. 고종 31년 2월 5일 임자 1894년 〈○〉 又以吏曹言啓曰, 翼陵參奉徐相協, 以其身病, 呈狀乞遞, 改差, 何如? 傳曰, 莊陵參奉李正載相換。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익릉참봉(翼陵參奉) 서상협(徐相協)이 신병을 이유로 정장(呈狀) 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교하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정재(李正載)와 서로 바꾸라고 하였다.
* 이정재 (李正載): 고전번역서 > 각사등록 >관동계록(關東啓錄)○고종(高宗) / 고종(高宗) 30년(1893) 2월 20일
장릉(莊陵)의 봉심(奉審)을 관례에 따라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에 접수한 영월 부사(寧越府使) 홍병도(洪秉濤)의 첩정(牒呈)에, “부사가 이달 17일에 장릉 참봉(莊陵參奉) 이정재(李正載)와 같이 능소(陵所)로 나아가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을 상세히 살펴보니 모두 아무 탈이 없었으며, 장판옥(藏版屋)ㆍ배식단(配食壇)ㆍ관풍헌(觀風軒)ㆍ자규루(子規樓)ㆍ청령포(淸泠浦) 비각(碑閣)도 일체로 살펴보니 또한 탈이 난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유를 치계(馳啓)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광서 19년 2월 20일 .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송수경 (역) | 2017
298. 고종 32년 12월 27일 계사 1895년 / 영월 장릉은 궁내부 소속임 〈○〉 宮內府, 宣陵參奉李載敦, 順陵參奉李壽瀅, 顯陵參奉趙重翊, 孝昌園奉事李贊鎬, 思陵參奉洪鳳杓, 元陵令李裕烈, 莊陵參奉李根宇, 懿陵參奉李承穆, 永禧殿參奉洪赫周, 社稷署參奉鄭範和, 章陵令金箕一, 光陵參奉李哲鎔, 靖陵令李完世, 參奉李弼宇, 掌禮院主事尹榮洙, 營繕司主事尹履炳, 主殿司主事尹亨善。궁내부(宮內府), 선릉 참봉(宣陵參奉) 이재돈(李載敦), 순릉 참봉(順陵參奉) 이수형(李壽瀅), 현릉 참봉(顯陵參奉) 조중익(趙重翊), 효창원 봉사(孝昌園奉事) 이찬호(李贊鎬), 사릉 참봉(思陵參奉) 홍봉표(洪鳳杓), 원릉 영(元陵令) 이유열(李裕烈), 장릉참봉(莊陵參奉) 이근우(李根宇), 의릉 참봉(懿陵參奉) 이승목(李承穆),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홍혁주(洪赫周),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 정범화(鄭範和), 장릉 영(章陵令) 김기일(金箕一), 광릉 참봉 이철용(李哲鎔), 정릉 영 이완세(李完世), 참봉 이필우(李弼宇), 장예원 봉사 홍혁주(洪赫周), 사직서 참봉 정범화(鄭範和), 장릉영수(榮洙)는 영선사(營繕司)의 주사(主事) 윤이병(尹履炳) 이었고, 전주(殿司) 주사(主事) 윤형선(尹亨善)은 주사일을 주관한다.
*이근우(李根宇) 1877년(고종 14) 9월 20일∼1938년 5월 13일. 일제 강점기 관료. 본적은 강원도 강릉군(江陵郡) 경포면(鏡浦面)이다.
1900년(광무 4) 무관학교를 거쳐 1907년(융희 1) 시위보병(侍衛步兵) 제1연대 제16대에서 근무하였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강원도 참사(參事)로 활동하면서, 1916년부터 1918년까지 강원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地方土地調査委員會) 위원을 겸임하였다. 1920년 12월 강원도 도평의회원(道評議會員)에 민선으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에 선임되었다. 1927년과 1930년 강원도 도평의회원에 관선으로 재선임되었고, 1933년 강원도 도회의원(道會議員)에 선출되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중추원참의에 재차 선임되었다. 또한 1927년 국민협회(國民協會) 평의원(評議員)‧1934년 시중회(時中會) 평의원 등 각종 정치‧사회단체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5년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 1928년 쇼와[昭和]대례기념장, 1935년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 등을 받았다.
