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썬킴의 『거침없는 중국사』
‘썬킴’이라는 이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다. 채널A의 인기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 같은데, 거기 고정출연하는 패널 중 한 사람이다. 본명은 김선영,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언론학 석사이며 사이버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학자가 아닌데 도 이렇게 역사 관련 책을 저술했다. 『거침없는 중국사』라는 이 책은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이 저술한 아주, 조금, 특별한 책이다. 그래서 좀 더 재미있거나 다른 자극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거침없는 중국사』는 중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보다 ‘영화처럼 읽는 중국사’라고 했는데, 책의 두께로 봐서는 간단, 간단하게 역사를 훑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 중언부언할 필요 없이,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재미없으면 그냥 넘어가면서 중국사를 읽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중국사에 대한 대표적 역사서인 《사기》만 해도 무려 130권이나 되는 방대한 역사서인데, 264페이지에 불과한 이 한 권의 책으로 중국의 역사를 얼마나 깊이 다루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에는 50만 년 전 ‘北京猿人’이라 불리는 인류의 조상이 살았고, 그 후 1만 년 전, 구석기 시대와 농경이 시작된 8000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황하강 유역에서 무리 지어 살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역사는 한나라 때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 기록되었다. 《사기》에는 기원전 2070년 이전을 삼황오제가 통치한 시대라 고 했는데 이들이 씨족 집단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후 기원전 1600년경부터 470년간 夏나라가 있었고, 하 나라는 주왕(紂王)대에 와서 말희라는 애첩과 酒池肉林 속에서 놀아나다 탕왕(湯王)에 의해 멸망하고, 상나라가 건국되고 상나라는 殷나라와 짬뽕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하나라가 550년간 지속되다가 걸왕(桀王)대에 주왕과 비슷하게 애첩 달기와 놀아나다, 주족의 문왕에게 멸망 당했다. 그러나 상나라 때는 우리가 중국의 역사를 알게 하는 갑골문이라는 한자를 만들었고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다는 백이·숙제도 이 나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서 알게 한다. 이때부터는 힘있는 씨족장이 다음 세대를 이어나간 것이 아니라, 왕의 아들, 즉 세자가 세습하게 되어 부족의 형태가 점차 커졌음을 알게 한다.
周나라는 문왕-무왕-성왕으로 이어지는데, 어린 성왕이 등극하였으나 그는 어린데다 능력도 아버지, 할아버지만 못했다. 그렇게 되는 경우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首陽大君이다. 하지만, 성종의 삼촌인 周公은 그렇지 않았다. 주공은 나라 기틀을 세우고 철저한 封建制를 시행했다. 봉건제는 같은 씨족이나 공신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제도다. 기원전 1046년부터 790년간 소위 말하는 주나라시대 太平聖代를 구가했다. 이때는 문왕이 발탁한 姜太公 같은 이가 나라를 제대로 이끌었고, 주공 같은 집안 어른이 어린왕을 잘 보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 花無十日紅.
12대 유왕(幽王)이 포사라는 애첩에게 미쳐서 나라를 거덜 내고 말았다. 그때가 기원전 770년, 이때부터 중국의 고대사는 춘추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공자가 《춘추》라는 역사서를 기록했기에 춘추시대라고 불리기도 하고, 이것은 《사기》이전에도 역사가 기록된 사실을 알게 한다.
춘추시대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주나라가 씨족과 공신들에게 내린 제후국들이 사방에서 설치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12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가 분열과 통합의 역사이듯이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서로 싸우고 찌지면서, 통합하기도 해 결국 ‘春秋 五覇’라고 하는 5개 나라가 형성되었다. 이 무렵의 역사는 《전국지》에 잘 나타나 있다.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로 이어지면서도 여러 나라가 난립하였으나, 나중에는 ‘戰國 七雄’이라는 7개 나라를 중심으로 서로 겨루었다.
춘추전국시대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공자, 노자도 이때 사람이다. 맹자, 장자는 조금 뒤인 전국시대 사람이다. 諸子百家가 등장하는 시대다.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일컫는 管鮑之交, 오나라와 월나라 싸움으로 생긴 臥薪嘗膽, 吳越同舟 등이 이 시대에 만들어진 故事成語들이다.
