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게와 콰인 사이의 시대를 살다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탐구』에서 분석철학의 이러한 일방적 경향성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짚어나갔다.
그는 4세기경의 성현 아우구스티누스의 『보잭록』을 인용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이미 의미의 물화 현상을 목도한다.
프레게나 러셀이 아닌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그는 불과 100년 사이에 인간 정신에 현실로 불어 닥친 가공할 타락이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바로 그 정신의 중심으로부터 예비되었음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의 창시자가 아니라
분석철학의 이념을 그 근원에서 해체하려 했던 포스트 분석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의미의 물화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의미의 물화 문제는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적 지평에서 접근해야 한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름만큼은1세개의 안드로니코스(Andronicos)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편찬에서
순서상 『자연학(Physica)』 다음에 놓였다는 이유에서
『자연학 다음의 책(Ta Meta Ta Physica)』이라 불린 데서 유래하였다.
하이데거가 지적하였듯이 정작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본질적인 차이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자연학이 근대에 이르러 물리학으로 변모하면서 물리학과 형이상학은
마치 각각 물리적 현상과 초물리적 (혹은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학문인 것처럼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실천이성비판』과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통해
형이상학이 현상계가 아닌 도덕에 대해서 유의미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칸트도 의미의 물화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칸트 이후로 물화 여부가 의미와 존재의 유일한 척도로 군림하게 된다.
형이상학도 그에 맞춰 초물리적 영역에다 의미를 물화시키는 학문으로 재해석된다.
이러한 해석은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트겐슈타인은 경험주의적 언어철학, 데카르트주의적 심리철학, 플라톤주의적 수학철학 등을
지시에 의한 의미의 물화에서 비롯되는 그릇된 형이상학으로 간주하고
이를 차례로 조목조목 비판한다.
지시와 친족관계에 있는 지향성의 개념에 토대를 둔
브렌타노와 후설의 현상학과 거기서 비롯되는 현대 유럽철학의 여러 사조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콰인에 와서 정점에 이르게 되는 자연주의와 물리주의는
물화의 영역을 과학의 대상 영역에 한정시킴으로써 형이상학의 물화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유물론이 완성되는 곳에 형이상학이 설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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