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펜데믹이 벌써 4년째,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집단 면역이 이루어져서 마스크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는데, 중국의 방역은 여전히 꽁꽁 묶인 겨울 날씨 같다. 10월1일부터 9일까지 열흘 가까운 연휴, 국경절을 맞이하고도 각 성의 방역 정책은 강경했다. 거주하는 성省을 떠나면 3일 이내에 PCR 검사를 두 차례 해야 하고, 연휴 이후 등교해야 하는 학생들은 성 밖에서 돌아온 날을 기준으로 연일 세 차례, 이틀 간격으로 두 차례, 일주일간 다섯 차례 검사를 마쳐야 등교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비행기를 타야하는 곳으로의 여행은 언감생심 시도하기 겁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과제 한 고비를 넘긴 큰 아들에게 선물도 줄 겸 떠나기로 정했다.
비행기로 세 시간 반을 날아가야 도착하는 운남성云南省의 리쟝丽江이 우리의 여행 목적지다. 상해에서 베트남까지의 비행시간이 대략 세 시간, 한국의 인천 공항까지는 한시간 반, 그런데 같은 중국에서 세 시간이 넘는 비행이라니! 어지간히 널따란 중국이다. 내가 살고 있는 쑤저우苏州는 산이 없기 때문에 이국적이라 느껴진다. 있어봐야 동네 동산 같은 규모니,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와 평평한 땅덩이로 이루어진 쑤저우는 나 같은 한국 토박이에게 한국의 산수를 그립게 하는 타국임을 확인시켜 주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세 시간 반을 날아가니 쑤저우와는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온통 산으로 뒤덮힌 땅들. 산들 사이의 길이 마치 실개천처럼 흘러간다. 터를 닦아 집을 짓고 농사를 지을 땅보다 산이 많아 보이는 이곳에 과연 사람들이 살 수 있을까 싶게 온천지가 산이다. 이렇게 땅 자체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은 수천 미터 상공의 하늘에서부터 확인 되었다.
운남성의 리쟝은 기본적으로 해발 2400미터의 땅에서 시작되는 고원지역이다. 쑤저우보다 위도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사계절 가을 날씨이다. 연평균 12~19도로 사계절 내내 적당히 따뜻한 곳이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우릴 맞이하는데, 반팔 티셔츠에 얇은 남방 하나를 걸치면 딱 좋은 서늘함, 상쾌함은 여행이 주는 설레임을 한층 고조시켰다. 우리는 비행장에 서 있을 뿐인데 이미 2400미터의 고도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리쟝 고성丽江古城과 나시족纳西族
첫 발품을 판 곳은 리쟝 고성이다. 얼마 전 다녀온 휘주 고성과 더불어 리쟝 고성은 중국의 4대 고성 중 하나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특히 이곳 리쟝 고성은 유일하게 ‘성벽 없는 고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곳은 중국의 소수민족 나시족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곳으로, 성의 중심으로부터 사방팔방으로 오밀 조밀한 길들이 펼쳐져 있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 한다. 리쟝은 실은 교역의 중심지, 그러니까 마방马帮들의 휴식처이면서 거래처, 그리고 차마고도茶马古道 의 길을 떠나기 위하여 여장을 단단히 하던 곳이다. 말과 차를 물물 교환하던 때, 지친 몸을 객잔客栈에서 쉬게 하고, 가지고 온 물건들을 흥정하며 바꾸고 길의 시작이면서 마침이기도 했던 곳이 바로 이곳 리쟝이다. 주로 마방马帮의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나시족纳西族은 꽤나 지혜로운 민족임이 틀림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문자가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걸 보면 분명한 사실이다. 문자의 형태는 영락없는 상형문자이나, 그림 같은 글씨라도 섬세한 감정까지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하니, 상당히 발전한 문자임이 틀림없다. 나시족의 고령층은 최근까지도 이 문자를 이용한다니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검증된 문자라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의 소수 민족 통합 정책으로 인하여 이제는 나시족의 문자를 가르치는 곳도, 배울 수 있는 곳도 없다. 곧 사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마도 앞으로는 나시족의 문자를 알고 쓸 수 있다면 무형문화재 제 몇 몇 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은 아직도 국민들을 끊임없이 세뇌시킬 일이 많은지, 곳곳마다 홍보용 빨간색 프랫카드와 문구들은 가장 중국다운 특색 중에 하나다. 특히 소주민족 자치구역은 '中华民族一家亲 同心共茿中国梦‘가 적힌 플랫카드가 위세당당하게 걸어져 있다. '중국민족은 한가족이니, 같은 마음으로 중국의 꿈을 이루자'라는 뜻으로 중국의 중앙집권적 통합정책을 한껏 미화시킨 선전 문구이다. 우리나라와 한민족인 중국의 조선족들 또한 30~40대 나이만 해도 한국어를 말하고 쓸 줄 알지만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전혀 한국어를 모른다. 이제는 나라 정책 상 소수민족의 언어를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빨간색 플랫카드만큼이나 선명하게 마음 언잖아지는 구석이다.
