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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복지회를 이끄는 원경스님
취재/ 전현자
기자: 스님! 면담을 허락해 주어 감사드립니다. 스님께서는 미국에서 생활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느 주에서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미국에 90년 초반에 4~5년 살았습니다. 고려사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좀 비교적 젊었던 열정으로 청년회 활동을 활성화 시키려 노력과 더불어 20여개 각 사찰들의 많은 노력들로 인해 LA 청년 불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자 : 스님께서 그렇게 청년회 포교 활동을 하셨다는 것은 누군가 노력을 하면 청년회 활동이 교포 불자 내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걸 짐작할 수 있겠네요.
스님 : 그 당시에는 유학하는 학생들과, 현지 학생들, 교포2세가 많았어요. 불교에 대한 열망도 많았었습니다. 허지만 요즘은 세계적으로 젊은 종교인들이 줄어드는 추세잖아요.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의 LA불자들의 현황은 잘 모르겠어요. 떠나온 지 오래되어서요.
기자: 교포나 유학생들이 불교에 좀 더 관심을 덜 가졌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거든요. 그것에 대해서 스님의 좋은 경험이 있으신지요.
스님: 불교를 이제는 젊은 세대들이 굉장히 호기심과 지적인 욕구를 위해서 관심을 갖는 그런 마음이 나도록 기존 불자나 지도자 스님들이 그 역할을 해내야 될 거에요. 그런데 우리 때 만 해도 현지인을 제도할 만한 자량이 부족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점들이 많이 향상이 됐을 것이고 제 2세대의 지도자들도 많이 성장을 했을 거고요. 그런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죠.
기자 : 이민 1~2세대들이 연로하시고 그 뒤로 자녀분들이나 2~3세까지라 할까요. 1.5세대부터 2~3세까지 그 세대들한테 언어장벽을 벗어나지 못해서 한국에서 이민 가서 포교하신 분들의 경우에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포교가 안 되니까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스님께서는 고려사에서 청소년이나 청년들 그런 것을 그렇게 잘 포교하실 수 있는 핵심 방안이 있으셨는지요?
스님: 내가 잘 했다기보다는 포교에는 지속성이 필요해요. 그런 지속성을 통해서 현지 생활 속에서 신뢰나 어떤 보이지 않는 믿음 같은 것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그런데 그 지속성을 구축하는데 가장 기반이 되게 해줬던 것은 은사스님이셨죠. 현字호字 스님께서 고려사를 창건 하셨고, 그 이후로 4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계속 절을 키워갔어요. 그리고 우리가 가서 은사스님을 모셨듯이, 은사스님께서는 당신의 은사이신 구산 큰 스님을 모셔다가 이민사회에서 느끼는 진리에 대한 갈증을 법문을 통해 해갈 시켜 주셨죠. 그리고 은사스님께선 워낙 불사에 대해서는 대단한 원력이 있으신 분이시거든요. 아마 그런 저력을 기반으로 해서 시봉하는 제자로써 고려사를 지키며 4~5년을 지냈던 같아요.
기자: 지금 현재는 어느 스님께서 고려사를 맡고 계신지요?
스님: 지금 현재 우리 은사스님이 어른으로 계시기도 하지만 또 사제 묘경스님이 주지를 하고 있지요.
