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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있는 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양애경 시인
박주용 시인은 차분하고 과묵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참 야무진 사람이다. 그는 목소리가 높지 않다. 예의 바르고 정도正道를 지키지만 약하지 않다. 그는 선량함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조용히 보여주는 사람이다. 조심스레 문학 애호가를 자처하는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201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옹이>가 당선되어 등단한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시인이 있었나 하고 그의 첫 시집『점자, 그녀가 환하다』를 들여다보니, 놀라울 만큼 시의 세계가 탄탄하고 깊다. 이런 후배님이라면, 하고《화요문학》에서 시 공부 같이 해보자고 했더니 기꺼이 동참하였다. 요즘은 계룡에 살며 할 일이 많아 얼굴 볼 시간이 적은 게 좀 아쉽지만, 능력 있는 사람이니 세상의 쓰임이 많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박주용 시인의 두 번째 시집『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의 원고를 받고 두어 달 동안 공들여 여러 차례 읽었다. 실험적인 난해성을 가진 작품이 아닌데도 한 번에 쉽게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만의 독특한 미학과 철학으로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독을 하고 마침내 몇 가지 소주제로 챕터를 구성하여 이 시집의 해설을 쓰기에 이르렀다.
1. 독특한 미감美感으로 잡아낸 자연의 신비
박주용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먼저 주목한 것은 독특한 미의식이다. 시인의 시의 출발은 산책이다. 그는 걸으며 보는 풍경들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섬세하게 언어로 구성해낸다. 시인은 들을 걸으며 보이는 사물들을 그야말로 ‘흡수’하여, 그곳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치밀한 언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보행의 리듬에 따라 시의 운율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며 풍부한 색채감으로 이미지가 채워진다.
산사 가는 길은 호남선 철길 따라 커피 전문점 칼디의 전설을 지나는 길이라서 방목된 염소들도 춤을 춘다
가끔, 아르튀르 랭보 닮은 푸른 눈의 스님을 만나기도 하는데 스칠 때마다 서로 합장할 뿐 나무의 학명 묻지 않는다
산사 가는 길은 매일을 걸어도 나를 처음 걷는 길이라서 낮달 담은 저수지도 어제는 아니다
산사 가는 길은 삼백예순날을 설레어도 내게는 사소한 일상이라서 노을은 흐르고 별은 뜬다
염소들도 스스로를 똥그랗게 비우며 산사 가는 길, 내 걸음의 자세를 생각한다 내 길은 내 것만이 아니라서 가로수 나무들도 허공으로 꽃물 오른다.
-「무상사 가는 길」전문
박주용 시인은 계룡시에 거주한다. 거주지와 전원이 적당히 어울려 있는 소도시에서 들길을 걸으며, 시인은 온몸의 감각을 열어놓는다. 호남선 철길과 커피 전문점, 가로수들과 그 꽃과 잎들, 자유롭게 풀어놓은 염소들, ‘아르튀르 랭보 닮은 푸른 눈의 스님’이, 노을이 흐르고 별이 뜨는 우주를 호흡하며 함께 걷는다.
역사가 오랜 무상사는 외국의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으로 과거와 현재가 함께 머물러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무상사로 향하는 길은 ‘매일을 걸어도 나를 처음 걷는 길’이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날이 처음인 새로운 사건이다. 산사로 향한 길을 걸으며 시인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데, 그 일은 언제나 새롭다.
이 시에서 마음에 와닿는 또 한 가지는 시인이 세상과 사물에 대하여 가지는 평등한 자세다. ‘염소들도 스스로를 똥그랗게 비우며 산사 가는 길’ 즉, 염소 또한 인간과 똑같이 삶에 대해 사색한다는 생각, 이 공간과 시간을 자연의 모든 존재가 공유한다는 인식이다. 자연계에서 가장 자기중심적인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를 염소와 나무와 동급으로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박주용 시인의 시에서 돋보이는 것은 독특한 미의식이다. 그의 시는 다양한 이미지를 섬세하게 구사하는데, 특히 색채 이미지를 대표로 하는 시각 이미지의 사용은 다른 시인과 차별되는 특징을 띈다. 시 <붉은 수수>의 예를 들어 보자.
