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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우상
32: 1-6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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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의 영도자 모세가 주도한 광야교회는 가나안 입국이라는 대명제 하에 목적의식이 분명한 교회였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의 싸인에 따라 일정기간 장막생활을 하기도 하고, 때가 되면 어디로든지 행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연 환경이나 여러 가지 악조건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과 초자연적인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광야교회의 역사는 세상이라고 하는 거친 토양 위에서 오직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야하는 지상교회의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 성경에는 시내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40일 간이나 산 위에서 율법을 계시 받고 있을 때 진중에서는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을 하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광야교회는 후세 사람들에게 사표가 될 만한 이적과 큰 권능이 행사되었지만, 다른 한편 그들이 저지른 과오로 인하여 징벌을 받은 불행한 일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은 광야 교회의 역사를 조명하므로써 그 감격스럽고 은혜로웠던 일을 계승하는 한편 그들이 자행한 범죄와 징벌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I. 불신앙으로 빚어진 행위입니다.
본문 말씀 3-4절에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저희 손에 있는 금붙이를 가지고 우상을 만들고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경배하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조형물을 두고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주권자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이사야 40:18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거나 인정받아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은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입니다.
여기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든 무리들은 자기들 손으로 고안하여 만든 물체를 하나님이라 불렀고, 그것이 저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23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언약에 대한 불신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애굽에서 저희를 인도하여 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왕과 그 신하들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행하게 하고, 유월절의 피 뿌리는 절기를 정하며,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오게 하신 하나님을 저들은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가나안 땅으로 가야 되는 일련의 과정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운동과 가나안 입국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2:24에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3) 자의적인 신앙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지키게 될 율법을 반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1-3에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요 불문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경우에도 이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의 삶을 영위하여야만 됩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나 명분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아말렉 전쟁에서 거둔 전리품을 모두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살찐 소와 양과 짐승들을 살려 두었습니다. 그 일로 사무엘에게 책망을 받게 되자 그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하여 살려 두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이 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하였습니다(삼상 15:22-23).
Ⅱ.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계시나 율법을 반포하실 때 먼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정립하게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님은 주권자요 자기 백성은 거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파동은 그들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행태로 빚어진 산물입니다.
(1) 배금(拜金)주의입니다.
1절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백성은 조급한 나머지 아론에게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하고 재촉하였습니다. 이에 아론은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2절).
백성들은 지금까지 저희를 인도하여 나온 신이 없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앞으로 인도해 줄 신을 저희 손으로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덩달아 아론도 부녀자들이 가지고 있는 귀금속을 모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모아온 금고리들을 불에 녹여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금을 물질적 부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재물이 부요하면 최고의 영광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적 발상을 가진 사람은 종교의 본질도 물질에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곧 재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인 것입니다.
(2) 공명(功名)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행위는 목적도 방법도 결과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위가 말씀에 근거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지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곤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신앙적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말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자기의 명예와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옛날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땅에다 성을 건설하고 하늘에 닿을만한 탑을 세우면서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창 11:4).
본문 말씀 4절에 보면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황금을 소재로 하여 송아지 형상의 예술품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머리를 써서 당시 이방인 사회에서 유행하는 종교적인 성향과 하나님 제일 주의적 유일 신앙에 실증을 느끼는 이스라엘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여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웃을 일이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예술과 문화로 이름을 들어내고자 하는 자들의 발상이 그런 것입니다.
(3) 집합(集合)주의입니다.
다수주의의 대중 심리에 영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광야여행 기간에는 여러 차례 진중반란을 일으키며 가나안 운동을 저지하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였습니다(출 14:11-12).
민수기 11:4-6에 보면 출애굽한 사람 중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고 백성을 선동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반항하게 하였습니다. 민수기 14:1-4에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 중에 열 명이 그 땅을 악평하며 백성을 충동하여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 때 성난 군중들은 돌을 들어 모세를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민 14:10).
민수기 16:1-2에 보면 레위 지파 사람 고라가 중심이 되어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짓고 250명의 족장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와해시키려는 목적과 또 절대 다수의 군중을 업고 나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리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은 다수주의에 영합할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군중을 선동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소수보다 다수를 존중하되 그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게 됩니다.
Ⅲ.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행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반역행위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 때까지 그 험한 시내산 암벽사이에서 하나님과 마주대하며 십계명의 율법을 받고 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정의 일단을 내비치셨습니다.
출애굽기 32:7-9에 보면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저희 신이라고 하는 소리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9-10절에 보면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 은혜를 배반한 자에게 징벌 하였습니다.
본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단정 하였습니다(9절). 이는 고집이 세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완고한 백성이라는 뜻이거나 구제불능의 희망이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실 때나 이스라엘의 회중 앞에 나타나실 때는 항상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하였습니다(출 20:2). 신명기 7:8에는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기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송아지에게 절하며 희생을 드렸고, 또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고 하였습니다(8절).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이름을 모독하고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할까봐 경계하면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출 20:5).
(2) 무책임한 선동자를 징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2:28에 보면 모세의 명령에 따라 레위 사람들이 금송아지 우상의 주동자들 사천 명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소수의 불순세력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덩달아서 행동하고 그 결과 불행한 일에까지 얽혀들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에도 섞여 사는 무리 중 불만을 품은 자들이 백성을 선동하고 집단 반란을 일으키게 작용 하였습니다.
민수기 11:4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하며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춰주었습니다.
민수기 16:1에 나오는 고라의 무리들도 몇 사람이 당을 짓고 족장들 중 이백 오십 명을 내세워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게 하였습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그 무리들을 백성과 격리시키고 땅이 갈라지게 하여 그 선동한 무리들과 이백 오십 명을 응징하였습니다(민 16:31-35).
어느 때나 고라의 무리들처럼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백성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를 감춘 채 겉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백성을 위하는 것 같은 언동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우를 두고 “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 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1:14).
(3) 하나님 나라 역사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고린도전서 10:11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불신앙적인 소수에 의하여 말없는 다수가 무고한 피해를 당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묵과 하지 아니하시고 징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빚어진 불행은 모든 백성이 다 치러야 했습니다. 우선 가나안 행진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그 기간 또한 엄청나게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온 사람들 중 열 명의 정탐꾼이 반기를 들고 선동했을 때 백성들이 덩달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광야에서 사십 년이나 맴돌고 말았습니다.
민수기 14:34에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뿐 아니라 선민의 역사에 후퇴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도자 모세로 하여금 또 다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면서 고된 시련을 겪게 하였습니다(출 34:8). 이스라엘의 광야교회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