기자: 스님께서는 제가 한국에 와서 본 절중에 가장 훌륭한 절에 살고 계신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원각사에 소임을 맡게 되신 가장 큰 이유나 원인이 있으셨다면
스님: 원래 나는 내 수행관이 스스로 내 내면을 성찰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런 성찰과 더불어서 깨달음, 부처님의 지혜, 이것을 생활화 하고 사회화 하는 것이 불교계 문화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문화를 중시하고 사찰의 산사음악회를 제가 선발주자로서 역할을 해왔습니다. 심곡암이라는 도심 속의 아름다운 절로 만들었어요. 자연 속에 문화예술이 꽃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불심, 자연과 예술이 하나, 이런 것이 참다운 아름다움의 실현 즉, 진, 선,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은 선이고, 누구나 자연에 대해서는 선심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불교 속에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통한 진선미 구현이라는 기치를 걸고 19년 동안 문화 포교를 한 셈이죠. 그런 세월을 10여년 지내다보니 이것 또한 너무 소승적으로만 사는 것 같아서 부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사회적인 활동을 해야겠다. 그래서 조계종단에 나와 제 15대 중앙종회 의원을 했어요. 그리고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를 역임했고, 그와 더불어 사회활동을 하는 중에 제가 복지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셈이에요. 문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복지 또한 전문가가 돼버리게 된 셈이죠, 그 와중에 이곳의 보리스님이 20년 동안 무료급식을 하다가 병환이 드셨어요. 70이 넘었는데. 할 사람이 없었어요. 누구라도 해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작은 힘을 보태야 되겠다 해서 계승하게 됐어요. 그렇게 시작한 일을 이제와 돌이켜보니, 꼭 해야 할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더 절감하게 돼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복지가 나라의 법에 의한 제도 복지인데 제도 복지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왜냐하면 제도라는 틀 속에 있다 보니까 제도에 벗어난 사람이 더 힘든 사람이 많아요. 예를 들면 기초생활 수급자 대상이 못되는데 자식들한테 오히려 소외받고 경제력이 없고 노동력이 없는 분들입니다. 자식들은 오히려 주민등록상에 등록이 돼 있지만 자식들이 오히려 최소한의 기초생활 수급마저 못 받게 발목을 잡는 게 있어요. 그런 분들이 많고 또 제도복지라는 한계는 어떤 한계가 있냐하면 국가에 재난이 닥치면 일거에 문을 닫아요. 이번에 메르스 사태 때도 복지관들이 모두 문을 닫았죠. 그러면 밥 먹을 데가 없는 거에요. 그리고 메르스 사태 때 심지어 민간단체의 무료 급식소마저 다 닫아버리자 이곳 탑골공원 무료급식소 원각사만 마지막까지 문을 열고 지켰어요. 당연히 지켰어야 했던 것은 여기를 닫으면 그나마 얻어 드시는 분들에게는 생명줄이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봉사와 헌신을 하는데 그냥 시늉하는 식으로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정말 마음을 담아서 한다는 순교자적인 정신을 보여야 되요.
여기에 오시는 분들 중에 진짜 먹을 것이 절실한 분들이 어떤 분일까 생각해보았어요, 설날에 오는 분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이 없고 외로운 사람들이더라고요. 그 분들이 한 150~ 200명 되요. 그래서 설날이나 추석날에는 우리가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떡국과 송편을 해 드려요.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도 달아주고요. 국가나 가족이 할 수 없는 일은 뜻있는 종교인이나 민간단체에서 해야 할 일 인겁니다.
기자: 자비심으로 하시는 일이시지만 어려움이 많으시겠네요.
스님: 한 달에 1500만원의 운영비가 들어가는데, 이것을 제가 복지재단에 상임이사를 하면서 겪은 경험을 살려 쌀도 후원을 받고, 다달이 3,000원, 5,000원, 10,000원 등 후원자가 정하는 일정 금액을 매월 자신의 통장에서 정기적으로 자동이체 후원 되는 CMS 후원방식을 도입했습니다.
문화와 복지가 이 시대의 우리 불교가 해야 되는 일인데, 문화는 부처님의 지혜를 생활화하는 것이고, 복지는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수행은 스스로 해야 할 기본이고요. 요즘 근래의 스님들이 수행도 안하고 복지도 안하고 이것저것 안하다보면 부처님 일은 누가 할까요. 더러 보이는 안일한 세태를 보면 참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래서 일(1) 사찰, 일(1) 복지를 주장합니다. 그래야 사회적인 참여와 연대를 통해서 불교의 역할이 주어지고, 부처님의 역할을 통해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는 거죠.
기자: 정부 도움이나 조계종의 정기적인 후원을 받는 건 아니신가 보네요. 그러시면 참 어려우시겠네요. 그럼 몇 년째 스님께서 여기서..
스님: 작년 4월 1일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기자: 네 그러셨군요. 하루에 몇 분 정도 식사를 하십니까.
스님: 200여분 와요
기자: 그럼 어느 장소에서 식사를 하시나요?
스님: 이 건물 2층, 3층, 4층 세를 얻어서 이렇게 세 층을 쓰는데 2층에서 음식도 하고 예불도 보고 무료급식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무료급식법당’이에요. 2, 4층은 실무자와 자원봉사자들의 업무처로 쓰이고 있죠.
기자: 그럼 이 건물이 세를 얻으신 거예요?
스님: 네 그렇죠.
기자: 그럼 봉사자들은 어떻게 구성 되어 있는지요?