수수가 낮술 기울여 붉다
붉은 것은 붉은 쪽으로 기울어 붉고 계절은 가을 쪽으로 기울어 붉다 바람에 여무는 수수도 경외는 스님처럼 합장하고 연신 허리 기울이는 것이어서 저절로 붉다
수수깡안경 쓰고 도수 없이 한 잔 기울여 보면 사는 게 뭐 별거냐며 하루해는 황소 불알로 축 늘어져 서산으로 붉고, 불알은 내게서도 잘그랑 잘그랑 실없이 붉다
기운 것은 모두 붉어 달도 허하게 붉다.
- 시 <붉은 수수>전문
이 시의 중심적인 시어는 ‘붉다’와 ‘기울다’이다. 시인의 눈길이 수수밭에 닿았을 때, 수수의 붉은 빛은 저녁 무렵의 노을과 연결되고, 수수 이삭이 ‘땅으로 기울어 있는’ 모습은 존재의 슬픔 또는 체념과 연결된다. 낮술 먹고 벌게진 장터 할아버지의 모습이나 막걸리 힘으로 일하다 땅바닥에서 낮잠 든 나이든 인부의 모습이 고개 기울인 수수 이삭과 겹쳐지는 것이다.
‘사는 게 뭐 별거냐’며 축 늘어진 황혼 무렵, ‘잘그랑 잘그랑 실없이 붉은 불알’이 주는 페이소스가, 황혼 · 붉은 수수 · 햇빛과 연결되며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떠오른 커다란 붉은 달과 어울려 우수를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인 사연이 담기지 않고 ‘붉다’와 ‘기울다’를 적절히 반복하며 수수가 리드미컬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황혼 무렵을 구성한 이 시에는 묘한 여운이 있다. 낭송해보면, 허무하면서도 가슴 짠하고, 무위자연적이며 주술적인 매력까지 느껴진다.
이와 함께 시각적인 시어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시편 중에 <스크래치>가 있다.
아버지의 계절에는 뻐꾸기가 여러 번 산 넘기고 넘기고서야 비로소 꽃 피어났다
진득하게 살아온 생, 지게 작대기에 받쳐놓고 담배꽃으로 피어 올리면 노을은 선홍빛으로 물들고 마을은 호롱불 켜기 시작했다 밤 되면 등에서는 열병처럼 더 많은 꽃들 돋아났다 한세상 지고 온 내력 살짝만 긁어도 두견새는 꽃망울 붉게 터트렸다
별똥별도 천년을 노랗게 긁어내렸다.
- 시 <스크래치> 전문
선홍, 노랑 등 색감이 화려한 이 시에서, 제목인 ‘스크래치’가 뭘까 고민해 본다. 회화에서 유화물감이나 크레파스를 겹쳐 바른 후 송곳이나 칼로 긁어내리는 기법을 스크래치(scratch)라고 하고, 표면이 예리한 것에 스쳐 흠집이 나면 ‘스크래치가 났다’고 한다. 현대적인 제목과 전통적인 시의 내용이 이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지게를 지고 고된 노동을 한 아버지 등에 지게 줄에 쏠려 난 상처, 그것이 ‘스크래치’가 아닐까. 스크래치는 하늘을 긋고 떨어지는 별똥별이 남기는 빛이자,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노동의 증거다. 마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던 예수의 등에 내리쳐지던 채찍질 자국처럼. 그리고 그 아버지의 희생의 대가로 가족에게는 최소한의 안온한 생계가 주어진다. 밤이 되어 지게를 벗은 아버지의 등의 통증은 뜨겁고, 그런 아버지들의 귀가를 환영하듯 집집마다 켜지는 호롱불빛은 따뜻하다. 이 시는 ‘상처’와 ‘치유’를 함께 담고 있다. 삶의 애환을 회화처럼 특유의 시각적 언어로 그려낸 시의 풍경이 아름답다.
