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극함(安克諴)安克咸
2派9世
증 병조참판 配享 顯忠祠
克諴 극함
字는 자성(子誠)
1601년辛丑生 을축(乙丑)년 무과 급제 정묘년에 소위포 싸움에서 이긴 공으로 훈련부정이 되다 병자호란 이후 비분강개하여 존주(尊周)의 의리로 최효일(崔孝一) 차예량(崔禮亮)과 함께 황명(皇明) 복위를 꾀하다가 신사(辛巳)년에 모사가 누설되어 의주부사 황일호(黃一皓)와 같이 형을 받다 숙종(肅宗)乙未1715년에 병조참의(兵曹叅議) 벼슬을 받고 다시 정조(正祖)丙辰1796년에 병조참판(兵曹叅判)으로 증직되어 의주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다 순종(純宗)己酉1909년에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으로 증직(贈職)되었다
묘용천 내중면 오동 임좌(壬坐) 부사(府使)를 지낸 성대중(成大中)이 받들어 찬사하여 전하고 영상(領相)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이 묘갈명을 찬하니 총록에 있다
配증정부인경주이씨(贈貞夫人慶州李氏) 父는 판결사(判決事)에 증직(贈職)된 충급(忠伋)
묘합장(合葬)하다
?∼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성(子誠).
병조참판 안준(安浚)의 아들이다.
1625년(인조 3) 무과에 급제,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이립(李立)과 함께
용천(龍川)의 소위포(少爲浦)에서 후금군(後金軍)의 배후를 위협하는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요동(遙東) 수복작전을 펴고 있던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을 도와
활약한 공으로 훈련원부정이 되었고, 명나라로부터는 의병장의 은자패(銀子牌)와 1,000석의 쌀을 하사받았다.
1641년 최효일(崔孝一)·차예량(車禮亮) 등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명나라를 도울 것을 모의,
먼저 최효일과 차예량을 등주(登州)에 보내고, 뒤에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역관 정명수(鄭命壽)에게 발각되어 서울로 잡혀와 처형되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의주의 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와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안극함(安克諴) 조선후기?-1641 무신 의병장.자는 자성(子誠) 父는병조참판 안준(安浚)1625년(인조3)무과에 급제,
정묘호란 때 용천(龍川)소위포(少爲浦)에서 활약함
元讓義州人贈兵曹判書諡忠壯 安克諴 字子誠 龍川人 贈兵曹參判 車禮亮兄忠亮從弟元轍車孟胤張厚健安東人以上五人俱贈兵曹參議享于 義州顯忠祠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안극함(安克諴)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
*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
숙종경인건백마산성사 정조기유액현충사.
肅宗庚寅建白馬山城祠 正祖己酉額顯忠祠.
제향. 강감찬(고려 문하시중 시추충협모안국공신 개국후 시인혜). 임경업(호고송 청북방어사 수군장 지중추 시충민). 황일호(호지소 부윤 증좌찬성 시충열 이하구 병자호난순국의사). 최효일(증병판 시충장). 안극함(증병참). 차예양(증병참). 차충양(예양제 증병참) 차원철(예양종제 증병참). 차맹윤(증병참). 장후건(증병참).
祭享. 姜邯贊(高麗 門下侍中 諡推忠協謀安國功臣 開國侯 諡仁惠). 林慶業(號孤松 淸北防禦使 水軍將 知中樞 諡忠愍). 黃一皓(號芝所 府尹 贈左贊成 諡忠烈 以下俱 丙子胡亂殉國義士). 崔孝一(贈兵判 諡忠壯). 安克諴(贈兵參). 車禮亮(贈兵參). 車忠亮(禮亮弟 贈兵參) 車元轍(禮亮從弟 贈兵參). 車孟胤(贈兵參). 張厚健(贈兵參).
*별단(別壇)
제향. 명국유민 임인관등구십오인. 조선 백대호등이십일인.
祭享. 明國遺民 林寅觀等九十五人. 朝鮮 白大豪等二十一人.
활쏘기 시험에서 세 번을 맞춘 안필을 훈련원 주부로 삼게 하다
춘당대에 나아가 서북 별부료군(西北別付料軍)의 활쏘기 시험을 보였는데, 전 부장(前部將) 안필(安泌)이 세 번을 맞추었다.