이런 고사를 낳는 과정을 모두 훑어보면 좋겠으나,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와신상담’에 대해서만 보도록 한다. 지금 산동지방은 강태공이 제후였던 제나라였고, 강남인 지금의 상해와 남경 부근에는 吳나라와 越나라가, 사천성에는 楚나라가 있었다. 초나라에서 태어난 伍子胥의 아버지 吳奢(오사)는 평왕의 아들, 즉 태자를 가리키는 스승이었다. 그 태자가 혼기가 차 平王이 秦나라의 공주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며느리로 삼고자 심복 費無己(비무기)를 사신으로 보냈다. 비무기가 공주를 보는 순간 생각이 바뀌어 공주를 평왕의 후처로 삼고, 공주의 하녀 하나를 태자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평왕도 공주를 보자마자 비무기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런 막장드라마는 오사에 의해 들통났다. 그래도 평왕과 비무기는 진나라 공주가 낳은 늦둥이 아들을 태자로 삼고는 공주와 결혼하려던 태자를 변방으로 내쫓았다. 직언을 멈추지 않았던 오사는 결국 옥에 갇혔다. 그러나 왕과 비무기는 그를 쉽게 죽이지 못했는데, 오사에게는 아들 吳尙과 伍子胥가 있어서 복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오자서 의 본명은 吳員이고, 오자서는 그의 자다.
변방에 있다가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옥중 편지를 받고 돌아온 오상은 아버지와 같이 죽임을 당했으나, 오자서는 내용을 알고 자신이라도 살아있어야 복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오나라로 망명했다. 오나라에서 태자 光이 권력을 잡는 데 힘을 보탠 오자서는 왕이 된 광, 즉 闔閭에게 신임을 얻고 자신의 소원은 초나라를 멸하고 평왕을 죽이는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오자서는 초나라를 칠 군대를 양성하면서, 마침 제나라에서 망명한 孫武와 손잡고 초나라를 박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때 초나라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무덤을 파내어 시신을 꺼내 수백 번 매질로 뼈를 가루로 만들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오자서는 눈을 돌려 오나라 아래쪽에 있는 월나라를 치기로 한다. 물론 이것은 오왕 합려의 꿈과 상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越王 句踐은 아직 어렸다. 하지만 구천에게는 오자서 같은 신하 范蠡가 있었다. 합려는 월나라를 치다가 부상당해 후유증으로 죽으면서 아들 夫差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부차는 아버지 원수를 갚기 전에는 편히 잠잘 수 없다며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그것이 臥薪, 누울 와, 장작 신인 것이다. 오나라를 격파한 월나라가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 때 오자서는 10 수년을 차근차근 준비해 월나라를 치게 되는데, 범려가 우려한 대로 월나라는 박살이 났고, 심지어 구천은 오나라 포로로 잡혀 버렸다. 구천을 죽이라는 오자서의 직언을 무시한 부차는 구천을 노예로 삼았다. 한 참 뒤 부차가 병으로 고생할 때, 구천은 ‘제가 의술을 좀 압니다’하고는 부차의 변을 맛보고 병을 진단하기도 했는데, 이에 부차는 그를 신임하고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물론 오자서는 피를 토하면서 반대했지만, 뇌물을 받은 신하들에 의해 부차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구천은 오나라에서 당한 수모를 잊지 않겠다며 매일 곰의 쓸개를 핥으며 각오를 다졌다. 이것이 맛볼 상, 쓸개 담인 嘗膽이다. 그래서 둘을 합쳐서 ‘와신상담’이 된 것이다. 심지어 구천은 범려와 짜고, 西施를 부차에게 보내 미인계를 쓰기도 했는데, 항주, 소주 소흥에는 서시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아직 가보지 못해 아쉽다. 서시에게 빠진 부차를 보고 혀를 찬 오자서는 서시의 빰을 때리기도 했다는데, 그러니 오자서는 제명대로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자살을 명받고 죽은 오자서는 ‘박수칠 때 떠나라’는 명언을 실현하지 못한 장수였다. 하지만 그는 적이었지만, 친구였던 범려를 만나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을 ‘토사구팽’이라는 말로 전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는 보신탕이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한나라 한신이 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오자서가 한 말이다.
기원전 770년부터 403년까지가 춘추시대, 이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에 춘추오패, 전국시대에 전국칠웅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여기서 모두 훑기는 어렵겠다. 다만 전국시대 가장 강력했던 나라가 서쪽의 진나라였고, 그 나라의 왕 영정이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秦나라는 중국 서쪽 산시성(山西省)에 있었고 전국칠웅 중 한 나라였다. 전국칠웅은 秦, 楚, 齊, 燕, 趙, 衛, 韓나라를 말하는데, 이들은 형식상 주나라의 제후국이었지만 이미 주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국이었다. 힘이 약했던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먹어 치운 데는 무슨 수가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500원? 다른 나라들은 공자왈, 순자왈 하면서 도와 도덕으로 仁을 베풀라고 할 때 진나라는 商鞅이라는 인물이 재상에 취임하면서 ‘나라에서 한 말을 지키면 반드시 보상을 해 준다’는 것을 확실 하게 보여 주었다. 또한 지키지 않으면 처벌이 따른다는 것도 확실했다. 그것이 기원전 359년 일로 다른 나라들과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247년 겨우 13살이던 영정이 어찌 어찌해 왕이 되었는데, 제6대 진나라 왕이된 그는 기원전 230년 초나라를 시작으로 다른 여섯 나라를 차례로 박살 낸다. 이 무렵에 장의와 蘇秦 등의 합종연횡이 있었고, 제나라 같은 경우는 강대국 초나라가 박살 나는 것을 보고 미리 겁을 먹고 나라를 바치기도 했다. 기원전 221년 영정의 나이 39세 때 그는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왕이라 부르지 않고, 삼황오제를 합쳐 만든 황제라는 이름으로 등극했다.