이처럼 박주용 시인의 시적 표현에는 특유의 반짝임이 있다. 독자도 위의 시 <스크래치>에서 ‘노랗게 긁어내리는 별똥별의 반짝임’을 상상을 통해 보았듯이, 시인과 함께 설레며 그 특유의 반짝임과 눈부심을 경험한다. 더 예를 들면 시 <쌍둥이 별자리>도 그러하다.
발끈, 우주가 뒤꿈치 들었다 놓는다
벽지 타고 오르던 꽃들도 귀 쫑긋 세우고 위층에서 들려오는 신발 문수 가늠해 본다 깊어지는 시간만큼 자라나는 소리, 천정에는 하모니 이루며 별들이 돋아나고 있다
불 끄고 방바닥에 누워 밤하늘에 귀 기울여 보면 아장아장 터치 하나로도 별 쏟아내는 아이들, 오늘은 오른쪽 뺨에 점 발랄한 하느님이 젓가락 행진곡 리드하고 있다
눈 감아야 서로 밝아지는 것들, 시간이 우묵하게 파인 자리에서도 층층이 꽃 밀어 올린 흔적 있어 아파트 벽에 그려진 감자 꽃은 아이 궁둥이처럼 환하다
꽃 피는 소리 왈츠로 흐르는 밤, 천정에는 하느님들로 별자리가 그려지고 있다.
- 시 <쌍둥이 별자리> 전문
이 시에서 독자는 시인과 함께 ‘귀 쫑긋 세우고 귀 기울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우주가 함께 귀를 기울여 아이들의 동정을 엿듣는다. 뛰는 소리, 걷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끄고 방바닥에 귀를 대보면, 뭘까, 천정에서 별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꽃 피는 소리가 들린다. 별과 꽃과 우주가 하모니를 이루어 반짝이는 모양을 상상하다가 깨닫게 된다. 신비로운 시적 표현에 비해 너무 세속적인 해석이지만, 그렇구나, 위층에 쌍둥이 아가들이 사는가 보구나. 점점 자라나면서 아장아장 터치하던 발걸음이 콩콩, 나중에는 쿵쿵…. 녀석들, 꽤 많이 자랐구나. 신발 문수도 꽤 커졌겠는 걸. 아파트의 층간소음을 이렇게 너그럽고 아름답게 해석하고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경탄을 하게 된다.
아이들이 내는 소음이 아니라 아이들이 꿈을 안고 자라나는 소리라는 어른세대의 관용과 애정이, 생명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우주의 신비로운 의미로 확대된다. ‘쌍둥이 별자리’는 쌍둥이 아가들이 뛰어다니는 아파트 바닥의 흔적이자 우주가 키우는 어린 생명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지도다.
생명에 대한 이러한 무한 애정은 작은 사물에도 차별 없이 향한다. 시 <압화전을 보며>에서 시인은 꽃 누르미 작품 전시회를 돌아보고 있다. 꽃잎을 펴서 누른 채로 말려 전시하는 이 전시회는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는 마이크로의 세계다.
꽃 누르미
작품 전시 돌아보며
압화, 압화, 압화
되뇌어 보는 것인데
아파, 아파, 아파
환청 들리기도 하는 것인데
납작해진 눈들과
차마 마주치지 못하는 것인데
세상, 원근법이 사라지는 것인데.
- 시 <압화전을 보며> 전문
시인은 누른꽃 즉 압화壓花 라는 말에서 ‘아파’라는 말을 떠올린다. 꽃을 감정이 통하는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른꽃의 아름다움보다는 납작하게 눌려버린 꽃의 신음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세상, 원근법이 사라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눌린 꽃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나〉내 편〉인간〉사물’이라는 원근법을 사용한다. 내 손톱 밑에 든 가시가 타인의 치명상보다 더 아픈데, 하물며 새와 동물과 물고기, 풀과 나무 같은 것들의 고통은 배려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이것을 시인은 ‘원근법’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편리한 삶을 영위한다. 이 원근법 덕분에 인간은 산을 허물고 하천을 메꾸어 건물을 짓고, 생명 있는 것들을 도축하고 사냥하고 채집하는 식생활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근법이 사라지는 순간, 즉 우주 아래 생명 있는 것들과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눌린 꽃들과도 눈을 마주치기가 미안해진다. 사람으로 태어나 자연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 시에서 필자는 박주용 시인의 이번 시집의 화두가 ‘목숨 있는 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신하게 된다.
