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하우스 13회 (4~1화). 루시에게 필요한 것은 러브 러브.
“새봄, 제발 이번에는 새 룸메이트가 커플이 아닌 싱글 여자였으면 좋겠어.”
아그네스 역시 존과 마틸다 커플 때문에 스트레스를 매우 심하게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들어온 사람이 미국인 영어교사 루시다. 미국에서도 영어를 가르쳤던 그녀는 한국 고등학교에서 외국인 영어교사로 일했다. 하루 수업이 4시간밖에 없어서 아주 일찍 퇴근하는 그녀는 집에 돌아와 주로 인터넷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루시가 매일 접속하는 사이트는 ‘아메리칸 데이트 라인' 같은 미팅 및 연애 사이트. 활발한 성격에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집에 잘 붙어 있지 않는 아그네스와 다르게 루시는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에 붙어 데이트 중계 사이트에 들어가 남자들의 프로필을 검색했다. 어쩌다 나와 얼굴이 마주치면 흥분해서 자기에게 메일을 보낸 남자들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루시가 보여준 사진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십대의 꽃미남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자는 메일을 보내는 뚱뚱하고 느끼하게 생긴 사십대 백인 아저씨, 멕시코풍의 갈색 머리 남자, 이탈리아 사람으로 추정되는 눈썹 짙은 남자, 마약이라도 할 것 같은 가죽점퍼를 입은 남자, 해변에서 웃통을 벗고 찍은 사진을 보낸 근육질의 남자까지 정말 다양했다. 생각해보면 루시는 남자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특별한 취향은 없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가 “꺄악!” 소리를 지르기에 놀라 달려가 보았다.
“새봄, 이것 봐! 레즈비언 여자한테서 메일이 왔어!”
루시는 긴장된 목소리로 나에게 메일을 보내온 남자들 가운데 다섯 명을 추려 이번 여름휴가 때 미국에 가면 만나볼 거란다.
아그네스는 그런 루시가 정말 이상하다고, 아무래도 이번 룸메이트도 실패한 것 같다고 고개를 저었다. 남자에 너무 연연하기는 했지만, 나는 루시와 지내는 생활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루시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마치 자신이 할리우드 스타가 된 것 같았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는데, 한국에 오니 가는 곳마다 나보고 예쁘다고 하잖아.”
루시는 한술 더 떠 더욱 예뻐져서 세인들의 관심을 지속시켜야겠다며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루시는 아그네스처럼 채식주의자이지만 우유와 치즈는 먹는다고 했다. 고추장과 커피 마니아인 그녀가 먹는 유일한 음식은 커피와 고추장을 듬뿍 바른 크래커 몇 조각이 전부였다.
이사 온 다음 주 주말에 루시는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파티 준비로 부산을 떨었다. 매일 저녁마다 알록달록한 무늬의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잔뜩 사들고 왔다. 양초, 식탁보, 고급 냅킨, 소주, 맥주, 포도주, 과일과 갖가지 음식 재료 등 온갖 것들을 사 날랐는데, 누가 보면 수십 명이 참석하는 성대한 파티를 여는 것 같겠지만 사실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고작 세 명뿐이었다.
“새봄도 같이 하지 않을래?”
루시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마침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외출했다 집에 들어오니 그녀는 친구들과 거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눈 다음 방으로 들어가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화가 잔뜩 나서 들어왔다.
“새봄, 내가 집들이에 초대했던 한국 남자 말야, 그 남자한테 여자친구가 있었어. 어쩜 그럴 수 있지? 난 전혀 몰랐어. 내겐 여자친구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단 말이야. 같이 등산도 갔었다니까.”
아, 루시가 그렇게 파티 준비해 공들인 이유가 있었구나. 어쨌든 나도 따라 흥분해서 말했다.
“루시, Never see that guy again. Never!”
