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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
F. 휠덜린. 1770~1843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휠덜린(1770~1843)이 쓴 유일한 소설로서 이미 그 고전적인 자리를 굳힌 작품이다. 휠덜린은 일생을 정신병과 싸우며 고독한 생애를 마쳤다. ~~~1,2차 대전 당시 전선에서 전몰한 독일 병사들의 배낭에는 반드시 그의 작품이 보물처럼 간직될 정도로 그에 대한 독일 젊은이의 애정은 거의 광적인 것이었다.
히페리온과 아라반다의 우정은, 히페리온이 너무나 완전한 우정을 희구했기 때문에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것은 사건이라기보다는 삶의 필연이었다. 그리고 디오티마와의 이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랑이 아무리 완전한 것일지라도, 주인공이 거기에서 안일을 구했다면 그 사랑도 위축되고 말았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도 히페리온은 행위로 내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사별로 끝나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은 이미 삶 속에 스스로 내포된 귀추였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느 의미로서는 사색의 서이며, 시인은 그 귀추를 마두 대하고 앉아 그것을 포섭하여 더욱 높은 전체로 사색을 넓혀 간 셈이다. 예술과 사상이 이처럼 긴밀히 연결된 작품은 찾아보기 드물다.
음악 같은 작품의 리듬, 산문시라고 할 수 있는 문장으로 해서 이 작품은 서정시적인 산문시라고도 불리는데, 그 리듬은 작자의 심층에서 울려 나와 정신의 모든 힘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1부
“최대의 것에는 위압감이 없으며, 최소의 것에서도 기쁨을 찾아낸다. 그것이 곧 신성한 일이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묘비명의 한 구절. 그가 인간의 자주성과 조화를 겸비했음을 찬미한 것임.
[서문]
나는, 될 수 있으면 이 책에 독일 사람들의 사랑이 깃들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내가 두려워하는 점은, 혹시나 사람들이 이것을 어떤 지침서처럼 읽어, 거기에 내포된 사상적 내용에 지나치게 마음 쓰지 않을까 하는 점이며, 또한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 흥미 본위로 가볍게 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내놓은 이 꽃에서 단지 향기만을 맡으려는 사람도, 또 그것을 쥐고 거기에서 지식만을 얻으려는 사람도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다.
1. 짓밟힌 우정의 화원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全文)
※히페리온이 조국 그리스를 떠나 독일에 망명했을 때 우정을 맺은 독일인.
사랑하는 조국 땅은 나에게 또다시 기쁨과 함께 번민을 준다. 나는 지금 매일 아침마다 코린트 지협의 고지로 발을 옮긴다. 그리고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처럼 나의 혼은 가끔 바다와 바다 사이를 여기저기 날아간다. 내가 딛고 서 있는, 햇볕에 이글거리는 산과 산은 양쪽에서 그 소맷부리를 시원스럽게 바다에 씻기고 있다.
만약 내가 천 년 전에 거기에 섰었더라면, 양쪽의 만이 나를 더욱 기쁘게 해주었을 것이다. 승리에 빛나는 반신(半神)과 같이 장려한 헬리콘의 거친 평야와 설봉을 아침 해에 빨갛게 물들인 파르네스 산, 그리고 낙원과 흡사한 시키온의 평지와의 사이를 그 빛나는 만은 환희의 도시, 청년 같은 코린트를 향해 파도를 일으키며 춤춘다. 그리고 세계 온갖 곳에서 쟁취하여 얻은 부를 자랑하는 이 청춘의 도시 앞에 흩뿌려 놓는다. 그러나 이처럼 과거를 회상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폐허가 된 고대의 돌더미에서 용기에 찬 만가를 부르는 표범의 부르짖음이 나의 꿈을 깨우고, 나를 현실로 되돌린다.
꽃피어 번영하는 조국을 마음의 기쁨으로 여길 수 있어, 거기서 힘을 얻는 사람은 복되리라. 그러나 타인이 나의 조국의 일을 물어 볼 때, 나는 늪으로 던져지는 느낌이 되며, 내가 누워 있는 관 뚜껑에 못이 쳐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내가 그리스인이라고 불릴 때, 나는 언제나 개 목걸이에 목이 졸리는 듯한 고통을 맛본다.
그러나 나의 벨라르민이여! 때로는 이런 말이 나의 입에서 새어 나올 때, 당신들 독일인 가운데 현명한 분들은 나의 마음을 좋은 미끼로 삼아 그들의 온갖 격언을 나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을 자신들의 기쁨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탄하지 말고 행하라고. 아아, 나는 행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더 희망에 넘쳐 있었을 것인가!
그렇다, 인간들끼리의 일은 잊도록 하라. 그리고 온갖 괴로움과 울분이 겹쳐 굶주려 구하는 마음이여, 돌아가라! 그대가 나온 자연의 품으로. 방황 없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 품으로.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나는 내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갖지 못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죽어 버려, 그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이름도 없는 고독한 몸으로 돌아와, 묘지처럼 소리도 없는 나의 조국을 방황한다. ~~~아아, 인간은 꿈을 꿀 때는 신(神)이며, 생각할 때는 구걸하는 걸인이다. 감격이 사라지면 인간은 부친에게서 쫓겨난 탕아와 다름이 없어, 부친이 던져 주는 몇 푼의 동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봄의 생명과 영원히 젊은 태양이, 언젠가 인간이 거기에 있었으나 이제는 사라져 그림자조차 없게 되었다는 것, 또 인간의 아름다운 성질이 이제는 신전의 페허나 기억 속에서도 찾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슬퍼하면서 그의 곁에서 이것저것 유희의 시간을 보냈다.
한편, 아다마스는 페허를 둘러 싼 풍경 - 밀밭 언덕, 올리브 수풀, 바위틈을 내려오는 양떼, 산꼭대기에서부터 골짜기로 줄지은 전나무 숲 등을 그림 그리고 있었다. 그때 도마뱀은 우리 발치에서 놀고, 새는 한낮의 고요 속에서 우리를 스치며 날개 소리를 내곤 했다.
나는 지금 수확이 끝난 밀밭 사이를 걸으며 이삭줍기처럼 과거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인루스 산상에서 우리를 맞아 준 것은 황금의 하루였다. 우리가 산상에 닿았을 때는 아직 새벽이었는데, 태양신은 영원히 젊음에 넘쳐 솟아나고 있었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全文)
내게 만약 내 젊은 시절의 즐거운 나날이 없다면, 나는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저승의 냇가에서 방황하는 망령처럼, 나는 내 생의 황량한 지대로 돌아왔다. 만상(萬象)은 늙어 가면서 또한 젊어진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자연의 이름다운 순환 법칙에서 예외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 법칙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일까? 만약, 우리 마음속에 그 하나가 없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믿고 싶다. 에트나 화산의 거인처럼 우리 존재의 깊은 밑바닥에서 뿜어져 나와, 모든 것이 하나가 되려는 그 어마어마한 노력의 정신이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채찍에 맞고 고삐에 매이려고 태어난 것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자기 내부에서 끓는 기름 같은 것을 느끼고자 하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미쳐 날뛰는 군마와 귀를 늘어뜨린 야생마 중 어느 쪽이 귀한가?