2. 목숨 있는 약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목숨 있는 것들은 끝이 예정되어 있기에 슬프다. 연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들일수록 수명이 짧다. 그리고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이 힘들어진다. 박주용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쇠락해가는 것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노래한다.
감정의 낮은 쪽으로 꽃은 기운다
지는 것의 몫은 습한 것이어서
꽃의 하강은 보랏빛이다
스스로를 떨구는 소리로
달무리 지는
자정 무렵
거문고도 울림통을 낮은 쪽으로 향한다.
- 시 <오동꽃> 전문
꽃은 낮은 쪽으로 기운다. 지는 꽃은 생의 마지막 빛깔인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고, 달무리 지는 자정 무렵에 생명을 다한다. ‘낮은 쪽’, ‘기울다’, ‘떨구다’ 같은 시어들이 여리고 아름다운 생명의 끝을 씨실과 날실로 엮듯이 구성해 보여준다. 떨어지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사랑의 끝도 낮은 쪽으로 기울며 스러진다. 왠지 이 시는 생명의 스러짐과 사랑의 종말, 두 가지 의미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지는 것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이 시집의 중심 주제로 잡아볼 때, 이 시집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멍>이 아닐까 한다.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본다
지는 것들은 멍으로 지는 것이어서 그림자도 피멍 들어 있다 멍은 스스로를 색으로 떨구어 목덜미 물린 목련은 하양 지고, 철 내내 심장 터진 철쭉은 빨강 진다 장독대 옹기종기 피어있는 작은 이끼도 하늘의 크기는 같아 파랑 진다
이름 부를 때마다 짙어지는 멍, 새기는 일보다 지우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지는 것들은 한세상을 지우며 지는 것이어서 화장 지운 민낯에도 멍의 흔적 남아 있다 화장터 옆 오동꽃은 딸랑딸랑 보라 물결, 상여길 이팝꽃은 나풀나풀 하양 물결, 이승 지는 것들의 행렬에는 멍의 물결 흐르고 있어 손수건이 촉촉하다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 멍은 더욱 눈가를 맴도는 것이어서 세상은 지독하게 습하다.
- 시 <멍> 전문
시 <멍>은 죽음을 제재로 한다. 시인은 지는 꽃에서부터 죽음에 대한 사색을 시작한다. 꽃은 지상의 생명 중 가장 화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또는 몇 시간 동안 눈부셨던 꽃은 물기가 가시기 시작하면서 멍이 들고 마침내는 땅에 떨어져 한 생을 마치게 된다. 물론 시인은 여기서 꽃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 꽃은 태어나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상징한다. 존재의 성격은 모두 다르기에 죽음을 맞는 모습도 모두 다르다. ‘목련은 하양 지고, 철쭉은 빨강 지고, 이끼는 파랑 진다’.
꽃이든, 사람이든, 나의 부모와 혈육이든 간에 죽음 앞에선 모든 존재가 평등해진다. 죽는다는 것은 의미 있는 한 생애가 사라지는 일이기에, 이 시인이 노래했듯, ‘지는 것들은 한세상을 지우며 지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독자는 착잡해지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민낯에 멍의 흔적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죽음을 맞기까지 겪은 고통스러운 과정의 흔적을 말한다. ‘멍’은 이 시집에서 출현빈도가 매우 높은 시어이다. ‘상처’, ‘고통’의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멍’은 생명 있는 것들이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3연에서 장례행렬의 목적지인 화장터와 상여길 옆에서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꽃과 아울러, 사랑하는 이와 영영 이별하는 사람들의 상처와 슬픔이 드러난다. ‘지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보면’, 시인이 노래하듯 ‘세상은 지독히 습한’ 곳이 되는 것이다.
