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심
마태복음 8장 14-17절(막 1:29-34; 눅 4:38-41)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가 옷을 사서 입는 데에는 기성복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맞춤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성복은 표준 사이즈를 정해 놓고 여기에 해당하는 옷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객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옷의 사이즈에 자신의 몸을 맞추는 것입니다. 몸에 옷의 사이즈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놓은 표준 사이즈의 옷에 사람의 몸을 적당하게 맞춰 입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다행히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옷을 골라서 입고 다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몸보다는 좀 큰 옷을 사서 헐렁하게 입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몸보다는 좀 작은 딱 낀 옷을 사서 입고 다니기도 합니다. 반면에 맞춤복은 옷을 만드는 직원이 사람의 몸의 사이즈를 줄자로 재서 여기에 맞춰 옷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의 사이즈에 맞게 맞춰서 옷의 사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맞춤복은 사람이 자신의 몸에 맞게 옷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신의 몸에 알맞게 맞춘 옷이 아니면 불편해 하며 다시 자신의 몸에 맞게 고쳐 맞춰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맞춤형으로 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치며,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일을 하시는 이유를 알려주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맞게 신앙 - 예수님 - 을 맞춤형으로 만들어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예수님을 이용합니다.
사업을 하는 어떤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자기가 생각하는 예수님상으로 맞춥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성경구절을 적은 판을 걸어놓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예수님은 사업을 번창하게 하고 많은 돈을 벌어다 주어 성공시켜 주는 분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또 가정에 불화로 고통을 겪는 어떤 신자는 예수님을 평화를 가져다 줄 분으로 맞춰 놓고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적절한 성경구절을 택하여서 현관문이나 방에 걸어놓고 그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신자는 예수님은 치유하는 자로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질병이나 우환을 겪는 온갖 고통으로부터 고침을 받아 나음을 입는 것에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구원의 능력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맞춰져서 우리에 맞게 사용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그렇게 우리에 의하여 맞춤형으로 가져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문에서의 예수님이 행하신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서 참으로 허망한 자는 그와 같이 큰 권능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자신이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쓰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이보다 더욱 확대하여서 자신이 살아가는 만사를 형통케 하는 만능으로 삼아 나갑니다.
마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심에서 예수님이 각 사람에 의하여 그들에 맞게 맞춤형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로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그 뜻에 순종하여 나가시는 분이시니,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였다.”는 알게 해줍니다.
마태는 앞서서 산상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산위에서 내려와 가버나움에 들르셔서는 백부장의 종[하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통해서 보게 되는 백부장에 있게 하신 믿음을 시작으로 동서에 있는 천하 만국으로부터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많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앉은 하나님 나라의 자리에 그들도 앉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그날 해질녘에 또한 사람들이 데리고 나온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말끔히 낫게 하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러한 일은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였다.”는 것에서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는 흑암에 있으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있게 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이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무슨 일로 이 권세를 행하시는지, 곧 악한 영들인 귀신을 굴복케 하며 내쫓는 일을 하시는지를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누가의 기록에서는 예수님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관점이 이 이적의 권세를 행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신지,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시길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귀신도 그의 말에 복종하여 내쫓기는가?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38-41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누가는 사람들이 귀신들려 고생하는 많은 사람 - 여럿 - 을 예수께 데리고 나왔으며, 예수님은 그들 위에 일일이 손을 얹어 귀신들을 쫓아내 그들 모두를 고쳐주셨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렇게 예수님에 의해서 내쫓김을 당하는 귀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쫓김을 당하는 귀신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소리쳐 외쳤습니다. 귀신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기에 이를 인정하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그 믿음에 있는 것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한 말인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예수님에 의해서 내쫓겨나면서 하고 있는 말로서 자신들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복종하여 귀신들린 자에게서 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왜 예수님이 하는 말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것에서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과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귀신들은요. 단지 자신들이 굴복하여 내쫓김을 당하고 있는, 곧 자신들을 내쫓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며, 이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내쫓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귀신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화 합니다. 즉 예수님의 자기 계시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과 또한 사람들이 데리고 나온 많은 병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에서 귀신들이 소리쳐 외치는 말인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가 있게 한 것에서 많은 이방인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앉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하시는 권세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서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는 것에서도, 그리고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것에서도,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출생하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셨으며, 성령으로 그 모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자라남과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모든 진행에는 성령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셨으며,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과 능력 행하심에는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신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하신 그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았으며, 그렇게 세상에 임하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자신의 권능(통치) 아래 두시고서는 다스려 가십니다. 그러한 우리를 성령님은 마귀의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기까지 마귀의 권세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며 예수님을 주시라고 하지 못했던 우리에게서 그 압박(압제)이 풀리므로 “우리의 주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 있는 믿음이 어느 한 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고는 그 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하여 악한 영인 귀신에게서 풀려나고 성령님의 지배에 있은 이후, 영원히 성령님의 처소가 된 그에게서는 성령님께서 그에게 고백케 하시는 예수님은 주이심을, 주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함이 지속적으로 있습니다. 이것은 말이죠. 육인 우리 몸에서 나오는 생각으로서는 전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육에서는 육에서 나오는 생각이 있으며, 이 생각을 좇아서 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그 믿음에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것은 육의 생각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인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여 구할 것은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함으로써 그분에게 믿음을 뿌리내려서 견고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주시는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서 성경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 하며 여기에서 주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에 우리 몸을 복종시켜 나가 그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에 있어 간다면 그것은 자기 부인의 삶으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생각을 좇아 성령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닫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증거하여 전파하는 것에 우리 몸을 드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분을 증거하는 것에 자신의 목숨까지 전부를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있는 놀라움을 보십시오. 어떻게 천하 만국에 있는 그 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앉은 자리에 그들도 함께 앉는지를 말입니다. 이 크신 은혜로운 일에 있는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