상이 그가 고 충신 안극함(安克諴)의 후손이란 말을 듣고 특별히 훈련원 주부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庚戌/御春塘臺, 試西北別付料射, 前部將安泌三中。 上, 聞知其爲故忠臣安克諴之後, 命特除訓鍊主簿。
정조 46권,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3월 10일(경술) 1번째기사
忠烈公黃一皓忠壯公崔孝一祠版遣地方官致祭車禮亮安克諴車忠亮車元轍車孟胤張厚健竝施加贈之典詔
同志殉節。其節甚苦。其蹟甚奇。忠烈公黃一皓。忠壯公崔孝一祠版。竝遣地方官致祭。贈參判車禮亮。贈參判安克諴。
贈參議車忠亮。贈參議車元轍。贈參議車孟胤。贈參議張厚健。竝施加贈之典。
正軒集v10
安克諴
安克諴者龍川府人也以勇力聞於東海能文章慷慨有膽略天啓中金人日盛數犯朝鮮朝鮮以李希健守龍川號曰洪陽君克諴事洪陽君築龍骨城金人攻之城中兵散洪陽君走時克諴之父浚與李立設柵浦口爲死守計推李立爲將克諴辭洪陽君往從之一日
三戰三勝歸附者日衆衆至數千人毛文龍遂聞于朝帝嘉之拜李立都督賜銀字牌先是劉綎戰死深河 克諴 欲提戈入虜中以快志有兄克諧尼之遂太息而止時年十八崇禎九年從林將軍入錦州衛及還義州崔孝一宣川車禮亮仗劍至克諴曰君輩遠訪我寧有意乎禮亮曰中原亂矣計將安出克諴大悅請與共事孝一曰吾入登州得兵擣瀋陽子與禮亮從東海而起金虜不難滅矣克諴抵掌笑曰善入中國得褊師橫行海垈間莫如崔君臨大事制機偵敵莫如車君繕戎器以待變克諴不敢辭孝一曰善遂誓天以自結或聚歗
山谷或托以海商 泛舟遊於登萊之徼里中皆笑曰彼輩自稱大丈夫乃反爲販貨翁耶克諴與禮亮送孝一入中國禮亮酒酣以歌克諴和之中夜乃泣平明孝一浮于海禮亮潛往瀋陽克諴市駿馬利劍時陟戍樓北望遼山歔欷彷徨者久之事大謬禮亮被執於金人其主遣使朝鮮捕克諴甚急或勸之去克諴曰吾矢一死焉耳遂爲其所捕金使械至漢陽殺之臨死瞑目叱金使曰恨不殺胡賊以報明天子耳禮亮死於瀋陽其從父弟元轍素卓犖有氣節及金人莅鴨綠江夷禮亮之族朝鮮人紿之曰唉元轍若以何罪欲受刃爲哉若
元氏也元氏無罪爾何爲哉元轍大呼曰爾不聞禮亮之弟車元轍乎男兒死耳豈變姓而偸活耶遂見殺江漢黃景源爲陪臣傳如崔孝一車禮亮事爲其傳頗詳獨於克諴而闕之者史之缺文也
해동외사 海東外史v1
安克諴者。龍川府人也。以勇力聞於東海。能文章。忼慨有膽略。天啓中。金人日盛。數犯朝鮮。朝鮮以李希健守龍川。號曰洪陽君。克諴事洪陽君。築龍骨城。金人攻之。城中兵散。洪陽君走。時克諴之父浚。與李立設柵浦口。爲死守計。推李立爲將。克諴辭洪陽君。往從之。一日三戰三勝。歸附者日衆。衆至數千人。毛文龍遂聞于朝。帝嘉之。拜李立都督。賜銀字牌。先是。劉綎戰死深河。克諴欲提戈入虜中以快志。有兄克諧尼之。遂太息而止。時年十八。崇禎九年。從林將軍入錦州衛。及還。義州崔孝一,宣川車禮亮仗劒至。克諴曰。君輩遠訪我。寧有意乎。禮亮曰。中原亂矣。將計安出。克諴大悅。請與共事。孝一曰。吾入登州得兵。擣瀋陽。子與禮亮從東海而起。金虜不難滅矣。克諴抵掌笑曰善。入中國得褊師。橫行海岱間。莫如崔君。臨大事制機偵敵。莫如車君。繕戎器以待變。克諴不敢辭。孝一曰善。遂誓天以自結。或聚嘯山谷。或托以海商。泛舟遊於登萊之徼。里中皆笑曰。彼輩自稱大丈夫。乃反爲販貨翁耶。克諴與禮亮。送孝一入中國。禮亮酒酣以歌。克諴和之。中夜乃泣。平明。孝一浮于海。禮亮潛往瀋陽。克諴市駿馬利劒。時陟戍樓。北望遼山。欷歔彷徨者久之。事大謬。禮亮被執於金人。其主遣使朝鮮。捕克諴甚急。或勸之去。克諴曰。吾矢一死焉耳。遂爲其所捕。金使械至漢陽殺之。臨死。瞑目叱金使曰。恨不殺胡賊以報明天子耳。禮亮死於瀋陽。其從父弟元轍素卓犖有氣節。及金人莅鴨綠江。夷禮亮之族。朝鮮人紿之曰。唉元轍。若以何罪欲受刃爲哉。若元氏也。元氏無罪。爾何爲哉。元轍大呼曰。爾不聞禮亮之弟車元轍乎。男兒死耳。豈變姓而偸活耶。遂見殺。江漢黃景源爲陪臣傳。如崔孝一,車禮亮事。爲其傳頗詳。獨於克諴而闕之者。史之觖文也。
석재고(碩齋稿) 碩齋稿卷之九 海東外史 윤행임(尹行恁)