한국 남자와의 핑크빛 로맨스가 허무하게 끝나자, 루시는 다시 데이트 라인 사이트에 접속해 시간을 보내며 한동안 우울해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잠시, 루시에게 다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친구로 지내던 대니얼이라는 캐나다 남자가 어느 날 술을 마시고 그녀에게 “Maybe…, I love you”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루시는 너무나 행복해했다. 집에 들어오면 언제나 인터넷 앞에 앉아 있던 그녀가 이제는 나만 보면 대니얼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행복에 겨워 온 집안을 동동 떠다녔다. 나는 들었던 말을 또 듣고, 다음 날 또 지겹게 들으면서 대니얼이 그녀에게 속삭인 사랑의 밀어에 대해 “Great!”라고 연발해 줘야만 했다.
하지만 그 사랑도 잠깐이고, 대니얼이 그녀와 한 약속을 번번이 취소하는 바람에 나는 또 매일 그녀한테 대니얼을 증오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런 놈과는 당장 헤어져!”라고 충고했다. 그녀도 마지못해 고개를 떨구었지만, 대니얼에 대한 마음을 접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가 보다. 그녀는 다음에 또 대니얼과 약속을 잡았고, 역시나 대니얼이 취소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니얼의 태도였다. 약속을 취소하려면 미리미리 해야지 꼭 일주일 전에 잡은 약속을 한두 시간 전에 취소하니, 하루 종일 메이크업 하고, 의상 고르느라 기대에 부푼 루시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말이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그녀의 상실감과 분노를 고스란히 들어줘야 하는 것은 내 몫이 되고 말았다.
아그네스는 그런 그녀가 비정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루시는 남자친구에게 집착하는 것 외에는 너무도 평화로운 사람이다. 간혹 내가 대니얼의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는 것 같으면 그만둘 정도로 눈치도 있고 심성이 착해서 절대 남을 공격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의 발음은 미국 본토 발음이 아니던가. 그녀의 흥미로운 남자 얘기를 듣고 있으면 서점에서 파는 영어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영어 리스닝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의 푸념조차 웬만하면 즐겁게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한테는 어떤 면에서 루시가 오랜 지낸 아그네스보다 편하기도 했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자기표현이 확실한 아그네스는 무척 활동적이어서, 내가 회사 가는 며칠을 뺀 나머지 시간에 집에서 게으르게 뒹굴면서 만화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는 것에 대해 종종 핀잔을 주었다. 내 생활에 참견하는 것도 좋지 않았지만 루시가 나와 비슷한 스타일이라서 편했던 것 같다.
글로벌 하우스 13회 (4~2화). 그날 밤, 그녀의 잔인한 복수는 성공했을까?
루시가 또 대니얼 때문에 화가 났다. 열 받아서 상기된 얼굴로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내 옆에 앉았다.
“새봄,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그녀의 하소연이 또 시작됐다.
“대니얼이 지난주 토요일 파티에서 한국인 여자를 만났대. 그 여자랑 키스까지 했대.”
그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에 대니얼은 루시와 저녁식사 하는 자리에 결국 그 한국인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왔던 모양이다. 몇 번이나 루시에게 사랑하다고 말했던 대니얼이 이제는 루시가 보는 앞에서 한국인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눈꼴시린 장면을 연출하다니. 게다가 대니얼은 루시에게 한국인 여자친구를 너무 사랑해서 한국을 떠나기 싫다고 말했단다. 어떻게 그런 나쁜 놈이 있을 수 있을까? 결국 그놈은 너무나 잔인하게 루시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루시는 분노와 상실감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을 흘렸고, 나 또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퍼붓고 나서 나는 헤어지라고, 차라리 상대하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충고했다. 루시를 달래주면서 나는 사랑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은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집적거리는 바람둥이 스타일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고.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인 비 오는 금요일 저녁, 집에 오니 루시의 방이 폭탄을 맞은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평소 깔끔하게 정리를 잘하는 루시인지라 그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내심 놀랐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더니 아그네스가 루시에게 말한다.
“새봄이한테 말해봐.”
폭탄 맞은 방에서 옷을 고르고 있던 루시가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Will you go to 이태원 with me?”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더니 루시를 며칠 전까지 그렇게 분노에 치를 떨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대니얼과 약속이 있다는 것이다.