주나라 봉건제의 폐단을 보아온 진시황은 이제부터 군현제를 시행하게 되는데, 통일 진나라의 행정구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에 작은 현을 두고, 모든 군현의 책임자를 수도 함양에서 임명해 내려보냈다. 뿐 아니라 전국의 도로, 문자, 화폐, 도량형 등을 통일했다. 물론 그것은 백성들이 편안하게 쓰라고 한 조치는 아니었다. 전국을 하나로 일사분란하게 통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 날 경우 쉽게 진압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한 흉노의 남침을 막겠다며 만리장성도 쌓기 시작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그때 쌓은 것은 아니지만, 처음 쌓기 시작한 것이 진시황 때다.
기원전 210년 7월, 자신이 정벌한 곳을 순시하는 것을 좋아했던 진시황은 돌아오는 마차에서 그만 쓰러져 죽고 말었다. 그의 나이 50살, 죽음을 예감한 그는 宦官 趙高와 丞相 李斯, 그리고 둘째 아들 胡亥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지금 만리장성 공사를 감독하고 있는 큰아들 扶蘇에게 황제 자리를 주라고.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생겼다. 조고와 이사는 호해를 다음 황제에 올리고는 부소에게는 자살을 명한다. 효심이 강했던 부소는 자결했다. 호해를 조종하기 편했던 조고는 이제 모든 권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2020년초 호해의 무덤 앞에서 사진 찍던 그때가 생각이 난다.
-2000.1.20 진2세황제릉-
진시황이 죽고 1년 후, 장성 공사에 동원된 陳勝과 吳廣이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기록에 남은 최초의 농민반란이다. 둘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며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더냐’라는 혁명적 구호로 봉기했는데, 고려 시대 망소·망이도 이런 구호를 남겼던 것으로 알려진다. 농민 900명과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들은 烏合之卒에 불과해 6개월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진나라에 망한 6개국들이 옛 영광을 되찾고자 들고 일어났다. 조고는 황제 호해를 죽이면서까지 반란을 억누르려고 하고는 죽은 진시황의 큰아들 부소의 아들인 子嬰을 황제에 올렸다. 그러나 자영은 황제에 오른 6일 만에 조고 일당을 모두 처형해 버린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이제 반듯한 황제가 즉위했으니, 진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싶으나 안타깝지만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반란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번졌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 통일된 진나라는 기원전 206년, 15년 만에 망하고, 기원전 202년 황우와 겨루던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했다. 그리고 기원전 8년 한나라 신하였던 왕망이 한나라를 멸하고, 신나라를 건국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3년 劉銖, 즉 한무제가 즉위하여 후한을 건국했다. 이를 두고 앞의 한을 前漢, 뒤의 한을 後漢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이 전국을 휩쓸고,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대전을 벌였고, 208년 적벽대전이 일어나 조조가 크게 패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12년 뒤인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魏나라를 건국하면서 한나라는 망했다. 249년 司馬懿가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고, 263년 허수아비 촉 황제 劉璿을 몰아내고, 280년 오나라도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지 시대는 끝났다. 사마염에 의한 진나라가 다시 중국은 통일됐다.)