의주(義州) 현충사(顯忠祠) 치제문
충렬공(忠烈公) 증 좌찬성 황일호(黃一皓), 증 병조 참판 차예량(車禮亮)ㆍ안극함(安克諴), 증 병조 참의 장후건(張厚健)ㆍ차충량(車忠亮)ㆍ차원철(車元轍)ㆍ차맹윤(車孟胤) 등을 추향(追享)하고, 증 병조 판서 최효일(崔孝一)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리고, 이어 충민공(忠愍公) 증 좌찬성 임경업(林慶業)에게 치제하였다
백마산(白馬山)이 드높고 / 馬山峨峨
압록강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 鴨水東流
이 땅에서 사당의 제향을 받으니 / 廟食玆土
천추에 빛남이 있네 / 有光千秋
황 충렬공(黃忠烈公)과 / 維黃忠烈
여섯 분의 의사에 대하여 / 曁六義士
신주를 만들어서 받들어 모시고 / 治主以升
일체로 함께 제사를 드리네 / 一體同祀
우리 민사에 복을 주고 / 福我民社
우리 관방을 공고히 하소서 / 鞏我關防
어찌 보답했다고 할 것인가 / 曷云酬之
권하는 술잔이 이에 있네 / 有泂其觴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4권 제문(祭文) 6 정조(正祖)이산(李祘)
義州顯忠祠致祭文
忠烈公贈左贊成黃一皓,贈兵曹參判車禮亮,安克諴,贈兵曹參議張厚健,車忠亮,車元轍,車孟胤等。
追享贈兵曹判書崔孝一賜諡忠壯。仍致祭于忠愍公贈左贊成林慶業。
馬山峨峨。鴨水東流。廟食玆土。有光千秋。維黃忠烈。曁六義士。
治主以升。一體同祀。福我民社。鞏我關防。曷云酬之。有泂其觴。
弘齋全書卷二十四 祭文六 正祖 李祘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皓)를 의주(義州)의 현충사(顯忠祠)에 뒤미처 배향하라는 하교
고(故) 만호(萬戶) 정운(鄭運)에게 관직과 시호를 내려 주라는 하교를 덧붙이고, 고 충신 최효일(崔孝一)에게 더 증직하고 차예량(車禮亮)과 안극함(安克諴)을 현충사에 뒤미처 배향하라는 하교, 현충사에 배향되어 있는 신하들에게 사제(賜祭)하라는 하교, 선무사(宣武祠)를 수리하여 보수하라는 하교, 고 통정(通政) 윤형갑(尹衡甲)을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하라는 하교, 내승(內乘) 정계주(鄭繼周)에게 사제(賜第)하라는 하교를 덧붙여 주냄
관서(關西)의 칠의사(七義士)를 뒤미처 배향하고 더 증직한 일로 인하여 생각건대, 황 충렬공이 비분강개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취는 지금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는 것이다. 충렬공이 의주(義州)를 맡고 있을 때 온 천지의 오랑캐들을 섬멸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수루(戍樓)에 오를 때마다 오랑캐의 기마(騎馬)가 날마다 관문(關門) 밖을 짓밟고 있는데도 아무도 천조(天朝)를 위하여 의로운 마음으로 염려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고는 번번이 슬피 노래 부르며 밤을 새우곤 하였다. 그러다 칠의사가 귀정(歸正)을 앞장서서 논한다는 것을 듣고 흔쾌히 도와 성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이 마침내는 새어 나가 화를 입게 되었는데, 저 일곱 명이 의사(義士)가 된 것은 곧 충렬공이 인도해 준 것이었다.
