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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수 목사
어떤 수도사에게 여인이 찾아와 하소연합니다. "남편과의 다툼 때문에 살수가 없습니다." 수도사는 물이 담긴 병을 하나 줍니다. "남편과 다투기 직전 이 물 한 모금을 입안에 물고 삼키지 마세요.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이 물은 신비한 물입니다." 여인은 남편이 시비를 걸 때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가정이 조용해지고 부부가 화목하게 됐습니다. 여인이 수도사를 찾아와 고마움을 전하며 그 물이 참으로 '신기한 물'이라고 감탄했습니다.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그 물은 평범한 물입니다. 다만 침묵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시는 모습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신 경우를 사울 왕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삼상 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도 그럴 경우가 종종 있지요. 말 같지 않은 말 할 경우… 상대가 너무 수준이 낮아서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낄 경우 차라리 침묵해 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도 하나님의 침묵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하라는 말씀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헤롯과의 대화에서는 완전 침묵을 지키십니다.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눅 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영어 성경에 보니까 but jesus gave him no answer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 대답도 주지 아니했다. 침묵의 의미는 답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no answer 왜 침묵 하시느냐…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있는데 답이 없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침묵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침묵으로 받아드리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그리고 그 예언은 오늘 본문인 마태 27:12-14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시면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심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엄청난 곤욕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그 입을 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침묵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벧전 2:21)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의 침묵도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말 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침묵을 통하여 어떤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요? 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을 배워야 할까요?
1. 침묵은 하늘의 지혜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우리를 자유의 문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침묵은 우리를 지혜의 보고로 인도 합니다. 침묵한다고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이란 말을 아끼는 것 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말씀하셨으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땅의 세계만 알고 세상 나라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려고 애쓰셨으나 빌라도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세상 수준에서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고 일하셨으나 당시 사람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무리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침묵을 하셨다고 해서 일체의 말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되도록 말을 아끼셨고, 보다 많은 경우에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 27장에서도 대제사장들에게 고발 당하시기에 앞서서 마태 26:62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62절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그 다음 63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침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침묵을 깨시고 64절에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는 결정적인 때에도 대답을 회피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해야 할 때에는 분명히 해야 할 말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꼭 필요했던 말은 그의 침묵 속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 위대한 말, 필요한 말, 참으로 깊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침묵이 창조적인 지혜를 제공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늘의 지혜를 공급받는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율법은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침묵 속에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일어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 8:7) 예수님께서 왜 아무 말씀 없이 땅에 글을 쓰셨을까요? 먼저 말을 통하여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했다면 흥분한 사람들은 아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헤로우신 예수님은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말씀하기 보다는 침묵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지혜로운 언어…. 이것은 침묵의 은총입니다. 침묵의 영성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왜 가정에서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게 되는 줄 아십니까? 감정이 상해있을 때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성을 높이면 상대방을 자극하여 감정은 더 상합니다. 마음의 문은 더 닫혀지고 상대의 논리에 반박할 방법만 찾게 됩니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다투게 되고 상처만 크게 주고 받습니다. 이런 때는 침묵이 약입니다.
아무런 반박도 하지 말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흥분한 감정이 가라앉기 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들을 여유가 생길 때에 의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이 우주에서 침묵만큼 하나님의 모습과 닮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침묵은 고요함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고요히 자랍니다. 고요함 중에 꽃이 피고 고요함 중에 꽃이 집니다. 고요함 중에 태양이 뜨고 고요함 중에 태양이 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십시오.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식물은 소리 없이 자랍니다. 곡식은 소리 없이 영급니다
타우러스산은 독수리의 서식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 독수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중의 하나가 바로 두루미랍니다.두루미들이 이곳 타우러스산을 넘어갈 때 독수리들은 두루미를 기다리고 있다가 잽싸게 공격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합니다.그런데 언제나 독수리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두루미들이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원래 두루미는 떠들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하늘을 날면서도 계속해서 소리를 발합니다.독수리는 두루미의 이 성향을 역이용해서 먹잇감을 찾아가는 신호로 삼습니다.그러나 나이가 많은 노련한 두루미들은 거의 희생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노련한 두루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그들의 입에 돌을 물고 날아가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입에 문 돌 때문에 침묵을 지키며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미물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침묵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침묵할 줄 아는 노련한 두루미가 떠들며 사는 미련한 인생보다 낫습니다.
침묵은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를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침묵은 말의 실수를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실수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던진 말 때문에 생기는지 잘 아실 것 입니다. 그 한마디만 안 했어도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을…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이 교훈은 우리 믿는 성도들을 말 하는 것 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말에 실수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삶의 지혜를 제공해 주는 잠언에 보면 모든 교훈의 핵심이 주로 우리들의 언어생활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8장에는 이런 경고가 많습니다.