고성의 중심에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니 곳곳에 카페가 있다. 운남성의 기후 때문인지, 이곳은 또 하나의 커피 생산지로 커피 애호가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우리 부부 또한 중국에서는 운남성의 커피를 즐겨 애용하고 있다. 카페는 눈앞에 펼쳐지는 고성의 마을 전경을 맘껏 보라는 듯 넓은 테라스의 뻥 뚫린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경치가 좋으면 노래가 절로 나오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같은 마음인지, 카페의 무대에서는 기타의 반주에 맞춘 여행객들의 자발적 참여로 끊임없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사실 아마츄어의 노래가 귀를 몹시 피곤하게 했지만 또 나름의 여행의 흥취를 느낄 수는 있었다. 노래 속에 실린 그들의 설레임과 흥이 우리 또한 여행객임을 확인시켜 준다. 새로운 장소, 여행 일상이 주는 맛이란 게 바로 이런 것, 색다른 감흥에 겨워 평소에는 해보지 않던 것들을 용기 내어 하게 되는 것, 나이와 업무에 시달린 몸을 씻어버리고, 시간을 색다르게 환기하는 것, 생소한 공기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몸에 새로운 피가 도는 것 같은 기분이다.
관광지니만큼, 곳곳에 관광객을 부르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전통 의상을 대여해 화장을 해주고 사진 촬영 서비스를 해주는 곳이 많다. 확실히 내가 살고 있는 소주와는 색다른 의상과 물건들이다. 내가 소주에서 보았던 전통 의상들은 대부분 당,명,청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유목민의 영향과, 티벳 라마불교의 영향이 역력하다. 같은 중국이지만 다른 문화를 이루며 살았다는 느낌이 확연하다. 해발 3000미터 이상에서만 산다는 야크의 털로 만든 망토(진짜 야크털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스타일의 옷을 흉내 냈을 뿐)가 가장 흔하게 전시된 품목이다. 나도 하나 구입해 볼까 싶어 한 가게를 들어갔는데 그 가게는 주인장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다. 가게 전체는 주인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목도리와 쇼울로 가득했다. 나시족의 풍습인가 했더니, 이곳의 모소인摩梭人의 기술을 전수받은 곳이란다. 모소인을 모소족이라 하지 않는 것은 중국의 소수 민족 중에서도 숫자가 너무 작기 때문에 ‘족’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을 주인장으로부터 전해 듣는다. 다른 곳에서 듣기로는 모소인을 개칭해 나시족이라고 한다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짧은 중국어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여튼 나시족이나 모소인이나 모계중심 사회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소수였던 모소인들이 나시족에 통합되어 일괄적으로 나시족이라 불릴 수도 있겠다. 특히 가게에 붙여놓은 모소인들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이 민족은 원래 딸의 나라라고 불리며, 모계 사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모소인은 독특한 결혼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밤에 동침하고 새벽에는 헤어지는 관계이다. 남녀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저녁에 여자의 집에 가서 문을 두르려 구애를 하면 여자의 허락 하에 합방을 하고, 낮에는 각자의 집에서 생활한다. 천하에 남자는 어디에나 있고, 여자는 남자를 멋대로 한다.” 설명에 따르면 남자는 거의 여자들이 부리는 종과 방불했다고 한다.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일차적으로 남자들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위기의 친족들 사이의 성관계 금지 조항이 실질적으로 남자들을 향한 명령인 것은 가부장적 사회 내에서 가정을 지키고 보호할 일차적인 책임이 남성들에게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이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남성들 사이에서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고려한 약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여 여성을 바라볼 때에 성적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로 볼 것을 촉구하시는 의도셨지 싶다. 이런 성경 해석을 <오늘을 위한 레위기>라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아마 나시족을 위한 성경이 쓰였다면 분명 하나님은 여성들을 향하여 명령하셨을 것이다. 약자인 남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하.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들이 겪는 삶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제도가 아닌가 싶다. 운남 리쟝은 차마고도의 시작이랄 수 있는 곳이다. 차마고도란 비단길보다 200년이 앞선 교역길로서 운남에서 티벳에 이르는 3천 킬로미터의 물물교환의 길이다. 생을 위하여 열린 길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길일 수 있었던 바, 물물교환을 위하여 몇 개월씩 집 밖을 나간 남자들은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일정한 삶의 터전에서 자식들과 함께 먹고 사는 일을 여전하게 꾸려야 했던 여자들이 마을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일을 했지 싶다. 그야말로 남자들은 뜨네기 주민이었을 수도.