지금 일곱 명은 함께 사당에서 제향을 받고 있는데 유독 충렬공만 빠져 있으니, 어찌 잘못된 전례가 아니겠는가. 이곳에 이 사당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제향을 지내면서도 충렬공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비록 빼어나고 굳센 영혼을 지닌 일곱 명으로서도 필시 원학(猿鶴)이 노래하는 지하에서 마음 편히 여기지 못할 것이다. 증 좌찬성 충렬공 황일호를 의주의 현충사에 뒤미처 배향하고 그날 치제하라.
오늘 봉실(奉室)에 삼가 전배(展拜)하니 더욱 쇠망한 명 나라에 대한 감회가 간절하다. 고 충신 최효일에게 더 증직하고 또 고 충신 증 병조 참의 차예량과 증 호조 참의 안극함을 똑같이 현충사에 뒤미처 배향하도록 하라.
○ 의주 현충사에 뒤미처 배향한 충렬공 황일호, 증 병조 참판 차예량ㆍ안극함, 증 병조 참의 장후건(張厚健)ㆍ차충량(車忠亮)ㆍ차원철(車元轍)ㆍ차맹윤(車孟胤), 시호를 하사한 충장공 증 병조 판서 최효일에게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되 오늘 향을 받아야 할 것이다.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사판(祠版)이 함께 사당 안에 있어 주향(主享)과 다름없는데 어찌 빠뜨릴 수 있겠는가. 똑같이 치제하라. 제문은 충렬공과 충장공에 대한 것과 함께 친히 지어 내릴 것이다. 그 나머지는 대신 지어 계하(啓下)받도록 하라. 충장공은, 연시(延諡)는 그 집에서 하고 사제(賜祭)는 본사(本祠)에서 하도록 하라. 본사의 주향은 곧 고 태사(太師) 강감찬(姜邯贊)이니 또한 치제하라. 모두 오늘 향을 전하여 이날 솟구치는 쇠망한 명 나라에 대한 감회를 붙이도록 하라.