반란의 중심에 뛰어든 인물이 項羽와 劉邦이었다. 항우는 초나라 사람으로 진시황에게 초나라가 망하자, 초나라 장군이던 할아버지 항연은 조용히 살고자 했으나,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너무 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항연의 아들이 항량인데 그도 진시황 통치하에서 숨죽이고 살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일찍 죽은 동생의 아들인 조카 하나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 조카가 바로 항우였다. 초나라 귀족 출신 항량과 항우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기회가 왔다며 바로 행동에 나섰다. 옛날 초나라 사령관의 아들과 손자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그 밑으로 몰려 들었다. 처음에 8000명으로 시작한 군사가 곧바로 10만의 대군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곧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군했다. 한편, 평민 출신이던 유방도 모병을 하고 출전을 준비했는데 그는 진나라 토목공사에 끌려가다가 폭우로 길이 끊기자 늦게 도착하면 맞아 죽을 것이 두려워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모의했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혁명을 모의하고 시작했으나, 사이즈 만큼은 달랐다. 항우는 10만 대군을 가졌으나, 유방은 고작 3000명 정도였다. 항우는 할아버지가 대장군이었으나 유방은 이름도 없는 촌부였다. 다만 항우는 남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독불장군이었고, 유방은 그래도 인복이 있었던지 여러 브레인들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또 그런 조언을 한쪽 귀로 듣고 흘리지도 않았다. 먼저 함양에 들어간 것은 유방이었다. 불쌍한 황제 자영은 황제가 된 지 46일 만에 죽고, 아방궁은 3개월 동안이나 불탔다고 전한다. 기원전 202년의 일이다. 유방이 항우를 四面楚歌에 몰아넣고 한나라를 세웠으면 순조롭게 나라가 발전해 가야 할텐 데 그렇지는 못했다. 북쪽의 흉노라는 족속이 자꾸 괴롭혔다. 그들에게도 사람이 있고, 욕망이 있고, 지도자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흉노’는 흉노어로 그냥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한족은 이를 끌어내리려고 오랑캐 匈자에 노비 奴자를 써서 불렀다. 가까스로 통일은 했지만, 흉노가 점점 무서웠다. 그런 와중에 통일한 다음 해 흉노와 접전하던 한왕이 흉노에 투항해버린 일이 있었다. 유방은 크게 격노했지만,(윤모씨처럼?), 어쩔 도리는 없었다. 와중에 운명은 유방편이 아니었다. 본부인 呂氏 편이었다. 유방이 나라를 통일하자 슬슬 다른 여인에 눈길을 주어 후궁을 들였는데, 그 여인이 아들을 낳자 그를 태자가 삼고자 했다. 그러나 기원전 195년 유방이 황제가 된 지 7년 만에 죽으면서, 후궁이던 戚부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여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2대 황제 惠帝에 올리고는 척부인은 물론 천하 명장 韓信까지 모두 죽였다. 유방이 나의 장자방이라던 장량도 멀리 떠나고 말았다. 너무 잔인한 방법으로 척부인을 죽이는 것을 본 혜제가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하고 달려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혜제는 서서히 미쳐갔다. 결국 7년 만에 그도 요절했다. 측천무후처럼 여황제가 된 여씨 부인은 모든 조정 대신을 여씨로 채우고, 15년 동안 한나라를 주물렀다. 여씨 부인이 죽자 유방의 친인척들이 들고일어나 유방의 아들 중 하나인 劉恒을 황제에 올렸다. 그가 3대 文帝다. 기원전 180년의 일로 망할뻔한 한나라는 겨우 다시 살았다. 이런 혼란한 나라를 본 궤도에 올려 논 황제는 무제였다. 기원전 141년이다. 그는 확실하게 흉노를 타도하고 주변국들의 반란을 잠재우기로 작정했다. 그로 인해 고조선도 망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무제 이후에 나름대로 나라를 유지하던 후한은 기원전 48년에 이르러 제11대 황제에 오른 元帝 때 위기를 맞는다. 위기의 시작은 중국의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王昭君과 관련이 있다. 왕소군은 원제의 3000명 궁녀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흉노는 한나라에 미녀를 보낼 것을 요구했고, 예쁘고 귀족인 여인은 보내주기 싫어서 못생긴 궁녀를 가리다가 당첨된 여인이 왕소군이었다. 왕소군은 궁궐에서 그림 그리는 궁중 화가 毛延壽에게도 돈이 없어 자신을 잘 그려달라고 청탁하지 못해 뽑힌 운명의 여인이었다. 예쁘지 않게 그려진 왕소군이 당첨된 것이었다.
왕소군이 흉노로 떠난 후 원제가 세상을 떠났고 아들 成帝가 기원전 33년 황제가 된다. 그런데 이 성제는 연산군과 같은 폭군에다 밤낮 주색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원제의 아내, 성제의 어머니 왕씨가 나라를 주물렀는데 왕씨 중에 王莽이라고 있었다. 왕망은 성제가 요절하자 哀帝를 황제에 올렸고, 그도 7년 만에 요절했다. 이제는 9살의 平帝가 황제가 되었으나, 이때부터 왕망이 발톱을 더러 내 스스로 假皇帝라고 칭하다가 서기 8년 나라를 新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었다. 신나라는 겨우 15년밖에 유지하지 못했지만, 한나라는 이 때 공식으로 망했다.