친구여, 내 가슴이 크나큰 희망으로 부풀 때도, 불멸을 향한 기쁨이 혈관마다 고동칠 때도, 장려한 계획을 갖고 마치 광대한 삼림을 가는 느낌이 들 때도, 대양의 고기처럼 끝없는 미래를 바라보며 멀리, 더욱 멀리로 돌진할 때도 내게는 그것이 있었다.
지복의 자연이여, 이 젊은이는 얼마나 용감하게 당신의 요람에서 뛰쳐나왔던가! 새로운 갑옷을 입고 그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활은 당겨지고 살은 시위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고대의 고귀한 불멸의 신령들이 그를 선도하였다. 아다마스는 바로 그들 신령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어디를 가나 그들의 장려한 형태는 나를 따라왔었다. 불꽃처럼 나의 마음속에서는 지나간 모든 시대의 공과(功過)가 타올라 맺어졌으며, 거인과 같은 구름 떼가 합쳐져 하나의 환호하는 뇌우가 되듯, 나의 내부에서는 줄지어 찾아드는 올림피아제의 백천의 승리가 맺어져 하나의 무한한 승리가 되었다.
나처럼 자신과 힘을 얻을 곳을 갖지 못한 자가 고대의 웅대한 위용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그것에 견딜 수 있겠는가. 태풍에 쓸린 어린 나무처럼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아아, 고대인의 위대함은 폭풍처럼 나의 목을 졸라, 내 얼굴에서 꽃처럼 붉은 빛을 앗아 갔다. 그리하여 나는 몇 번이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바람에 쓰러진 나무가 시냇물에 쓰러져 그 시들어 가는 나뭇가지를 물에 담그고 있듯이.
아아, 한 위대한 인간의 생명의 순간이라도 그것을 피로써 살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기쁘게 그것을 샀을 것인가.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아아, 이처럼 무(無)가 되어 버린 자신을 보는 것은 비참하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일랑 그것에 대해 묻지 말고, 그저 자기가 자연에 의해 나비처럼 세상의 즐거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창조되었음을 감사하며, 한평생 슬픔이나 불행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나는, 날벌레에게 빛을 쫓듯 나의 영웅들을 사모하였으며, 위험함을 알면서도 그 곁에 접근하여 도망했다가는 또 접근하였다.
상처 입어 피 흘리는 사슴이 흘러가는 물에 뛰어들듯, 나는 몇 번인가 희열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져 타오르는 가슴을 식히고 영예와 위대함을 구하려고 미쳐 날뛰는 장려한 꿈을 씻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
그리고 한밤중에 뜨거운 가슴에 쫓겨 뜰로 나가 이슬에 젖은 나무 아래 서서 샘물의 자장가와 쾌적한 미풍과 달그림자에 마음을 달랜 적이 몇 번이었던가. 머리 위에서는 무심히 움직이는 은빛 구름을 바라보고 멀리서 아련히 올라오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내 가슴속에 깃들인 사랑에서 생겨난 갖가지 위대한 환상은 그 얼마나 내 가슴과 화합을 했던가.
천상의 사람들이여, 안녕. 나는 아침 햇살이 머리 위에 비치기 시작할 때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영광스러운 고대인들이여, 안녕.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이 세계가 네게 준 것을 털어버리고, 보다 자유스런 어두움의 나라로 나그네 길을 떠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슬을 끊을 수가 없어, 내 목마름을 가라앉힐 초라한 접시를 쓰디쓴 기쁨으로써 집어 들었을 뿐이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아다마스여 떠나자, 나의 섬은 내게는 너무나 비좁게 느껴졌다. 나는 티나에 싫증을 느껴, 세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사르디스의 평원에서 나는 트몰로스 산의 암벽 사이를 올라갔다. 그리고 산속의 아담한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뮈르터 나무 그늘과 무성한 향기 속에서, 사금을 낳는 파크톨스의 흐름 속에는 백조 떼가 내 곁에 떠 있었고, 여신 키벨레의 옛 신전은 느릅나무 사이에서 수줍은 망령같이 나타나 밝은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섯 개의 아름다운 원주는 폐허를 더욱 슬프게 해주고, 장려한 대현관이 그 발아래 무너져 있었다. 나의 길은 어울려 핀 꽃밭 속으로 계속 뻗었다. 벼랑에서 속삭이는 나무가 몸을 굽혀 정다운 꽃잎을 내 머리 위로 뿌렸다. 나는 아침 일찍 떠났으므로, 점심때는 정상에 닿아 거기에서 조망을 즐기며 깨끗한 대기를 마음껏 마셨다. 그것은 최고의 시간이었다.
하계는 바다처럼 젊고 발랄한 기쁨에 넘쳐 눈앞에 펼쳐졌고 장려한 무한한 봄빛은 나에게 인사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하늘을 가는 태양이 대지가 보내는 빛의 변화에 의해 자기를 아는 것처럼, 나의 정신은 팔방에서 엄습해 오는 생명의 충일에 싸여 스스로를 인식하였다.
왼쪽으로는 세찬 물줄기가 나의 머리 위쪽 대리석 바위에서 숲을 향해 거인처럼 환호 소리와 함께 흘러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바위 위에는 독수리가 새끼들과 놀고 , 눈 덮인 그 꼭대기에는 푸른 하늘이 솟아 빛나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뇌운이 시필로스 산의 숲을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구름이 안고 있는 폭풍의 위험을 느끼지도 않고, 다만 두발을 날려주는 쾌적한 바람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뇌성을 마치 미래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들었고, 그 번개는 나의 대망하는 신성으로부터의 빛과 같이 보였다. 나는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에는 낙원과 같은 대지가 그 전모를 보이고 있었다. 카이스트로스 강이 가로질러 굽이쳐 흐르는 그 모습을 보는 재미는, 주위 풍경의 풍요함과 아름다움 속을 스치며 지나감에 따라 아쉬운 감을 주었다. 나의 마음은 봄날의 미풍처럼 행복에 빠져 넘치는 아름다움 속을 방황했다. 멀리 보이는, 이름도 모르는 평화스러운 마을에서 메소키스 산맥이 차츰 흐려져 사라지는 저 멀리의 하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향연에 취한 술꾼처럼 스미르나로 돌아왔다. ~~~살랑거리는 미풍이 백합을 움직이듯, 벌써 내 마음은 그 사람을 꿈꾸고 그리워하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스미르나는 인제 싫증이 났다. 먼저, 내 마음이 차츰 권태로워졌던 것이다. 가끔씩 어떤 소망이 마음속에서 타올랐다. 세계를 편력하든지, 어떤 전쟁에든 참전해 보든지. ~~~여름은 오래지않아 끝나려 해서, 나는 벌써부터 음울한 우기, 불어대는 바람, 흙탕물의 분류를 예감하였다. 거품이 이는 샘처럼 모든 초목에 일고 있었던 자연은, 이제 나의 어두운 마음에 나 자신과도 같이 퇴색하고 시들어, 그 자신 속에 틀어박혀 있다.