스님: 35단체의 봉사자들이 있어요. 그래서 매일 릴레이식으로 봉사를 하죠. 그래도 봉사단체는 잘 구축이 되어 있어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법조계 고위 종사자분들이 와서 몸을 사리지 않고 봉사를 제일 먼저 하는 것을 보면서, 꼭 우리 사회가 각박한 사회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사회적 위기가 닥치면 각계각층의 선량한 분들이 계셔서, 솔선수범을 보이는 내재된 미덕이 있음을 보게 된 것이죠.
기자: 하루에 세끼를 준비하십니까?
스님: 세끼는 못 하고 점심만 해요. 그런데 점심 한 끼를 세 번을 드시는 분도 계세요. 장소가 협소하여 32분이 들어오고 빈자리가 나면 채워지는 식으로 돌아가며 드시는데, 하루 한 끼로 사시는 분들도 있어 세 번을 반복해서 드시는 분도 계시죠.
기자: 스님께서는 어려운 분들께 생명유지와 함께 부처님 법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밥공양’만이 아니라 ‘법공양’(부처님 법을 베푸는 것)를 실천하고 계시지요?
스님: 불공이 다름 아닌 활인공덕이야 말로 진정한 불공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또 밥만 주는 단순한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밥을 드리기 전에 예불을 올리고 법회를 보고 밥을 드려요. 무료급식자가 예불을 하는 것은 아니고 봉사자들이 주로 하죠. 그래서 봉사자가 부처님의 자비 정신을 되새기고, 진정한 불교의 정신이 자비의 실천이란 것을 스스로 자각하게 합니다. 신행과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짐으로써 참 불교정신을 구현 하게 되는 겁니다.
기자: 그럼 스님께서는 수행은 어떤 수행들을 하셨는지요.
스님: 어려서 송광사에 출가해 전통 강원을 거쳐 승가대를 나왔습니다. 그 이후에 제방 선원에서 정진을 했죠. 그런 수행을 거치면서 수행과 포교가 둘이 아닌 가운데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 깨닫게 됐죠. 그래서 요즘에는 문화와 복지를 새의 양쪽 날개처럼 수행의 날개로 삼고 있죠
기자: 앞으로 여기서 스님께서는 향후 얼마 동안 이런 복지 구호사업을 하실 계획인가요?
스님: 여력이 되는 데 까지 해야 할 일이죠. 생명하고 관계가 있으니까요. 내가 못하면 제 제자가, 내 제자가 못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중단 없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 자체가 수행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기가 챙겨가고 지혜를 또 발굴해 가고 이런 것이 수행이죠. 수행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삶을 떠나서 수행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려서 출가해 기본 교육을 이수하는 수행기간 이외에는 줄곧 은사스님을 늘 그림자처럼 모시며 수행하면서 15여년의 세월을 시봉하며 보낸 바 있었죠. 그 과정에서 법련사의 불사를 위해서, 그리고, 미국 고려사에서 저를 불러 들이셨고, 법련사 불사를 또한 마쳤습니다. 그 후 18년 여 동안 심곡암에서 수행했습니다. 초창기에 암자의 형편이 좋지 않아 3년을 기약하고 기도와 더불어 안으로 내관 수행을 정진하다 보니까 이내 안정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자: 그 이후로도 많은 일들이 있으셨으리라 생각 됩니다. 예로 심곡사를 심곡암으로 바꾸신 것을 포함해서요.
스님: 자연주의 경향이 짙었던 개인의 성향도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도심 속에 가까우면서도 심산유곡의 정취를 지닌 ‘심곡사’라는 절을 대형주의로 치닫는 현실세계에 회의를 갖고, 잊혀져가는 암자의 이름을 되찾자는 마음으로‘심곡암’이라고 바꿔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시를 써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더 많은 시를 쓰게 되면서 <그대, 꽃처럼> 시집을 내고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등단 한 점입니다.
또 산사음악회를 주도했다시피 음악적인 친밀감이 많았습니다. 저의 시‘오실이 가실이’를 가사로 전 중앙대 총장이셨던 박범훈 선생님이 작곡을 하여‘니르바나’라는 노래와 함께 국립극장에서 직접 부르기도 했습니다. 룸비니 동산이라는 찬불가는 제가 작사와 작곡을 해 완성된 찬불가 입니다.
기자: 훌륭한 여정이셨습니다.
스님: 훌륭하진 않아도 작으나마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싶은 염원으로 살아온 거 같아요.
기자: 심곡암에서는 신행 활동 및 어느 포교 일을 하고 있는 지요.