<한국역대인물DB>
299. 고종 33년 2월 4일 기사 1896년 ○ 莊陵參奉李相宇, 依願免本官。장릉참봉(莊陵參奉) 이상우(李相宇)가 본관 고을에서 면직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300. 고종 33년 2월 4일 기사 1896년 ○ 宮內府, 莊陵參奉徐相協。궁내부에서, 장릉참봉(莊陵參奉)은 서상협(徐相協)이다.
301. 고종 34년 4월 4일 계해 1897년 〈○〉 侍從院侍御李昌漢 [莊陵]令徐相協, 任莊陵參奉沈相起 시종신(侍從臣) 인 시어인 이창한(李昌漢)이 장릉(莊陵)의 글을 올리니 서상협은 장릉참봉(任陵參奉) 심상기(沈相起)에게 맡긴다.
302. 고종 36년 5월 18일 갑자 1899년 〈○〉 詔曰, 莊陵參奉沈相起, 依願免本官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는 본관(本官을 면직하게 하라고 하였다.
303. 고종 36년 8월 16일 신묘 1899년○ 任莊陵參奉沈相起 장릉참봉(任莊陵參奉)에 심상기(沈相起)를 임명하였다.
304. 고종 38년 3월 14일 경진 1901년〈○〉 莊陵參奉沈相起, 依願免本官, 任莊陵參奉林炳恒.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는 원하는 대로 본관(本官)을 면직하고 장릉참봉(莊陵參奉) 임병항(林炳恒)을 단부하였다.
305. 고종 38년 3월 15일 신사 1901년 〈○〉莊陵參奉林炳恒, 依願免本官, 任莊陵參奉沈相起。장릉참봉(莊陵參奉) 임병항(林炳恒)은 본관에서 면직하고 심상기(沈相起)를 장릉참봉(莊陵參奉)에 맡겼다.
306. 고종 38년 8월 16일 기유 1901년 〈○〉 莊陵參奉沈相起,依願免本官。六品吳啓浹任莊陵參奉. 장릉 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가 본 고을에서 면직되기를 원하니 6품 오계협(吳啓浹)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오게 하였다.
307. 고종 38년 8월 17일 경술 1901년 〈○〉 莊陵參奉吳啓浹, 依願免本官。장릉 참봉(莊陵參奉) 오계협(吳啓浹)은 본관 면직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308. 고종 38년 8월 17일 경술 1901년 〈○〉九品沈相起任莊陵參奉。9품 심상기(沈相起)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임명했다.
309. 고종 38년 9월 20일 임오 1901년 〈○〉 莊陵參奉沈相起,依願免本官, 成祚永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는 본 고을의 수령에서 면직되기를 원하니 성조영(成祚永)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10. 고종 38년 9월 21일 계미 1901년〈○〉莊陵參奉成祚永,依願免本官, 九品沈相起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성조영(成祚永)이 원하는 대로 본관(本官)을 면직하고, 9품 심상기(沈相起)를 장릉참봉(任陵參奉)에 임명했다.
311. 고종 38년 10월 18일 경술 1901년 〈○〉 莊陵參奉沈相起, 依願免本官, 洪承弼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는 원하는 대로 본관(本官)을 면직하고, 홍승필(洪承弼)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12. 고종 38년 10월 19일 신해 1901년〈○〉莊陵參奉洪承弼,依願免本官,沈相起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홍승필(洪承弼)은 원하는 대로 본관(本官)을 면직하고, 심상기(沈相起)를 장 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14. 고종 38년 12월 5일 정유 1901년〈○〉莊陵參奉張宇遠, 依願免本官, 沈相起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장우원(張宇遠)은 본관(本官)을 면직시켜 주고, 심상기(沈相起)는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15. 고종 38년 12월 24일 병진 1901년〈○〉莊陵參奉沈相起, 依願免本官, 任莊陵參奉成樂元[成樂遠]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는 본관을 면직하고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성낙원(成樂元) [成樂遠]]을 임용하였다.