상처와 죽음을 다룬 이 계열의 작품들로 시 <꽃불 신호등>, <꽃신>, <봄이 접히다>, <어머니의 연못>, <할아버지와 누에> 등이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인연의 끝을 노래한 이 시들은 여리고 절절하고 아름다우며, 인생이 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촉촉한 감성의 위 시들과 달리 다소 건조한 어조로 장례를 다룬 <보내기 번트>는 박주용 시인의 다른 시들과 시어의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야구방망이 대신
꽃 한 송이 들고 들어선 빈소
촛불이 툭툭 허리 굽히며 모션 취하는 순간
코끝 찡하게 어루만지며 보내오는 감독의 사인
타석에 들어서 있는 슬픔의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문상 끝낸 사람들은 저희끼리 모여
베이스에 진루해 있는
주자의 트레이드 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삼루쯤에서 홈으로 내달릴 준비하는
영정 속 사내 주위로
국화꽃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는 찰나
지상의 마지막 호흡을 모아
번트를 댄다
사람 보내는 일,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 시 <보내기 번트> 전문
장례식장에는 가족과 친족, 그리고 직장과 거래처 사람들 등 고인과 여러 갈래의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이 모인다. 고인과의 감정적 거리가 저마다 다르기 마련이기에 애절하게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봉투를 전달하는 책무를 마치고 홀가분해진 사람도 있다. 야구 게임과 장례 의식을 나란히 놓은 이 시는 객관적 시점에서 바라본 고인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죽음을 희화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 고인은 생리적으로는 죽음이 선고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장례식장에 그를 알던 사람들이 모여서 그와의 여러 추억을 회고하면서 이별을 완성했을 때, 즉 고인을 저 세상으로 고이 보내주었을 때 죽음이 완성된다. 장례란 결국 ‘사람이 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서는 일종의 철학적 여유가 풍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잘 알게 된 나이의 연륜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여유라고 할까.
그리하여 마침내 시 <묵묘>에 이르면, 시인은 죽음을 생명의 종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된 우주의 한 존재라고 해석하게 된다.
알몸은 봉긋했던 봉분에 밋밋한 평지 하나 얹기까지 수억의 구름 삼켰을 터, 절정의 끝자락에 잠자리 한 마리 평온하게 올리기까지 수만의 소지 올렸을 터
자작나무 등걸도 스스로의 생각 주저앉히고 흘러내려 시나브로 이승 지고 있다
주저앉은 것들, 시간에 깎이고 다듬어져 모난 것이 없다 흘러내린 것들, 열두 구비의 생각도 모자라 웅덩이 파놓고 동안거 들고 있다
얼마나 둥근 묵언 수행이기에 가시나무도 저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쉿, 우주의 꽃봉오리 열반 중이다.
- 시 <묵묘> 전문
‘묵묘’란 오래 관리가 되지 않아 둔덕인지 무덤인지도 구별이 잘 안 되는 상태가 된 무덤을 말한다. 봉긋했던 봉분이 평지에 가까워지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그 안에 누운 알몸의 사람은 이미 골격도 정념도 다 사라져버린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버려지고 잊혀진 무덤이라고 생각하면 안쓰럽지만, 박주용 시인은 이 묵묘를 다르게 해석한다. 수십 수백 년의 ‘묵언수행’을 거친 수행자인 무덤의 주인은 누구의 자식, 누구의 어버이, 어디의 누구라는 모든 제한을 넘어서서, ‘우주의 꽃봉오리로 열반에 든’ 초월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버이와 자식,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들과 그 인연의 끊어짐으로 인한 비탄, 아름답고 여린 생명을 가진 것들이 멍들고 시들고 죽어가는 것을 보는 애달픔 같은 삶의 고통도, 우주의 정상적인 순환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의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철학적 사색을 계속해 온 시인은 마침내 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태도에 도달하게 된다.
시퍼렇게 멍들어도 어쩔 거여 허옇게 살아야지
장다리꽃, 시리다.
- 시 <내 삶에 무꽃이 피었다 하여 텃밭에 나가보니> 전문
1행짜리 2연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시에 시인이 하려고 하는 말이 요약되어 있는 듯하다. ‘시퍼렇게 멍드는 삶이 계속되더라도 허옇게 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차가운 밭에서 노랗게 피어나는 장다리꽃이 햇볕 아래 시리도록 빛나 보이는 것은 그러한 삶의 긍정적인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워도, 죽음이 예비 되어 있어도, 현재의 삶에서 강렬하게 살아내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에 대한 박주용 시인의 인식인 것 같다.