그래도 나는 흘러가는 삶에서 많은 것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으며, 외계에서 좋게 생각한 모든 것을 나의 내부로 끌어들이려했던 것이다. 내년에는 이 나무와 산 사이에서 내 모습이 또다시 보이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자주 걸어서, 혹은 말을 타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2. 하나로서의 모두인 아름다움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나는 지금 아이아스 왕(트로이 전쟁 때의 거구의 맹장) 의 섬, 그리운 살라미스에 살고 있다. 나는, 이 그리스 땅은 어디나 좋아한다. 그것은 내 마음의 색체를 띠어, 어디를 보나 기쁨이 깊숙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유향수 나뭇가지로 산봉우리에다 오두막을 짓고, 이끼와 나무와 갖가지 꽃과 관목을 심어 그곳을 둘러쌌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어느 한쪽이 맹세하기도 전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가 맺어져 버렸다.
제2부
1. 슬퍼하는 대지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가을은 부드러워진 햇빛을 구석구석까지 비쳐, 사랑의 고뇌와 지나가 버린 즐거움에 대한 추억을 기리는 축제의 계절이었다. 겨울을 맞이할 나뭇잎은 저녁놀에 곱게 물들었고, 소나무와 월계수만이 영원히 녹색이었고, 철새는 아직 떠나기를 주저하면서 포도밭이나 야채밭에서 떼 지어 즐거운 듯이 인간이 수확한 뒤의 이삭을 쪼았다. 햇빛은 맑은 하늘에서 내리쬐어, 수목마다 성스러운 태양이 미소 지었다.
디오티마와 나는 낯익은 오솔길을 모조리 찾았고, 지금은 옛날이 된 저 행복하던 한 순간의 추억을 어디에서나 다시 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나가 버린 5월을 다시 생각했고, 그때처럼 대지가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나는 나의 다정한 아가씨와 함께 그녀의 집 앞에서 헤어지기를 계속 주저했으나, 달빛이 조용한 어둠을 비치기 시작했으므로 드디어 노트라의 집으로 돌아왔다. 사색에 잠기고 영기에 넘쳐서, 언제나 디오티마의 포옹을 받고 돌아올 때는 그러했다. 돌아와 보니, 아라반다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드디어 발발 했다네 히페리온. 러시아가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네. 러시아의 제1함대가 다도해에 와 있어. 터키 황제를 유프라테스 강가까지 쫓는 일에 협력한다면 그리스인에게 독립을 허락한다고 했네. 그리스인은 그 일을 완수해서 자유를 얻겠지. 나는 마음속까지 유쾌하네. 드디어 우리 할 일을 찾았네. ~~~아라반다는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너무 무위하게 세월을 흘려보냈으며, 너무 무사안일을 즐겼고, 너무 하늘을 가까이했으며 너무 정력이 없었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아라반다의 편지를 읽고 있는데, 디오티마의 창백해지는 안색이 나의 혼에 느껴졌다. 이어 그녀는, 침착하면서도 진지하게 이 계획에 참가하기를 보류하라고 내게 권했고, 우리는 이것저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분, 이제는 아무 말도 마세요. 저도 아무 말 않겠어요. 제발 떠나세요. 자랑스러운 분. 당신이 그런 분이라면, 당신에 대해 제게 무슨 힘이나 권리가 있겠어요. 그녀는 소리없이 울었고,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그 앞에 서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게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全文)
디오티마는 이때부터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우리가 사랑하게 되면서 조용한 생명이 그녀의 우연한 눈초리나 사랑스런 말에 구석구석까지 나타나는 것을 나는 기쁨을 갖고 보아 왔었다. 또 그녀가 갖춘 침착함이 때로는 빛날 만큼 감격이 되어 나를 맞아 준적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그 아름다운 혼이 얼마나 낯설게 되었는가. 처음으로 꽃핀 생명이, 아침이 지나고 지금 한낮의 높이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그녀의 복된 모습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그만큼 숭고하고 번민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아아, 몇 번이나 나는 슬픔에 잠긴 성녀의 모습을 그리며, 그녀의 모습을 그리며, 그녀를 위한 괴로움의 눈물로 혼조차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던가. 그리고 몇 번이나 찬탄에 잠겨 전능의 힘이 넘치는 것을 깨달았던가. 한 줄기 불꽃이 그녀의 가슴에서 눈동자 속에 타올랐고, 감추어 두기엔 너무나 엄청난 소원이나 번민 때문에 그년의 가슴은 찢어질 듯했다. 그러기에 지금 그녀의 생각은 더없이 씩씩하고 활달했다. 하나의 새로운 위대함과 모든 것이 군림하는 위력이 그녀 속에 가득 차서, 이제 그녀는 더욱 높은 존재가 되었다. 이미 무상한 인간은 아니었다. 오오 디오티마여, 그때 내가 희미하게나마 그것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느끼기라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이제 헤어져야 할 날이 왔다. 노트라의 뜰을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상쾌한 겨울의 대기를 쬐면서 상록수 밑에서 지냈다.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청춘의 어마어마한 힘이 내게 용기를 주었고, 예감하던 고통은 나를 구름처럼 더욱 높은 곳으로 실어 갔다. 디오티마의 모친은, 노트라와 그 밖의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 날만이라도 자기 딸 곁에서 지내도록 주선해 주었다.
내 발소리로 알았는지, 내가 올라가자 디오티마가 조용히 나를 맞았다. 핏기를 잃은 볼은 아궁이의 불로 타는 듯 빛났고, 커다란 두 눈은 눈물로 반짝였다. 그녀는 멈칫거리는 나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세요, 어머니는 안에 계세요. 저도 바로 뒤따라 들어가겠어요.