316. 고종 38년 12월 25일 정사 1901년〈○〉莊陵參奉成樂遠, 依願免本官。沈相起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성낙원(成樂遠)은 본 고을에서 면직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심상기(沈相起)를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17. 고종 39년 5월 10일 기사 1902년〈○〉 莊陵參奉沈相起, 依願免本官。沈鎭杓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가 본 고을에서 면직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심진표(沈鎭杓)를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18. 고종 39년 5월 11일 경오 1902년〈○〉莊陵參奉沈鎭杓, 依願免本官。沈相起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진표(沈鎭杓)가 본 고을에서 면직되기를 원한다. 심상기(沈相起)를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참봉(參奉) : 종9품|서운관지
319. 고종 39년 10월 30일 병진 1902년〈○〉莊陵令申泰成, 依願免本官, 莊陵參奉沈相起任莊陵令. 장릉 영(莊陵令) 신태성(申泰成)은 본 고을의 수령으로 면직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상기(沈相起)를 장릉 영(莊陵令)에 임명하였다.
320. 고종 40년 6월 3일 을묘 1903년〈○〉 莊陵參奉兪麟濬,依願免本官。趙範夏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은 본 고을의 수령으로 면직되기를 원한다. 조범하(趙範夏)를 장릉참봉(任陵參奉)에 임명했다.
321. 고종 40년 6월 4일 병진 1903년〈○〉莊陵參奉趙範夏, 依願免本官。兪麟濬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조범하(趙範夏)를 원하는 대로 본관의 참봉을 면직하였다. 유인준(兪麟濬)을 장릉참봉(任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22. 고종 41년 4월 6일 갑인 1904년〈○〉詔曰, 莊陵參奉兪麟濬, 依免, 吳智泳任莊陵參奉. 조서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은 면직하고, 오지영(吳智泳)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23. 고종 41년 4월 8일 병진 1904년〈○〉 詔曰, 莊陵參奉吳智泳, 依免, 兪麟濬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오지영(吳智泳)은 면직하고, 유인준(兪麟濬)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임용하였다.
324. 고종 41년 4월 21일 기사 1904년 ○ 莊陵參奉兪麟濬, 依免. 李命九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은 면직하라. 이명구(李命九)는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25. 고종 41년 4월 23일 신미 1904년 ○ 莊陵參奉李命九, 依免, 兪麟濬任莊陵參奉.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명구(李命九)는 면직시키고, 유인준(兪麟濬)을 장릉참봉(任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26. 고종 41년 5월 4일 임오 1904년 ○ 莊陵參奉兪麟濬, 依免, 吳致殷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은 면직하고, 오치은(吳致殷)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27. 고종 41년 5월 5일 계미 1904년 ○ 莊陵參奉吳致殷, 依免, 兪麟濬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오치은(吳致殷)은 면직하고, 유인준(兪麟濬)은 장릉참봉(任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28. 고종 41년 6월 3일 경술 1904년 ○ 莊陵參奉兪麟濬, 朴魯學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과 박노학(朴魯學)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29. 고종 41년 6월 6일 계축 1904년 ○ 莊陵參奉朴魯學任通信司電話課主事, 兪麟濬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박노학(朴魯學)은 통신사(任通信司)의 주사(主事)로, 유인준(兪麟濬)은 장릉참봉(任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30. 고종 41년 6월 7일 갑인 1904년 ○ 莊陵參奉兪麟濬, 依免, 嚴文吉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은 면직하고, 엄문길(嚴文吉)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31. 고종 41년 6월 8일 을묘 1904년 ○ 詔曰, 莊陵參奉嚴文吉, 依免, 兪麟濬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엄문길(嚴文吉)은 면직하고, 유인준(兪麟濬)은 장릉참봉(任莊陵參奉)에 임용하라고 하였다.
332. 고종 41년 9월 27일 임인 1904년 ○ 詔曰, 莊陵參奉兪麟濬, 依免, 宋升鉉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은 면직하고, 송승현(宋升鉉)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33. 고종 41년 9월 28일 계묘 1904년 ○ 詔曰, 莊陵參奉宋升鉉, 依免, 兪麟濬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송승현(宋升鉉)은 면직시키고, 유인준(兪麟濬)을 장릉참봉(任莊陵參奉)에 임용하였다.
334. 고종 41년 10월 29일 계유 1904년 ○ 詔曰, 莊陵參奉兪麟濬依免, 李元榮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유인준(兪麟濬)은 면직하고,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35. 고종 42년 5월 8일 경진 1905년 ○ 詔曰, 莊陵參奉李元榮, 依免, 呂濟東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을 면직하고, 여제동(呂濟東)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336. 고종 42년 5월 9일 신사 1905년 ○ 莊陵參奉呂濟東 依免, 莊陵參奉任李元榮。장릉참봉(莊陵參奉) 여제동(呂濟東)을 면직하고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이원영(任元榮)을 임명하였다.