3. 사람들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
산책하며 마주치는 풍경들 속에서 자연의 신비로운 색감과 의미를 찾아내고, 여린 것들이 멍들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낸 시인은, 마침내 사람들과 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 주목하게 된다. 이 계열의 대표작이라 생각되는 시 <청산 장터>에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들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여는 곳
저잣거리에는 이야기가 자잘하게 피는 것이어서
돌 틈 삐져나온 질경이도 슬며시 귀를 연다
내가 열려 네가 열리고, 네가 열려 내가 열리는
난전의 오일장에서는
꼬깃꼬깃 쌈짓돈도 빳빳하게 열리는 것이어서
튀밥 튀기는 소리가 삼천 원에 열리고
고등어의 등 푸른 바다가 오천 원에 열린다
패스트푸드점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서도
산발치 지켜온
쑥갓이며, 달래며, 씀바귀며, 이름 낮은 것들이
쪼그리고 앉아 이천 원에 열리고
침침하게 포장된 비닐 속에 종일 앉아
저를 맘껏 벌리고 마늘 까는
저 곰 같은 여자도 하루가 구천 원에 열린다
연다는 것은 서로가 흥정인 것이어서
내 마음 열지 않으면 네 마음 열리지 않고
네 마음 열지 않으면 내 마음 열리지 않는다
생선국수 한 그릇으로도 구수하게 만나
보청천 고운 물줄기로 정 나누는 청산장은
사람이 사람을 탁발하는 곳이어서
하루치의 저녁놀도 수수하다.
- 시 <청산장터> 전문
시인은 장터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여는 곳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장이 ‘열린다’라고 하는 말의 어원이 거기서 온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장터에서는 돈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물건도 살 수 있고 먹을거리도 대접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야박한 것이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연다는 것은 서로가 흥정인 것이어서 / 내 마음 열지 않으면 네 마음 열리지 않고 / 네 마음 열지 않으면 내 마음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상대방이 얼마만큼 여는 가에 따라 내 마음 또한 그만큼 열린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오랜 경험에 의해 결정된 합리적인 사회적 약속이며 삶의 지혜다. 열지 않으면 마음이든 물질이든 나눌 수 없는데, 나의 기대에 비해 너무 적게 열리면 서운하고 너무 많이 열리면 부담스러울 수 있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장터는 적당하다 또는 다소 싸다는 느낌의 가격으로 물건들이 열리는 곳이다. 그래서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도 걱정 없이 좋은 고객이 될 수 있다. 고등어, 튀밥, 나물, 깐마늘을 사고, 생선국수 한 그릇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는 곳이다. 대형 마트는 십수 년을 이용해도 모두 낯선 이들이지만, 장에서는 한두 번 물건을 사면 눈썰미 있는 상인의 단골이 되어 반가운 미소를 나눌 수 있고, 넉넉한 덤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장은 ‘사람이 사람을 탁발하는 곳’이라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장은 사람과 사람이 필요한 물건과 함께 사람다운 정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시를 읽으니 시인이 사랑하는 청산장터가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하다. 몹시 가보고 싶어진다.
이와 함께 지상에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자상한 관심이 드러나는 시편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시 <무릎을 굽다>는 군고구마 굽는 할아버지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장작불 지펴 군고구마 굽고 있는
저 할아버지, 무릎 굽고 있는 게야
평생 쪼그리고 앉아 고구마 캐다 보니
도가니 절단난 것도 몰랐던 게야
통증에 좋다는 그 신통한 신신파스 달고 살아도
삭신 쑤시기는 마찬가지여서
겨울만 되면 인적 드문 거리로 나와
벌겋게 무릎 굽는 게야
장작불 실하게 지펴놓고 드럼통 달구면
무릎도 덩달아 폭신하게 익는 것이어서
하늘에서는 눈도 따뜻하게 내리는 게야
- 시 <무릎을 굽다> 중에서
젊은 시절 고된 노동으로 무릎을 못 쓰게 된 할아버지가 한겨울 거리에 드럼통을 내놓고 장작불을 피워 군고구마를 굽고 있다. 추위에 곱은 손에 입김을 불고 군고구마통에 아픈 무릎을 덥히며 그래도 비관하지 않고 단돈 몇 푼의 소일거리를 정직하게 이어간다. 일상적인 거리의 풍경에서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사연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다.
