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脫俗탈속, 脫身탈신의 과정을 뚫고 나가는 한강의 글쓰기>
한강에게 있어 우리의 삶이란 낙원으로부터 추방되고 타락해가는 비극적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 보인다. 선악과를 먹고 추방된 에덴동산의 신화에서 상기되는 것처럼 삶은 본질적으로 사악함에 몸담는 과정이다. 문제는 그 더러움을 어떻게 감내하고 정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책은 구원에의 열망과 그 변질이라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치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이 짐승의 세계 역시 꽃의 세계를 갈망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꽃과 같던 엄마에서 마녀 같은 엄마로 변해버린 엄마의 슬픈 변화는 곧 들짐승 같은 아버지가 겪을 그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이해와 연민, 그것이 한강의 소설을 따뜻하게 만든다. 사실 한강에게 있어 사람이란 근원적으로 서로에게 낯선 타인일 뿐이며, 따라서 결국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나고자 할 때 ‘너’는 머무르고자 하며, ‘내’가 슬퍼 울 때 ‘너’는 웃음으로 넘쳐나고, ‘내’가 이쪽으로 가고자 할 때 ‘너’는 저쪽으로 가고자 하는 것,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관계의 숙명인 것이다. 그러나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세계가 만날 때 한강의 슬픈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에 의하면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존재, 두 세계를 연결하고 결합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물로 부터 시작된다….
들짐승처럼 무섭게 짖어대던 개가 천막 쇠기둥에 매인 초라한 개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이때 ‘나’와 ‘너’, 무서운 대상과 무서워하는 존재, 꽃과 짐승은 대립적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로 겹쳐진다. 아버지가 끝내 버리지 않은 엄마의 꽃핀, 이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세계를 다시금 이어줌으로써, 개의 세계와 꽃의 세계가 하나로 만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눈물과 사랑의 힘이 행복을 영원히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를 감동시킨 눈물은 금세 마르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일상은 아득하며, 우리가 꿈꾸는 것은 과수원 집이지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짐승의 시간이다. 한강은 짐승의 운명과 식물에의 꿈을 한 몸에 지닌 이 슬픈 존재의 숙명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은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잃어버린 낙원으로의 귀향을 끈질기게 꿈꾼다…….
한강의 인물들이 무거운 짐승의 몸을 벗고 가볍게 날아올라 사악하고 더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나기를 꿈꿀 때, 그것은 우선 세상밖으로 달려나가 길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는 탈주의 꿈으로 나타난다. 그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여행을 꿈꾸며, 그들의 눈은 바다를 행해 있다..….
한강 소설에서 ‘끝’은 인물들이 서 있는 현실의 쓸쓸한 가장자리이자 동시에 자유로 이어지는 위태로운 통로다. 거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유를 향해 과감히 한발을 내딛거나 쓸쓸히 뒤로 되돌아서는 것뿐……
탈주가 불가능한 아내는 철제 현관문과 베란다 쇠창살 등으로 상징되는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묵직한 철구’가 그녀의 발과 다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먼 데로 가’자는 말이 묻히고 탈주에의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녀는 다리를 잃고 이빨이 빠지면서 ‘두 발 동물’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식물이 되어간다. 고정된 자리에 뿌리박고 있어야 하는 이 수동적이고 정적인 몸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잔병에 시달리던 온몸에 푸른 멍이 들고 배가 고프지도 않을 뿐더러 하루에도 몇 번씩 토악질을 해대는 그녀의 몸은 그 고통과 상처를 통해 동물의 몸, 욕망의 몸을 벗는다. 그녀의 내장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위, 간, 자궁, 콩팥 모두 서서히 사라져간다. 이 脫身탈신 혹은 식물로의 변신은 새로운 탈주의 방식이 된다…..
한강이 꿈꾸는 이 脫俗탈속, 脫身탈신의 경지는 구질구질한 일상을 사는 소심한 우리들에게는 다소 추상적이고 먼 세계로 보이기도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며 욕망과 폭력성, 상처와 같은 인간사로부터의 해탈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붉은 꽃 속에서]를 읽으면 이런 느낌은 더 강해진다. 우리 삶의 업보가 ‘살아서는 속가의 반연을 끊고, 죽어서는 육신도 태워 산중에 뿌리는 탈속, 탈신의 과정을 뚫고 나가는 한강의 글쓰기는 진중하고 힘겹다. 심지어 그는 작가로서의 말의 욕망조차 덜어내려는 듯 보인다(희랍어 시간). 그리하여 짐승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꽃의 세계로 들어서고자 하는 그 과정은 산문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점점 詩의 세계로, 禪의 세계로 다가가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끝없이 욕망을 덜고 몸을 태워 꽃의 세계로 다가간 인물도 창조해 내기도 하지만, [흰 꽃]에서처럼 구토가 나와도 억지로라도 밥을 씹어 삼키면서 삶의 역사적 현장으로 걸어간 인물들이 우리의 가슴속으로 구멍을 내어 뚫고 들어오게도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는 부조리한 역사적 상황에서 불의한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눈 감고 있었던 우리의 양심을 찔러 피 흘리게 만든다. 다수의 이름(국가, 반공, 종족, 신앙, 성별, 등등 어떠한 명분이라도)으로 타자에게 행사된 폭력을 슬퍼하며 함께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탐욕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과연 사람 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한강소설 <내 여자의 열매/ 2000.3.15./창비 출판> 황도경의 해설에 덧붙여 원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