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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엔
가영심
흐린 날 마당 귀퉁이에서 스친 달팽이
대체 무엇이 그를 이 한낮에 불러냈을까
고장난 시계 떠메고 가듯 더듬이 세우고
느릿느릿 딛고 간 빈자리마다
허기진 꿈들이 부스러기로 검푸른 이끼 되어 남아있다
누가 추억의 흉터를 지워갈 수 있을까
홀로 비를 기다리던 달팽이의
숨은 욕망의 창문은 귀처럼 언제나 열려 있었다
우울향기로 가득 퍼져있는 꽃밭
온종일 햇빛 얼굴 그리워하며
결핍의 열망으로 떠도는 바람의 가슴 하염없이 뜯어가던
오랜 시간의 고집이
잠깐 반짝 눈물로 빛났을 때
물방울 목숨 무게보다 더 가벼운 구름 되어
외발자전거 타고 달려보고 싶은 흐린 날이면
그의 기도는
늘 한 발 늦은 박자로 기어가야 했던
생의 서러운 하모니였다.
나무와 숲
강정화
스무 해 전부터 산오름에 빠진 노시인님
짬내어 산에 다니라는 당부에 솔깃하여
벼르기만 하던 산오르기
늦을세라 따라나선 산 속 나들이
만물의 생사고락의 사계四界 덤으로 만났네.
나 세상일로 혼 빼앗긴 통에
풀, 나무들 이름 변변히 몰라 민망해 하며
산 식구들 살아가는 무언의 질서에 놀라고
우주 끝자락 해와 달의 부신 빛 끌어와
나무와 숲과 산은 선 채로 철학자 닮아가네.
나무들 바라보며 탄성이 절로 나오고
푸른 잎사귀들의 향연 절창의 기도이며
지절되는 새소리는 연속적 앵콜로
앗차! 하산길에 휘둘리는 걸음걸이
오름길보다 내리막길 소중함, 인생길 또 배웠네.
먹어라 밥
강희동
밥 !
밥이다
먹어라 밥
허공에 차려진 밥상
너는 나의 밥
나는 밥의 너
지쳐 돌아오는 밥도시 언덕
웅크린 전자빛 거미줄의 산란
밥이 안 되려고 버둥거리는 전등
짧은 여름 새벽
농부가 한 짐 밥상을
끌고 오는구나
허기진
허공의 밥
은하수 별 하얀 튀밥으로 날려
회색 지상으로 떨어진다
먹어라 밥
상현달 하현달
고창표
상현달
희망 담으며
동녘을 향해
커져가고,
하현달
근심 비우며
서녘을 향해
작아지네.
어머니가 사는 곳
권기만
옷이 엄니 손같이 느껴지는 날
나는 아이처럼 엄니가 벗겨주던 대로 옷을 벗는다
물끄러미 앞섶 바라보던 콧날 참 따뜻하다
내 안의 것을 보는 듯한 눈빛
한 종지 미소 같은 단추를 끄른다
눈물 가득 고인 조그만 호수
주름진 엄니 손마디 물결처럼 일렁인다
얼룩진 윗도리 벗어 빨래통에 던진다
던지면서 돌아앉는 뒷모습에 얼른 다시 줍는다
엉거주춤 벌린 두 팔
엄니가 안아 달랬을 세월 안겨 있다
단단히 여며주지 못해 힘들어하던 모습
후줄그레 어려 있다
벗어든 옷으로 엄니 잠시 나를 보듬는다
부시시 까슬하다 주름진 옷 속 조그만 엄니
빨래통에 넣으려다말고 부둥켜안고 한참 참는다
달빛을 낚는다
권희자
유명산기슭
애솔밭에 이는
솔바람타고
달빛을 낚는다
숲들의 잔치
황홀한 물결
반짝이는 나뭇잎들
달빛비늘 낚으며 낚으며
초록별이 되는 꿈을 꾼다
옷고름 풀며
환한 살빛
서러운 달빛
명퇴 이후
권혁수
빚 많은 부도직전 출판사에 부사장으로 들어갔다
집 팔고 전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낡고 기울어진 장롱 틈에 시집(詩集)을 끼웠다
된장찌개 뚝배기 밑에 계간잡지를 깔았다
콩팥수술을 했다
빚 대신 콩팥을 어느 노인의 장부에 끼워넣었다
된장찌개 다 먹고 출판사에 출근했다
빈 책상이 너무 넓었다
시집 출판의뢰라도 한 건 들어오길 기다렸다
이월된 어제의 시간이 오늘로 이어졌다
각시투구꽃
김관식
깊은 산
골짜기
자주색
투구를 쓴
로마 병사들
적을
기다리는
매복한 병사들일까?