스님: 시립 어린이집을 하나 맡아서 하고 있죠. 창5동 어린이 집이라고. 그리고 야전 복지인 ‘원각사 노인무료급식소’와 제도권 복지인 구립 중림종합사회복지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자: 네, 그러시군요. 스님! 이미 설명해 주셨지만 5년, 10년 더하여 선방 30년 났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어쩌다 뵈면서 참 훌륭하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님를 뵙고 나니 미쳐 깨닫지 못했던 수행관에 대해 다시금 각성이 되면서 존경의 의미를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시면 수행과 사회 복지 일이나 문화일이 둘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것에서 스님께서 그렇게 둘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 모습을 믿고 따르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스님: 그렇죠. 하루 무료급식 봉사자들이 7~10명입니다. 한 달이면 300여명이고. 또 기존 형식의 법회들이 심곡암이나 원각사에서 봉행 되고 있구요. 그런 신행을 바탕으로 야전복지와 제도복지의 봉사자와 종사자들이 함께 뜻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기자: 그동안 한국 불교에서는 ‘수행이 먼저다. 자신을 제도해야 남을 제도 할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분들을 뵈었었는데, 그러면 스님과 뜻을 함께 하는 그분들도 신행활동을 사회복지와 함께 하면서 ‘봉사가 곧 수행이다’는 신행 생활의 실천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알겠군요.
스님: 일반적으로 절에 가서 불공하잖아요. 칠성불공도 하고 관음불공도 하고요. 그런 불공의 일환으로 봉사로써 대신합니다. 그리고 케이크 살 돈과 생일상 차리는 20만원, 30만원으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밥을 한 끼 공양을 올리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행위 자체가 불공을 현실적으로 생활화하고 실천하는 것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오늘 내 생일이라고 해서 상 받는게 아니라 내 생일에 내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푼다 이거죠. 그 일이 굉장히 아름다운 거에요. 그래서 그런지 그런 봉사를 20년 가까이 해온 보살님들이 한 다섯 분 계신데 90세가 넘었어요. 모두 건강하시죠. 날마다 와서 젊은 사람 봉사하는 것을 바라보고, 또 지도도 해주고, 봉사도 해주고 그래요. 그런데 그분들 건강한 이유가 수년 간 이웃을 위해 수명장수를 하도록 생명의 기본 에너지원인 밥을 줌으로써, 칠성불공을 몸소 실천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건강하다고 보아요. 제일 나이가 많은 왕보살님은 99세예요. 날마다 혼자 걸어 오셔서 봉사하고 가르쳐주시죠.
기자: 그 분들을 멀리서나마 뵙고 싶고, 저도 봉사에 참여를 하고 싶다는 원이 생길 정도로 스님의 부처님 가르침 실천이 마음에 와 닿네요.
스님: 인연이 있겠지요.
기자: 이 곳 원각사 절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 까닭은 사세가 갖춰져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비와 사랑이 실천되고 있는 절이기 때문인데요. 원래 이 절의 유래는 어떻게 돼나요?
스님: 조선 개국과 더불어 무학대사가 흥복사라는 절을 이 자리에 지었어요. 그 후 작은 절에 불과 했을 거라 추정합니다. 세조대왕 당시에 양주 회암사에서 원각경을 강설하는 법회에서 공중에서 부처님 사리가 많이 나타나면서 방광을 하게 되니, 세조대왕이 왕비와 같이 궁에 모셔 놓고 친견하는데도 또 사리가 분과 하는 이적을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흥국사 터에 당대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을 세우면서 원각사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기자: 원각사 10층 석탑이 그 탑인가요?
스님: 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대리석이 거의 없었어요. 요즘에는 외국에서 들여오죠. 우리나라의 최고 귀한 대리석으로 10층탑을 모신 거예요. 가장 컸던 경천사지 10층탑을 모본으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조성한 것이죠. 그후 연산군이라는 폭군에 의해 이 절의 전각이 다 유실 돼었고, 현재로는 공원으로 사용되어 부처님 사리탑인 국보 제2호 원각사10층석탑만 역사적 수난속에서도 의연하게 사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터가 예사로운 터가 아니기 때문에 3.1운동 봉기가 일어났어요. 조선조 때에는 파리 에펠탑처럼 하얀 백탑이라고 했어요. 백탑이 멀리서도 아련히 다 보이는 그런 탑이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건물들이 밀림처럼 많아 탑이 묻혀있어 아쉬움이 있어요. 조선시대의 외형적 아름다움은 사라졌지만, 사지 한켠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 할수 있으니 진짜 아름다운 것이죠.
기자: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나, 그리고 그대는 둘이 아닌 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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