337. 고종 42년 5월 21일 계사 1905년 ○ 詔曰, 莊陵參奉李元榮, 依免, 崔永祚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을 면직하고, 최영조(崔永祚)를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용하였다.
338. 고종 42년 5월 22일 갑오 1905년 ○ 詔曰, 莊陵參奉崔泳祚, 依免,李元榮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최영조(崔泳祚)는 면직되었고,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339. 고종 42년 5월 23일 을미 1905년 ○ 江原道觀察府摠巡 崔秉顯任城津港摠巡, 前摠巡洪昌燮任江原道觀察府摠巡, 依免, 莊陵參奉李元榮,依免, 安塤任莊陵參奉。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최병현(崔秉顯)을 성진항 총순(城津港摠巡 : 조선시대 말엽에 경무청에 두었던 관직의 하나. 고종 32(1895)년에 종래의 포도청을 경무청으로 고치고 설치한 관직인데, 감옥서장(監獄署長) 다음으로, 30명 이하의 정원을 두었음.)에 임명하며, 전 총순(摠巡) 홍창섭(洪昌燮)은 강원도관찰사총순(江原道觀察府摠巡)에 임명한다. 장릉 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은 면직되었으며, 안훈(安塤)은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340. 고종 42년 5월 24일 병신 1905년 ○ 莊陵參奉安塤, 依免, 李元榮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안훈(安塤)은 면직하게 되었고, 이원영(李元榮)이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341. 고종 42년 5월 25일 정유 1905년 ○ 詔曰, 莊陵參奉李元榮, 依免. 尹相鈺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을 면직하라고 하였다. 윤상옥(尹相鈺)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42. 고종 42년 5월 26일 무술 1905년 ○莊陵參奉尹相鈺, 依免, 李元榮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윤상옥(尹相鈺)은 면직되었고,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참봉(參奉) : 종9품|서운관지(書雲觀志(책명) : 정조 때에, 성주덕(成周悳)이 서운관(書雲觀)의 기록을 모아 엮은 책. 순조 18년(1818)에 간행되었으며, 천문ㆍ지리ㆍ역수(曆數)ㆍ점주(占籌)ㆍ측후(測候)ㆍ각루(刻漏) 따위의 발달(發達)과 그에 관한 제도의 연혁(沿革)을 기록하였다. 한국 천문 기상학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4권 2책(冊)의 인본(印本))
343. 고종 42년 6월 19일 신유 1905년 ○詔曰, 莊陵參奉李元榮, 江原道觀察府摠巡崔養浩, 依願免本官。閔祐植任莊陵參奉, 尹相殷任江原道觀察府警務署警務官。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과 강원도 관찰사 이원호(李元浩)를, 원하는 대로 본관(本官)을 면직시키라하였다.
민우식(閔祐植)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윤상은(尹相殷)을 강원도 관찰사에 보내 경무(警務)와 서경(西京)의 경비를 경계하게 하였다.
344. 고종 42년 6월 20일 임술 1905년 ○ 詔曰, 李元榮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다.
345. 고종 42년 7월 21일 임진 1905년 ○ 詔曰, 莊陵參奉李元榮, 依願免本官。金英采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은 본관에 면직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김영채(金英采)를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임용하였다.
346. 고종 42년 7월 22일 계사 1905년 ○詔曰, 莊陵參奉金英采, 依願免本官, 李元榮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김영채(金英采)는 원하는 대로 본관(本官)을 면직하였고,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47. 고종 42년 9월 1일 신미 1905년 ○莊陵參奉李元榮, 依願免本官, 崔善徹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은 본관(本官)에서 면직을 원하였고, 최선철(崔善徹)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348. 고종 42년 9월 2일 임신 1905년 ○ 莊陵參奉崔善徹, 依願免本官, 李元榮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최선철(崔善徹)은 원하는 대로 본관(本官)을 면직하였고,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349. 고종 42년 9월 3일 계유 1905년 ○ 詔曰, 莊陵參奉李元榮, 依願免本官, 崔炳漢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은 본관을 면직하기를 원하였고, 최병한(崔炳漢)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350. 고종 42년 9월 4일 갑술 1905년 ○莊陵參奉崔炳漢, 江原道觀察府主事趙炳一依免, 九品李元榮任莊陵參奉, 李聖洙任江原道觀察府主事。장릉참봉(莊陵參奉) 최병한(崔炳漢)과 강원도관찰사 조병일(趙炳一)은 면직하였고, 9품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이성수(李聖洙)는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습니다.