독기를 품고
적을
기다리는
각시투구꽃
부릅뜬 눈망울
맷돌
김관형
어여쁜 아낙네가
고사리 손으로 맷돌을 빙빙 돌린다
팅팅 불은 콩을 구멍에 집어넣으면
아래 위 부부 돌이 신나게 비벼댄다
줄줄 흘러나온 콩물이 엉겨
야릇하게 여린 두부가 탄생한다
투가리서 부글부글 끓는 된장찌개
순한 두부 한 점 입에 떠 넣으면
야들야들한 그 맛 혀가 깜짝 놀란다
자연의 맛이 쩍쩍 붙는
뭉개서 만드는 요리의 선구자 맷돌
선조의 슬기가 배인 기술의 맛인 걸
어디 믹서가 따를 손가
오호라, 근심 걱정 던지고
맷돌처럼 베풀며 살란다.
줄어든다
김규화
내 키가 줄어든다
내 빵은 조금이면 된다
척추를 갉아먹는 시침(時針)이 내 양을 줄였다
천연색으로 나를 유혹하던
TV세상이
단색으로 가지런해졌다
내 오락도 조금이면 된다
칼로 뚝 자른 푸줏간의 욕망,
적당량으로 저울에 재어
내 무릎에 놓인다
무명(無明)의 눈을 뜨는 곳에
내려와 쌓이는 적막
내 공간은 조금이면 된다
꿈길
김금아
내비게이션에 감겨드는 하늘이
푸른 머리를 빗질하는 오후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숲으로
렌트카를 몰고 달린다
오르막을 넘어서자
타이어가 튕겨 1차선으로 굴러간다.
나는 타이어 안을 들여다본다.
둥근 바퀴살 사이에
덩치 큰 로터리약국이 끼어있다
용접공은 햇살을 빼어들고
조명이 꺼진 약사의 얼굴에
빗금을 친다.
그림자가 포스트를 향해 다림줄을 놓자
LED간판에 붙은 여배우가
전단지를 뿌리며 지나간다.
용접토치에서 에나멜향이 풍기고.
금간 백미러에서
골목바람이 불어온다
롤렉스(ROLEX)시계
김두자
그 시절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시계는 롤렉스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을 때
에드먼드 힐러리경의 손목에 롤렉스가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Rolling)과 무한의 엑스(Ex)가 결합한 이름
그 시계 한번 차고 싶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몇 가지 중 첫 번째
세상에 살면서 시간에는 칼인지라. 나는 늘 시계 보는 걸 좋아했다
덕분에 시계 컬렉터가 되었다
집안 곳곳에 시계가 자리잡고 있다
무슨 때가 되면 공연히 시계를 사들였다
학교시절 종치면 발딱 일어나 수업교실로 가던 버릇
언제나 내 곁에 그림자처럼 시계가 있다
나의 만족을 위해 노안을 위하여 큰 시계를 구입했다
천 만 단위의 값비싼 몸값이다
너무 큰 시계라 손목에 차니 팔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무겁다 비취색 바탕에
시 분 초침은 화이트 골드 녹색 테두리(베젤)는 세라믹
베젤에 새겨진 눈금 및 숫자의 표시는 플래티늄
전자식이 아니고 손목과 팔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가는 기계식 시계
째깍째깍 소리를 내지 않고 초침은 그냥 미끄러져간다
잃어버릴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흠집나지 않게 충격을 주지 말아야 하고
집밖에서 시계를 풀어놓고 있을 때는 파우치에 보관해야 하고
이틀 중 하루만 꾸준히 차기만하면 간다
좋아하다가 그의 종이 되었네
롤렉스가 내 손에 들어온 후 그의 노예가 되었네
가져보니 별 것도 아닌 것을
그토록 소망했는지 어리석은 마음뿐
가시
김상경
물고기의 그것이 저를 찌르고
그 피를 안음으로 지탱하듯이
저것은 살 속에 들어앉아
서까래가 되었다
안에서 나는 피를 짐짓 모른 체
아버지는 굽힌 가시를 받쳐들고
비탈길을 오르내리고
어머니는 갈비뼈 오장을 파고들 때마다
산밭을 콕콕 더 깊게 파서 콩을 심었다
밥상 위에 제 생을 찌른
아버지 어머니의 등과 허리에 박혀 있는 가시의 수
눈이 시리다
꽃은 거짓말을 안 하네
김선진
사람은
꽃이 아니기에
필 때
잘 피지를 않고
질 때 잘 지지도 않는다
대추볼 붉히는 건…
김시종
대추가 익는 것은
여름햇빛에 익는 게 아니라,
대추가 익는 것은,
가을 달빛에 익는다.