정말 말씀대로예요. 그 편이 좋군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으며, 손수건으로 맑은 두 눈을 가렸다. ~~~~벨라르민이여,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를 그토록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게 하지 않았던가. ~~~나는 휘청거리면서 그곳을 떠났다. 디오티마만이 혼자서 나를 따라왔다. 해는 지고, 별은 이미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잠자코 집 아래쪽에 섰다. 뭔가 영원한 것이 우리 내부에도 우리 위에도 있었다. 하늘에 퍼진 영기와 같이 몽롱하게 디오티마는 나를 포옹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녀의 모습은 황혼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정말로 그녀였던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사라지던 그 모습은, 다시 한 번 내 눈앞에서 번쩍거렸다가 이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디오티마에게 (全文)
나는 죽음 같은 이별에서 소생했습니다. 나의 디오티마여,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원기에 넘쳐, 나의 혼은 원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지금 에피다우로스 산맥의 어느 정상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 멀리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디오티마여, 당신의 섬입니다. 그리고 그 앞쪽에는 나의 결전장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승리할 것인가 전사할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오오 펠로폰네소스여, 그대들 에우로타스와 알페이오스의 수원(水源)이여, 거기에서 승패가 갈라지는 것이다. 스파르타의 삼림 속에서 이 나라의 예로부터의 수호신이 독수리처럼 우리 군대를 휘몰아치는 양쪽 날개에서 뛰어나올 것이 틀림없다. 나의 혼은 행위의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디오티마여, 그리스의 계곡들을 멀리 바라보는 내 눈은 마치 마술을 내리려는 듯 빛나고 있습니다. 또다시 일어서라, 신들의 도시들이여라고. 신이 나의 내부에 틀림없이 깃들여 있습니다. 내가 우리의 이별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레테의 언덕에 모이는 지옥의 손님처럼, 지금 나의 혼은 당신의 혼과 함께 천국 같은 자유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운명은 이제 우리의 사랑을 좌우할 힘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히페리온으로부터 디오티마에게
나는 지금 펠로폰네소스의 중앙부에 있습니다. 오늘 하룻밤의 숙소가 된 이 오두막에서, 나는 옛날에도 밤을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그때처럼 행복합니다. 떡갈나무의 와글거림이 미래의 공명을 예언하였다는 저 도도나 숲을 걸어가듯, 나는 이 나라를 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복수의 힘이 이 근처 산 사람 사이에 가득 차, 그들은 침묵하는 뇌운처럼 그들을 몰아칠 폭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디오티마여, 신의 숨결을 그들에게 불어넣는 것을 용서하기 바랍니다. 겁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도 별로 거칠지는 않겠지요. 나는 자연 그대로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을 비웃으면서도 감격에는 즉시 달려듭니다. 혼을 다하여 일한다면, 잘못될 일은 없습니다. 잔재주를 피울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힘도 가는 곳을 막을 수 없으니까요.
-히페리온으로부터 디오티마에게
그와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디오티마, 내 마음은 가볍고, 내 다리는 어쩌면 그렇게도 빨리 움직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미래는 내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맑은 물이 우리를 유혹하여, 바로 그리로 뛰어들어 쏟아지는 피를 식히고 싶어지는 것처럼.
-디오티마로부터 히페리온에게
떠나가신 뒤, 저는 대개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히페리온, 오늘은 오랜만에 밖에 나가 보았습니다. 축축한 2월의 대기로 저는 원기를 되찾아, 그 원기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오랜만에 쐰 햇빛은 과연 제게도 상쾌하게 느껴졌으며, 맑고 깨끗해서 언제나 변함없는 초목의 세계에 싹트는 새로운 기쁨을 저도 알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모두가 슬퍼하다가도 때가 되면 또다시 기쁨을 되찾는 초목의 세계를 말입니다. 히페리온 오오, 히페리온! 어찌하여 우리는 조용한 삶의 길을 걷지 않는 건가요. ~~~지산의 인간은 태양만으로 살고 있지만, 저는 당신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저는 타인과는 다른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분. 당신이 영광에 빛나고 있을 때, 저는 말라 시들어 버려도 괜찮은가요? 삶의 기쁨이 당신의 전신의 힘을 소생시킬 때, 제 마음은 지쳐 있어도 좋은가요?
-히페리온으로부터 디오티마에게
붓을 들기가 몹시 힘듭니다. 세계가 5월의 훈풍처럼 자기 쪽으로 불어 주는 동안은, 누구라도 이야기를 하거나 작은 새처럼 노래 부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한 낯이 지나면 바람이 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잃은 게 무엇입니까? 나는 감히 마음속으로부터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말은 소용없다고, 그리고 최선의 것은 항상, 다만 혼자 깊은 곳에서 쉬는 것이라고. 바다 속의 진주같이.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써 보내려는 것은, 뭐라 해도 그림은 액자가 있어야 하고, 남자에게는 나날의 일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나는 잠시나마 러시아군의 함대에서 근무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인과 나는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 주위는 무척이나 어두워졌습니다.
2. 영원히 작열하는 생명
-히페리온으로부터 벨라르민에게
디오티마에게 보내는 편지에 쓴 전투가 시작되었다. 터키 군선은 카오스 섬과 아시아 해안 사이의 좁은 해엽으로 도망쳐, 티에스 부근의 연안에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 제독은, 내가 탄 기함 한 척만으로 터키군 선두의 배와 전투를 시작하였다. ~~~나는 그 기함의 승무원이었다.
[히페리온 단상] 탈리아편
우리 존재에는 두 가지 이상(理想)이 있다. 그 하나는 지고의 단순 소박한 상태로, 거기서는 우리의 욕구가 우리 자신, 우리의 힘, 우리와 관계되는 모든 것과 순수 자연 조직에 의해 조화된다. 다른 하나는 지고의 교화 상태로서, 거기에서는 우리의 욕구와 힘은 무한으로 증대되어 강화되나, 우리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구조에 의해 앞서와 같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란 전체로나 개인으로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하나의 상태, 순수 소박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 완성된 교양으로 옮아가는 이심적인 기묘한 노정은, 그 줄거리에 있어서는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행로의 몇 개가 이하의 서간에서 다루어지리라.
인간이란 일체의 모든 것 내부에, 그리고 일체의 것 위에 존재 하고 싶어한다. 최대의 것에도 굴복됨이 없고 최소의 것에서도 기쁨을 찾아낸다고 했던 로욜라의 묘비명은, 일체를 갈망하여 그것을 눌러 굴복시키려는 인간의 위험한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다시 나의 이오니아로 돌아가려 한다. 나는 헛되이 조국을 떠나 진리를 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언어라는 것이 어떻게 나의 메마른 혼에다 만족을 줄 수 있겠는가? 말이라면 나는 구름처럼 어디에서나 보아왔으나, 주노(헤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죽음을 미워하듯 유(有)와 무(無)의 초라한 중용인 언어라는 것을 미워한다. 내 영혼은 본질이 없는 것에 저항한다. 일체가 아닌 것, 영원에 걸쳐 일체가 아닌 것은 내게는 무이다.