홍재전서(弘齋全書) 제35권 교(敎) 6
忠烈公黃一皓追享義州顯忠祠敎
附故萬戶鄭運贈職賜諡敎。附註故忠臣崔孝一加贈。車禮亮,安克諴追享顯忠祠敎。顯忠祠腏享諸臣賜祭敎。宣武祠修補敎。故通政尹衡甲不祧敎。內乘鄭繼周賜第敎。
因關西七義士追配與加贈事思之。黃忠烈慷慨殉身之跡。尙令人隕涕。當忠烈之守龍灣也。有廓淸海岱之志。每登戍樓。見胡騎日轢關外。而無人爲天朝出義排患者。輒悲歌終夜。及聞七義士倡論歸正。欣然助成之。謀遂洩而及於禍。彼七人之爲義士。卽忠烈有以啓之也。今七人者。同躋祠享。而獨忠烈闕焉。豈非欠典。是地無是祠則已。祠之而不侑忠烈。則雖七人之英魂毅魄。必將怵惕不安於猿鶴謳唫之中。贈左贊成忠烈公黃一皓。追享於義州顯忠祠。其日致祭。
今日祇拜奉室。益切匪風之感。加贈故忠臣崔孝一。而又故忠臣贈兵曹參議車禮亮。贈戶曹參議安克諴。一體追享於顯忠祠。○義州顯忠祠。追享忠烈公黃一皓。贈兵曹參判車禮亮,安克諴。贈兵曹參議張厚健,車忠亮,車元轍,車孟胤。贈諡忠壯公贈兵曹判書崔孝一。而遣官賜祭。今日當受香。而忠愍公林慶業祠版。同在祠中。無異主享。豈可闕爲。一體致祭。祭文與忠烈忠壯。同爲親撰以下。其餘代撰啓下。忠壯則延諡於其家。賜祭於本祠。而本祠主享。卽故太師姜邯贊也。亦爲致祭。皆於今日傳香。以寓此日風泉之思。
每閱忠武全書。見鹿島萬戶鄭運事。未嘗不拊髀興歎。使伊人不有雲臺之戰。何以致鳴梁之捷。唐浦之勝乎。薄暮層溟。促櫓先登。使遮海之賊艘。不能相抗而運則殉矣。似此忠勇。求之史牒。罕與爲比者。此猶在運爲一節。慷慨憤迫。勸起忠武。卽此人。特以乘障之士。微而未闡。尙無錫諡之典。豈可但以欠典闕事謂哉。向訪其孫。先令軍門。付祿其後。幷與復職。而未聞有收錄之擧。矧當大政。豈可虛過。雲臺。卽釜山地方也。御營廳把摠鄭爀。今日政。釜山僉使作窠差送。而故萬戶鄭運。特贈兵曹判書。仍令弘文館。議美諡。
弘齋全書卷三十五 敎六
龍骨城 등지의 전투 상황과 宣川 義兵將 등의 활약 등에 대한 보고를 수합하여 올린 平安監司의 장계
○ 平安監司狀啓, 卽接龍川小爲浦義兵將訓鍊判官李立龍報內, 當初龍骨城潰散之後, 奴賊焚蕩閭閻, 廝殺男女, 矣身招集散民, 領率若干將官, 千摠金缺, 右把摠李仲立·安右咸, 哨官沈達海·崔希男·金義老·張右·李德立·張希俊·吳重生, 偵探將張麟·金重汴·張屹·張希宗·張述·安克諧等, 托身於唐將, 三旗鼓士〈?〉善或以偵探于鴨綠江爲有如可, 回泊彌串, 領我軍結陣于都間山爲有如乎。三月十八日辰時量, 奴賊千餘騎, 自東路仍至結陣處, 連二日相戰, 所殺幾至二百餘名, 中箭帶傷者, 不知其幾, 同賊盡輸其死傷, 十九日午後退走爲去乙, 卽爲移陣于北爲浦爲有如乎。又於同月二十三日巳時量, 賊兵二千餘騎, 來圍我軍所駐處, 至酉末相戰, 射殺二百餘名是乎白去, 伊賊亦輸其屍, 故不得盡斬, 只斬五頭, 甲冑五件艱難得奪爲有如乎, 督府差留駐陣中, 斬級甲冑等物, 卽送都督府爲旀, 當初召募形止及相戰緣由, 三月卄四日馳報成貼, 使同守金明金等, 定送爲有如乎, 時未回來, 安克咸等七人, 領軍邀擊, 射殺不知其數, 斬級四頭, 亦送督府, 義兵招集形止及三巡相戰軍功, 成冊上送。