추석무렵 대추맛는
햇님의 맛이 아니라
달님의 맛이다.
가을을 무르익게 하는 것도
강렬한 햇빛이 아니라
은은한 달빛이다.
어머님 은혜
김윤한
육군 이등병 계급장 달고
경기도 어느 땅 사단 교육대에서
밤낮 없이 신병교육 받던 시절
영하 매서운 날씨 각개전투 훈련시간
엠16 소총 가슴팍에 품고 낮은 포복
공포탄 총소리 뚫고 철조망 통과
진흙탕에 범벅이 된 군복 털며
잠시나마 꿀맛 같은 ‘10분간 휴식’
‘담배 일발 장전’ 연기 풀어 올리고
훈련장 젖은 땅에 함께 누워 하늘 보며
조교 구령 맞춰 불렀던 ‘어머님 은혜’
‘낳으실 제 괴애로움 다 잊으시고오’
합창 소리 아득한 고향 쪽으로 날아갔지
울컥 목이 메어 노래는 툭 툭 끊어지고
병사들 눈가에 하염없이 쏟아지던 눈물
그리워라, 그리워라
하늘에선 눈물처럼 눈발 펑펑 쏟아져
낯선 땅 온 천지가 눈 세상이 되었던
1980년, 혹독하게 추웠던 그 겨울.
노을빛 안에서
김연식
황홀恍惚의 그물 펴는
노을빛 안에서
만난 그대여
지루했던 고달픈
한나절, 그
아픈 생애生涯 위에
내리는 노을빛 타고
미지의 바다
노 저어 가는
보름달, 그
그림자 안에서
밀회密會를 여는
꿈길에
피어나는 꽃별들
아, 찬란한
영혼의 불씨여라.
백두대간
김연하
우람한 백두산 천지에서
지리산까지 뻗어 내린 줄기
기슭마다 삶터를 열었네.
신비스러운 기암괴석 이룬
아득한 능선과 계곡들
비경이 계절의 변화 따라
정기를 받으며 사는 삶
태초에 시원의 숲속
장엄한 산줄기에 길을 열고
수많은 생명들이 오가듯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천만년 민족의 염원을 싣고
생명이 움터 열매 맺으며
민족의 삶터에 꽃피우네.
상대성원리
김예태
처음에 그는 우리 곁에 없었다
우리가 출발선에 서서 신호총을 기다릴 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주먹 그러쥐고 동이 트도록 달리고서야 어슬렁어슬렁 뒤를 쫓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어깨를 맞대어 동무하고 싶었지만 어린아이 잰 몸짓으로는 느짓한 그의 걸음을 기다릴 수 없었다
삼단 같은 머리칼에 푸른 물이 돌 때에도 서로의 걸음은 보폭이 맞지 않아 우리는 무시로 그를 기다려야 했다
겨울을 건너는 길목은 늘 소망과 낙망의 일교차가 심해서 수은주만 터질듯이 솟아오르고 얼어붙은 하늘로는 길이 나지 않았다 곤고한 다리 쉬어가자, 쉬어가자 한두 번 겨울잠을 청했는데 함께 누운 줄 알았던 그가 밤새도록 눈길을 걸어 우리를 따돌렸다
잔득한 친구
우리의 유전자마저 소멸한다 해도 저 홀로 걷고 있을 저 견고한 다리
닭
김완철
가택연금은 원죄 때문입니다
탈출을 위하여 발톱이 닳도록
지하통로를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역부족인가 봅니다
하루 세끼 국민연금을 받고 있지만
사후 보장은 전무이고요
뒷짐 지고 기웃거릴 자유뿐이고
초가지붕까지 날고 싶은 건
희망사항이지요
허지만
나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새벽을
알리는 사명감으로 날고 싶습니다
나무의 외출
김용언
달력 몇 장이 뜯겨져 나가고
시침 몇 개가 부러지고
나무 꼭지에는 서너 개의 바람이 펄럭였다
외롭다는 건
나무가 나무 밖의 세상에 서 있을 때였다
한여름 화려하던 나무는
가을로 접어들며, 뱀의 허리처럼 휘어지고
드디어 가까운 길도 아득해졌다
외출을 시작하려는지,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마지막 메시지에 마침표를 찍고 있다.