25년 유수가 이끄는 혁명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망은 부하에게 칼을 맞아 죽었다. 유씨 나라가 다시 세워졌으며 역사는 이때부터를 후한이라고 부른다. 황제가 된 유수, 즉 무제는 이제 철저하게 외척을 배격한다. 그러니 태자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환관이 필요했다. 《삼국지》가 환관을 타도하기 위한 이야기로 시작하듯 후한 말이 되자 환관이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10명의 환관, 즉 十常侍들을 영제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불리기도 했다. 사회가 혼란해지자 장각이라는 황건을 두른 도인이 나타나 세상을 바꾸자고 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황건족의 난이다. 흙을 상징하는 누런 두건을 썼다고 붙인 것이다. 그러나 184년 황건적의 난은 1년 만에 장각이 죽으면서 끝이 났다. 십상시에 둘러싸여 매일 밤 파티를 열던 영제는 189년, 34살에 요절했다. 겨우 14살 소제가 등극하니 그도 환관들의 밥이었다. 황제의 엄마 하태후가 섭정하는 동안 외삼촌인 대장군 何進이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다. 하진은 어느 날 하태후로부터 ‘오빠 빨리 궁으로 오세요’하는 연락을 받고 궁으로 들어가다 자객들의 칼을 맞고 허무하게 죽었다. 십상시들이 태후의 글씨를 흉내 내 하진을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하진이 죽기 전에 이런 일을 예상이라고 했던지 부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저 유명한 董卓이었다. 동탁 이후의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에도 정사 《삼국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동탁은 황제를 구한 영웅이 되어 낙양으로 입성하는데 수중에 황제가 있었으니 겁날 것이 없었다. 동탁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어린 소제를 끌어내리고, 더 어린 동생을 獻帝를 황제 자리에 앉힌다. 동탁의 횡포를 보다 못해 방방 곳곳에서 분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비와 관우, 장비가 만나는 장면도 이 때문에 생긴다. 동탁은 양아들 여포가 죽이는데, ‘貂蟬’이라는 미인이 등장하고, 초선을 서로 차지하려는 과정에 여포가 동탁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삼국지연의》가 꾸며낸 이야기다. 정사 《삼국지》에는 동탁은 부하에게 암살당했으며, 내 팽개진 시신 배꼽에 심지를 꽂아 불을 붙였는데, 뱃기름으로 며칠 동안 지글지글 탔다고 한다. 동탁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던 혁명군들이 머쓱해진 사이 조조가 나타났다. 그는 한나라를 재건하고 천하통일을 꿈꾼다. 서기 200년 원소와의 일전인 ‘관도대전’을 벌였다. 관도는 산동성 제남 서쪽에 있다. 《삼국지연의》는 ‘적벽대전’을 최고의 전쟁으로 치지만 사실은 이 관도대전이 실재 역사에서는 크고 중요한 전쟁이었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하자 《삼국지》의 실권자 3명, 즉 조조와 유비, 손권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220년 조조가 66세로 죽고 아들 曹丕가 껍데기만 남은, 인질로 잡고 있던 헌제를 급박해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魏로 바꾸었다. 한편 남경의 오와 사천성 성도에 있던 촉도 각각 황제를 내세워 천하삼분지계를 완성된다. ‘천하삼분지계’는 제갈량이 기획한 것으로 제갈량은 총 다섯 번 북벌 전쟁을 치렀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만큼 똑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조비가 죽은 후 아들 曹叡가 2대 황제가 되었다. 조예는 자질이 한참 부족한 인간이었다. 249년 실권자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찬탈하지 않고, 계속해서 허수아비 조씨를 황제로 내세우다가 251년 72살로 죽었다. 아들 司馬昭는 263년에 劉禪을 촉의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유비가 나라를 세운지 43년 만이다. 2년 후에 사마소가 죽자 아들 司馬炎이 핫바지 조씨 황제를 몰아내고 새 황제가 되었다. 魏나라는 晉나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위나라는 46년 만에 망했다. 이제 남은 건 오나라 뿐. 252년 손권이 죽고, 권력다툼이 벌어질 때 드디어 사마염이 오나라까지 삼켰다. 280년의 일이다.
(이어 5호16국 시대, 진나라 멸망, 수나라 건국과 멸망, 당나라 성립과 멸망 그리고 송→원→명→청으로 이어진다)
서기 313년 진나라 회제가 흉노가 일으킨 ‘영가의 난’으로 살해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진나라는 남경으로 도망가 동진을 세운다. 그러나 이 동진도 420년 망하는데, 그 사이 흉노세력이 북위를 세움으로써 남북조 시대가 이어지다, 양견이 수나라를 세우고는 수문제에 등극했다. 그전 5호 16국과 위진남북조 시대를 호기롭게 통합해 통일한 수나라도 결국은 망하는데 고구려도 한몫했다는 것은 다 안다. 수나라 장군이었던 이연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건국한 것은 순전히 둘째 아들인 이세민, 나중에 당태종이 되는 이의 힘이 컸다. 그는 꼭 마치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이방원을 닮았다. 후대를 위해 깨끗이 정리해 주는 것까지. 그러나 이세민은 정치는 아주 삼빡하게 잘한 모양이다. 그 시대를 ‘정관의 치’시대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그렇다.