벨라르민이여, 우리에게 평온을 주는 그 하나의 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어린 시절 지복한 나날에 우리 마음속에 울린 그 화음을.
아아, 언젠가 나는 인간과의 우애 속에서 그 화음을 찾았었다. 초라한 두 사람이 합쳐서 하나의 마음,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본질의 초라함은 갑자기 부(富)가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고통은, 다만 원래 맺어졌던 것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기쁨과 슬픔을 나는 지금 생각해본다. 내 전 존재는 그 얼마나 친구의 미소를 얻으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 애썼으며, 사랑의 그림자 그 하나만을 얻기 위해 몸을 던졌던가. 아아, 나는 몇 번이나 다짐했던가. 용단을 내려 사랑하는 것 속에서 전념만 한다면, 이름도 지울 수 없는 그 나의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거기서 성스런 도취를 맛볼 수 있다고 믿었던가. 나는 구하고 또 구했으나, 불쌍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단순한 유희에 지나지 않아 진지한 것이 되지 못했다.
나는 소년이어서, 나보다 가난한 걸인들에게서 진주를 사려고 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빈한한가를 모르고 누더기를 몸에 걸친 채 뽐내는 걸인들로부터. 그 숱한 실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정말로 나는 파멸해 버리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자기 존재가 가진 의의를 이렇게까지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괴로움이며, 파멸로 이르는 끊임없는 사념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의기소침이 나를 괴롭혀, 나는 사람들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었으며, 아이들한테도 비웃음을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 한편으로는 극히 침착하고 참을성이 잇을 때도 많았고, 때로는 온갖 것에 숨어 있는 치유력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신앙을 기울였다. 그리고 가끔 내가 사들인 작은 물건이나, 뱃놀이나 골짜기 같은 데서 구하고 있는 것을 은밀히 기대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짐에 따라 나의 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는 당초에 생각한 사상의 조각들을 주워 모으려고 애썼으나, 생생한 정신은 이미 먼지를 쓰고 있었다. 정신이 빛을 냈다고 생각한 찰나에 그것이 차츰 어두워 가는 것을 나는 느꼈다. 물론 내 존재는 보잘것없이 시들었지만, 그것이 극한 선까지 이르렀다고 느끼자 자랑스런 내 마음이 머리를 쳐들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절망한 자의 쥐어짜는 힘이 나의 내부에서 눈을 떴다. 또한 시들어 초라한 나의 혼이 한 방울의 기쁨을 빨아들인 것 같을 때는, 나는 위세 있게 사람들에게 나아가, 영감을 느낀 사람처럼 다변하여 지복의 눈물까지도 흘릴 때가 있었다. 다시 무엇인가 사상이나 영웅들의 범례가 나의 혼의 어두운 밤 속에 빛을 던져 올 때는, 신이 이 시들어 버린 곳에도 들러 준 것처럼 나는 놀라 기뻐하였다. 그런 때는 내 마음에 한 세계가 생겨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잠자코 있던 힘이 급히 솟아나면 날수록 그것이 무너지는 일도 빨랐으며,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몇 배나 더한 고통에 떨어졌다. (이상 全文)
그대와 내가 고대 로마의 폐허에서 만났을 때는, 나는 아직 어느 일이 추억으로서 소생하는 것을 두려워할 때였다.~~~봄은 나 있는 곳을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는다. 이 천상의 손님인 봄이. 모두가 그 다정스러운 스미르나의 해변으로 몰려 나가는 것을 보고, 나도 기대에 부풀어 문밖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정말로 자연의 전능이 펼쳐지고 있었으며, 얼굴마다 다정했고 어디에서나 농담이 오갔다. ~~~봄은 온갖 것을 젊게 하고 싱싱하게 해준 것이다. 장려하고 감로운 봄이.
항구에는 환호하는 배들이 웅성거리고, 배 위에는 꽃다발이 바람에 나부끼며, 포도주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미르테 나무 아래에서는 쾌활한 가락이 울리고, 춤과 음악이 느룹나무와 플라터너스 사이로 넘쳤다.
세월은 흘렀다. 몇 번인가 봄은 오고 또 지나갔다. 자연의 온갖 형상과 절묘한 환상에서 이루어진 그대의 이탈리아 생활을 기념하는 갖가지 작품은 내 눈을 즐겁게 해주었으나, 그 대부분은 지워져 머리고 그 사람의 모습만이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것과 연결된 모든 것과 함께, 지금도 아직 그 사람은 내 앞에 서 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날 때의 깨끗한 도취의 순간의 모습 그대로, 나는 그 다정한 환상을 내 타는 가슴에 포옹하며 그 사람의 목소리, 그 속삭임을 듣는다.
밀레테! 오오, 밀레테여! 성스런 사람! 나는 알고 싶다. 그 사람이 지금도 때로는 나를 생각해 주는가를. 그녀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겠지. 영원한 존재의 어느 시간에서이든,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겠지.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
-잔테에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창틀에 놓인 시든 R초을 보았으며, 별빛에 솟아 있는 스미르나의 폐허를 바라보았다. ~~~아아, 나는 예전에 고독한 잠자리에서 불면의 밤을 보낼 때, 얼마나 여러 번 한밤중에 거기 섰었던가. 그리고 더욱 좋은 시대에 대한 미련과 거기 떠도는 정령들을 향해 내 마음의 아픔을 얼마나 호소했던가.
[히페리온의 청춘시절]
(1)
인간이 순진한 본능과 결별하고 정신이 지배를 시작하는 성년기에 이르러, 최초의 수년간은 우아한 여신에게 공물 바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운명과 현자들의 학교에서 배워 더욱 확고하고 더욱 자유로워졌으나, 자연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전제적이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내 학교의 잘못은 아니지만, 일체를 전면적인 불신으로써 맞이하는 태도는 나의 내부에서 사랑이 자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나는 믿었다. 순수하고 자유스런 정신은 절대로 관능과는 융화될 수 없다고.