이젠 시퍼렇게 날이 선 고독을
아침 인사처럼 받아들일 모양이다
가을로 서 있는 나무
나무는 나무 밖의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동행
김용옥(전주)
류마티스 관절염의 손을
아프다고 말, 하지 마라
내가 진 십자가는
남에게는 돌팔매질거리일 뿐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아픔을 발설하면 몹쓸 죄인이 되더라.
어떤 사람도 남의 아픔에
치유자가 아니라
비난자가 되나니
무겁다고 아프다고 힘겹다고 말,
하지 마라.
견디는 것이 가장 좋은 사는 법,
세상살이 고난과 아픔은
삶의 꽃짐이더라
정 네가 아프고 힘이 들면
내 등에 꽃짐이 되어라
점
김용태
어차피
왔다 가는 일
점이나 하나
잘 찍고 가야지
점,
점,
산다는 것도
하나의 점이 아닌가
점
점
점이나 하나 잘 찍어보자
시간의 늪에는
김우현
달빛이 산다
오래된 월여(月餘)를 닮은
노란 유채꽃이 산다
유채의 유랑의 잔상이 묻어서 산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랑과 그리움과 모험과
그 옛것들의 밤의 이야기
괴괴한 카오스의 엑소더스가 살고
바다 건너 잉카의 아름다운 산야
산야에 가려진 슬픈 맥이
흐르다가 인화된 채 그림자로 산다
거기에는 네가 살고
네가 살다간 흔적이 살고
나는 너와 더불어 붉게 물든다
너는 달빛만큼 가고
달빛만큼의 나는 남는다
네가 천 일 전의 야사(野史)를 보듬을 때
그때에 나의 초야의 문은 열린다.
봄 그니
김정현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정호승 시인이 준 몌시지
지난여름 뜨겁게 사랑하다
툭툭 힘없이 숨어든 계절,
겨우내 땅 속에서 뜨겁게 뜨겁게
사랑을 했나보다
사르르 사르르
겨울이 녹아내렸다.
물잠자리
김종호
놔주면 다시 와서 나풀나풀 꼬리치고
살며시 다가가면 삐뚤빼뚤 달아나네
철없이 따라나서다 물속으로 철퍼덕
성스러운 얼굴
김종희
루오*의 그림 성스러운 얼굴을
한참을 서서 바라보고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너야
루오가 바로 너라고
하는 말이 내 마음속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내가?!
지금 네 마음속에 루오가 살아있으니까
그러니 네가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해서 걱정할 게 없다구
그 때 파리에서 루오와 함께 살다간 이름 모를 사람들도
모두가 다 루오지, 루오!
나는 미술관을 나오면서 저 말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찾으려고 골몰했다
그렇지 이름 모를 사람들은 안개니까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 파리 출생 프랑스 판화가
봄
김주곤
꾀꼬리 노래 소리에 졸고 있던 봄이 눈 비비고
개구리 하품소리에 개나리 잠깰 때
봄처녀 바구니 들고 긴 머리 흩날리면
보리밭 종달새 소리에
태돌이 총각 지게목발 장단 맞춘다.
봄은 사랑을 고백하는 계절
장미꽃 울타리 너머로 웃음 짖는 파란 눈
나비야 살구꽃 붉게 피는 내 고향 가자
호랑나비 너도 가자
숙이 따라 노래하며 춤을 추자.
봄 태양 아지랑이 등을 타고 졸고 있고
꽃 사이 놀던 파랑새 짝을 찾아 노래할 때
감정이 풍부한 총각 봄을 부르면
봄은 연지 찍고
푸른 치마 휘날리는 어여쁜 여인이 된다.
