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농우(農牛)
1500년 전부터 소 이용… 한 마리당 논·밭 700평 갈았죠
입력 : 2023.08.31 03:30 조선일보
농우(農牛)
▲ 김홍도가 그린 '단원 풍속도첩' 중 '논갈이'. 소 한 마리에 멍에를 지우면 외겨리 혹은 독겨리라 하고, 쌍멍에를 소 두 마리에 지우면 쌍겨리라 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올여름 장마철에는 폭우로 물에 잠긴 축사에서 소를 구출했다는 소식이 여러번 전해졌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소는 농민의 중요한 재산이자 국가 경제 기반이었습니다. 소를 죽이면 엄벌에 처하기도 했죠. 조선 초기 세조 때 편찬한 법전인 경국대전은 '소를 죽인 자는 몽둥이 100대, 도형(노역형) 3년에 처하고, 이웃과 관리가 이러한 일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몽둥이 80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이후 성종 때 편찬한 경국대전(을사대전)에는 "소를 도살한 사람을 한 명 잡으면 면포 10필을 준다"고 돼 있어요.
이처럼 정부가 나서 소를 죽이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가 농민이 농사짓는 데 가장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소가 많아야 곡식을 많이 생산할 수 있고 국가 경제가 튼튼해질 수 있었어요. 부유한 양반이 몰래 백정 등을 시켜 소를 잡아 고기를 먹는 일이 없도록 나라의 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일하는 소가 필요한 이유
농경지에 비가 오면 농작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거름이 땅속으로 스며들고 땅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그런 곳에 농작물을 심으면 잘 자라지 않아 수확량이 적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농민은 흙을 땅속 깊이 갈아엎어 식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양분이 땅 위로 올라오도록 했어요. 이것을 '깊이갈이(심경법)'라고 불렀어요.
농경 초기 우리나라와 중국에선 사람이 쟁기를 이용해 논과 밭을 갈았어요.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10㎝ 이상 갈기 어려워 수확량이 적었어요. 또 거름이 부족해 농경지에 매년 곡식을 심지 못하고 2년에 한 번 정도 농사를 지어야 했어요. 농민이 농경지에 해마다 곡식을 심으려면 깊이갈이와 많은 양의 거름이 필요했어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소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농부가 소를 이용해 쟁기를 끌어 농경지를 갈면 15~30㎝ 정도로 깊이갈이를 할 수 있었어요. 또 소의 배설물과 풀, 짚 등을 썩혀 많은 양의 거름을 생산할 수 있었죠.
소를 이용한 농경의 시작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 3년에 우경(소가 쟁기를 끌어 농경지를 경작하는 일)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 초기에는 사람과 소의 힘으로 쟁기를 이용해 농경지를 갈았고, 이후 6세기쯤에는 우경이 널리 보급됐다고 보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평평한 농경지에서는 소 한 마리(외겨리)가 쟁기를 끄는 경우가 많았고, 비탈진 곳에서는 두 마리(쌍겨리)가 끌었어요. 지역이나 토지 상태에 따라 쟁기 끄는 소의 마릿수가 달랐어요. 통상적으로 일소의 힘, 흙의 상태, 쟁기 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 한 마리가 쟁기를 끌면 약 600~700평, 소 두 마리가 쟁기를 끌면 1200~1800평 넓이 농경지를 갈 수 있었다고 해요.
소는 쟁기를 끌 뿐만 아니라 곡식이나 땔감 등을 운반하는 수레(소달구지)도 끌었어요. 소가 쟁기와 수레를 끌면 보통 사람보다 7~8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죠. 1970년대 이전까지 일하는 소 없이 농사짓는 일은 불가능했을 정도니 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죠?
'100집의 밭을 겨우 소 몇 마리가 갈았다'
소는 풀과 짚, 겨 등 곡식 부산물을 먹고 자랍니다. 여름에는 밖으로 끌고나가거나 풀을 베어다가 먹이고, 겨울에는 곡식에서 나온 부산물이나 짚으로 소죽을 끓여 먹였어요. 외양간에는 짚이나 풀을 바닥에 깔아주고 그 위로 배설물이 쌓이면 모아뒀다가 거름으로 사용했어요. 소는 키우는 과정에서 정성과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죠. 식구와 비슷해 '생구(生口)'라고 불렀어요. 주인집에 사는 노비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어린 송아지가 태어난 후 5~6개월 지나면 코뚜레를 걸고 고삐를 매었어요. 소가 1년 정도 자라면 멍에를 씌우고 빈 달구지를 걸어 끌고 다니게 하거나 쟁기를 걸어 모래밭을 갈아보게 했어요. 농부가 어린 송아지를 '일하는 소(농우·農牛)'로 만들려면 일정 기간 훈련이 필요했지요.
과거 일하는 소는 매우 귀했습니다. 조선 성종 때 강희맹이 쓴 농서 '금양잡록(衿陽雜錄)'에는 '동리에 100집이 있는데, 가축이 있는 집은 10곳 남짓이다. 거기서 송아지를 제외하고 농사일을 맡길 만한 소는 겨우 몇 마리에 불과하다. 100집의 밭을 몇 마리 소가 갈자 하니 힘에 부치기 마련이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일소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 수 있지요.
일소가 없는 농부가 소를 빌려 논과 밭을 갈려면 보통 2~3일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라면 누구든 자기 일소를 갖고 싶어 했죠. 일소는 마을 전체의 중요 재산이라 키우는 방법이 다양했어요. 그중 세 가지를 알아볼까요?
우선, 소가 없는 농부는 암송아지를 데려다 키워 일소를 만들고, 그 일소가 새끼를 낳으면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뒤 새끼를 소유할 수 있었어요. 다음으로 부잣집에서 소가 없는 가난한 농민에게 송아지를 사줬다가 1년 남짓 먹인 후 판매해 사준 자와 먹인 자가 이득을 절반씩 나누기도 했어요. 또 부잣집에서 일하는 소를 가난한 농부에게 사주고, 그 소가 새끼를 낳아 어느 정도 자라면 소와 새끼를 부잣집에 돌려주는 방법도 있었어요. 가난한 농부는 그동안 일소를 부려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불리한 조건이었지요.
일소가 중요해지면서 소의 수는 점차 늘어났어요. 1930년대 안동 지방의 소 사육에 관한 연구를 보면, 농가의 수와 소의 사육 두수(頭數)가 비슷합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농기계가 등장하면서 일소는 점점 사라졌죠. 오늘날은 고기를 먹기 위해 기르는 소가 더 많아요.
▲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제수각 앞에서 촬영한 소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 지난달 17일 충남 청양군 청남면 대흥리 일대 침수 현장에서 건물 위로 떠내려간 채 발견된 소. /뉴스1
이환병 관악고 교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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