291년부터 306년까지 진나라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8명의 사마씨 왕들이 서로 싸웠다 해서 이를 ‘8왕의 난’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절대 불러들여서는 안 될 흉노족과 선비족같이 그들이 오랑캐라고 하는 용병을 불러들이면서 흉노가 중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311년 흉노족이 진나라 황제를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이를 회제의 연호를 따 ‘永嘉의 亂’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에 따라 5개의 오랑캐 유목민족이 중국에 들어와 16개의 고만고만한 나라를 세움으로써 이를 ‘5호 16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35년 동안 지속된 이들의 이국 점령은 한족의 자존심을 구길대로 구기고 말았다.
한편 남쪽으로 내려온 동진은 420년 내부분열로 자멸해 사라졌다. 이때 중국 남부에는 송·제·양·진 4개국이 흥했다 사라졌다. 이들 4개 나라를 남조라 하고 북쪽의 북위를 합쳐서 ‘남북조시대’라 하고, 조조의 위나라, 사마염의 진나라를 합쳐서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기억되는 인물로는 북위의 孝文帝다. 그는 유목민 출신 황제였지만, 한족 문화를 사랑해 471년 중국문화를 수용하고 심지어 수도를 북쪽에서 낙양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또 이때 남조에는 書聖으로 불리는 황휘지와 도연맹이 활약했으며, 불교가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양제와 그의 아들이 아주 심취했고, 양나라는 백제와도 교류가 번번했다는 것은 무령왕릉을 통해 확인되기도 한다.
420년부터 159년간 이어진 남북조시대는 수나라에 의해 다시 통일된다. 혼란한 중국을 재통일한 楊堅은 진시황에 비교될 만큼 중국에서는 대단한 인물로 취급된다. 유럽은 로마제국 이후 한 번도 재통일된 적이 없으나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양견은 北周의 뛰어난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다. 다만 황제의 장인이 되고 나서, 581년 7살 난 외손자가 황제가 되면서 외손자가 황제 자리를 넘겨주어 황제가 되고 나라 이름을 隨로 바꾸고, 文帝가 되었다. 문제는 봉건제도 군현제도 아닌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뽑아 지방으로 내보내는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광종 때 시행했으니, 우리보다 한참 앞선다.
문제의 뒤를 이은 황제는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 楊廣이다.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 무슨 짓도 할 인간이었다. 그의 눈속임에 문제는 양광을 태자에서 끌어 내리려고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양광이 아버지는 물론 형 양용도 죽이고 황제 자리를 차지한다. 양광이 고구려 역사에 등장하는 2대 隋煬帝이다. 서기 604년의 일이다. 오죽했으면 중국인들이 그의 사후 시호를 양제라고 했을까 싶은데, 煬은 ‘불질러 태우다’는 한자다. 그의 이름을 땄다고 알려진 ‘수양버들’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참에 알아 두자.
수양제의 업적은 대운하 건설이다. 그는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대운하 공사를 610년 마무리했는데, 중국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총 2500㎞에 달하는 거대한 공사였다. 서울-부산을 5번 왕복하는 거리로, 공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는지는 기록하지는 않았다. 다만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더불어 양대 토목공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나라는 단 2명의 황제로 겨우 38년을 유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2차례 고구려 침공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황실이 모두 남쪽으로 도망가자 지방세력들이 기회를 잡고자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중에 이연이라는 수나라 장군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그는 우유부단해 결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세민이 앞장섰다. 이세민이 형 건성을 화살로 쏴 죽이는 것을 본 아버지 이연은 겁에 질려 바로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쫓겨났다.
이방원보다 더한 이세민은 정치 하나는 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도 폐착을 두기도 했는데, 황제가 된 지 19년 만인 645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다. 요동의 고구려성들을 차례로 쳐부수며 진격했으나, 안시성만은 달랐다. 야사에는 양만춘이 쏜 화살이 당태종의 눈에 박혀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내 생전에는 고구려를 다시 침략하지 말라고 하고,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적이었지만 바른말만 하던 위징은 이때 살아 있지 않았다. 당태종은 1차 고구려 침공 실패에도 여러 차례 더 고구려를 넘보다가 649년 51살에 죽었다. 시안에는 수나라와 당나라와 명나라의 수도로서 그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아무튼 당나라는 우리 삼국시대와 관련이 깊다.