且宣川·劍山義兵將, 左協將李宗義, 右協將田德年等馳報內, 賊兵入寇之初, 惟曰, 宣川, 列邑之中無城郭, 盡陷賊頹, 奪掠財物, 聚會男女, 置諸圍陣中, 餘生士民等, 束手無策, 脫身潰圍, 遁入劍山巖窟之中, 忘生奮義, 招集散民千餘, 劍山之險, 十倍於蜀道, 虜賊百萬, 決難卒犯, 千餘人入其險窟, 臨賊放砲, 射殺者, 一日三十餘名, 奪馬者八九匹, 自三月初至四月初九日, 連日數十餘戰, 未嘗一敗, 射殺合爲三百餘名, 奪馬三十餘匹分叱不喩, 軍功成冊上送次, 龍川山城, 以馳報爲白有在果。但兵盡卒飢, 今月初十日, 飢民男女百餘人, 從間道東向京城爲如可, 爲胡兵盡獲, 矣徒文武士民等, 率數百餘人, 據險固守之際, 毛都督聞此奇, 遣自募將毛求然·許存等, 各率軍兵百餘人來到, 與我軍合勢, 自今月初十日連戰, 射殺四十餘人, 奪馬十餘匹, 唐將於前後竭力討賊, 及飢民情由備。督府軍餉入送次, 以定將一人領去。定州別監金廷績都目內, 本州慈聖峯摘奸, 則同峯三面懸岸如削, 人跡不到, 惟西一面, 暫有底下, 新築石城, 防備器具, 三稜杖大小石塊無數負積, 兵器私持弓千餘張·雜箭八九部, 累次相戰, 已盡破毁, 只有鳥銃·長槍·環刀略干, 防牌段, 閭家棺板門戶, 多數浮取, 列立峯西面, 去二月初十日爲始入守, 所謂義兵五十餘名外, 本州各官避亂人等, 聞奇來集, 男女老弱竝一千卄餘名, 時方入據峯上, 前日與賊九巡相戰, 每次勝戰, 我國人段, 無一名致傷, 賊兵段, 致死者頗多, 同峯太高, 未及斬首, 同賊敗走時, 棄置馬一匹·白旗一·甘土一·胡箭三四部·鐵甲二領·草綠卜多只等乙, 峯上捨置爲有齊, 糧食已盡, 菜色滿顔, 相對涕泣, 慘不忍見事。本月二十三日, 在永柔, 酉時, 日暈左珥。龍川出身自初不離李渾, 狀啓持來。
以上內下日記
승정원일기 인조 05년 1627년 天啓(明/熹宗) 7년 인조 5년 4월 26일 (임술) 원본17책/탈초본1책 (6/6)
命義士 崔孝一 等子孫題給米布
正言 柳孟養 啓言灣上義士 崔孝一 車元轍 安克諴 等與故 府尹 林慶業 黃一皓 諸人密通天朝謀襲虜營大功未成秘計先漏慘被虜館之屠戮 孝一 則獨免虜禍自經於 崇禎皇帝 墓前者尤萬萬卓犖請 孝一 等子孫題給米布以示朝廷崇奬節義之盛意從之
1779 년1월16일 국조강목 일성록 정조 3년
의사(義士) 최효일(崔孝一) 등의 자손에게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다.
○ 정언 유맹양이 아뢰기를,
“만상(灣上)의 의사 최효일, 차원철(車元轍), 안극함(安克諴) 등과 고(故) 부윤(府尹) 임경업(林慶業), 황일호(黃一皓) 등 여러 사람이 은밀히 중국과 내통하여 오랑캐의 군영을 습격하려고 모의하였다가, 큰 공을 미처 이루기 전에 은밀한 계획이 누설되어 참혹하게 노관(虜館)의 도륙을 당하였습니다. 최효일이 홀로 오랑캐의 화를 면하였으나 스스로 숭정 황제(崇禎皇帝)의 묘 앞에 가서 자결하였으니, 그 절의가 더욱더 우뚝합니다. 최효일 등의 자손에게 쌀과 베를 제급하여 조정에서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성대한 뜻을 보이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1월 16일(신축)
“만상(灣上)의주의 의사(義士)인 최효일(崔孝一)·차원철(車元轍)·안극함(安克諴) 등은 사적(事蹟)이 뛰어났으니, 그 자손들에게 미포(米布)를 지급하기를 청합니다.”