그런 여로에서 나는 언젠가 어느 뛰어난 사람의 소문을 들었다. 그 사람은 오래 전부터 가까운 산장에 기거하면서 별다른 일을 하는 것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젊은이든 늙은이든 모두의 마음을 쥐고 있다고 한다. 물론 대개의 사람은 그가 타향 사람으로 사람이 좋아 그에게 마음이 끌린 것이지만, 그의 정신을 이해하고 예감하는 사람도 약간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인물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마침 그는 정원의 포플라 숲속 어느 입상(立像) 근처에 앉아 있었는데, 앞에는 사랑스러운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지팡이를 멈추었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서 내 쪽으로 걸어왔을 때, 나는 내게 달라붙은 새로운 마력에 온 힘으로 저항하면서 내 정신의 자유를 지탱 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침착한 태도와 친절함이 나를 원래대로 침착하게 해주고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여러 군데로 여행을 했으니 인간들을 어떻게 보느냐고 그가 w마시 후 내게 물었다. 신에 가깝다기보다 동물에 가까운 자들이었다고, 나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가혹함과 엄격함으로 대답했다. 오오, 인간이 더욱 인간적이기만 하다면야! 라고 그는 열의와 사랑으로써 대꾸했고, 나는 그에게 그 말의 설명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시작했다. 실제로 인간의 정신이 만물을 헤아리는 데 쓰이는 척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싸울 때도 자연의 호의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우리 정신은 우리와 친한 정신을 만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무기는 우리를 겨누고 있으나, 그 방채 뒤에는 좋은 스승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사랑은 가시덤불 속에서도 열매를 주우며, 베어 낸 삶의 밭에서도 이삭을 모읍니다. 그리고 무더운 날에 친절한 손으로부터 마실 것을 내놓았을 때, 사랑은 흙으로 만든 그 초라한 그릇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사랑의 어머니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의 자유는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십시오! 그것을 잃는다면, 하늘도 그것을 보상해 주지는 않습니다. 부족함을 느낀 나머지 자기를 잃어서도 안 됩니다. 아버지의 고귀함을 부인하고 언제나 나를 잃는 사람, 그것은 언제나 방황을 겹치게 할 뿐이며, 그런 상태로 빠지기 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랑은 어떻게 자기의 깊은 내면이 갖고 있는 부를 자기 소유로서 인식할 수 있을까요. 풍부하면서도 그것은 가난을 느낍니다. 또 가난의 절절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그 충일은 실은 하늘을 가득히 할 정도입니다. ~~~
어떤 행위나 어떤 사상도 그대가 요구하는 것에 도달할 수 없다고,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그대의 무력이라는 형태로써 그대에게 말해 줍니다. 그 영광을 잊지 말라고. 자신의 무력만을 생각하는 자는 늘 소심하게 남의 지지를 구해, 주위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자기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늘 남에게서 받으려고만 하며,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에게 일체가 주어져도, 그는 그것을 틀림없이 부족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받는 것만 생각하는 좁은 길을 취하면, 부(富)도 우리에게는 부족하게 됩니다. 누가 대해를 한 그릇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의 눈이 하나님의 신을 있는 그대로의 찬연한 빛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부족이나 결함이 전혀 없는 것을 의식하기란, 우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부족이나 결함이 없는 것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 내부에 있는 숨은 힘이 스스로 나타나고, 그 힘으로부터 뜨거운 햇빛에 의해 양분을 받아 당신의 영원한 성장이 전게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꽃이 질 때는 그것을 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으며, 당신의 가지가 시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당신 내부에 무한 무궁의 싹을 갖고 있는데, 그 싹을 생의 부족한 속에서 보전해 가십시오. 당신의 자유스런 정신은 자연에서 저항을 받으며 불굴의 태도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야만 됩니다. 자연은 우리 에게 싸움을 걸면서도 우리가 동정을 구걸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까. 자연은 겁쟁이를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정신의 고귀함과 힘을 치부하여 이 늙은 싸움 상대인 자연에게 맞서 싸워야 할 텐데도 울면서 이렇게 말할 때, 자연은 그 아첨을 벌합니다. ‘나의 여자 친구여, 당신은 호의를 가져 주는군요. 저는 당신에게 나 자신과 무기를 건네 드립니다‘라고.
운명의 철차(鐵車)는 자기 준마를 용감히 타지 못하는 자를 쓰러뜨립니다. -또 자연은, 사람들이 자연의 폭풍을 피해 사념의 나라, 가능성의 조용한 나라 안에서 현실을 잊고 자족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의 본질의 깊이를 구명해 보십시오. 그러나 아킬레스가 스틱스 강에서 헤엄쳤을 때처럼, 불굴의 힘으로 그 깊은 곳에서 나타나 싸움으로 뛰어들기 위해서만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당신이 생각한 바를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 그러나 자연이 나날의 일을 도우려 할 때, 당신의 정신이 감각의 나라에서 거울을 보듯 기쁜 마음으로 자기와 닮은 모습을 바라볼 때, 그리고 자연계의 여러 가지 형식이 당신의 고독한 사상에 자매처럼 다가올 때, 그런 때 당신은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사랑을 쏟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쾌한 바람이 당신의 돛을 풀게 할 때도 당신은 조타기에서 손을 떼어선 안 되며, 신선한 운명의 여신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결과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 여신이 노래를 부르는데 당신이 잠들면, 당신은 그녀를 요녀 세이렌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우면서도 기쁨을 갖는 것, 그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나그네여, 정신을 그 드높은 곳, 조용하고 영원한 나라에 두고 인간의 변화무쌍한 생활, 더욱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명랑하게 내려다보며 조금이라도 순수 정신에 닮은 것이면,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최소의 것에도 신적인 것과 친근감으로 인간답게 허용하며, 자연의 적대적인 움직임에도 무장을 갖추어, 화살이 힘없이 떨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자연의 온갖 평화스런 현상에 대해서는 그것을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하십시오. 그리하여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안아 올릴 때의 헥토르처럼 투구를 그 앞에서 벗도록 하십시오. 희망과 신앙의 장미꽃으로 삶의 밤을 밝게 하되, 무의하게 수수방관하지는 마십시오. 고귀한 것과 진실한 것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구속 없는 자유스런 마음으로 전하되, 절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말 것이며, 청순한 사물에서 주어지는 것을 감사히 받으며 형제 같은 마음으로 그 선물을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최선입니다. 내게 이런 것을 가르쳐 준 것은, 내가 존경하는 내 인생의 학교입니다.
저도 너무나 오랫동안 방황했었습니다. 제 청춘 이야기는 모순으로 가득 찬, 극단과 극단의 교체입니다. ~~~그 극단의 한 가지는, 우리가 슬픔에 잠겨 가난한 상태로 전락해서 고귀한 소유물을 생각지 않으며, 우리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할 모든 것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믿고, 그 잃어버린 것을 미래나 현재의 미로에서 찾아 구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극단은, 우리의 심정이 가혹해져서 온갖 도움을 경멸하며, 온갖 신앙을 신랄하게 비웃고, 선량한 자연이 우리 소원을 받아 주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저항 받는 것을 자기가 갖고 있는 힘의 위대성을 증명하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지금 평화롭게 묘지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식물은 어머니인 대지에 언제나 충실하며, 새는 숲에다 집을 짓고 거기서 주는 나무 열매를 쪼아 먹습니다. 자연은 만족해서 그 단순한 생활법을 절대 잃지 않습니다. 자연은 자신의 가난함을 넘어 요구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족이 없는 정신도 그와 마찬가지로 영원의 충일 속에서 자족합니다. 완전 속에는 전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신의 부를 열망하고 있습니다만, 그 식량은 자연의 가난함이기 때문입니다. - 감각의 나라에서 만족을 모르는 심정이 계속 대상을 따라 뛰어다녀도 그것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심정은 무한을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시냇물은 가시덤불 사이를 방황하며 흐르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대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자기를 잊고 한계를 넘어서 dsltlr할 수 없는 세계의 미로 속에 갈피를 못 잡고 불손하게도 자신의 유한을 뛰어넘으려 해도 그것을 꾸짖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완성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규칙한 흐름도, 그것이 하늘의 물에 의해 넘치는 일이 없다면, 자기의 물길을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3]
우리는 티나로 돌아왔다. 다음날 내가 그를 다시 방문햇을 때, 그는 이미 떠난 뒤었다.