‘측천무후’는 무씨 성을 가진 황후라는 뜻으로, 그녀를 황제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측천무후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지금까지 써온 것 이상으로 많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줄인다. 스스로 자처한 여황제로 인해 잠시 혼란을 겪던 당나라는 현종 대 다시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현종은 측천무후의 넷째 아들 예종의 아들로 측천무후의 손자다. 초기에는 쓴소리하는 신하를 곁에 두고 나라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737년 황후가 죽자 정신줄을 놓고, 밤마다 ‘부인 돌아오시오. 보고 싶소’하고 허구한 날을 뜬 눈으로 지샜다. 보다 못한 환관 高力士가 헌종의 18째 아들의 부인이 미인이라는 것을 알고 만나보라고 했다. 과연 절세가인이었다. 745년 현종이 56살, 楊玉環은 겨우 22살일 때 둘은 운우지정을 나눴다. 그 동안은 서로 알지 못했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사는 것이 미안했던지 18째 아들에게는 다른 여인을 소개해주고, 양옥환은 도교 사찰로 보내 신분 세탁을 하도록 했다.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華淸池의 海棠湯을 둘러보며 여행하던 생각이 자꾸 난다.
-2000.1.20 화청지 해당탕-
양귀비에 빠진 현종과 권력을 주무른 양귀비, 양귀비 집안의 오빠인, 이름도 충성하겠다는 뜻으로 바꾼 楊國忠, 막강한 군대를 지휘하던 安祿山, 이들은 당나라를 쥐락펴락하던 실세들이다. 755년 안록산이 ‘간신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양귀비는 덩치가 아주 큰 안록산을 양아들로 삼고 있었으므로 ‘우리 아들이 왜?’했지만, 권력이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도망 와중에 현종은 양국충의 목을 베고 양귀비도 목 졸라 죽였다. 그래서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말이 생긴 것일까?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느라 국고가 바닥난 당나라 조정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16살 난 마지막 황제 哀宗이 반란군 수괴 ‘황소의 난’을 진압한 周全忠에 의해, 907년 당나라 건국 290년 만에 사라졌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5대 10국’이라는 나라들이 난립하여 역사는 혼란스러웠다. 여기는 대는 大가 아니라 代로 교체한다는 뜻이다. 북부에 5개 나라가 있었다면, 남부에도 10개 나라가 있었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뒤 송나라가 통일하는 979년까지 70년을 ‘5대 10국시대’라고 한다. 주전충은 後梁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그에게는 양아들 하나, 친아들이 둘 있었다. 흔한 이야기기만 양아들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것도 며느리와 사랑에 빠지서 그랬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친아들들이 아니었다. 친아들 하나가 아버지와 배다른 아들을 죽이고 다음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싸우다가 16년 만에 후량은 망하고, 당나라를 잇는다는 後唐이 세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는 중국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점점 커지는 만주의 여진과 거란이 문제였다. 황제의 장인으로 평화롭게 後周를 이은 趙匡胤은 960년 나라 이름을 宋으로 바꾸고, 5대 10국을 차례로 정리해 나갔다. 그는 자신과 같은 군사력을 가진 군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것까지도 곧잘 정리해 버렸다. 하지만 만주의 거란족은 遙나라를 세우고 점점 군사 강국이 되어, 1004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쪽 송나라로 쳐들어왔다. 이에 송나라 眞宗은 매년 공납을 바치기로 하고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이때는 만주의 다른 유목민족인 여진이 金나라를 세웠다. 금·요·송 이런 형국이었다. 그러나 1125년 금나라는 송과 짜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럼에도 송나라는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산둥지방 梁山泊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宋江이 일으킨 반란으로 양산박과 송강의 이야기가 《수호지》다. 송나라는 1127년 황제 徽宗뿐만 아니라 수많은 황족과 귀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때 수도를 북경 남쪽 하북성 開封에서 황저우(杭州)로 옮겼고, 휘종의 동생 高宗이 남송을 세웠다. 남송은 금과 일전을 벌일 것인가, 화친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고종이 싸움을 싫어했으므로 결국 화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남송은 오래가지 못했다.
금나라가 남송을 괴롭히고 있을 때 금나라 북쪽에서 유목민족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 예전에는 ‘蒙古’라고 한 그 나라다. 蒙은 ‘어리석다’는 뜻이고, 古는 ‘오래되다’는 뜻인데, 한족이 몽골인들을 비하하기 위해 붙인 나라 이름이다. 이 이름을 몽골인들은 아주 싫어한다. 1162년 몽골 초원에서 테무친이란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1204년 40대 초반에 몽골제국을 세웠다. 스스로 ‘칭기즈’로 개명했고, ‘가장 위대한’이라는 뜻이다. 칸은 ‘추장’이란 뜻이다. 그는 중국과 서쪽 호라즘을 바라보기에 앞서 우선은 금나라가 더 급했으므로, 원정에 나서지는 않다가 1227년 66살로 사망했다.