정조 7권, 3년(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1월 16일(신축) 1번째기사
命贈 參判 崔孝一 加贈正二品職
右議政 尹蓍東 啓言贈 參判 崔孝一 贈諡事成命已下非當品贈職而施以節惠之典者似無其例且 崔孝一 車禮亮 安克諴 事績之奇偉忠烈之炳朗將有辭於天下後世則一資加贈非可勒惜請 崔孝一 加贈正二品職從之仍命政官牌招開政
命 平安監司 金載瓉 狀啓中故忠臣 崔孝一 事爽實委折關問該 道臣 後論罪
先是 載瓉 狀啓以爲故 訓鍊副正 安克諴 龍川 人也故 敎授 車禮亮 宣川 人也少卓犖有奇節自丙子後有北復之意聞 義州 人 崔孝一 素多氣略結爲死友號爲 淸北 三豪一日 克諴 禮亮 謂 孝一 曰古有魯 仲連 何如人也 孝一 曰諾吾有意君敢言可無從乎三人因相與謀曰一人入 登州 說天朝諸將直擣 瀋陽 一人入 瀋陽 爲內應一人擧 淸北 義士以入則事可成也 克諴 曰內附莫如崔君偵諜莫如車君倡率同志臨機北驅吾不多讓于君輩也於是三人潛募死士百餘人往來江湖間己卯 孝一 自 彌串 發船向 登州 三人作詩揮涕而別辛巳 禮亮 潛渡江直投瀋中自是 克諴 日治戰具以待北報事竟露 禮亮 逮瀋獄被酷刑臨死嚼一指血淋漓作書付家人罵不絕口而死 克諴 械致于京與 黃一晧 死于市當刑色不變大罵 鄭命壽 曰恨不先斬汝 孝一 隸 吳三桂 軍皇京陷上 崇禎皇帝 陵痛哭七日而死後 孝一 累贈至 左贊成 諡忠烈 禮亮 贈 戶曹參判 克諴 贈 兵曹參議 同時死事人竝貤贈有次此皆在故 相臣 閔鎭遠 奏議故重臣 鄭宲道 啓中甚悉目 孝一 追享灣祠之後 淸北 多士擧狀申告于 道臣 曰辛巳死事諸人受朝家褒典固至矣況 崔孝一 之躋子祠享可使百世起義但云義士其志同其事同其死也又同若使太史書之將見三士同傳而今使 孝一 獨腏享列 克諴 禮亮 則不與焉是睢陽之廟祭巡而不祭遠者也蓋結義主策卽 克諴 而特 孝一 之死磊落光大比二士更高一著故邑士呈文先擧 孝一 故也然等是死耳易地則皆然 孝一 今旣腏食矣 克諴 禮亮 之一祠同配實是一路之輿論向臣省部之行路過灣上諸儒聯狀一辭無異今此追配之論寔出公議之同然自有所不可遏者故今因孝烈修啓之時詳採事實以聞而祀享體重臣不敢指一以啓令該曹稟處至是 禮曹判書 閔鍾顯 啓言奏御文字何等審愼而 平安監司 金載瓉 狀啓中以故忠臣 崔孝一 之贈 戶參 而誤稱屢贈至 贊成 至於節惠之典則近始因特敎方爲擧行而謂以忠烈賜諡云者極爲未安請當該 道臣 重推敎以贈 參判 之賜諡雖因特敎旣無可據之文跡則從大臣之言先令加贈然後賜諡實合重愼之意故耳朝廷之擧措猶且如此況奏御文字乎又況事實關係乎無諡而曰有諡未贈 正卿 而至謂已贈貳相云者不可但以不審言其委折爲先關問後草記論罪
命贈 戶參 車禮亮 贈 兵議 安克諴 配享 顯忠祠
敎曰今日祗拜奉室益切匪風之感因 右相 筵奏加贈故忠臣 崔孝一 而又聞 禮判 之言知有 道臣 狀請者取見狀聞此言卽予今日欲言者事若不偶何待稟處故忠臣贈 戶曹參判 車禮亮 贈 兵曹參議 安克諴 依故忠臣贈 判書 崔孝一 追配例一體配享於 顯忠祠 事分付該道後因 禮曹判書 閔鍾顯 陳達 禮亮 贈職釐正改書見下四月二十日
최효일에게 정2품직을 가증하고, 차예량·안극함을 현충사에 배향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