[4]
나는 언제까지나 그를 생각하며 슬픔에 잠겼다. ~~~그에게서 들은 그 짧은 말도 내 가슴에 간직되어, 그것은 내게 무척이나 신성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나는 차츰 성인이 되었다.
머리위로 별이 떠오르면, 나는 종종 별의 이름을 불러 보기도 했다. 그것은 예전부터 지상에서 살아 있던 영웅들의 이름이다. -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오, 신에 가깡ㄴ 사람들이여! 나는 외쳤다. 당신들 일을 모두 잊게 해주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의 빛남으로 나를 죽여 다오. 지복의 젊은이들이여!
나는 겨우 인간들 틈에 끼여 위안을 구하게 되었다. 내가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었다. 고독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틀어박히면 생각이 빗나가기 쉬운데, 사람들과 어울리면 그것을 분별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서 만들어 내기는 불가능하며, 또 타인들에게서도 그것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각자 자기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내를 알게 되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커다란 이득이 된다고. 그러나 나는 당시 그런 분별 있는 말을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전혀 다른 의도를 안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젊디젊은 심정이 삶의 유희를 저렇게 중대시하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진귀한 것을 찾아낸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축제에서 저렇게도 만족해 돌아온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그런 축제로 그들처럼 즐거워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러자면 거기서 무한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여겨졌다.
내 암흑 같은 기분 속에서도 봄은 나를 놀라게 했다. 마른 가지가 움직이며 미풍이 볼을 스칠 때, 나는 멀리에 있는 봄을 예감할 수 있었다. 비록 순간적이나마 신록은 내게 놀랄 만큼 활기를 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다정한 아침 햇살이 나를 깨울 때는, 무엇이든 잘될 것 같다는 예감이 나를 즐겁게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연인 같아서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집안 일로 몇 주간 그 섬에 머물다가 산니콜로로 돌아왔다. 다정한 봄은 그 넘치는 젊음으로 나의 사랑하는 숲속에 깃들여 있었다. 마치 다시 한 번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 나는 창을 열고 축제일처럼 옷을 손질했다. 내게도 저 하늘에서 오는 손님이 돌아오는가. 이 가련한 내가 새삼스럽게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죽은 자들이 회생한다는 건가. 하고 나는 생각했으나,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화사한 옷에 덤비는 아이들처럼, 기쁨에 넘친 자연의 모습에 눈길을 줄 때마다 나의 내부에는 더욱 나은 날이 오리라는 확신이 커갔다. 사람들이 티나의 다정한 바다로 넘쳐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밖으로 나갔다.
감미로운 요술 같은 봄이 다시 온갖 것을 젊게 하고 생생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얼굴에도 어느 때보다 다정함과 활기에 넘쳐 있었다. 도처에서 악의 없는 농담이 오갔으며, 보통 때는 신중한 인사만으로 지나치던 사람들도 오늘은 서로 손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즐겁게 조각배를 타고 멀리 저어 나가, 먼 곳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섬을 향해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플라타너스 숲으로 돌아와 봄바람 같은 춤을 추었다. 얼마 뒤에는 텐트 아래에 모여 즐거운 식사를 하면서 로네카 춤(그리스의 민속춤)의 미로 속에서 없어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칭찬하기도 하고 기뻐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것만으로는 나를 죽음 같은 상태에서 구할 수 없기에. 나는 그곳을 떠나 쓸쓸한 언덕길을 방황하면서, 때때로 아래쪽의 떠들썩한 세계를 바라보고는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행복한데, 왜 나는 결핍에 번민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기쁨도 얼룩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며, 어쩌면 내게도 인제 부터는 좋은 시절이 오리라고 희망했다. 그러곤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노트라의 집을 지나갈 때였는데, 거기에 그의 모친이 문밖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았다. 기품 넘치는 처녀들이 떼지어 그녀를 둘러싸고 명주실을 짜면서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를 합창하고 있었다. “저기에 사람 기피증에 걸린 분이 오는군요.”하면서 모친이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완대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 이렇게 오랫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 벌을 받아야겠지요.” 노트라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젊은이가 없는 사이에 내 집에는 한층 귀여운 사람이 들어왔다구요. 인제는 당신이 오지 않아도 걱정이 없어요. 거만한 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기에 그녀가 서 있었다. 사랑의 사제처럼 신성하고 다정한 그녀가. 아아, ~~~~그대로부터 여러 해가 흘렀고, 바다가 그녀와 나를 가로막았으며, 세계의 모습은 내 앞에서 천 가지로 변화했으나, 그 사람의 모습은 나를 떠나는 일이 없었다.
[5]
다른 처녀들과 디오티마가 부지런히 일을 하는 동안, 노트라의 모친이 내게 말했다. “조용하고 사려 깊으며 불평을 모르는 저 아이가 내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노트라의 모친이 말을 계속했다. ” 저 아이는 트몰로스 산의 쓸쓸한 골짜기 파크톨스 강 언덕에서 왔습니다. 저 아이의 부친은 노트라 가문의 연고자이지만, 동족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스미르나로부터 그곳으로 은거한 것이고, 모친은 이오니아의 왕족이었으나 일 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때 노트라가 와서 내게 다정하게 d니사를 건네며 말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나? 나는 왜 자네가 화를 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그러자 모친이 그의 말을 막으며 그를 가까이 불러 귓속말을 했다. 내게는 여전히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나는 뭔가 기쁜 일을 예감했다. 나는 노트라에게 용서를 빌지 않을 수 없었다.■
(Review)
오래전에 일주일에 일회 신문 칼럼을 연재하는 분이 일주일 내내 글을 고치고 다듬는다고 고백한 기사를 보았다. 괴테는 60년에 걸쳐 전 생애 동안 심혈을 기울인 작품 파우스트에서 문장을 죽기 직전까지 고쳐 썼다고 한다.