장예모张艺谋 감독은 나시족의 생활 풍습을 테마로 인상리쟝印象丽江江쇼를 연출했다. 이제는 1200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그 차마고도의 교역길을 들고 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터, 그야말로 그들의 생활상 또한 그저 관광 볼거리가 된 것이 분명하다. 교통의 발달로 일자리를 잃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들의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그의 인상쇼는 그곳의 거주민들에게 중요한 경제자원이 되고 있다. 쇼에 출연하는 인원만도 500명이 넘는다고 하니 규모가 어머하다. 일단 무대부터가 출중하다. 저 멀리 옥룡설산玉龙雪山을 배경으로 꾸며진 무대를 마주하는 순간, 관객은 이미 입이 벌어진다. 그리고 옥룡설산을 배경 삼은 무대는 이곳의 땅을 그대로 형상화 해 층을 이루어 고원의 다양한 높이와 척박함을 묘사한다. 사방 360 원통의 무대에 500여명의 나시족들이 말을 몰고 나와 남자다움을 연출하고 수천리길의 물물교환의 길을 형상화한다. 고된 일에는 술이 있는 법, 술 문화는 세계 어디나 만국 공통어인지, 기쁠 때도 술, 슬플 때도 술, 일이 있어도 술, 일이 없어도 술, 돈이 있어도 술, 돈이 없어도 술이라는 문구와 함께 술을 들이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실소를 내뿜고 말았다. 또한 어디에나 사랑에 속한 전설 하나씩은 있는 법,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확 트인 야외 공간에서 설산을 배경 삼아 관람하는 것은 그야말로 색다름 그 자체이다. 나는 괜하게 눈물까지 울컥하려 했다. 관광객이 1시간여의 공연 하나 보고는 그들의 삶을 얼마나 이해할까마는, 척박한 자연 속에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저 공통의 인류애를 느낀다고 하면 지나친 감상일까? 그들의 신앙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찾아내서 알려줘야 할까,라는 자못 굵직한 질문 또한 내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었다. 선교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보는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면 나는 인간 안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었다고 믿는다. 죄를 논할 때,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를 언급함이겠지만, 이는 죄의 열매일 뿐이다. 상대적일 뿐이란 얘기다. 죄를 이야기 하자면 기준점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 우리가 잃어버린 그 본성을 제시해주고 깨닫게 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한다. 죄의 낱낱을 열거하기 보다, 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히 보여주고, 그곳에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이 우리 삶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죄인이라는 열등감과 좌절을 넘어선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보게 된다. 죄란 바로 그분과의 관계가 깨져버렸던 것, 하여 멀리 멀리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일이지 이 와중에도 그분은 언약을 잊지 않고 면면히 은혜의 줄기를 펴셨다는 것,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아는 순간은 그야말로 내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나는 소수민족, 그들의 문화와 생활과 신앙 안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근본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생명에 대한 끈질길 본성이 이를 방증한다. 살고 싶지 않으면, 살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는다. 차마고도茶马古道는 삶을 위하여 떠난 길이었지만 무조건 생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죽는 길이기도 하였으니, 생을 위하여 죽음의 길을 간다함은 인간의 본성 안에 살고자 하는 생명의 힘이 얼마나 강인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일인 것이다. 나는 이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마음, 바로 영원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하고 싶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