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1-20
새벽을 준비하는 느헤미야
우리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가정의 울타리가 헐렸습니다 느헤미야를 사용하셨던 하나님,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은 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누가 이 새벽을 맞겠습니까?
2001년 6월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점치는 집의 수가 1만1천4백54개라고 합니다. 다방과 찻집의 수는 4만4천3백60개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찻집 4개당 1개가 점집인 셈입니다. 이렇게 많은 점집이 있고 수 많은 무속인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들을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인과 무속인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습니다. 무속인들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 신을 이용합니다. 점을 보고 굿을 하고 부적을 붙이는 일련의 행위들로 신을 달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복을 얻습니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기를 부정합니다. 신앙인은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복과 욕망을 채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진정한 신앙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그렇습니다. 믿음은 죽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사십니다. 내 안에 사는 그 분을 따라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느헤미야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고, 하나님의 환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으니 느헤미야의 길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고 나아갔던 바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모진 매와 감옥이었습니다. 한동대 김영길 총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총장을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제안을 거절하고 세번째 제안이 왔을 때, 장로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부름 때문에 따라갔지만, 장로님을 기다리는 것은 부채와 고난과 감옥이었습니다. 부름 때문에 바벨론을 떠난 느헤미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패배한 역사와 낙망한 백성들, 그리고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 일에
느헤미야는 적어도 두 달 이상의 여행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의 호위병과 함께 화려하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모습은 황폐한 성읍에서 소망없이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놀라움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관심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행동하지 않고 3일 동안 쉬었을까요.
서두르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서두르는 것이 좋지도 않습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가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소문을 들은 후 그는 마음에 근심을 감출 수 없어서 왕에게 근심을 들켰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3일 동안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머무름’의 의미
이 머무름에는 세 가지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이 기간은 느헤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객관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목숨을 걸고 이루어야 할 사명이지만 느헤미야는 개인의 지혜와 힘으로 그 일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고위 관리들을 만나며 정치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부자들을 만나면서 경제적인 지원을 요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 재건의 사명은 누구의 사명입니까? 개인의 것입니까, 민족의 것입니까? 성벽 재건의 주인공이 느헤미야입니까? 아닙니다. 주인공은 그 땅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유다민족입니다. 느헤미야의 ‘여유’는 예루살렘 재건이 느헤미야 한 사람의 일이 아닌 모두의 일이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느헤미야의 머무름은 유다민족의 행동을 부추겼습니다.
둘째로, 이 머무름은 사람의 지혜와 힘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서부터 일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요란합니다. 작은 것을 큰 것이라고 떠듭니다. 자신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것은 떠들썩한 변화가 아니라 조용한 혁명입니다. 느헤미야는 침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머물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되새깁니다.
성벽이 재건되어야 할 곳은 총독의 관저가 아닙니다. 부자들의 집이 아닙니다. 성벽이 재건되어야 할 곳은 여인들이 유린당하고,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메는 거리, 밤이 찾아와도 잠들 수 없는 억울함이 있는 통곡의 땅, 주님의 찢겨진 가슴이 있는 곳, 주님의 꺾여진 무릎이 있는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위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지만, 느헤미야는 역사의 새벽을 맞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민족과 함께 그 아픔의 자리에서 동고동락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첫 삽질, 첫 곡괭이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두 단어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서지 않고 ‘물러가셨다가’ ‘거기서 사셨습니다’. 주님의 공적 사역은 고통받고 있는 그 땅의 백성들과 머물러 함께 떡을 먹고, 그들의 눈물을 보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느헤미야도 그렇게 시작합니다. 느헤미야는 사람을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압력을 가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습니다. 평생 살아온 깊은 가슴, 그 가슴을 나누며 사역을 시작합니다. 어디에서 역사의 새벽을 맞을 수 있습니까? 동 트는 민족의 가슴에서 새벽을 맞을 수 있습니다. 3일의 안식은 개인의 사명을 객관화 했고,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용기
마지막으로, 머무르며 지냈던 그 시간은 느헤미야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폐허 속에 도착한 느헤미야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용기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환상을 갖고 도착한 느헤미야가 직면한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저항군인 반페르시아계가 예루살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적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홀로 바로 왕 앞에 섰던 것처럼, 느헤미야는 절벽과 같은 상황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격려하십니다.
“느헤미야야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피해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고, 뚫고 가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용기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가자,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나갑니다. 그는 대적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조롱했지만 느헤미야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 기업을 함께 위업으로 받을 수 없다. 떠나가라.”(20절)
세상 끝에 서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느헤미야의 이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주목하십시오. 그분에게 마음을 드리십시오. 그분과 함께 머무르십시오.
지금은 ‘역사의 새벽’ 깨워야 할 때
이제 느헤미야에게 행동의 때가 왔습니다. 12~16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쌔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본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앞으로 행하여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그 밤에 시내를 좇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으나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인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다가”
3일 동안 쉬고, 침묵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기를 얻은 느헤미야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쉴 때가 있으면 일할 때가 있습니다. 지도자는 종종 다른 사람이 잠잘 때 깨어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쉴 때 일을 합니다. 대적을 의식한 느헤미야는 한밤중에 일어나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을 시찰했습니다.
지도자들은 공상의 세계에 빠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을 직시하고 직면해야 합니다. 좋은 소리 뿐만 아니라 좋지 않는 소리도 분별력있게 들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시찰하고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꼭 필요한 정보를 얻었고, 성벽 재건을 위한 설계를 마쳤습니다.
설계를 마친 느헤미야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가서 외쳤습니다. 17, 18절을 보십시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의 호소는 열정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단순하고 분명했습니다. 이 단순한 도전 앞에서 유다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였던 하나님은 이미 그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패배했던 과거를 들먹거리지 않았습니다. 자원하고 헌신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여전히 황폐하고 무너진 돌무더기는 거리를 막고 있었지만, 이미 이들은 역사의 새벽을 깨우고 승리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교육이 무너지고, 가정의 울타리가 헐렸습니다. 느헤미야를 사용하셨던 하나님,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은 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시고 새벽으로 부르십니다. 누가 이 새벽을 맞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