여자와 자동집
김지향
집이 좌. 우. 앞. 뒤로 몸을 움직인다
입으로 명령하는 대로만 움직인다
오늘은 집이 발을 내밀어 걸어나간다
집안에서 사는 여자가 시장을 본다
여자는 집안에서 둘레길 산책을 하고
집안에서 번지점프로 낙동강을 건너뛰고
집안에서 고향집을 다녀온다
여자는 집안에서 오페라극장으로 출입을 하고
집안에서 직장 출퇴근을 하고
집안에서 영화구경을 한다
여자는 심심하면 입으로 명령만 한다
더 심심하면 집을 차곡차곡 접어들고
하늘 위의 그 하늘로 가서
자동집을 펼쳐놓을 궁리를 한다
떨어진 말들
김진돈
달이 나를 낳고 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떨어지는 말들, 그 속에 가느다란 달이 또 하나 뜨고 있다. 푸른 비단 깔린 오솔길, 은사시나무 귓속말하는 허공 사이로 달이 뜬다. 그 안에 내가 있다.
벽, 느닷없이 벽이라고 써본다. 벽이 내게 말을 한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이 떨어진다. 손가락을 떼어낸다. 떨어진 말들이 벽에서도 나온다.
꺾어진 길 한 모퉁이에서 짙어진 단풍 한 잎
손가락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언 내 안도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백일홍
김철교
꼿꼿이 꽃봉오리 하늘로 쳐들고
햇빛과 구름 타고 오는 축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깐깐한 너의 모습 속에는
허허로운 달관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집요한 태양의 애무에
탈색되어 가는 젊음
검으스름한 씨앗뭉치로
늙음의 보상이 되기나 할까
가을을 생각하기 아직은 이른 때에
붉은 꽃 이파리 달콤한 혀로
벌과 나비 그리고 대지 가득한 꿈들과 키스하며
꽃봉오릿적 꿈을
열심히 하늘 화폭에 펼쳐보렴
삶의 센스
김태룡
연약한 듯 하다가도
강한 의지로 우뚝 선 너
가령 헤어진 지 오_랜
연인이 살포시 다가와
내 빰에 열정적으로
입맞춤하듯
황홀함의 극치가
말 못할 인연으로 성큼 다가선다
종(種)이 다른 것끼리
얼키설키 서로 의지하며
부대끼며 살아온 모진 세월이
소중한 밀어들로 익어가고
모든 것 포옹하는 듯한 그 표상이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율법인양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어느새 황금빛 노을이
현란한 춤사위를 뽐내며
주위를 감싸고 돌 때
세상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둥근 길 찾아서
김해빈
물이 내어준 물렁한 길 따라 덕적도에 왔습니다
모서리 지우고 있던 자갈마당 몽돌들
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둥근 길 안에 또 하나의 모난 길이
단단하게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겹겹으로 몽글려 온 길은 날카로운 모서리 담지 않으려고
낯선 걸음에 비명을 참고 있었습니다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찾아 헤매던 견고한 길을 지우고
유연한 길 찾아 되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선착장 고무통에서 퍼덕거리는
작은 눈의 도다리를 보았습니다
한쪽으로 쏠린 눈 뜨고 입맛 다시는 술꾼들의 구미에 맞춰 무거운 시간을 씻어낼 뿐
기꺼이 껍질 벗겨내는 아픔을 견디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모난 길이 아니었습니다
꽃으로 만났다가
김현호
꽃으로 만났다가 낙엽으로 지고 마는
자연의 섭리 앞에 가고 오는 인생여정
우리들 삶의 질곡桎梏을
사랑이라 부르리.
그대 숨결 그윽함은 같이한 아픔이었고
당신 몸짓 다정함은 동행한 고통이었어
우리들 삶의 고난苦難을
향기라고 말하리.
너와 함께 걷는 길
김효동
훌훌 떠나고 싶은
향기 있는 길
가야할까 말아야할까 망설이다
푸른 물속의 냉정과
붉은 꽃의 열정으로
너와 같이 간다면
낯선 땅으로 같이 걷고 싶다
힘들어 하는 너를 볼 때마다
어느 한 곳 향해
동행 꿈꾸는 애틋한
시간 벗어나 공간 깊이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하나 보다는 둘이 좋은 길
너를 보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
짧은 만남의 설레임
생각을 조율하면서
머얼리 같이 걷고 싶다
침묵의 돌
나석중
천 년 만 년
입 닥치고 살아온
이 주먹만한 돌을 보고
당신의 마음이 떨렸다면
당신은 비로소
이 돌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당신의 풍경
노유섭
당신이 있음으로
이곳이 의미가 되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이곳의 모든 풍경이
새롭게 또렷이 밝아졌습니다
햇살은 따스하고 하늘은 맑아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렇게 가신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아직도 이곳의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먼 훗날 이 자리에
다시금 당신은 보이지 않아도
그 모습 하나로 흔들리며
당신은 이곳의 풍경으로 남아
손 흔들고 있을 것입니다.