아들 오고타이가 칸이 되자 그는 금나라를 손보기로 한다. 1234년 금을 멸망시키고, 1258년에는 남송 정벌에도 나섰다. 총사령관은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였다. 남송 정벌 과정에 쿠빌라이의 형이 죽고, 쿠빌라이 동생이 몰래 칸으로 등극했다. 이에 둘은 권력다툼이 일어나는데, 다행히 1271년 고려는 쿠빌라이 편에 붙었으므로 살아남았다. 몽골 공주를 맞이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 것이다. 칸이 된 쿠빌라이는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도 元으로 바꾸었다. 쿠빌라이가 칸일 때 마르크 폴로에 의해 원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죽고 1308년부터 25년 동안은 극심한 혼돈의 시대로 무려 8명의 황제가 오르고 쫓겨났다.
원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한족 차별이었다. 이때 원의 인구는 고작 100만 명, 한족은 1억 명으로 한족은 부글부글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1351년 머리에 붉은 띠를 맨 한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몽골 놈은 물러가라’고 외친 이들로 인해 원의 멸망은 앞당겨졌다. 그들은 붉은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음양오행에 따르면 송나라는 붉은색 기운으로 만들어진 나라였다. ‘몽골 타도, 송 부활’의 의미로 붉은 색 띠를 두른 것이었다. 홍건적을 이끈 지도자가 바로 朱元璋이었는데, 그의 본래 이름은 朱重八, 1328년에 태어났으며, 이때 유럽의 흑사병이 중국에도 몰아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중팔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부모 형제가 모두 죽자 그는 달랑 혼자 남았고, 중이 되기로 하고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죽어 나가는 것이 몽골 때문이라고.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홍건적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름을 元을 없앤다. 璋, 인재가 되겠다는 뜻으로 주원장으로 바꾸었다. 홍건적이 활개칠 때 고려의 수도 개경도 그들이 점령했는데, 이 홍건적을 깨부순 것은 이성계였다.
일자 무식꾼, 머슴살이와 중이되기도 한 주원장은 1398년 나이 71살로 죽었다. 손자인 주윤문이 建文帝로 등극했는데, 건문은 당시 연호다. 3대 황제는 永樂帝, 그는 중도, 연경, 북경으로도 불린 곳에 화려하고 웅장한 紫禁城을 지었고 쓰러져가던 만리장성을 새로 짓고 보수했다. 지금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인 이때 지은 것이다. 명나라가 왜 만리장성을 지었을까? 명나라가 자리를 잡아가던 1400년대 초반 북쪽 초원지대 몽골이 다시 세력을 키웠다. 처음에는 돈으로 평화를 사자였으나, 정통제에 이르러 칼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는 그가 전투 중 포로로 잡히는 일이 있었는다. 이 일로 북쪽 오랑캐 놈들과는 상종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리장성을 다시 쌓은 것이다. 장안성도 이때 크게 보수해 쌓은 것이다.
하지만 몽골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고, 금나라가 문제였다. 금은 처음에는 말갈족, 여진족이라 불리다가 명나라 때는 만주족이라 불렸는데, 만주족이 단결하면 무섭다는 것을 안 명나라는 끝없이 분열을 획책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터지자 처음엔 명나라는 조선의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명나라는 조선이 불쌍해서 파병해 준 것도, 예쁘서 파병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일본의 목표는 명나라였으므로 그렇다면 조선 땅에서 싸우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도 되지 않은 1616년 누루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새로운 나라를 선언한다. 後金, 금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후금이 요동 무순을 점령하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이 명을 지원하기 위해 강홍립 장군에게 1만 5000명 조선군을 참전시켰다. 다만 전쟁에는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밀명을 주었다. 명나라가 10만, 후금이 6만이었지만, 명나라가 박살이 났다. 명나라 마지막 崇禎帝는 자금성 뒤의 경산에서 자결을 하고 만다. 1644년 3월 19일 일이다.
앞으로의 대만의 운명도 가늠하기 힘들지만, 과거는 어땠을까? 청나라 姜熙齊는 대만을 중국 영토로 편입한 황제다. 대만은 원래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1661년 鄭成功이 청에 반대하던 명나라 장수로서 청나라에 맞서 싸우다 패하자, 2만 명 군사를 이끌고 섬으로 들어갔다. 한족으로 처음 섬에 상륙한 것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고 섬을 독립시켰다. 그래서 대만 곳곳에는 ‘대만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인물이 정성공이다. 그러나 1683년 강희제는 정성공 일당을 소탕하고, 대만을 청나라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강희제가 61년간, 중간에 雍正帝가 있었지만, 乾隆帝가 60년간 청나라를 다스렸으니, 그 둘이 청나라 대부분을 지배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1790년 청나라는 드디어 인구 3억 명을 돌파했다. 그렇게 세워진 청나라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1840년 청나라 차를 은을 주고 사들이던 영국이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하면서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아편전쟁, 청나라의 몰락과 중화민국의 탄생 등은 따로 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 8.31 오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