351. 고종 42년 12월 27일 을축 1905년 ○ 莊陵參奉李元榮任主殿院電務課主事, 金𡎋任莊陵參奉。장릉(莊陵) 참봉 이원영(李元榮)은 주전원(主殿院)책임자로 임명하고, 김후(金𡎋)를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한다. *주전원(主殿院)은 1905년(광무 9) 궁내 각종 업무와 경위(警衛), 호위, 전기 업무[電務] 등을 담당하기 위해 만든 궁내부 산하 기구이다.
352. 고종 42년 12월 28일 병인 1905년 ○ 莊陵參奉金𡎋依免, 李元榮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김후(金𡎋)는 면직하고, 이원영(李元榮)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하였다.
353. 고종 43년 3월 26일 계사 1906년 ○ 莊陵參奉李元榮, 依願免本官, 宋世用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은 본관(本官)에서 면임을 원하였고, 송세용(宋世用)을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임명했다.
354. 고종 43년 3월 27일 갑오 1906년 ○詔曰, 莊陵參奉宋世用, 依願免本官, 九品李元榮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송세용(宋世用)은 본관을 면직하고, 9품 이원영(李元榮)은 장릉참봉(莊陵參奉)을 맡았다고 하였다.
355. 고종 43년 4월 24일 신유 1906년 ○ 莊陵參奉李元榮, 依免。林宗相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은 면직되었다. 임종상(林宗相)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56. 고종 43년 4월 26일 계해 1906년 ○ 莊陵參奉林宗相,依免。九品李元榮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임종상(林宗相)을 면직하였다. 9품 이원영(李元榮)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57. 고종 43년 5월 1일 정유 1906년 ○ 莊陵參奉任坎宰, 依願免本官。尹宗植任莊陵參奉。장릉참봉(莊陵參奉) 임감재(任坎宰)는 본관 면직되기를 원하니 윤종식(尹宗植)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58. 고종 43년 5월 2일 무술 1906년 ○ 詔曰, 莊陵參奉尹宗植, 依願免本官。九品李元榮任莊陵參奉。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윤종식(尹宗植)은 본관의 면직을 원하니 9품 이원영(李元榮)을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했다.
359. 고종 43년 6월 1일 병인 1906년 ○ 詔曰, 莊陵參奉李元榮任泰陵參奉, 依願免本官。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원영(李元榮)은 태릉참봉(泰陵參奉)에 임명하였으니, 본직에 따라 면직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360. 고종 43년 12월 16일 무인 1906년 ○ 莊陵參奉李象麒依免。장릉참봉(莊陵參奉) 이상기(李象琪)를 면직하였다.
361. 고종 43년 12월 22일 갑신 1906년 ○ 詔曰, 莊陵參奉李命求依免。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명구(李命求)를 면직하라고 하였다.
* 이명구(李命求) : 1866년(고종 3)∼1904년. 조선 말기의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이형부(李馨溥), 조부는 진사(進士) 이익로(李翊老), 부는 이인규(李寅珪)이다. 웅주(熊州:지금의 충청북도 공주) 정산(定山)에 세거(世居)하여 이를 자호로 삼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553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904년(고종 41)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문집으로 『정산선생문집(晶山先生文集)』이 전한다.<한국역대인물DB>
승정원일기 고종 39년 임인(1902) 6월 2일(경인, 양력 7월 6일) 이명구(李命求)를 육군 보병 참위에 임용하였다.
362. 고종 44년 1월 7일 기해 1907년 ○ 詔曰, 莊陵參奉李象麒依免。조서를 내리기를, 장릉참봉(莊陵參奉) 이상기(李象琪)를 면직하였다.
363. 고종 44년 1월 11일 계묘 1907년 ○ 莊陵參奉河在衡依免, 代六品李象麒任。장릉참봉(莊陵參奉) 하재형(河在衡)을 면직하고, 6품 이상기(李象夔)에게 임명하였다.
364. 순종 3년 1월 23일 갑진 1909년 ○ 六品李象麒任莊陵參奉。6품 이상기(李象棋)는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