가을 그리고
단인서
산촌에 꽃 지니
산그림자 서운하고
청산에 낙엽 지니
산새가 운다.
꽃 지고 잎이 지면
한 세월 다 가
서산에 뜬 구름
허공에 걸치었다
목련, 바람 속의 하얀 그리움
맹숙영
그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영겁으로 이어진 간절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침묵으로 일구어낸 혼불의 화신이다
동짓달 그믐께까지 혹한의 서슬에도
별빛 고요로움 아래
냉기에 얼어붙은 나목으로 서서
삼동三冬 지날 때까지
미동도 없었거늘
꽃사슴 정기를 받아 꽃물 취하고
어디 님 찾아 백화의 면사포 드리우고
천상으로 오르려했던가
황후의 기상으로
하얀 그리움의 화신으로 서 있다
홍시紅柿
문덕수
우듬지 끝
계절과 벌레들을 몸짓으로 다 문질러 떨어뜨렸다
위로 보자기처럼 덮고 싸는 투명한 하늘
밑을 보자기처럼 펴어 안는 투명한 대지
수시로 자리 바꾸면서
성숙成熟이란 이런 것이란 듯이
모두들 속으로 끌어들였다
우듬지 끝의
자살 테러 폭탄이다
비 나리는 날 주암호
박강남
슬픈 유적이 된
섬
지상에 그림 같던 마을이 수몰되어
떠나가던 유목민은
다시 닿을 수 없는 국경을
오래도록 서성거렸을 테지
부슬부슬 비 나려
가지마다 매달린 눈물이
부지런히
초 삼월 어린
매화꽃눈을 틔우는 하오
구불구불 도로 위를 굽어가는
내 생도
잠시 미끄러져 흐르던 주암호에
푸른 물비늘 끌고 가는
청둥오리 한 쌍이
유유히 봄 수문을 열고 있다.
꽃
박건
풀잎은 하늘이 내린 이슬을 받아
꽃을 피운다
들판은 쏟아내는
풀꽃의 잔치판이다
꽃은 한 올의 원한도
남기려 하지 않는다
죽음 같은 아픔을 견딘
고운 얼굴들
빨간 심장으로 선다
빨간 심장으로 춤을 춘다
분단
박건웅
이념의 유희론
동강난 산하
누구나 자유롭게
오고 갔는데
건방진 가시철망
길 막아서고
간사한 바람
산자락 휘어잡고
깔깔 웃는데
세월은 오늘도
분단 반세기의 서러운
사연 끌어안고
시공간 모서리를
휘청거린다.
봄비
박기임
마음을 울리는 봄비
소리없이 찾아와
가슴을 두들기며
내 마음을 헤아리고
걸음걸음 영혼 깊은 곳
스며드는 봄비
향긋한 내음이
마음의 묵은 때를 씻어주고
잠들었던 영혼을 깨우는 소리
생명의 싹이 가득 차
영혼 깊숙이 내리는 봄비
내 영혼에 비망록 같은 솔베지송
박송죽
가장 낮은음(音)과 높은음이 서로 어울러
아름다운 화음을 내듯이
경련하며 쓸고 가는 바람 속에 살 패어가며
숨 가쁘게 깎기고 씻기며
세상에 태어난 우리 서로가
천지간 눈 맞춘 인연으로
불꽃같은 가슴 사랑으로
생명의 뿌리마다 단물로 고여
살아있어 아름다운 세상
살아있어 목숨 값을 지불하며
아름답게 조율되어 하모니를 이루어야 할
내 영혼에 미망록같은 삶의 솔베지송.
내가 너에게 들려줄
너가 나에게 들려줄
베네치아
방극인
물의도시 베네치아
20개의 작은 섬과
150여개의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이탈리아반도의 동쪽
아드리아 해의 끝에 매달려 있다.
인구 30만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했던 전설이 주절이 흐른다.
4륜차가 다닐 수 없는
수상가옥
산마르코 성당
산마르코 광장
시인묵객이 한담을 나누는
유명한 카페 플로리안
더 이상 세상과
인연을 맺을 수 없는 탄식의 다리
아름다운 베네치아에도
탄식소리 들린다.