(잠 18:2)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잠 18:4)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잠 18:6)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 18:7)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잠 18:8)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 18:15)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잠 18:20)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그래서 저는 우리들이 스스로 훈련해야 할 중요한 삶의 영역이 있다면 바로 침묵의 훈련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는 오래 전에 삼일 동안 침묵 훈련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삼일 동안 말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삼일 동안 저녁 식사 후에만 침묵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일체 말을 할 수 없고,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이 되면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침묵은 훈련으로 되어지는 것 입니다. 이것도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시는 여호수아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도는 동안 흥미있는 한 가지 명령을 추가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6:10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곧 행진하는 동안에 침묵을 명하신 것입니다. 함구령이 내린 것입니다.
왜 이런 침묵의 명령이 필요했을까요?
우선 침묵이 명해지지 않았다면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번져 갔을까요?
"야, 우리가 돈다고 이 성이 무너지겠냐? 여기서 이렇게 돌다가 진짜 우리가 돌겠다. 돌기 전에 그만두자." 틀림없이 이런 부정적인 메시지는 쉽게 동조자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침묵의 시간에 당신의 백성들이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런 침묵의 행진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인생의 여리고를 침묵하며 믿음으로 행진하여 깨뜨릴 것을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충분히 침묵했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소리를 외칠 타이밍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내는 소리들은 과연 믿음의 소리일까요? 아니면 의미 없는 헛된 소리들일까요? 이 세상에 쓸데없는 헛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소음 공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침묵으로 들어가십시오. 침묵이 저와 여러분의 말의 실수를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 하여 홍해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군중들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들은 울며 불며 떠들었습니다. 우리를 죽일 때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빨리 바로에게 항복하고 돌아가자.” 인간들의 소음 공해가 시작 되었습니다. 그 때 기도하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가만있어라. 오늘 하나님이 일을 하실 것이다. 조용히 있으라.”
신약에 보시면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요한을 잉태했을 때부터 출산하였을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 저 말 함부로 하지 말라.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보라. 침묵하라.” 그래서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의 잉태를 지시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 모든 일을 마음에 두니라.”라고 했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침묵은 하나님께 일을 맡겨드리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때는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렇게 가만히 계신 것인가?’ 이런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무 나설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내가 조용할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특별히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지심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이를 침묵으로 수용하신 것입니다. 변명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가 구차한 변명과 방어를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상황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강력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 53:7에서 주께서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침묵하신 이유는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10절에서 해명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의 뜻을 수용하시는 아멘의 침묵이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대제사장 앞에서도 빌라도 앞에서도 주께서는 침묵을 지키신 것입니다. 몇 마디의 변명만 하면 예수를 풀어 줄 생각을 했던 빌라도 총독에게 이런 예수님의 침묵은 기이한 침묵이었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마태 27;14)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놀라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에게 침묵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방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구원하셔야 하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비록 고통스러워도, 수치스러워도, 피하고만 싶어도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감당하시려고 침묵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분의 임재 앞에 서 있다면 이제 구차한 변명도, 불평도, 고발도, 원망도 그만 하시고 그분의 임재,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잠잠히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잠잠하면 그분이 친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연습 할 때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처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여인에게 몰려와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고 다그쳤습니다.
상황이 몹시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당황한 처녀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 수도사를 지목했습니다. 사람들은 수도사에게 몰려가 사실여부를 따졌습니다. 수도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사람들은 처녀를 임신시킨 주인공으로 확신하고 비난을 쏟아부었습니다. 위선자, 이중인격자, 더러운 놈.. 흥분한 이들이 던지는 돌에 의해 수도사는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렇게 죽은 수도사를 장사 지내려고 수의를 입히다가 수도사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수도사는 얼마든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데 왜? 침묵하였을까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함으로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내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여 회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들추어 정죄하고 심판하려는 사람들을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일깨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침묵을 통하여 어떤 웅변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주 작은 비난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습니까? 사소한 문제로 인하여 얼마나 억울해 하고 목청을 높입니까? 아주 작은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싸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묵묵히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때로 나에게 주어진 고난에 순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젊은 철학자 에머슨이 대사상가인 칼라일을 방문했습니다. 두 사람은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말없이 걸었습니다.해질 무렵에는 모두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두 사람은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저녁때 에머슨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이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라일도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머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자네는 매우 훌륭한 철학자가 될걸세"
두 석학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그들은 `대화'보다 `명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래서 서로 침묵의 시간을 깨뜨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웅변보다 침묵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침묵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때입니다. 지금은 침묵하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말 못할 속상한 일이 많으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여 침묵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1. 침묵은 하늘의 지혜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2. 침묵은 말의 실수를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3.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기는 믿음의 행위이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을 통하여 더 깊은 영성을 소유 하시는 사순절을 보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들의 억울한 사정을 모두 다 아시는 주님 앞에서 변명하며, 떠들며, 들레지 말게 하시고 잠잠히 주를 바라보며 하늘의 지혜를 공급 받아 살게 하시고 말의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온전히 맡기며 오직 주를 믿는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