시 <팥죽을 먹으며>도 그러하다. 시인은 장터 팥죽집에서 팥죽을 먹고 있는 것 같다. 급한 허기가 가시자, 뜨거운 불 앞에서 땀을 흘리며 팥죽 쑤는 여인에게 눈길이 멈춘다.
팥죽 쑤는 저 여자
놋쇠 대접 같은 누런 주름 보니 알겠다
산비탈 돌아 굽은 밭고랑 일구며
한평생 오금 저리도록 허리 펴지 못한 채
사타구니 짓무르는지도 모르고
꽃 피어오를 때까지
꼬투리 실하게 익을 때까지
두둑이 북도 주고
한여름 내내 햇살과 바람으로 서성였음 알겠다
- 시 <팥죽을 먹으며> 중에서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강한 햇볕 밑에서 평생 밭일하고 논일하여 두꺼워진 피부의 주름과 너무 많이 써서 구부러진 관절들…. 가족의 생계와 생활을 위해 바친 숱한 노동들. 잘 영근 팥알로 정성들여 쑨 맛있고 뜨끈한 한 그릇의 팥죽을 손님 앞에 올려준, 저 아지매가 걸어온 헌신의 생애가 시인의 눈에 보인다. 그래서 시인은 “저 여자의 한평생을 뚝딱 비우면서 / 나의 한 그릇은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느냐”고 돌이켜보는 반성의 독백을 한다.
시 <고백>은 짧지만 매우 흥미롭다.
지금 사 야그지만
임자 가던 해 말유
그해 고추가 젤 매웠지 뭐유.
- 시 <고백> 전문
한 아주머니(또는 할머니) 화자가 세상 뜬 남편에게 말을 건넨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임자가 세상 뜨던 그해, 그해 고추가 제일 매웠다는 것이다. 그냥 남편 세상 뜬 그해에 고추가 참 매웠지 라는 기억뿐이라면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은데, 하필 이 시의 제목이 ‘고백’이다. 죽은 남편에게 왜 그걸 고백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 고백에 어떤 행간의 의미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많은 다양한 상상이 허용될 것 같아 재미있다. 누군가에게 깊은 궁금증을 품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함께 살던 임자와 이별할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마음을 추스른 후일에 와서야 속내를 드러낸다. 한 생을 더불어 살던 임자와 사별하던 그해가 가장 슬펐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이런저런 산책을 한 시인은 마침내 이 해설에서 다루고자 한 마지막 시에 다다른다. <상생>이다.
나무는 둥지 품고, 둥지는 새 품고, 새는 알 품고, 알은 우주 품고, 우주는 나 품고, 나는 똥 품고, 똥은 씨 품고, 씨는 나무 품고, 나무는 시 품고……
숲에 들어가니 다람쥐가 땅속에 도토리 묻고 있다 식량으로 쓸 요량이다 겨우내 찾아내지 못한 도토리는 내년 봄에 싹으로 돋아나겠다
숲이 울창해서 시도 푸르겠다.
- 시 <상생> 전문
약하고 여린 것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는 모든 생명이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박주용 시인이 도달한 결론은 함께 살아가기, 즉 상생相生이다. 상생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통하는 원만한 해결책이다. 우주와 지구가, 자연과 인간이, 나와 사물이 이로운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산다는 것이다.
자연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감각으로 잡아내고, 멍들고 사라져가는 여리고 선한 생명에 감응하며,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꿈꾸는 것, 이것이 박주용 시인이 이번 시집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이며 세계관이다. 때로 다람쥐처럼 추운 겨울을 위해 묻어 놓은 도토리의 위치를 잃어버리더라도, 그 도토리는 내년 봄에 참나무로 돋아날 것이라고 시인은 믿는다. 이렇게 울창해지는 숲에서 시인의 시도 푸르게 번성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