지팡이의 삶
배학기
당신은
언제부터 나를 필요로 했나요
무쇠 같던 사람도
철 같은 다리를 다치거나
늙어지면 나를 찾지만
눈먼 이에겐 나침반,
약자에겐 호신용으로도 그만이고
민중의 지팡이로도
크게 쓰임받던 당신
흐르는 세월 앞엔
바싹 말라
볼품은 없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친구삼아 보란 듯
의좋게 살아보자구요.
시가 있는 숲길
서병진
이 마을 밤하늘은 별들의 천국
새록새록 별 하나가 숲길로 내려와
소쩍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옆집 강아지는 멍 멍 멍
꼬리달린 별 하나가 마을에 왔나보다
샘실 마을은 별들의 천국
별들이 내려와 불꽃놀이를 한다.
이 마을 밤하늘은 별들의 잔치
작은 옹달샘 하나가 졸졸
쉼 없이 소리 내어 행복을 퍼내곤
실개울 조약돌 틈에서 시를 읊조리는데
풀잎마다 이슬 빛 찬미
이파리 없는 나무들도 숨을 쉬는 밤
별들이 내려와 불꽃놀이를 한다.
갠지스 강의 병풍
서종남
들여다보일 듯한, 다시 들여놓기
어려울 것 같던 물안개가 몸을 끌어당긴다
겨울저녁, 물의 날개가 열리고
바람이 하늘을 가리며 강변을 떠다닌다
담요에 싸여 흙바닥에 귀댄
얼굴이 취한 살점처럼 누웠다
병풍은 어느 곳을 향하여서도 서지 않았다
안팎 같은 회색 낯빛에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먼저 잘라야 할 질긴 끈이라면서
높이, 보다 더 높은 곳에
폭포를 쏟아내고 벽을 넘나들며 서로의 등을 지운다
가트 위에 타오르는 불꽃, 널빤지 같은
하늘로 피어오르는, 둥글게 휘어지는
연기는 어느 풀잎의 숨결일까, 등 뒤에서
허물을 걷어내고 먹빛 물결보다 더 눈부신
강가의 달빛이 꿈의 뼈들을 비추어 준다
* 강가Ganga는 히말라야 신의 딸이며, 갠지스 강의 또 하나의 이름
* 가트는 갠지스 강변에서 시체를 태우는 계단
계절의 향기
성지월
온갖 들꽃 향기
지나가는 세상을
마음껏 점령하고
현실을 지배하며
세월을 희롱한다,
흐르는 시간 앞에
활짝 피었던 꽃
시름 속에 나래를 접고
빛바랜 향기를 토하며
마지막 삶의 안간힘으로
시대의 흐름을
점철하고 있을 뿐이다,
석공
손광세
십 년에 한두 획씩
어쩌다
십 년 걸려 한두 자씩
비문을 새긴다.
남의 비문이 아니다.
한평생
남의 비문만 새기다 간다는
스스로의
비문을 새긴다.
한복
손기섭
내가 한복을 입는 날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나에게서
절 받고 싶어 하시는 날
대대로 효성이 지극했던 우리 가문
불현듯 한복 한번 입고 싶어도
아이들 눈치보여
매사가 조심스러운 나이
명절이나 되어야지
나이답지 않게 기다려지는
추석날 설날
한복 갈아입고 책상다리 하고 앉으면
손자손녀들 때때옷 갈아입고
나풀거리고 다니다가 내 앞에 와
꽃 본 나비 같이 나붓이 엎드린다
가로등
손남주
횃불로 늘어섰던
먼 그대들이여,
돌아와 홀로
풀섶에 서면
벌레소리만 가슴 가득합니다.
당신 앞에서 펴 보았던
아쉬운 내 마음,
거기 조금 남겨둔 채
발길 이만치 떠나와도
그 눈길, 등 뒤로 먼 데까지 따라옵니다.
내 마음 켜두고
잊고 간 그대여,
한낮까지 겸연쩍게
붉어있는 내 얼굴,
흘러가는 낮달처럼 꺼지고 싶습니다.