“또 취소되는 거 아냐?”
“아냐, 아냐, 이번에는 절대 아냐.”
그녀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 한국인 여자 친구는 안 와?”
그러자 루시가 말했다.
“대니얼이 남자친구들하고 이태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보고 여자친구들 같이 데려와서 놀면 어떻겠냐고 해서”.
물어볼 것도 없이 아그네스는 거절했을 것이다. 나는 같이 가 줄 친구가 없는 루시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기도 하고 오랜만에 이태원에 가보고 싶기도 해서 아그네스에게도 함께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그네스, 같이 가자. 내 차로 가면 집에서 이십 분도 안 걸려. 기분 전환도 하고 좋잖아.”
아그네스는 마지못해 승낙했고,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루시는 메이크업과 액세서리, 의상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머리는 귀부인처럼 틀어 올려 업스타일을 하고 까만 사각형 돌이 몇 겹으로 둘러진 목걸이를 했다. 어깨가 드러나는 검정색 탑에 검정 스커트를 걸치고 검정색 구두로 마무리했다. 흡사 영화 속에 나오는, 이브닝 파티에 초대받은 여주인공의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준비를 마친 우리는 거실의 대형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미녀 삼총사 같다. 나는 동양 루시 리우, 아그네스는 키가 크니까 카메론 디아즈, 루시는 드류 배리모어.”
내 말에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나 루시는 “Am I fat?” 하면서 흥분했다.
“아니! 네가 우리 중에 제일 말랐지만 전체적인 캐릭터가 그렇다는 거지.”
지나치게 외모에 예민한 루시를 위해 나는 부연 설명을 해줘야만 했다. 아그네스도 그렇고, 루시도 그렇고 전혀 뚱뚱한 편이 아닌데 지나치게 다이어트에 집착했다. 자기들도 서양에서는 마른 축에 속하는데 한국에서는 뚱뚱해 보인다나 뭐라나.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녀들은 한국 여자애들이 너무 예뻐서 자기들이 예쁘게 보이지 않는 게 스트레스라고 하소연하곤 했다.
하여튼 우리는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씨에도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루시는 기분이 좋은지 뒷좌석에서 흥얼거리며 음악에 맞춰 몸까지 흔들었다.
이태원은 갈 때마다 놀랍다.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 모두 외국인들이고, 차 안을 들여다보면 운전을 하는 사람들도 흑인이거나 백인이다. 내가 실수를 하자 옆으로 지나가던 차의 운전자가 괜찮다는 수신호를 해주었는데, 머리에 흰 천을 두른 아랍 복장 의 사람이었다. 해밀턴 호텔 앞의 나이트클럽 주변엔 까만 양복을 입은 파란 눈의 외국인 종업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버거킹 안에도, 베스킨라빈스 안에도, KFC 안에도 온통 외국인들이 북적북적했다. 정말 한국 같지 않은 풍경이야.
약속 장소는 해밀턴 호텔 맞은편 2층에 있는 바였다. 마침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고, 바 안에는 많은 외국인들로 거의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다트를 하는 사람들, 포켓볼을 치는 사람들, 서서 맥주를 들이키는 사람들이었다.
루시는 왁자지껄 시끄럽고 비좁은 바 안에서 드디어 대니얼을 찾아냈다. 그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사정이 있어서 못 오게 됐어.”
역시 대니얼다운 사정이었다. 아그네스와 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음료수를 주문했다. 가게 분위기와 맞지 않게 우아하게 앉아 내숭을 떨고 있던 루시는 역시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와인을 주문했다. 그리고 파란 눈에 금발의 대니얼은 그 시끄러운 공간에서도 열심히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와 아그네스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우리는 루시와 대니얼에게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말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쇼윈도로 지나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최고로 예쁘게 꾸미고 나가서 대니얼을 잔인하게 차버리겠어!”
이렇게 호언장담한 루시는 그날 밤 들어오지 않았다. 나와 아그네스는 그럴 줄 알았다며 서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과연 루시가 대니얼에게 잔인한 밤을 안겨주었을까 몰라.