글을 다듬고 쓰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글의 씨앗이 있어야만 의미를 적절하게 조합하고 새롭게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평소에도 다른 이들의 글 속에서 씨앗을 찾고 또 일상에서 발견된 씨앗을 메모로 준비하라고 한다.
“아름다운 생명이여!
한겨울의 연약한 꽃송이처럼, 그대는 살고 있구나.
늙어버린 세계에 그대 갇힌 채 꽃 피우고 있구나.
홀로 봄볕에 몸 쬐고자 사랑하며 밖으로 애써 향하네.
세계의 청춘에 몸 덥히고자 그대는 그것을 찾고 있네.
그러나 그대의 태양, 아름다운 시대는 지고
지금은 서리 내린 밤에 광풍들 다투어 불고 있구나.“
-휠덜린의 시. <디오티마에게>.-
<히페리온>이 책에는 그런 씨앗들이 많다. 문장 하나하나에 역동적인 에너지와, 갈등, 아름다움과 사랑, 희망이 느껴지고 마음에 담고 싶은 독특한 이미지가 담겨 있다.
윌덜린(1770~1843)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소설 속의 주인공 “히페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작가 자신을 가리킨다. 서간체 소설과 단상, 그리고 청춘 시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1797년에서 1799년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출간된 것을 한데 묶었다.
이 책의 출판 당시 휠덜린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소개로 괴테, 피히테, 노발리스와 같은 대문호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갖추어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무렵 그는 부유한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가,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 책에서 히페리온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디오티마‘ 는 바로 그 여인이다. 현실에서 두 사람의 밀회는 발각되었고, 휠덜린은 가정교사직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히페리온이 전쟁에 나가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주제테와 헤어진 휠덜린은 심한 생활고와 정신적 갈등을 겪으며 작품에 열중하기도 했으나 1802년 주제테가 사망하자 정신 착란 증세를 나타내게 되었고, <히페리온>을 감명 깊게 읽은 목수 ‘에른스트 치머’ 가 휠덜린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함께 36년이라는 세월을 돌보며 평온한 삶을 지내도록 돌보아 주었다.
휠덜린은 당대에 명성 있는 대문호들의 그늘에 가려져 인정받지 못하고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20세기 초 그의 시어가 헤르만 헤세, 릴케, 벤야민, 블랑쇼 등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며 오늘날 독일 문학의 선구자적 평가를 받게 되었고, 1, 2차 대전 당시 전선에서 전몰한 독일 병사들의 배낭에는 반드시 그의 작품이 보물처럼 간직될 정도로 그에 대한 독일 젊은이의 애정은 거의 광적이었다고 한다.
1, 2부 소설 속에서 휘페리온은 독일에 망명한 그리스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만난 친구인 ‘벨라르민’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이어진다. 조국 그리스에 대한 그리움과 연인 ‘디오티마’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시적으로 표현되어 독자들에게 ‘휠덜린’이라는 작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소설 속에서 히페리온은 조국 그리스의 부름을 받아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데 그 과정에서 연인 디오티마와 결별하게 된다. 히페리온의 결심을 알게 된 디오티마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분, 이제는 아무 말도 마세요. 저도 아무 말 않겠어요. 제발 떠나세요. 자랑스러운 분. 당신이 그런 분이라면, 당신에 대해 제게 무슨 힘이나 권리가 있겠어요.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고,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그 앞에 서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게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본문)
전쟁터에 나간 히페리온은 디오티마에 대한 그리움을 이렇게 적어 보냈다.
“나는 죽음 같은 이별에서 소생했습니다. 나의 디오티마여,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원기에 넘쳐, 나의 혼은 원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지금 에피다우로스 산맥의 어느 정상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 멀리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디오티마여, 당신의 섬입니다. 그리고 그 앞쪽에는 나의 결전장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승리할 것인가 전사할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오오 펠로폰네소스여, 그대들 에우로타스와 알페이오스의 수원(水源)이여, 거기에서 승패가 갈라지는 것이다. 스파르타의 삼림 속에서 이 나라의 예로부터의 수호신이 독수리처럼 우리 군대를 휘몰아치는 양쪽 날개에서 뛰어나올 것이 틀림없다. 나의 혼은 행위의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디오티마여, 그리스의 계곡들을 멀리 바라보는 내 눈은 마치 마술을 내리려는 듯 빛나고 있습니다. 또다시 일어서라, 신들의 도시들이여라고. 신이 나의 내부에 틀림없이 깃들여 있습니다. 내가 우리의 이별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레테의 언덕에 모이는 지옥의 손님처럼, 지금 나의 혼은 당신의 혼과 함께 천국 같은 자유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운명은 이제 우리의 사랑을 좌우할 힘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본문)
히페리온의 편지에 디오티마는 이렇게 화답 했다.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분. 당신이 영광에 빛나고 있을 때, 저는 말라 시들어 버려도 괜찮은가요? 삶의 기쁨이 당신의 전신의 힘을 소생시킬 때, 제 마음은 지쳐 있어도 좋은가요? ”(본문)
소설은 여기서 흐지부지 이어지게 되는 것처럼 마친다. 이어서 ‘히페리온의 단상’ 과 ‘ 히페리온의 청춘 시절’에서는 삶의 노정에서 알게 되는 소회와 깨달음이 산문체 형식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이야기, 거대한 서사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회적인 책이 아니라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알듯 모르듯 한 글을 남겼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이 책에 독일 사람들의 사랑이 깃들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내가 두려워하는 점은, 혹시나 사람들이 이것을 어떤 지침서처럼 읽어, 거기에 내포된 사상적 내용에 지나치게 마음 쓰지 않을까 하는 점이며, 또한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 흥미 본위로 가볍게 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내놓은 이 꽃에서 단지 향기만을 맡으려는 사람도, 또 그것을 쥐고 거기에서 지식만을 얻으려는 사람도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다.”■
(본문)
"승리에 빛나는 반신(半神)과 같이 장려한 헬리콘의 거친 평야와 설봉을 아침 해에 빨갛게 물들인 파르네스 산, 그리고 낙원과 흡사한 시키온의 평지와의 사이를 그 빛나는 만은 환희의 도시, 청년 같은 코린트를 향해 파도를 일으키며 춤춘다."
“사르디스의 평원에서 나는 트몰로스 산의 암벽 사이를 올라갔다. 그리고 산속의 아담한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뮈르터 나무 그늘과 무성한 향기 속에서, 사금을 낳는 파크톨스의 흐름 속에는 백조 떼가 내 곁에 떠 있었고, 여신 키벨레의 옛 신전은 느릅나무 사이에서 수줍은 망령같이 나타나 밝은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인간들끼리의 일은 잊도록 하라. 그리고 온갖 괴로움과 울분이 겹쳐 굶주려 구하는 마음이여, 돌아가라! 그대가 나온 자연의 품으로. 방황 없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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