소금꽃
손해일
신안 증도 슬로시티에 소금꽃 피었다
물 햇빛 바람이 살 섞은 열꽃
형체 없는 물 가두고 열고 풀어
염부가 돌리는 무자위 수차와 당그래질
무한궤도로 증발한 지상의 땀꽃
한때 바다였다 솟구친 희말라야 연봉
아득한 만년설 눈보라에 흩날려
몽골초원 고비사막 하늘땅 홀리는 신기루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에 순장된 암염들이
눈사람 예띠의 이른 아침
키 쓰고 소금 얻는 오줌싸개의 홍안에도 피었다
득도한 부처 염화시중의 우담바라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사해(死海) 갈릴리 물위를 걷는 예수
썪지 않는 빛과 소금
찬연한 생명꽃
벙어리매미
송영숙
전생에 나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다섯 악사 중 배소를 불던 주악상이었다
어쩌다 속 깊던 한 사내를 몰래 가슴에 두었다가 그를 위해 연주한 것이 발각되어
쫓기듯 나와 지금 여기 허름한 나무의자에 기대 있는 것이다
그러다 단 한 번도 나팔을 불어본 적 없는 나팔꽃
하늘 한 번 올려다본 적 없는 엔젤트럼펫처럼
꿈인 듯 생시인 듯
슬퍼도 소리 내어 울 수 없게 된 벙어리매미
사랑에 눈멀었던 악사들이 인연의 줄을 끊고
소리를 허락받는 날이면
사람들은 지상에서 가장 슬픈 교향악을 듣게 될 것이다
당신은 모른다. 내가 밤낮 잘도 웃지만 돌아서서 한 번씩 크게 울기도 한다는 것을, 울면서 새끼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피가 나게 파 보기도 한다는 것을
물의 마음
송용구
흐르는 물의 살갗에 머물기보다는
물속의 물에 들어가
돌이 되어 앉는다
물속의 물에 불어가는
바람으로
닳아진 귀를 씻고
물속의 물에 내려앉는
그림자로
주름진 마음을 편다
물속의 물에 잠들어
오래 감겼던
눈을 뜬다
조각달
신규호
생각은 깜깜하고
태어날 듯 태어나지 않는다
견고한 알 하나
항문 끝에 보이고
대붕(大鵬) 한 마리 검은 나래를 펴
하늘을 덮고 있다
출산이 끝나면
타조의 알보다 클
생각 한 쪽은 파묻혀
보이지 않고
낡은 절 처마 끝에
풍경만 울어댄다
마르지 않는
눈물 한 방울
둥지 사랑
신영옥
'아들 딸'이라 써놓고
-사랑- 이라 읽는다
'가족'을 세워놓고
-둥지- 라 부른다
세 살 적 익힌 배려 평생으로 이어지고
둥지에서 익힌 소통 우주로 향하니
어려움도 기쁨도 함께 나누는 밥상머리
양보도 협력도 키워가는 둥지여라
방 한 칸도 넉넉하다 불평 없는
까치네 집
다독이고 기쁨 주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
우리네 살림에도 사랑이 제일이라
하늘 가득 날개를 펴 사랑둥지 전한다
어느 날 오후 통영에서
신을소
오랜만에 찾은
통영 앞바다
그곳 사람들의 표정만큼
아는 체도 않고 물살만 출렁인다.
섬들은 이렇게라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멀찌감치 떨어져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속없는 사람들만
유람선이 기울도록 막춤에 한창이다.
뱃전을 스치는
가출한 미역 한 올, 너울너울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즐기고 있다.
내 마음속 춤사위
신주원
한 잔의 차가 생각날 때면
스르르 눈감고
우주가 내 것인 양
천상으로 날아보겠네
우주와 하나 될 때
바람소리조차 숨을 죽이지만
그리운 바다소리
불러내야 하는
이름 없는 새는 외롭겠네
내 곁에서
마음속 비밀을 들려주겠니?
저자거리에 물들지 않는
끝없이 이어지는 붕새들의 춤사위를.
검은 도로
심상운
직선의 아스팔트 도로를 100km로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검은 도로를 손짓하며 말한다.
“방금 지나온 길이 어릴 적 뛰놀던 동네 언덕이야”
“이 검은 도로 밑에 내가 태어난 마을이 깔려있는 거야“
“길을 낼 때 언덕의 중심에 퍼런 정수리 뼈 드러낸 바위 하나 있었대”
"비 오는 날이면 도로 밑에서 둥둥둥둥 풍물소리가 울려나오는 거 같아“
TV 속에서는 마다가스카르 맨발의 여자들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벌거숭이
아이들 손을 잡고 맑은 강물이 보이는 푸른 풀밭 언덕길을 뛸 듯이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