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닷의 첫번째 변론
성경: 욥8:1-22 찬송; 404장, 373장
<서론>
지금까지 엘리바스와 욥 사이에 진개되었던 변론을 소개한 데(4-7장) 이어 본문
에서는 새로운 변론자 빌닷의 공박이 소개된다. 빌닷은 욥을 비난하는 어투로 말을
시작하여(1-2절), 하나님의 의로음(3-7절)과 유서 깊은 전통(8-19절)의 이름으로
앞선 엘려바스와 같은 맥락의 비난에 찬 충고를 퍼부었다. 그리고는 간단하나마 격
려성 발언을 덧붙인다(20-22절). 실로 전통과 편협한 자기 생각만을 중시하여 현실
속에 전개되는 다양한 인간의 삶을 무시하고 무조건 정죄하고 매도하는 것은 또 하
나의 교만이요 범죄가 아닐 수 없다.
<본론>
1.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함부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빌닷은,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 공의로운 분이심과 또 참회하고
당신께 돌아오는 자에게 회복과 형통의 은혜를 입히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욥에게 확인시켜 주었다(1-7절). 한편 빌닷의 이같은 발언은 하나님의 공의로
움이나 자비로음을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통해 욥의 불의함을 들춰내고 그
를 정죄하려는 의도가 더욱 짙었다. 실로 빌닷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지식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이웃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빌닷은 그같은 신지식을
가지고 타인의 허물을 들춰내고 이웃을 정죄하는 데 사용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 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롬 1:21), 하나님의 거룩
한 품성을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자는 그야말로 하
나님을 만홀히 여기며 하나님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크나큰 범죄자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의 신앙 지식은 과연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가?
2. 전통적인 지식이 최고의 논단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
빌닷은 욥을 정죄하고자 하는 자신의 논리를 더윽 힘있게 하기 위해 옛 시대 사
람의 지혜와 열조의 일(8절)을 거론하였다. 다시 말하면 빌닷은 지금껏 내려오는
전퉁적인 지식과 전통의 권위롤 통하여 자신의 논증을 더욱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
다. 그리하여 빌닷은 전통의 권위를 힘입어 마치 백과사전의 지식을 읊조리듯이 악
인이게 임할 멸망에 관해 소개했던 깃이다(11-22절). 물론 빌닷히 이같은 발언은
비록 인생에 있어서 보편적인 진리를 말한 것일 수는 있으나 욥과 같이 특수하고
독특한 상황에 처한 자에게는 오히려 짐이 되고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매몰찬 논
지인지 모른다. 이처럼 진통적인 권위와 전통의 잣대로 일반 상식으로써 도저히 아
해하기 힘든 특수한 고난에 처한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오직 진리와
생명의 메시지인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인간의 최고의 판단 기준일 수가 있다(시
119:105 딤후 3:15.17)
3. 전통보다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1-22절).
빌닷 역시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재난 중에 빠진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고자 욥을 방문했습니다(2:11). 하지만 욥의 재난과 곤경이 상상을 초월하여
심각하고 비참하자, 그들은 위로의 말문을 열지 못하고 깊은 비애감과 참담함 속에
칠일 칠야를 빠져 있었습니다(2:12-13). 그러던 터에, 욥이 극한 고통의 와중에서
자신의 생일을 한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자(3장), 욥의 친구들 중 최장자인 엘리바
스가 자신의 경힘에 근거하여 변론했습니다 그 내용인 즉슨, 분명 욥은 그 죄때문
에 그같은 고통이 임했으니 회개하고 축복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4-5장). 이에 누
구보다도 경건하게 살았고, 따라서 작금의 재난과 고통을 초래할 만한 특별한 죄를
기억할 수 없었던 욥은, 엘리바스의 말이 아무런 도음도 될 수 없었고 오히려 감정
만을 악화시킬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무죄와 성결을 주장했습니다(6-7장).
그러자 엘리바스에 이어 두번째로 빌닷이 나선 것입니다. 빌닷 역시 엘리바스와
같은 입장에서 욥을 비판했습니다. 빌닷은 열조의 전통을 근거로 삼아 읍을 비판했
습니다(8-19절). 왕골, 갈대, 거미줄, 덩굴 식물 등을 예로 들어 세상적인 깃에 의
존하는 악인들의 허무함과 신속한 멸망을 역설했습니다. 욥 역시 그러한 것들에게
의존하였다가 오늘날 그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식의 변론이었습니다. 빌닷은 욥의
고난을 퍼의 결과로 판단한 깃입니다. 그래서 "득죄하였으므로 ...그 죄에 붙이셨
나니"(4절) 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보십시요. 빌닷은 읍의 특별한 고난율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상 빌
닷이 역설한 전통은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
지만 그것으로써 빌닷은 읍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욥을 정죄하는 잘못에
빠졌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 율법주
의자들이 랍비들의 전통과 장로들의 유전을 중시하고, 따라서 그것을 가르치고 역
설했지만, 결과적으로 백성들에게 아무런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주지 뭇한 것과 같
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만 얹혀 주었고, 스스로 올무되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
일까요? 전통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통을 말하는 자에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통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빛을 발합니
다. 사랑 없는 전통은 죽은 의문의 율법이요, 날지 못하는 박세된 새에 불과합니
다. 따라서 전통보다 소증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즉 그때에 빌닷은, 욥을 정죄하
는 화려한 옛 선조들의 전통을 역설하기 보다 차라리 욥의 고난을 함께 아파하고
그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는 그 따스한 사랑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사
실 그때에 읍도 무엇보다 이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습니다(16:1-5).
4. 이론보다 소중한 것은 실천입니다(1-22절).
사랑 없는 전통은 이론에 치우칩니다. 헌실 속의 아픔은 히면한 쾌 그저 이론적
이고 원론적인 법씩들만 나열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빌닷의 변론이 그랬습니다. 보
십시요. 그의 말은 흠 잡을 데 없이 모두 옳은 말입니다. 구구절절 명문입니다. 그
렇지만 그 슨간에 욥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흙조각이 의복처럼 몸에 붙었고, 가죽
은 곪아 터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밤낮으로 고통의 순간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오
히려 죽음이 그리워질 그러한 지경에 처혜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빌닷은 유창
한 이론을 설파합니다.
읍은 외롭고 답답했습니다. 친구들의 말은 이제 날카로운 가시에 불과할 뿐입니
다. 위로와 긍휼의 말은 없었습니다.
욥에게 필요란 것은 원론적인 냉냉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빌닷은 차라리 욥의
몸에서 흐르는 피고름을 닦아주는 조그마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냉냉하고 원론적인 이론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창한 이
론보다 소중한 것은 작은 사랑의 실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